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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성의 완벽한 조화, 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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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해변의 여인, 애상, 점포맘보, 해석남녀, 진실, 보고보고, 이 여름Summer' 그리고 최근 작업한 '안녕들한가요?' 까지...... '운명' 이후 쿨 정규음반의 타이틀곡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올해로 20년 차가 된 장수그룹 쿨. 그러나 그 첫만남은 '마지막 앨범'이라는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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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일상홈페이지(http://www.ilsang.com/)

 

여름이면 나오는 팀

 

한 제작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쿨'이라는 팀의 신곡 작업을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제작자는 '이번에 안 되면 해체하려 한다.'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두 번째 앨범의 타이틀곡이었던 '슬퍼지려 하기 전에'라는 곡은 사실 당시에는 큰 히트곡은 아니었기에, 이 그룹을 계속 끌고가기에 힘이 딸리는 느낌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럼 내 방식대로 쿨을 해석해서 작업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제작자는 흔쾌히 그 제안에 응했다. 쿨의 안무 클립을 보며, 평소 순수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수를 만들고 싶던 나의 바람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그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쿨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모 건물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다소 풀죽은 것 같은 어두운 색채감이 느껴졌는데, 나는 그들에게 하얀색, 푸른색의 밝은 색채를 입히고 싶었다.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유리의 카랑카랑하면서도 귀여운 목소리와 재훈이의 부드러운 톤, 성수형의 재밌고 개성있는 캐릭터를 살려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작업을 진행했다. 실제로 유리가 부를 '운명'의 샤우트성 보컬을 위해 녹음 전 여러 가수의 샘플을 들려주며 부단히 연습을 시켰다. 처음에는 본인이 처음 해 보는 보컬 스타일에 쑥스럽고 어색해 하더니 이내 샘플로 들려준 보컬을 넘어서 자기만의 색깔로 소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운명'이 세상에 나왔고 쿨은 운명처럼 큰 사랑을 받으며 수주 간 차트 정상에 머물렀고, 1위 소감에 가장 고마운 사람으로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도 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스텝으로서 시상식이나 1위 소감에 이름이 불려진다는 것은 시청자나 다른 사람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일이겠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보람을 넘어 큰 감동이 되는데, 유독 쿨은 방송에서뿐만 아니라 시상식 이후에 따로 전화까지 하며 고마움을 표해주었다.

 

다음 앨범은 쉼없이 바로 들어갔다. 여름을 겨냥한 앨범이었고 나는 내심 쾌재를 질렀다. '여름이면 나오는 팀'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비치보이즈'나 일본의 '튜브'같은 팀이 우리나라도 있었음 했고 제작자나 멤버들에게도 이런 나의 소망을 이야기했다. 이전 앨범의 성공에 탄력받은 쿨은 '해변의 여인' 역시 큰 히트를 기록했고 그 앨범 후로 쿨은 그야말로 여름이면 나오는, 여름이면 기다려지는 팀이 되었다.

 

하마터면 없었을 곡 '애상'


'운명'과 '해변의 여인'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다음 앨범 '애상', '변명' 작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사실 나는 멤버들과 일 이외의 별다른 관계가 없었다. 그저 작곡가와 가수 사이로 만났고 그들에게 나는 언제나 어려운 존재였다. 당시 나는 데모작업을 할 스케쥴이 안 될 정도로 바빴기 때문에 '운명'과 '변명'의 작업도 녹음실에서 악기를 풀면서 시작되었다. 나의 가이드가 전해지고 가사가 나오고, 드디어 노래 녹음날이 왔다.

 

"노래 연습 많이 했어?"


수줍게 앉아있는 유리에게 얘기했다.


유리는 "많이는 못했어요..."라며 다소 풀죽은 목소리로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연일 밤샘녹음에 지쳐있던 나의 예민함은 이 말을 지나치지 못했다.


"뭐? 내 노래를 연습을 안 하고 녹음하러 왔다고? 그럼 하지 마!"


나는 짐을 휙 둘러메고 그대로 녹음실을 나와버렸다.

 

스케쥴로 아무리 힘들어도 내 노래를 충분히 연습하지 않고 녹음실에 온다는 건  '당시의 나'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사실 유리는 밤새 보컬 연습을 해왔음에도 내 앞에서 긴장된 나머지 많이 못했다고 말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냉정하게 나와버린 내 뒤로 성수형이 바로 따라 나왔다.

 

"일상아 정말 미안해. 이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나를 봐서 한번만 이해해줘."


성수형의 착한 얼굴과 울먹이는 목소리에 마음이 풀어졌고, 심지어 무릎까지 꿇으려는 그를 보며 그렇게 돌아설 수는 없었다. 난 다시 녹음실로 들어갔고 풀 죽어 있던 유리와 재훈이에게 얘기했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해서 미안해....신나고 밝게, 재미있게 해보자."


그렇게 멤버들과 내가 쿨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는 '애상'의 녹음이 시작됐다. 그때 함께 작업하는 가수와의 인간적인 교감이 더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고 그날 이후부터는 사적인 자리도 종종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애상'은 몇 해 전 나의 21주년 음반에 10센치가 불러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으며 그 해 가장 오래 차트에 머문 곡으로 선정되기도 하였고, 최근 토토가 열풍과 함께 또 한번 차트에 등장하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있다.

 

쿨, 그리고 음악

 

쿨은 유난히 오래가는 음악이 많은 팀이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멤버 각자의 보컬적인 특색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재훈이의 목소리는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쉽게 질리지 않는 편안한 멜로우 보이스의 소유자고 유리와 성수형 역시 그에 못지 않는 개성을 지녔다. 녹음 시에 여느 팀보다 훨씬 더 즐겁고 밝은 마음으로 임하기에 그런 현장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녹음으로 투영되어 리스너들에게도 오랜 편안함으로 함께하는 것 같다.

 

특히 성수형의 녹음은 정말 독특하게 진행된다. 물론 나의 가이드를 듣고 미리 곡 분위기와 라임, 플로우를 익혀오라고 한 후에 녹음을 진행하지만, 성수형의 최종녹음 버전은 성수형의 그날의 끼로 완성된다. 성수형은 틀에 맞추어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런 느낌이니까 자유롭게 해봐'라고 요구하면 순간적인 아이디어를 수십 트랙 쏟아낸다. 수많은 곡의 녹음을 진행할 때마다 그야말로 녹음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는데 그 Take들 중에 지나치지 않고 적절한 것으로 최종녹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End, and...

 

쿨은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매년 여름이면 나와서 차트를 휩쓸었고 그 인기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요즘 같았으면 아마도 실시간 차트 줄 세우기를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평소 그들은 건전한 레저를 즐기며 특히, 여름에 특화된 레포츠를 앞서 즐기고 전파시키는 데 앞장섰다. 음악도 생활도 언제나 밝은 느낌을 전파하던 쿨. 

 

그러다 여러가지 이유로 팀 내에 크고 작은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소속사에 관한 개인적인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고 결국엔 '이여름summer'를 마지막으로 긴 겨울잠에 들어가게 된다. 최근 '안녕들한가요?'는 쿨의 곡으로 섭외 받고 작업했지만 재훈이 혼자 불러서 발매가 되기도 했다. 유리의 결혼과 출산으로 이제 원년멤버 그대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게 되었다.

 

정리하며

 

아직도 여름이 오기 전 난 버릇처럼 쿨의 곡을 쓴다.

 

재훈이의 감성적인 보컬과 유리의 귀여우면서 개성있는 보이스톤, 그리고 팀내 조미료 역할을 하며 곡의 재미를 더해주는 성수형의 랩. 이 셋의 조합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환상적인 융합이다.

 

공식적인 해체도 없었고 아직까지 공연으로 많은 사람들과 호흡하고 있는 그들이기에,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듯 언젠가 완전체 쿨이 다시 무대에서 호흡을 맞출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나는 아직도 기대한다. 그리고 매해 여름 기다린다. 쿨이 새로운 날개짓을 할 수 있기를......

 

'굿바이 나의 친구야. 굿바이 지난 날들아. 웃으며 떠나는 건 이별이 아냐. 다시 꼭 만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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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무 살이다 윤일상 저 | 대교북스
대한민국 대표 작곡가 윤일상의 인생 이야기. 윤일상의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인기 가수들과 작업을 했다. 그만큼 한국의 가수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을 통해 그와 가수들이 지금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운 자기계발을 했는지를 책에 담아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고결한 슬픔의 협주곡, 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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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부 남자들뿐일까? 혹시 그런 의구심을 가져본 적 있는지요?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의 역사에서 여성의 이름을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역사 이래로 모든 권력이 남성에게 쏠려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연약하고 열등한 존재, 그래서 남성의 보살핌과 지배를 받는 존재로 수천년간 인식돼 왔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재능과 끼를 가진 여성들이 숱하게 많았겠지만, 대부분 재능을 꽃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사라졌을 겁니다. 물론 아주 드물긴 하지만 여성이 음악사에 등장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긴 했지요. 예컨대 중세 시대에도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브리지타 폰 슈베덴(Birgitta Von Schweden, 1303~1373) 같은 여성 작곡가들이 있었습니다. 한데 이 두 명은 중세 가톨릭의 ‘고위층 수녀’였지요. 말하자면 종교적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었기에 음악을 작곡해 이름을 남기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여성 음악가들의 이름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있을까요? 모차르트의 누나였던 난네를, 멘델스존의 누나였던 파니, 또 슈만의 아내였던 당대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등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어떤가요? ‘모차르트의 누나’ ‘멘델스존의 누나’ ‘슈만의 아내’ 같은 수식어들이 꼭 따라붙습니다. 말하자면 동생이나 남편의 삶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부차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지요. 재능은 뛰어났지만 사회적으로 여전히 숱한 제약을 받아야 하는 시대에 살았던 탓입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딸 난네를에게 아예 작곡을 가르치지 않았지요. 배워봤자 소용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이 아버지는 난네를이 18세가 되자 “이제 집에서만 연주하라”며 연주여행마저 금합니다. 파니는 어땠나요? 그녀는 피아노 연주뿐 아니라 작곡에도 뛰어났던 음악가였습니다. 하지만 역시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이 ‘적’이었지요. “음악은 너한테 장식일 뿐이니, 결혼 준비나 잘 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명령이었습니다. 결국 파니는 집안 친지들 앞에서 연주하면서 아까운 재능을 썩혔지요. 또 클라라는 10대 시절부터 당대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쳤지만 남편을 위한 내조와 육아의 짐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스물한 살에 결혼한 그녀는 아이를 여덟 명이나 낳았지요. 그중 한 아이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일곱을 키우는 일이 간단치 않았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로베르토가 작곡하는 동안, 나는 밀린 일을 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 한 시간도 쓸 수가 없다”고 털어놓기까지 합니다.

 

음악에서 여성들의 진출이 활발해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지요. 오늘날에는 지휘자와 작곡가, 또 오케스트라에서도 여성연주자들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피아노와 바이올린, 관악기 중에서도 플룻과 오보에 같은 악기들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최근에는 금관과 타악기에서도 여성 연주자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한데 첼로는 많은 악기들 중에서도 특히 오래도록 ‘금녀의 악기’로 여겨졌습니다. 다리 사이에 끼고 연주하는 모습이 여성답지 못하다는 인식 때문이었지요. 물론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입니다. 한데 그 잘못된 터부를 허물어뜨린 여성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포르투갈 태생의 첼리스트 귀예르미나 수지아(Guilhermina Suggia, 1885~1950)였습니다. 때로는 ‘파블로 카잘스의 연인’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수지아는 20세기 초반에 주로 활약했던 첼리스트입니다. 영국의 화가 어거스트 에드윈 존(1878~1961)이 그녀의 연주 장면을 회화 작품으로 남겨놓고 있는데, 그림 속의 수지아는 약간 매부리코에 팔다리가 아주 긴 체형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이지요. 그래선지 ‘첼로의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이 따라붙기도 하는데, 이 또한 남성 중심적 표현 같습니다. 또 그녀를 일컬어 ‘세계 최초의 여성 첼리스트’라고도 하지만 이 역시 정확한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요. ‘여성 첼리스트로 이름을 날린 최초의 연주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겁니다. 그녀는 음반으로 연주를 들어볼 수 있는 최초의 여성 첼리스트입니다. 물론 음반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수지아는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지요. ‘내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팔아서 대영제국 예술위원회가 관리하는 수지아 재단의 기금으로 쓸 것, 국적에 관계없이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스물한 살 미만의 첼리스트에게 수지아 상을 수여할 것.’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그녀가 영국의 예술위원회에 기금을 맡긴 것은 자신이 연주자로서 큰 성공을 거둔 곳이 영국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한데 ‘국적에 관계없이’라는 단서가 있긴 하지만 영국 예술위원회가 수상자를 선정하면서 영국인을 더 염두에 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재미있는, 어찌 보자면 매우 의미 있는 인연이 만들어집니다. 1956년, 수지아 상의 첫번째 수상자가 다름 아닌 열한 살의 꼬마 재클린 뒤 프레(1945~1987)였던 것이지요.
 
수지아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에 태어났던, 그리고 지금도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성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뒤 프레는 그렇게 ‘신동 첼리스트’로 세상에 등장합니다. 이어서 17살이던 1962년, 런던 로열페스티벌홀에서 엘가의<첼로 협주곡 e단조>성인 연주자 신고식을 치르지요.

 

엘가의<첼로 협주곡 e단조>는 이 두 명의 여성 첼리스트들이 즐겨 연주했던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첼리스트들에게는 협주곡 레퍼토리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이든, 생상스, 드보르자크, 슈만 등 손에 꼽을 정도로 제한적입니다. 이렇게 레퍼토리도 부족했을 뿐더러 수지아의 전성기 활동 무대가 런던이었기 때문에, 또 뒤 프레에게는 엘가야말로 모국의 대표적인 작곡가였기 때문에 그의 협주곡을 자주 연주했을 겁니다. 뒤 프레는 이 곡으로 데뷔했을 뿐 아니라, 1965년 존 바비롤리(1899~1970)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을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명연으로 남겼습니다. 아마도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녹음한 음반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엘가의 협주곡은 그녀를 대표하는 레퍼토리였고, 거꾸로 보자면 그녀로 인해 엘가의 협주곡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게 됐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1857년 영국 브로드히드의 농촌에서 태어난 엘가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이른바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자국의 작곡가를 배출하지 못했던 영국의 음악적 자존심을 세워준 인물로 평가받지요. 고상한 격조와 우울한 슬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땅에 대한 짙은 향수 같은 것들이 음악에서 배어나옵니다. 당연하게도 영국인들의 칭송과 자부심이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지요. 비슷한 연배의 영국 작곡가로는 네 살 아래의 프레데릭 델리어스가 있는데,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습니다. 음악적 스타일도 프랑스의 인상주의와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가 혼합된 양식을 보여줍니다. 좀더 아래로 내려가면 본 윌리엄스(1872~1958)가 엘가에 이어 영국적인 스타일을 구축하지요. 영국의 민요에 대한 애착, 아울러 약간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담긴 음악들을 썼습니다. 또 한 명의 영국 작곡가인 구스타프 홀스트(1874~1934)도 민요에서 영향 받은 음악들을 많이 썼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여준 음악가였습니다. 특히 그는 선배인 엘가와 친분이 돈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첼로 협주곡 e단조>는 엘가의 음악인생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명세를 안겨줬던 <수수께끼 변주곡>을 1899년 발표했고, <위풍당당 행진곡>을 1901년 프롬나드 콘서트에서 초연했지요. <첼로 협주곡 e단조>는 60세가 넘은 1918년에 작곡을 시작해 1919년에 세상에 선보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절제하면서 독주 악기인 첼로의 역할을 뚜렷하게 부각하고 있는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갈수록 웅장하고 거창해지는 후기 낭만주의의 관현악법에 대한 반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간결하면서도 애절한 ‘첼로의 노래’에 좀더 집중하고 있는 협주곡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곡은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을 예감한 음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첼로 협주곡 e단조>가 초연되고 다섯 달 뒤에 엘가의 아내 캐롤린 앨리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 아내는 엘가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고 하지요. 원래는 엘가의 제자였습니다. 엘가는 29세였던 1886년에 자신보다 9년 연상인 앨리스를 제자로 받아들였다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엘가는 가난한 평민이었고 앨리스는 귀족의 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앨리스 집안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1889년 5월 결혼합니다. 그래서였는지 엘가의 아내 사랑은 대단히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작곡했던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품 <사랑의 인사>가 바로 아내를 생각하며 쓴 음악이지요.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앨리스는 그다지 미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엘가에게로 왔던 그녀는 헌신적으로 남편을 내조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는 엘가의 음악에 영감을 주는 뮤즈였을 뿐 아니라 작곡에 대한 비평가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귀족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던 평민 출신의 작곡가 엘가, 그래서 심하게 내향적이거나 때로는 대인기피증까지 보였던 남편을 돌봐주고 격려한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엘가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런던 근교 햄스테드에 있던 대저택을 팔고 고향으로 내려가 거의 은둔하다시피 합니다. 이후 몇 곡의 소품을 제외하곤 작곡을 해달라는 모든 제의를 거절한 채 살다가 1934년에 77세를 일기로 타계하지요.

 

<첼로 협주곡 e단조>는 고결한 슬픔의 협주곡입니다. 모두 4개 악장으로 이뤄졌지요. 1악장과 2악장은 구분 없이 연주됩니다. 첫 악장에서 등장하는 첼로의 격렬하면서도 슬픈 노래를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 서주는 전곡을 통해 빈번히 등장합니다. 클라리넷이 잠시 첼로의 슬픔을 달래주다가 명상적인 느낌의 주제선율이 연주됩니다. 반면에 2악장은 활기찹니다. 스케르초 풍으로 들리는 경쾌한 악장입니다. 16분 음표를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장면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랍니다. 3악장은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가요풍의 악장입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첼로의 비가(悲歌)가 느릿하게 울려 퍼집니다. 행진곡풍으로 문을 여는 4악장은 매우 격렬하고 뜨겁습니다. 첼리스트의 기교와 에너지가 폭발하는 악장입니다.


 

 

 

 

 

▶재클린 뒤 프레, 존 바비롤리,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65년/Warner Classics

 

본문에서 언급한 녹음이다. 작은 키의 거장 존 바비롤리는 엘가와 시벨리우스의 음악에서 일가를 이룬 지휘자다. 혈통으로는 영국계가 아님에도 ‘영국 지휘자’로 언급된다. 그의 지휘는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동시에 웅혼한 낭만성을 드러낸다. 이 음반에서 만나는 뒤 프레의 첼로는 뜨겁고 순수하다. 음악을 향한 혼신의 집중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놓칠 수 없는 음반이다.
 

 

 

 

 

▶미샤 마이스키, 쥬세페 시노폴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1990년/DG


국내에서 구하기 용이한 음반 중에서 고른다면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를 선택하는 것도 좋다. 마이스키의 장점으로 손꼽히는, ‘노래하는 첼로’의 미덕이 살아 있다. 음악의 격렬한 생동감도 놓치지 않는다. 2장의 CD에 엘가 외에도 하이든, 슈만,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함께 수록했다. 오리지널 음반을 고집하는 애호가가 아니라면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음반이다.      

 

 

 

 

 

 

 

 

 

[관련 기사]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 >
- 브람스, 소박하고 엄숙한 기도의 노래
- 음악가가 말하는 인생의 봄날과 사랑
- 에릭 사티, <6개의 그노시엔느> (6 Gnossiennes)
- 에릭 사티,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edies)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닌 우리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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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한 여행을 떠났다. 봄이 오는 게 아팠다.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그런데 충동적으로 떠나는 바람에 음악을 깜빡 잊고 챙기지 못했다. 음악도 없이 5시간 이상 운전할 신세가 된 걸 깨달은 건 수원을 지날 무렵이었다. 동행한 친구와 나는 낑낑거리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절망은 일렀다. 매달 자동결제 중인 음원 사이트가 기억났다. 차 오디오에 스마트폰을 연결해 엄선한 리스트를 재생시켰는데 정작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Aux 케이블이 맛 간 것이었다.


 결국 한 곡도 들을 수 없었다. 엄청난 풍절음과 엔진음을 자랑하는 내 경차에서 조악한 스마트폰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수는 없었다. 사실 우린 소리 지르는 수준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말자고. 라디오가 있잖아.”


 라디오 주파수를 계속 돌리자 록 음악을 틀어대는 방송이 하나 잡혔다. 우리는 볼륨을 높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좋아하는 지미 헨드릭스의 곡까지 나왔다.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좋았다. 하지만 라디오는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잡음이 많이 섞이더니 아예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다른 방송을 찾아 주파수를 돌렸더니 어떤 방송이 짱짱하게 잡혔다. 가요만 틀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오래된 가요 위주라 신남이 좀 떨어졌지만 어째선지 잘 아는 음악들이 많이 선곡되어 다시 고무되었다. 우리는 전주만 듣고 노래 알아맞히기 게임을 하며 즐겁게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알아맞힐 수 없는 곡이 덜컥 나왔다. 남자가수가 부르는 노래였는데 1절 후렴구 앞까지 전혀 모르는 곡이었다. 멜로디가 평범하다 못해 전형적인 발라드 흐름이라 볼륨을 줄이고 다음 곡을 기다리려 했는데 목소리가 굉장히 비범해 다시 볼륨을 높였다. 듣다보니 두껍고 깊은 음색에 가슴이 쿡쿡 쑤셨다. 


 “이런 목소리는 임재범만 낼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임재범 아저씨가 맞았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유니크하다. 평범한 멜로디도 그가 부르면 훌륭한 명곡이 되어버리는 걸 오랜만에 재확인한 셈이 되었다. 우리는 임재범이라는 진짜 가수이자 아티스트에게 거듭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라디오에서 나온 곡은 드라마 OST였던 **였다. (멜로디가 전형적이라고 깠으니 제목은 못 밝히겠다)


 그 곡을 끝으로 긴 터널이 나왔고 라디오 방송은 다시 주파수를 잃었다.

 

  “이렇게 된 이상 라이브로 가자.”


 오랜만에 임재범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고 나선지 그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 속에 남겨진 그대모습~’ 이란 노랫말로 시작하는 <그대는 어디에>를 불렀다. 노래방에서 도전하면 고음 부분에서 반드시 음이탈을 하게 되어있던 노래였다. 역시나 후렴구에서 ‘삑사리’가 나자 친구가 견디기 힘들어하며 노래를 중단시켰다.


 친구는 <낙인>을 불렀다.‘가슴을 데인 것처럼 눈물에 패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 그렇게 우리는 임재범 님의 주옥같은 음악들을 메들리로 망치며 서로에게 욕을 하며 부산까지 꾸역꾸역 내려갔다. 

 

 


 

 

 부산에서 우리는 정신없이 회와 장어구이와 술을 영접했다. 그리고 3차 입가심으로 바닷가에 있는 한 선술집에 들어갔다.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이 흐르고 있었다. 


 “요맘때 이 노래만 트는 거 좀 지겹지 않아?”


 친구가 술집 스피커를 가리키며 말했다. 봄에 딱 어울리는 명곡임에는 틀림없지만 나 역시 좀 감흥이 떨어졌다. 봄에 <벚꽃엔딩>을 함께 듣던 연인과 작년에 헤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해마다 봄노래로 듣던 Vinnie moore의 <April Sky>도 올해는 식상했다. 새로운 봄 음악을 정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의 3차 주제가 임재범의 로커시절부터 그의 주옥같은 음악 얘기로 흐르자 술집 주인이 슬그머니 임재범의 음악을 틀었다. 좋은 술집이었다. 우리가 불렀던 <그대는 어디에>와 <낙인>등이 그의 진하고 두터운 목소리로 흐르자 가슴 어딘가가 몹시 아팠다.

 

 그제야 나는 이 봄이 왜 아픈지 생각해보았다. 벚꽃과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 아름답고 화사한 계절이지만 이젠 황사와 미세먼지가 뿌옇게 밀려와 콧물과 기침이 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또한 꽃피지도 못한 생명들이 작년 봄 뿌연 바닷물 속에 침몰했다. 내게 4월의 봄은 그날부터 잔인한 계절이 되었다. 나는 이 어이없는 재난 때문에 아직 슬프고, 해마다 슬플 것이다. 이토록 생동하는 봄과 안타까운 죽음의 선명한 대비가 너무나 잔인해서다. 이토록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후진 사회에 살며, 심지어 원인규명과 문제의 해결 의지는커녕 힘으로 눌러 덮으려는 자들이 지배적인 후진 현실이 절망적이다. 일 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해결 안 된 세월호 비극 얘기가 지겹다는 여론까지 있어 충격적으로 절망적이다. 생명과 인간다움에 대한 모욕감을 느끼는 봄이다. 비슷한 위도의 나라에서 누군가는 완전하게 아름다운 봄을 맞더라도 우리의 봄은 이제 봄 같지가 않아졌다. 겨울에 비하면 너무나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마음은 겨울과 다를 바 없이 차갑고 처연하다.

 

 1997년에 발표된 <그대는 어디에>와 2010년에 드라마 삽입곡으로 나온 <낙인>은 두곡 다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이별노래지만 부산의 선술집에서 감정이 축축해진 내겐 마치 세월호 사고로 가슴이 구멍나버린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노랫말로 들리기까지 했다.

 

 ‘…내가 사는 것인지 세상이 나를 버린 건지 하루가 일 년처럼 길구나….’(낙인)


 ‘아직도 함께 했던 그 많은 시간들을 그리며 나의 한숨 시간 속에 남아 나를 눈물 짓게해….’(그대는 어디에)

 


 

 

 

 임재범의 목소리에는 망연자실한 슬픔과 절망의 감정이 진정으로 녹아있었다. 이별이란 이토록 참 지독한 것이라는 걸 절절히 동감할 수 있었다. 하물며 지난봄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영 이별한 유가족의 심정은 지옥보다 더 지독할 거라는 생각으로 이입되자 참담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여행에서 돌아왔지만 마음은 전혀 화사해지지 않았다. <낙인>과 <그대는 어디에>를 반복해서 들으며 산다. 임재범 아저씨의 지독한 음색만이 이런 봄을 사는 심정을 공감해주는 것 같아서다.

 

 이 코너는 정치 사회 주제가 아니고 기본적으로 가벼운 칼럼인데도 오늘은 결국 이렇게 썼다. 그런 봄이다.

 

 

 

[관련 기사]

- 박상 “웃기고 싶은 욕구는 변하지 않아”
- 스뽀오츠 정신과 부드러움이 필요한 시대
- 드레스덴 축제의 매혹적인 단조
-베를린에서의 성급한 반항심
- 사막의 방광 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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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드릭 라마와 Black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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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ope you come back, and learn from your mistakes.
꼭 돌아와서, 네가 저지를 실수로부터 배웠으면 한다.
Come back a man, tell your story to these black and brown kids in Compton.
남자가 되어 돌아와서, 컴튼의 흑인 아이들에게 네 이야기를 해주렴.
Let 'em know you was just like them, but you still rose from that dark place of violence, becoming a positive person.
너도 그들과 똑같았지만, 이 폭력의 도시에서 자라나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But when you do make it, give back, with your words of encouragement, and that's the best way to give back, to your city.
네가 정말 성공했을 때, 격려의 말들과 함께 이곳에 돌아와. 이것이 네가 이 도시에게 보답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야.
「Real (Feat. Anna Wise)」


돈, 여자 그리고 마약을 쫓는 무의미한 가사를 남발하는 다른 래퍼들과는 다르게 켄드릭 라마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진 힘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는 래퍼이다. 그는 아직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은 흑인에 대한 억압과 편견을 고발하고자 하는 소신이 있으며 이를 곡으로 구현해내는 뛰어난 재주가 있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저 랩을 잘하는 래퍼이기 이전에, 자신의 고향인 빈민촌 컴튼 구역의 처절한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깨어있는' 메신저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출시된 메이저 2집< To Pimp A Butterfly >의 핵심은 가사에 있다. 물론 높은 수준에 도달한 프로듀싱과 랩 퍼포먼스가 당연히 빛을 발하지만, 그가 정성스레 빚어낸 가사야 말로 앨범의 뛰어난 성취이다. 흑인에 대한 역사적 사건과 여러 문학들을 근거로 한 서사와 성찰의 텍스트는 그저 안이하게 그러나 주눅 들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날리는 뼈아픈 일침이다.


- 1 -

Sneak me through the back window, I'm a good field nigga.
날 뒤 창문으로 몰래 들여보내줘, 나는 좋은 노예야.
I made a flower for you outta cotton just to chill with you
너랑 놀러 목화로 꽃을 만들어 왔잖아.
Brown skinned, but your blue eyes tell me your mama can't run
검은 피부에 파란색 눈을 가졌다는 것은 너의 엄마가 도망치지 못했단 뜻이겠지.
「Complexion(A Zulu love) (Feat. Rapsody)」

 

What you want you? A house or a car?
원하는 게 뭐야? 집? 차?
Forty acres and a mule, a piano, a guitar?
40 에이커의 땅과 노새, 피아노, 기타?
「Wesley's Theory (Feat. George Clin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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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들의 험난한 일상을 담은 영화 < 노예 12년 >의 장면들

 

신대륙 아메리카의 발견과 함께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유럽의 국가들은 16세기부터 그 곳을 식민지를 만들었다. 팽창하는 자본주의의 성질에 의해 아메리카의 원주민(인디언)들로는 일손을 채우지 못했고, 수많은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노예로서 끌려왔다. 주로 사탕수수나 목화 재배의 목적으로 이용된 흑인들은 백인들의 수하에 억압받고 겁탈당했으며, 고통당했다.

 

흑인들의 고단한 생활은 1863년 16대 대통령 링컨의 < 노예 해방 선언 >으로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또한 1865년 윌리암 셔먼 장군은 < 특별 야전 명령 15호 >에서 흑인들에게 40에이커 넓이의 경작 가능한 땅과 노새를 주겠다고 발표했고, 여기에 많은 흑인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이 약속은 새 대통령 앤드류 존슨과 다수의 정치인들로 인해 취소되고 만다. 이로써 흑인의 꿈은 무너지고, 그들은 다시 소작농의 생활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러한 암울한 현실의 탈출구는 바로 피아노, 기타가 대표하는 음악이었다. 이들의 음악은 후에 탄생한 재즈와 블루스의 기원이 된다.


- 2 -

So why did I weep when Trayvon Martin was in the street?
그래서 나는 왜 트레이번 마틴이 거리에 있었을 때 울었을까?
When gang banging make me kill a nigga blacker than me?
내가 한 것들이 나보다 더 검은 흑인들을 죽이는데
「The blacker than ber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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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트레이번 마틴(Trayvon Martin)    2014년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

 

자경단원 조지 짐머만(George Zimmerman)이 동네를 순찰하던 도중, 후드티를 입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한다. 그는 그 소년을 아무 근거 없이 마약에 관련되었다고 판단하고 소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소년은 도망가기 시작했고, 결국 짐머만은 권총을 꺼내 발사했고, 그렇게, 17살 트레이번 마틴은 그저 편의점에서 스키틀즈 한 봉지와 아이스티를 사고 집으로 귀가하던 길 위에서 사망했다. 대학생 마이클 브라운은 백인 경찰과 몸싸움 도중 6발의 총알을 맞아 사망했다. 그의 유가족은 총격사유와 당시 경찰의 신원공개를 요구했지만, 경찰은 침묵했다.

 

이 두 소년은 모두 흑인이다.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트레이번 마틴이 범죄자로 의심 받았던 이유엔 드러나지 않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편견에 많은 흑인들이 분노했고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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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제보한 월터 스콧(Walter Scott) 총격 장면

그리고 1년도 지나지 않은 2015년 4월 8일, 또 한 차례의 비극이 발생한다. 바로 백인 경관 마이클 슬레이저가 비무장한 흑인 월터 스콧에게 8발의 총격을 가한 것. 마이클은 스콧과 실랑이 중 빼앗긴 전기충격기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고 증언했지만 시민이 제보한 동영상에 의해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다.

 

- 3 -

But remember, anybody can get it. The hard part is keeping it.
기억해둬, 누구나 여기까지 올 순 있어. 하지만 가장 어려운 건 그걸 계속 유지하는 거야.
My name is Uncle Sam on your dollar.
나는 너의 지폐 위에 그려진 엉클 샘이야.

Pay me later, wear those gators
돈은 나중에 내고, 이 악어 가죽을 입어봐.
Two coupes, two chains, two c-notes.
두 대의 자동차, 두 개의 목걸이, 100달러 두 장.
And everything you buy, taxes with deny.
그리고 네가 그 모든 것을 산 댓가인 세금을 내기 거부한다면,
I'll Wesley Snipe your ass before thirty-five.
난 네가 35살이 되기 전에 널 웨슬리 스나이프로 쏴버릴 테니까.
「Wesley's theory (Feat. George C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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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영화배우 웨슬리 스나입스는 플로리다 법원으로부터 1999년부터 2001년 사이의 소득 3억 8천만 달러에 대해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세와 소득신고 누락 등의 혐의로 유죄를 판결 받고 징역 3년형을 선고받는다.

 

이에 대해 그는 국가의 부당한 조세법에 대해 불만을 가지며 탈세를 저지르는 '납세 거부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했다. 켄드릭 라마는 「Whesley's theory」란 곡을 통해 힘겹게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은 흑인들을 몰락시키는 국가를 엉클 샘(Uncle Sam)에 비유하며 부당 한 사회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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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링컨이 < 노예 해방 선언 >을 선포한지 약 15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이 세상이 피부색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도 편견은 존재하며 차별은 현재진행중이다.

 

So I'mma say somethin' that's vital and critical for survival Of mankind,
그러니 내가 한마디 할게, 인류의 생존를 위한 중요하고 필수적인 한마디.
if he lyin', color should never rival
피부색으로 적이 될 수 없어.
「Complexion(A Zulu love) (Feat. Rapsody)」

 

2015/04 이택용(naiveplante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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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선물, 〈네 개의 마지막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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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에서 오페라 이야기를 한 적은 없습니다. 오페라는 별도로 다뤄야 할 또 하나의 방대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하기 위해 그의 오페라 한 편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이 작곡가의 음악적 전반기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교향시일 테지만, 20세기로 접어들어 40대를 맞은 그의 음악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르는 역시 오페라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20세기 벽두인 1905년 12월 9일, 독일 드레스덴의 궁정오페라 극장에서는 매우 노골적인 오페라 한 편이 막을 올렸습니다. 이 오페라에서 섹스하고 싶다는 욕망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 여주인공은 ‘살로메’였지요. 그녀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욕정을 느꼈고 그것을 감추지 않습니다. “네 몸에 매혹당했어” “너를 만지고 싶어” “네 입술에 키스하고 싶어”라는 고백이 그녀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녀의 노골적인 프러포즈를 거절하지요. 그러자 복수의 정념에 휩싸인 살로메는 의붓아버지 헤롯왕 앞에서 옷을 한 겹씩 벗어던지며 유혹의 춤을 춥니다. 그녀의 요구는 딱 하나입니다. “요한의 목을 잘라 내게 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때까지의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관능적이고 관음적인 장면이 그렇게 펼쳐집니다. 이른바 ‘일곱 베일의 춤’이라고 불리는 장면입니다.
 
<살로메>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첫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이 오페라를 초연할 당시 41세였던 그는 이미 유명한 음악가였지요. 한스 폰 뷜로를 잇는 지휘자로서의 탄탄한 입지, 교향시 분야에서 이룩한 작곡가로서의 업적 등으로 슈트라우스의 명성은 이미 확고했습니다. 교향시 <돈 후앙>을 발표한 것이 1888년이었고 <죽음과 변용>은 그 다음해였습니다. 1890년대의 슈트라우스는<맥베스><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을 잇따라 발표했고 마침내 <영웅의 생애>로 관현악 작곡가로서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오페라 <살로메>의 원작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입니다. 세기말의 탐미주의자 와일드는 신약성서 마태복음의 한 구절에서 ‘살로메’라는 소녀를 데려와 한층 더 강렬한 캐릭터로 재창조했지요. 마태복음에 서술된 세례 요한의 사형집행은 살로메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사주에 의한 것이지만, 와일드는 그것을 살로메의 좌절된 욕정과 그로 인한 복수의 드라마로 그려냈습니다. 연극 초연은 1894년 프랑스 파리에서 이뤄졌지요. 하지만 이후의 과정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초연 3년 뒤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린 와일드는 법정 구속돼 노동 금지형에 처해졌고, <살로메>의 이마에는 ‘사악한 연극’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습니다. 당연히 수많은 극장들이 ‘쓰레기’의 상연을 거부했지요. 물론 모든 극장이 그랬던 건 아닙니다. 와일드의 고향인 영국은 완전히 문을 닫아걸었지만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간간히 공연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관객들은 반응이 워낙 뜨거웠던 까닭입니다. 공연 비즈니스의 측면에서 보자면, <살로메>는 포기할 수 없는 연극이었던 셈이지요. 1903년 막스 라인하르트의 연출로 베를린에서 공연됐을 때도 관객이 대거 몰렸는데, 객석에는 당시 39세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페라<살로메>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아마도 그날 객석에 앉아 있던 슈트라우스의 마음속에는 어떤 떨림과 흥분이 충분히 존재했을 겁니다. 두뇌 회전이 빠른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이 파격적인 연극을 오페라로 만들면 결과가 어떨지를 직감했을 겁니다. 슈트라우스의 그런 측면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평은 훗날에 아도르노(1903~1969)의 입에서 흘러 나왔지요.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그 자리에 계속 멈춰 있을 수 없다. 크게 판을 벌인 사업가가 자신의 사업의 거래량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으면 이제 망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존재하지 않는 삶을 그럴듯하게 베낀 환영의 음악”이라고까지 혹평했습니다.

 

그런 혹평의 근거에도 불구하고 슈트라우스의 예감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 에로틱한 오페라의 드레스덴 초연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곧바로 입소문을 탔고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이듬해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다시 공연했을 때는 인구 15만 명의 도시에서 진풍경까지 벌어졌습니다.“도시 전체가 굉장히 흥분해 있었다. 의견들이 모였다가 쪼개졌다. 술집의 철학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떠들어댔다. 다른 지방에서 온 손님들, 평론가, 언론인, 빈에서 온 외국인들… 3회 공연이 모두 매진됐다. 짐꾼들은 무거운 짐을 나르느라 끙끙댔고 호텔 종업원들은 금고 열쇠를 가져왔다.”(알렉스 로스 『나머지는 소음이다』 중에서) 
     
일곱 베일을 하나씩 벗으며 춤추는 의붓딸의 몸을 음탕한 눈길로 더듬던 헤롯왕은 “요한의 목을 달라”는 살로메의 집요한 요구를 결국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페라 사상 전무후무한 장면이 벌어지지요. 살로메는 은쟁반에 담겨 나온 죽은 요한의 얼굴에 격정적으로 키스를 퍼붓습니다. “나는 지금 너의 목에 키스하였노라”고 노래하면서 집착적인 욕망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 오페라의 결론은 살로메의 욕망에 대한 찬미가 결코 아니었지요. 성애에 대한 그녀의 무아지경적 탐닉은 가부장에 의해 결국 단죄받습니다. “저 여자(살로메)를 죽이라”는 헤롯왕의 명령이 이 오페라의 종점이었던 것이지요. 20세기 벽두에 등장한 이 문제적 오페라는 그렇게 ‘가부장적 의식’ 속에 갇히고 맙니다. 그래서 철학자 지젝은<살로메>에 대해 “남성적 응시를 위해 무대에 올려진 볼거리”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것은 결국 슈트라우스의 인식적 한계였겠지요. 그는 타산이 빠른 현실주의자였던 동시에 가부장적인 남자였습니다. 교향시를 거쳐 오페라의 세계로 진입한 그는<엘렉트라>(1908),<장미의 기사>(1910),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1916),<그림자 없는 여인>(1917) 등을 잇따라 작곡합니다. 55세였던 1919년에는 빈 국립오페라극장 음악감독에 취임하면서 독일ㆍ오스트리아의 가장 막강한 음악가로 입지를 굳힙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삶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랄 수 있는 나치와의 관계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지요.

 

음악은 정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종교와 귀족이 음악의 후원자였지만, 현대로 오면서 정치권력과 자본이 음악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특히 민주주의의 발전이 더딘 나라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지요. 한데 이 지점에서 많은 음악가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이중적입니다. 음악의 순수성을 외치는 음악가들일수록 권력과 더욱 친연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친연의 논리는 아주 단순하지요. ‘음악을 후원하는 정부’는 그 권력의 속성이 어떻든 ‘좋은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이면에는 자신의 출세와 성공이라는 욕망이 깔려 있습니다. 슈트라우스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는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에게 보낸 편지에서 “음악과 극장을 후원하는 새 정부”에 큰 호감을 피력합니다.

 

물론 히틀러가 완전히 권력을 장악한 1933년에 그는 69세의 노인이었습니다. 나치의 속성을 속속들이 파악하기에는 좀 늙은 나이였지요. 또 스스로를 ‘음악계의 어른’으로 인식했던 그는, 이제 정부도 바뀌었으니 ‘내가 어른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1933년에 제국음악원 총재에 취임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개막식을 위해 작곡했던 ‘올림픽 찬가’는 물론이거니와, 독일ㆍ일본ㆍ이탈리아의 3국 동맹을 기념해 작곡했던 오페라<평화의 날>을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에서 창작한 음악이라고, 본인은 그런 식으로 굳게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긍정적인 자기 암시였겠지요. 분명한 것은 슈트라우스가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였고, 본인 역시 그 권력을 내려놓기 싫어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치의 권력자들은 그를 ‘독일음악의 모범’으로 추앙하면서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영광과 오욕의 삶을 살았던 교향시와 오페라의 대가 슈트라우스는 생애 마지막 무렵에 가곡을 쓰기 위해 펜을 듭니다. 그가 남긴 200여곡의 가곡 중에서도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즐겨 듣는 <네 개의 마지막 노래>(Vier letzte Lieder)가 바로 이때,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아내 파울리네와 함께 스위스 곳곳을 떠돌던 시기에 작곡됩니다. 사실 그는 나치에 협력하던 시절에는 전혀 가곡을 쓰지 못했지요.<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그가 20년 만에 다시 손을 댄 가곡입니다. 아울러 1948년 11월에 작곡했던 피아노 반주의 가곡 ‘접시꽃’을 제외하고는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음악으로 남아 있습니다.

 

소프라노 독창과 관현악으로 이뤄진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음악에 ‘네 개의 마지막 노래’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출판업자에 의해서였지요. 어쨌든 제목처럼 이 음악은 모두 네 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1곡 ‘봄’, 2곡 ‘9월’, 3곡 ‘잠들 무렵’은 헤르만 헤세의 시에 곡을 붙였고, 4곡 ‘저녁노을’은 아이헨도르프의 시를 가사로 삼았습니다. 편편마다 추억에 대한 회상, 또 죽음을 앞둔 노년의 심경이 애잔하게 서려 있지요.

 

또한 이 음악은 슈트라우스가 당대의 소프라노 가수였던 아내 파울리네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합니다. 소프라노 독창을 위해 작곡한 것도 그렇거니와, 가사가 드러내는 의미도 그렇습니다. 특히 2곡 ‘9월’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호른 소리는 슈트라우스가 호른 연주자였던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또 3곡 ‘잠들 무렵’에서는 바이올린 독주가 아름답고 애틋하게 흘러나오지요. 어느 곡이든 가사를 음미하면서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슈트라우스는 이 곡을 작곡한 이듬해인 1949년 9월 8일, 고향인 뮌헨 근처의 가르미쉬에 있는 별장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아내인 파울리네는 그 다음해 5월 13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곡 봄


‘어스름한 무덤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꿈꿨네 / 너의 나무와 푸른 바람 / 너의 향기와 새의 노래를 // 이제 너는 빛을 받으며 / 화려한 장식 속에서 / 빛을 받으면서 마치 기적처럼 내 앞에 있네 / 너는 나를 알아보고 다정하게 유혹하니/ 너의 행복한 모습에 내 온몸이 떨리네.’

 

 2곡 9월


‘정원이 슬퍼하고 있네 / 차가운 비가 꽃 속으로 파고드네 / 끝자락에 다가선 여름이 / 조용히 몸을 떠네 // 황금빛 잎사귀가 하나씩 / 높게 자란 아카시아 나무에서 떨어지네 / 놀라고 지친 여름이 엷은 미소를 보내네 / 사라져가는 정원의 꿈속에서.’

 

 3곡 잠들 무렵(Beim Schlafengehen)


‘한낮은 나를 지치게 한다 / 내 동경하는 꿈은 / 피곤한 아이처럼 기꺼이 / 별이 빛나는 밤을 맞이하는 것이라네 // 손이여, 모든 행동을 멈추어라 / 머리여, 모든 생각을 거두어라 / 내 모든 감각은 잠 속에 빠지길 원하니 // 영혼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 자유로운 날개로 날으리라 / 신비로운 밤의 나라에서 / 깊고 오래 살기 위해.’

 

 4곡 저녁 노을에(Im abendrot)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 슬픔도 기쁨도 함께 지나쳐 왔다네 / 이제는 높고 조용한 곳에서 / 우리의 방랑을 끝내고 쉰다네 // 하늘이 점점 어둑해지고 / 주위의 계곡은 낮게 가라앉는데 / 두 마리 종달새가 꿈을 꾸듯이 / 안개 속으로 날아오르네 // 이리 오게, 종달새는 그냥 울게 놓아두고. / 곧 잠들 시간이니 / 우리는 이 외로움 속에서 / 더 이상 방황하지 않으리 // 오, 넓고 고요한 평화여! /저녁노을 속에 우리는 가라앉으니 / 어쩌면 이것이 죽음인가?’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Elisabeth Schwarzkopf), 조지 셸ㆍ베를린 방송교향악단/1965년/EMI


단 한 장의 음반을 꼽는다면 이것이다. LP시절부터 오늘날까지 수십 년간 거론돼온 명연이다. 슈바르츠코프의 목소리는 이론의 여지없이 기품 있고 아름답다. 소프라노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테크닉은 물론이거니와, 가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달력이 돋보인다. 네 편의 시가 품고 있는 서정성과 애틋한 드라마를, 절제와 균형 속에서 묘사해내고 있다. 조지 셸이 이끄는 관현악 반주도 빼어나다.

 

 

 

 

 

 

▶군둘라 야노비츠(Gundula Janowitz), 카라얀ㆍ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73년/DG


이 음반도 놓치기 아쉽다. 전자에 비해 좀더 탐미적이고 감각적이다. 특히 깨끗하게 뻗어나가는 야노비츠의 고음이 황홀함마저 느끼게 한다. 여기에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감각적인 연주가 더해졌다. 이 음반을 듣다보면 카라얀이 왜 그녀를 발탁했는지를 저절로 수긍하게 된다.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변용’(Tod und Verklarung)을 함께 수록했다.

 

 

 

 

 

 

 

 

 

[관련 기사]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 >
- 고결한 슬픔의 협주곡, 엘가 <첼로 협주곡 e단조〉
- 음악가가 말하는 인생의 봄날과 사랑
- 에릭 사티, <6개의 그노시엔느> (6 Gnossiennes)
- 에릭 사티,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edies)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공항에서 딱 떠오르는 노래, 거북이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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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알바를 구했다. 인천공항에서 승객들의 위탁수화물을 비행기에 싣고 내리는 일이다. 퇴근하고 이 글을 쓰는데 오타가 많이 날 만큼 무거운 놈이 많았다. 소설가로서 아이러니한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건축 설계를 하듯 짜임새를 미리 구상 & 구성하고 유려하게 시공하는 게 소설가의 주특기 아닌가. 근데 내 생계를 한 번도 꼼꼼하게 구상해 본 적 없는 것이다. 설마 굶어죽진 않겠지 하며 안일하고 무모하게 달려왔다. 그랬더니 글을 쓰기위한 최소한의 밥벌이를 육체노동 알바로 투닥투닥 때우는 신세다.

 

바보라고 자랑하려는 것 같지만 아니다. 당분간 월세를 낼 수 있게 돼 바보가 될 신세를 면했으니까. 후훗. 심지어 비행기를 남달리 좋아해 이번 일이 꽤 흥미롭다. 비행기란 사람이나 화물을 하늘위로 날려 보내주는 과학과 예술의 하이브리드 아니겠는가. 절정의 과학으로 인간의 한계를 공중에 날려 보내는 매끈하고 잘 빠진 물체인 것이다. 인천공항에 매일 간다는 것도 신난다. 게다가 보수적인 한국에서 장발족인 나를 채용해 줘 신기하기도 했다. 나는 머리카락이 짧으면 글이 안 써지는 특징이 있는데(삼손이여 뭐여) 참 잘됐다. 유니폼도 줘서 오늘 뭐 입을까 고민하지 않는 점은 보너스.

 

 그러나 막상 일 해보니 스타일을 안 따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장 낮은 비행기 화물칸에 들어가 허리도 못 편 채 짐 가방과 뒹굴어야 하는 것이다. 화물칸은 당신이 누구든 어떻게 살아왔건 순식간에 거지꼴로 만들어버린다. 무거운 가방이 쓰러질 때 정강이가 벗겨지기도 하고 무너지는 가방더미에 갈비뼈 어택을 당하기도 하고 무릎 손목 팔꿈치 어깨 허리가 동시에 나한테 왜 이러냐며 난리인 점도 꽤 고충이다.

 

 아무튼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고생스럽게 일하니까 공장 얘기는 이쯤 해 두고 본연의 주제인 오늘의 음악을 밝히겠다. 뚜둥. 여러분은 비행기 하면 어떤 음악이 떠오르시는가? 나는 일단 이거다. 


 떴다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외국 곡에 한글 가사를 입힌 아동문학가 윤석중 님의 곡이다. 하늘로 대차게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며 이 노래를 부르면 동심이 그립다. 제트엔진과 날개의 양력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게 사람이 날아라날아라 하면 뭘 하며 고도 3만5천 피트까지 쭉쭉 알아서 올라갈 비행기에게 다 큰 어른이 높이높이 날라고 하는 건 의미가 없지만 물체에 감정을 이입하는 순진한 동심이 오랜만에 그리워지는 거다. 그냥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


 사실 이 국민동요를 오늘의 주제곡으로 삼아 종이비행기 날리던 꼬꼬마 시절의 추억을 똥꼬 발랄하게 떠들고 싶었다. 그러나 격조 높은 채널예스의 지면에 그동안 음악과 추억과 여행에 대한 깊이 있는 칼럼을 빙자한 질 낮은 개그와 일기만 써 재낀 주제에 떴다떴다 비행기 가지고 어린 시절 코 묻은 얘기를 꺼낼 체면이 없었다. 미남 담당자와의 술 약속도 계속 미루고 있는데 미안해서 안 되겠다.

 

 그래서 얼른 다른 음악을 생각했다. 출근길에 마이 앤트 메리의 <공항 가는 길>, 줄리 런던 버전의 <Fly me to the moon> 헬로윈의 <eagle fly free> 켄트의 <747> 그리고 뜬금없이 저니의 <open arms>등등을 자주 듣는데 뭔가 비행기랑 연결 될 것 같으면서도 칼럼으로 쓰기엔 접점을 찾기 애매한 음악들이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완벽하게 <비행기>라는 제목을 가진 곡을 깜빡하고 있었으니 그 곡이 바로 오늘의 주제곡 거북이의 <비행기>이다. 나로선 라디오에서 우연히 나올 때마다 볼룸을 잔뜩 높이게 되는 곡이다. 발표한지 거의 10년 됐으니 오랜만에 들어보시라.


 

 

 남자 한 명 여자 둘 혼성 삼인조 거북이의 음악은 딱 인생 친화적이다. 멋 부리고 끼 부리거나 전형적인 음악을 하기보단 독특하게 친밀한 매력을 추구했다. 뽕짝 같은 리듬에 힙합과 발랄한 랩과 단조의 음색이 섞여 있는 그들의 음악은 경쾌하면서도 어딘지 슬픈 쪽을 건드리는 희한한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들만의 친밀성이 있다. 들으면 일단 신나는데 싸구려 유흥을 북돋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삶의 국면들을 순수하게 사유한 노랫말에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거다. 페이소스에 재미를 뭉칠 줄 아는 이들의 표현력을 나는 한껏 동경한다. 찰리 채플린을 존경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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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빙고>, <싱랄라>, <사계> 등등을 자주 듣는다. 봄엔 버스커버스커, 여름엔 비치보이스를 듣는 것처럼 쓸쓸할 땐 단연 거북이다. 과연 언제 다시 들어도 촌스런 위화감 없이 훌륭한 음악을 해냈다. 거북이의 음악은 질긴 생명력을 가졌지만 대부분의 히트곡을 작사 작곡하고 프로듀싱한 리더 터틀맨 임성훈 씨는 7년 전의 어느 잔인한 4월에 먼 곳으로 떠났다. 4월이 몹시 미울 정도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곡인 <비행기>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비행기 타고 가는 먼 나라면 더 좋겠다는 역마살을 쿡쿡 찌르는 음악이다. 생계를 위한 노동에 지쳐 몸도 마음도 바닥에 질질 끌릴 때 이 음악을 듣거나 부르면 금방 화색이 돌곤 한다. 특히 이런 가사에 그 능력이 숨어있다.
 
 파란 하늘위로 훨훨 날아가겠죠 어려서 꿈꾸었던 비행기 타고

 …비행기 타고 가던 너 따라가고 싶어 울었던 철없을 적 내 기억 속의 비행기 타고가요

 

 공항에서 승객들이 비행기에 타는 동안 지상에선 짐 가방을 부지런히 비행기에 실어주고 물을 채워주고 정비사들이 비행기를 점검한다. 기내식 트럭과 급유 트럭이 다녀가면 출발 준비가 끝난다. 힘센 토잉카가 비행기를 활주로 쪽으로 밀어준 다음에 비행기가 자기 힘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지상조업자들은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며 배웅한다. 안에 탄 사람과 우린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손을 흔들 때 객실 안에서 손을 마주 흔드는 승객들을 보면 난 어쩐지 콧등이 시큰하다. 기차역 같고 항구 같고 바래다준 연인의 창문 같다.


 거북이의 <비행기>를 들으면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먼 곳으로 떠난 터틀맨이 그곳에서 행복하길 빌며 한참 손을 흔들어 본다. 가슴이 시큰하다. 부디 파란 하늘위에서 높이높이 날아라 우리 터틀 형.

 

 사족 - 독자님들께 위탁수화물 가방이 더러워지지 않는 팁을 몇 가지 소개할까 한다. 새로 산 여행 가방이 걸레가 된 경험이 있다면(난 매번 그랬다) 이렇게 하면 된다.


 1. 비닐이나 껍데기로 꽁꽁 싸매거나 도어 사이드를 신청한다.(ㅡㅡ;;)

 

2. 큰 기종을 타면 인력으로 일일이 싣지 않고 기계로 한꺼번에 올리고 내려 바닥에 끌릴 일이 적다. 가방에 대해선 사람보다 기계가 인간적인 아이러니. (비싼 게 함정)

 

 3. 작은 기종을 탈 땐 바퀴 네 개 달린 캐리어가 좋다. 배낭이나 보스턴 백, 바퀴 두 개만 달려 굴릴 수 없는 캐리어는 질질 끌게 된다. (화물칸 바닥은 그닥 깨끗하지 않다)

 

 4. ‘수고하십니다. 살살 다뤄주세요’ 라고 써봤자 소용없다. 땀이 눈에 들어가 읽을 틈이 없다.(겨울엔 모르겠다)

 

 5. 캐리어가 더러워지는 걸 여행 경력을 나타내는 ‘간지’라고 생각하면 심리적 데미지를 입지 않는다.

 

 

 

[관련 기사]

- 박상 “웃기고 싶은 욕구는 변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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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레스덴 축제의 매혹적인 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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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토토가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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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중반 댄스음악 시장의 아이돌 그룹 중에는 가창력에 문제가 있는 가수들이 참 많았다. 요즘은 컴퓨터 기반의 레코딩 시스템과 각종 음정 보정 편집툴이 많아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제작이 용이하지만 당시는 테이프 레코더로 녹음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오로지 녹음실에서 가수가 음정이나 박자를 잘 맞춰야 했고, 그만큼 그 과정에서의 집중력을 더욱 필요로 했다. (그렇다고 예전 가수들이 더 노래를 잘 했고 요즘 가수들이 노래를 못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래방 이후 세대들인 요즘 어린 친구들이 노래하는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평균적인 가창력은 더 우세한 것 같다. 다만 음색이 모두 획일화 된 느낌이 드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서 가창이 약한 가수들과의 작업에서는 어김없이 전문 코러스를 요청하거나 내가 직접 같이 따라부르면서 음을 밑에 까는 형식으로 믹스를 하여 보컬의 약점을 커버하곤 하였다. 댄스 음악의 특성상 외적인 부분이 중요했으므로 가창력보다는 춤이나 비쥬얼적인 부분이 해결되는 친구들을 선호했던 당시 제작자들의 성향이 만들어 낸 현상이었다. 가수라는 직업을 이름 앞에 붙이기에는 다소 어색한, 실력이 한참 모자란 가수들과의 작업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한창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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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일상홈페이지(http://www.ilsang.com/)

Love is...

 

1995년, 건장한 체구의 두 사내가 '터보' 라는 아주 강력한 이름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름과 걸맞게 기존 댄스음악에 비해서 다소 강한 비트의, 그야말로 남성적인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그룹이었다. 1집의 약진으로 제법 입에 오르내리던 그들은 다음 해, 2집 앨범의 작업을 위해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락 매니아였기에 강한 느낌의 댄스음악을 하는 그들에게 락적인 색채의 옷을 덧입혀 볼 수 있으리란 기대에 흔쾌히 승낙했고 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그래서 터보의 앨범에 수록된 내 노래들 ‘Love is, 바람의 철학, 금지된 장난, 오버센스, X, 첫사랑’ 등은 락음악 베이스에 디스토션 기타플레이가 많았다. 당시 제작자 형님은 2집 작업이 들어갈 때만 해도 "왜 댄스뮤직에 디스토션기타가 들어가야 되는거야?" 하며 의아해 하더니 Love is의 성공 이후에는 "이번에도 락기타 들어가는 곡 있는거지?"하며 기대감을 나타내곤 했다.

 

‘쿨’이 내 안의 순수함을 끄집어 낼 수 있었던 팀이라면 ‘터보’는 내 속의 강한 락 스피릿과 감성을 덧칠할 수 있는 표현의 장이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좋은 가수들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터보, 김종국과 김정남의 만남은 Bay Studio라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기획사는 마치 스파르타식으로 엄격히 가수들을 통제했다. 그러한 관리방식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한창 놀기 좋아하고 끼 많은 아이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필요한 조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어느 기획사보다 엄격했던 터보의 소속사였던지라 첫 인사 자리에서 잔뜩 군기가 들어 있던 그들이었다. 그 어떤 어려움도 모두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눈빛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기타리스트 근형이 형과 기타프레이즈를 만들어 그것을 기반으로 한 곡이 나왔고 첫 보이스 녹음이 드디어 시작 되었다.

 

'와~! 잘한다!'

 

노래가 시작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입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당시의 댄스뮤직 아이돌들과는 확연히 다른 보컬 실력이었다. 독특한 보컬 톤은 물론이고 4옥타브 E노트나 F노트까지 무난히 소화하는 가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흔하지 않다. 그렇다고 매번 고음에서만 노는 가수가 아니고 중저음 까지도 완벽히 소화했다. 자유로운 음역대에 황홀해하며 곡을 만들었기에 녹음 당일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에는 더더욱 기쁨이 컸다. 더구나 음역대가 높다고 샤우트로 지르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미성으로 아름답게 표현할줄 아는 종국이의 보컬은 감성적인 멜로디라인의 내 댄스음악과 매우 잘 어울렸다. 그런 짜릿한 느낌은 매 작업마다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에 ‘Love is’의 믹스 때 차오르던 감격과 전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종국이의 보컬실력에 뒤지지 않는 터보의 또 다른 1등 공신은 김정남의 댄스실력이다. 여러 댄스그룹이 안무팀의 안무를 소화하기에 바빴던 것과는 달리, 김정남은 이미 댄스씬에서 실력자로 오르내렸었기에 그들의 무대는 김정남의 주도 하에 늘 가득 찬 느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언제나 밝고 예의 발랐던 타고난 춤꾼 김정남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3집 작업이 들어가기 전 김정남의 탈퇴 소식을 들었고 후임은 미국에서 온 마이키였다. 새로운 팀원으로 재정비에 들어간 터보는 다른 멤버에 맞게 새로운 엔진의 음악이 필요했다.

 

그 즈음 난 바쁜 스케쥴과 여러가지 사건사고로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당시 가요차트 10위 안에 내 곡이 7-8곡을 오르내리던 시절이었는데 히트곡이 늘어나면 날수록 그에 질세라 더 많은 구설수에 올랐고, 곡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부터의 괴롭힘과 시달림도 당해야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매 작품이 연속 히트했지만 두 개의 방송국에서 '한 작곡가의 음악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윤일상 음악 금지령'이 내려지고 급기야 신문기사까지 났었다. 결국엔 경고조치 정도로 마무리 되었고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이 때문에 급하게 타이틀을 바꾸는 기획자들이 많았다.(일례로 유승준의 1집 타이틀곡은 '사랑해 누나'였지만 이 일 때문에 '가위'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내 나이는 불과 스물셋이었다. 24시간 음악에만 미쳐 사는 스물셋의 내가 감당하기에는 수많은 주변 일들이 너무나 힘겨웠고 급기야 쓰러지는 일까지 생겼다. 


'이렇게 살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나는 모든 스케쥴을 접고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을 거쳐 다다른 올랜도. 함께 간 엔지니어 형님과 차를 하나 빌려서 데이토나비치로 드라이브를 갔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해안가를 달리는 기분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환상적이었다. 난 차를 세우고 모래사장으로 달려갔다. 입자가 너무도 가는 모래 한가운데 서 있으니 마치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의 그 곳에서 떠오르는 영감으로 쓴 곡이 있다.

 

회상

 

미국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바로 편곡 작업에 들어갔고 작사가 이승호 형님께 데이토나비치에서 곡을 썼던 당시 내 감정을 정리해서 말씀드렸다. 3집이 출시되는 시점이 겨울을 맞이하던 때라 작품의 배경은 겨울이 되었고 보컬 녹음을 하는 날 당일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받은 글을 읽고 우리는 실로 큰 감동을 받았다.

 

"겨울오면은 우리 둘이서 항상 왔었던 바닷가
시린 바람과 하얀 파도는 예전 그대로였지만
나의 곁에서 재잘거리던 너의 해맑던 그모습
이젠 찾을 수 없게 되었어.
(중략)
보이지 않니
나의 뒤에 숨어서 바람을 피해 잠을 자고 있잖아
따뜻한 햇살 내려 오면 깰거야
조금만 기다려~"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했고 아직까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이 곡에는 나의 20대의 추억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렇게 음악은 작곡가의 삶이 투영돼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X에서 Tonight까지

 

유독 터보는 실제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 만들어진 곡이 많다. 4집을 만들기 전 터보의 제작자 형님과 친하게 지낼 때인데, 사는 곳까지 같은 아파트였기에 거의 매일 만나서 낚시도 하고 술도 마시며 음악 이야기를 나눴다. 그 즈음 홀로 지내던 이 형의 가슴에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왔다. 자연스레 함께 어울려 자리도 하곤 했었는데 그때 형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많이 투영되어 4집에 수록된 '기도'라는 곡이 탄생했다. '애인이 생겼어요'라는 곡도 그것의 연장선에 있는 곡이다. 같은 앨범에 있는 X는 일본에 있는 내 친구의 러브스토리로 만들어진 곡이기도 하다.  진정성 있는 스토리가 통해서 였을까? 터보의 4집 역시 많은 인기를 얻으며 성공했다.

 

댄스음악의 황금기는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터보는 계속 질주했다. 2000년에 발매된 5집은 김흥국 선배님이 라디오에서 발음을 실수해 이슈가 되기도 했던 Cyber Lover가 타이틀곡이었지만 후속 곡 Tonight이 더욱 오랫동안 노래방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며 사랑받기도 했다.

 

5집 역시 히트음반이 되었고 마지막 앨범까지 터보는 단 한번도 성공하지 않은 적이 없는 그룹이 되었다. Tonight이라는 잔잔한 노래를 끝으로 터보의 제작사와 종국이의 계약기간이 끝났고 그 당시 소속사는 다른 회사와 합병을 하면서 여러가지로 변화의 과정을 거치던 중이었다. 새로운 소속사로 옮겨 종국이는 솔로 음반을 발매했고 변하지 않는 보컬실력으로 발라드 음악계에서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터보, 엔진이 꺼지다

 

터보의 여정에서 나는 2집 노스트라다무스, 바람의 철학, Love is, 3집 금지된 장난, 회상, 오버센스, 4집 X, 애인이 생겼어요, 기도, 첫사랑, 5집 D.D.R, Cyber Lover, Tonight 을 작업했고 터보와 나와의 그리고 터보와 대중들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이다.

 

터보의 노래는 90년대 아이돌그룹 중에 아직까지 오랫동안 불려지고 각종 클럽에서도 자주 흘러나오고 있지만 그들이 함께 서는 무대는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최근 무한도전에서 기획된 토토가와 그 여파로 열린 공연들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함께인 모습이 더욱 더 감격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아직 공식 재결합 소식은 없지만 종국이가 평소 멤버들을 꾸준히 챙겨오고 있고 최근 무대까지 함께 하는 그들을 보면 '혹시나...'하는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종국이는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사실이지만 중국에서 그야말로 대형스타가 되어있다. 또한 각종 예능에서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고 음악에 대한 큰 열정도 여전하다. 김정남과 마이키 역시 음악과 무대에 대한 그리움과 배고픔이 간절하다고 전해들었다.

 

가끔 전화기를 통해 여전한 종국이의 목소리를 들으면 나 역시도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상황이 바뀌었고 자리도 변화가 생겼지만 우리의 20대에 함께 그린 터보는 영원히 잊혀질 수가 없는 것이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 윤일상 작곡의 터보 무대가 2015년 혹은 2016년에 발표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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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무 살이다윤일상 저 | 대교북스
대한민국 대표 작곡가 윤일상의 인생 이야기. 윤일상의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인기 가수들과 작업을 했다. 그만큼 한국의 가수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을 통해 그와 가수들이 지금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운 자기계발을 했는지를 책에 담아낸다.

 

 

 [관련 기사]

- 세 개성의 완벽한 조화, 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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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가가 말하는 인생의 봄날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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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2015 봄 페스티벌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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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페스티벌만 인기가 아니다. 오히려 요즘 대학가를 중심으로 청춘들은 '봄 페스티벌'에 더 열광한다. 선선한 봄바람과 따스한 햇볕, 맑은 공기와 함께 펼쳐지는 풀밭 위의 음악 소풍은 상상만으로도 낭만 그 자체다. 아기자기하고 부드러운 봄날의 페스티벌, 이즘이 전격 분석해봤다. Q&A를 통해 대략의 정보를 얻고, 실전 가이드로 올해 열리는 봄 페스티벌 다섯 개를 확인하면 되겠다. 5월과 6월에 걸쳐 개최되는 뷰티풀민트라이프, 그린플러그드, 레인보우페스티벌, 서울재즈페스티벌, 뮤즈인시티 페스티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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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봄 페스티벌의 짧은 역사라면?


따뜻한 데다 휴일도 많은 5월을 음악 축제가 놓칠 리 없다. 2010년을 전후로 봄 페스티벌이 떠올랐다. 2007년의 서울재즈페스티벌과 월드DJ페스티벌이 흥행 가능성을 점친 이후, 2010년 뷰티풀민트라이프와 그린플러그드, 2011년 레인보우, 2013년 뮤즈인시티가 차례로 등장했다. 하반기의 몇몇 축제들은 봄 관객을 잡고자하는 기획을 내 걸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뷰티풀민트라이프는 전부터 개최돼왔던 그랜드민트페스티벌의 연장선에 있으며 2013년의 자라섬리듬앤바베큐는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을 모태로 한다.

 

2015/04 이수호(howard19@naver.com)


Q) 갑자기 인기인 봄 페스티벌, 이유는?


역사가 짧다 보니 봄 페스티벌이 대세로 떠오르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선 뚜렷한 목적. 기존 록 페스티벌의 수요층에 비해 봄 페스티벌은 20대 젊은 층(특히 여성)을 공략한다. 마니아 성향이 강한 인디 아티스트들이 라인업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한강 공원 등 낭만적인 야외 공연장을 꾸린다. 여기에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의 확산으로 이들 세대가 주 소비층으로 떠오르며 인기에 탄력을 받았다.

 

2015/04 김도헌(zener1218@gmail.com)


Q) 봄 페스티벌의 단골 아티스트는 누구?


페스티벌의 분위기가 서로 비슷해서 '겹치기 출연'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뜻밖에 올해 2개 이상의 라인업에 동시에 이름을 올린 뮤지션은 10cm, 쏜애플, 술탄 오브 더 디스코 등 10팀이 채 되지 않는다. 10cm와 옥상달빛, 가을방학은 뷰티풀 민트 라이프에, 몽니와 갤럭시 익스프레스, 브로큰 발렌타인과 안녕바다는 그린 플러그드에 집중했다. 네덜란드의 재즈 뮤지션 바우터 하멜(Wouter Hamel)은 올해 자신의 다섯 번째 서울재즈페스티벌 무대를 확정 지었고, PBR&B의 신성 더 위켄드(The Weekend)는 레인보우 페스티벌 무대에만 세 번 올라 재방문을 기대해볼 만하다. 특정 공연에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관객들을 만난 아티스트는 데이브레이크. 올해에도 뷰티풀 민트 라이프와 서울재즈페스티벌 무대에 오른다.

 

2015/04 정민재(minjaej92@gmail.com)


Q : 봄 페스티벌들은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요!


페스티벌 시장에서 봄은 작다. 거대한 여름이 개척된 후에야 건드려졌다. 역사가 짧고 그만큼 자리 잡지 못했다. 예를 들어 인천 펜타포트는 올해로 10주년을 맞는다.


작은 시장인 만큼 자본도 적다. 라인업은 한국 아티스트로 국한되고, 겹칠 수밖에 없다. 올해 안산에는 데이브 그롤과 노엘이 온다.


하지만 여름과 비교했을 때 그런 것이지, 마냥 똑같지만은 않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도 분명한 콘셉트와 매력을 내세운 봄 페스티벌들이 대두하고 있다.


2015/04 전민석(lego93@naver.com)


Q : 전체적인 특징을 꼽는다면?


여성 관객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힐링 피크닉'. 직접 싸온 간식을 펴놓고 음악과 함께 맛볼 수 있다는 점이 봄 페스티벌을 도심 속 유토피아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음악과 뮤지션에 열광하는 여름 페스티벌과 달리 여유로운 분위기와 과정을 누리는 데서 오는 자기만족이 크다. 장시간의 체력을 요구하지도 않고, 음악적 지식을 동반하지 않아도 무대를 즐길 수 있으니 행복을 더한다.


2015/04 정유나(enter_cruis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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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민트 라이프


뷰티풀 민트 라이프(줄여서 뷰민라)는 민트페이퍼 주최로 2010년부터 개최된, 국내의 가장 대표적인 봄 페스티벌이다. 주요 타겟은 <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 > 식 심야 라디오 방송을 좋아할 법한 감성적인 여성들로, 취향을 저격할 10cm, 데이브레이크, 정준일 등 소위 '인디계의 아이돌'들이 다수 출연한다. 어쿠스틱 악기와 함께하는 음악으로 가득하고, 가만히 앉아서 듣거나 서서 몸을 가볍게 흔들흔들할 수 있을 정도의 무대가 주를 이룬다. 라이브 공연 외에도 자체 라디오 공개방송, 친환경적인 향기 폴폴 나는 클래스와 플리마켓 등이 준비되어있다. 주목할 만한 신인으로는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출신으로, 민트 브라이트(민트 페이퍼의 신인 소개 프로젝트 음반)에도 이름을 올렸던 유근호가 있다. 포스터마저 수채화로 그려진, 나들이 느낌의 페스티벌.


2015/04 홍은솔(kyrie17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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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플러그드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맞는 '그린플러그드 서울 2015'는 올해 5/23~24일 석가탄신일 연휴 양일간 난지 한강공원에서 개최된다. '따뜻한 봄날의 음악소풍, 가장 행복한 음악축제'라는 슬로건으로 도심 속 자연에서 펼쳐지는 친환경 뮤직 페스티벌이다. 록, 힙합,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의 인디에서 메이저까지 아우르는 약 100여 팀이 출연하며 장르에 따라 총 7개의 스테이지가 마련된다. 스테이지 중에는 버스킹 스테이지와 피크닉 스테이지가 있어, 연휴에 난지 한강공원을 찾은 시민들 또한 무료로 음악을 즐길 수 있다. 올해는 네이버 뮤지션리그와 함께 진행해서 선발된 신인 그린프렌즈도 더해졌으며 페스티벌 참여 뮤지션들이 함께 한 옴니버스 앨범인 '숨[SUM∞] 다섯 번째'도 발매예정이다.


2015/04 윤석민(mikaelopeth@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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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재즈페스티벌


이제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페스티벌인 만큼 가장 비싸고 제일 화려하다. 벌써 9회째를 맞이해 5월 23-25일 서울을 재즈로 물들일 준비를 끝냈다. 칙 코리아 허비 행콕, 세르지오 멘데스, 아르투로 산도발, 그레고리 포터 등 오뙤르(Auteur)급 거장의 이름으로 수놓아진 기둥 위에 베이스먼트 잭스, 제프 버넷, 카디건스, 막시밀리언 해커 같은 중견 아티스트가 신선함을 더한다. 언니네 이발관, 이적 등 한국을 대표하는 대중음악 아이콘의 이름값도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테다. 이런 소위 말해 '말도 안 되는 라인업'에 맞춰 도대체 재즈 페스티벌에 빈지노나 에픽 하이같은 힙합 아티스트가 왜 출연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준비해온다는 전제하에 일단 접어두고 즐기자.


2015/04 이기찬(geechan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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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아일랜드


1년에 한 번 남이섬에서 캠핑이 가능한 날! 음악 페스티벌을 넘어 힐링까지 가능한 '레인보우 아일랜드'. 2011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5년째 많은 여성관객의 참여로 남이섬을 뜨겁게 달군다. 날씨가 무더워질쯤 열리지만, 물씬 봄 향기가 나는 듯한 이유는 콘셉트 때문이다. 음악, 캠핑 외 로맨틱 캠핑팅, 프리마켓, 3분 결혼식 등 다양한 레크레이션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여성들의 취향을 저격한다. 작년 「너의 의미」,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로 좋은 반응을 얻은 김창완 밴드가 이번 해도 다시 한 번 무대를 꾸미고, 인디계의 루키로 떠오르는 바버렛츠가 라인업에 올랐다. 50~60년대 사운드재현과 풍성한 화음으로 남이섬의 밤에 힐링을 불어넣을 이들의 무대 또한 기대해 볼 만 하다.


2015/04 박지현(kcandco0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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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인 시티


뮤즈 인 시티는 2013년 국내 최초 여성뮤지션들의 음악 축제라는 모토를 가지고 그 첫 시작을 내딛는다. 예술을 관장하던 뮤즈 여신들의 이름을 딴 만큼 국내외의 여성 음악가들을 섭외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올해 두 번째 페스티벌이 열리게 되었다. 2013년 당시에는 윤하, 이효리, 한희정, 요조 등 국내 인디와 메이저 뮤지션을 아우르는 라인업에 리사 오노(Lisa Ono) 리사 해니건(Lisa Hannigan)과 같은 해외 뮤지션까지도 무대에 올랐다. 올해는 레이첼 야마가타(Rachael Yamagata) 김윤아 조원선 등의 라인업이 공개된 상태. 여성 뮤지션 위주의 라인업이라는 특성상 장르가 포크 혹은 모던 록으로 한정되곤 하는데 그 덕분에 페스티벌 자체가 잔디밭에 많은 사람이 앉아 관람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015/04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2015/04 김도헌(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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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우주로, 비틀즈 〈Across the uni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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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같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렇다 또, 이사했다) 록앤롤을 듣기 딱 좋은 반지하다. 거실에만 조그만 창이 달랑 한 개 있고 방에는 창문 비스무리 한 것도 없다. 실내는 퀴퀴하고 습도가 높으며 요즘 날씨에도 서늘한 냉기가 감돈다. 지금도 얇은 패딩을 입고 따듯한 차를 마시며 이 글을 쓴다.

 

그렇지만 문을 닫으면 음악을 미친 볼륨으로 들어도 상관없고 바깥의 어떠한 개소리도 스며들지 않는다. 흡사 방음부스에 가까울 정도로 고요한 공간이다. 더구나 상가건물이라 밤엔 이 건물에 달랑 나 혼자만 남는다. 내가 발광을 해도 남에게 피해를 줄까봐 걱정 안 해도 되는 곳이다. 지하 아니랄까봐 냄새가 퀴퀴하긴 하지만 요런 소음 독립구역을 가지는 게 내 오랜 로망이었다. 달팽이관에 앰프가 달렸는지 유독 소리에 민감한 나로선 방음부스를 참 갖고 싶었다. 한데 돈은 한 푼도 없어서 그동안 하느님께 싹싹 빌기만 했다.  


 “제발 돈 좀 벌게 해주세요. 방음부스 개 비싸다구요.”


그러나 기복신앙이 극혐인지 신은 내 기도를 번번이 생 까셨다. 이사 전 낡은 빌라에 살 땐 집에서 음악 볼륨을 자꾸 줄이고, 주로 활동하는 새벽 시간엔 답답한 헤드폰을 끼고, 내가 쓰는 기계식 키보드의 우렁찬 딸깍거림이 옆집에 피해주지 않길 노심초사할 정도로 방음이 안 됐다. 그런데 윗집에선 뒤꿈치로 바닥을 찍으며 걷는데 박자가 안 맞고 창밖에선 주정뱅이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음정이 안 맞고 집 앞 슈퍼마켓의 대형 냉장고 실외기는 고주파 음으로 뇌파를 교란하며, 이틀이 멀다하고 악 쓰며 욕하는 소리가 날아들어 심리의 평온을 찢어발겨 놓기 일쑤였다. 결정적으로 앞집에 목소리 크면 장땡인 줄 아는 또라이가 사는데 잠 좀 자게 조용히 좀 해달라고 했더니 지랄마라고 도리어 큰소리 쳐서 경찰에 신고했다가 딱 내가 타겟이 되어버려 몹시 피곤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살기에도 바쁜 귀로 적반하장의 쌍욕을 듣다보니 글을 쓸 수가 없어 턴테이블 원고를 지난주에 펑크냈고(죄송합니다;;) 이사한 지 두 달 만에 이사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깊은 산속의 절간에 들어가 글을 써재낄 스타일이 못 된다. 도시에서 돈도 벌어야 하고 치킨에 맥주도 사먹어야 한다. 예전에 홍대 앞의 방음 설비가 잘 된 24시간 개인 연습실을 빌려서 장편 소설을 두 편이나 완성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내게 아름다운 대안이 될 것 같았는데 문제는 집 월세에 작업실 월세까지 내다보면 치맥은 고사하고 A4지 살 돈도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지하이긴 해도 달랑 월세 20에 주거와 방음부스가 합쳐진 공간에 살게 되었으니 오호 과연 신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서론이 길었고(죄송합니다;;) 오늘의 음악을 이야기하자면 바로 비틀즈의 <우주를 가로질러Across the universe>되겠다. 횡단보도도 아니고, 대서양도 아니고, 우주를 가로지른다니 스케일 좀 보소. 비틀즈의 음악들은 만약 우주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꼭 챙겨가고 싶은 음악 일 순위다. 그들의 음악은 우주를 가로지르며 들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얼마 전 비틀즈 멤버 폴 매카트니 경이 최초로 내한공연을 했다. 늙어서라도 그가 와준 게 고마웠고 살아있음이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나는 안타깝게도 공연을 못 봤다. 티켓값이 없다는 매우 사소한 이유 때문이었다. 


아쉬움을 대신해 기타를 잡고 <Across the universe>를 크게 불러본다. (지금 새벽 세 시지만 이 지하에선 그래도 된다. 크핫핫) ‘종이컵 위에 쏟아지는 말들처럼’ 하고 첫 소절을 시작하자 비틀즈의 고향 리버풀에 갔던 여행이 떠오른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그들의 전설이 시작된 라이브 무대 캐번 클럽(Cavern Club)이었다. 지하의 어둡고 퀴퀴한 동굴 같은 공간에서 비틀즈 멤버를 닮은 사람들로 구성된 짝퉁밴드가 공연 중이었는데 워낙 비슷해 의식을 조금 이완시키면 실제 비틀즈 공연을 보는 듯했다. 실제로 맥주에 조금 취하자 싱크로율이 100%에 가까워져 싸인을 요청할 뻔했다. 이제 비틀즈 전체 멤버의 공연을 직접 볼 수는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황홀한 감명을 받았다. 그곳에선 추억만 팔고 있는 게 아니라 공연장을 두 개로 만들어 여전히 무명의 새로운 밴드가 한 쪽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캐번 클럽 출신의 또 다른 아티스트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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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번 클럽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도 밴드 라이브 클럽들은 대개 지하에 있다. 음악이 아닌 병신 같은 소리들은 지상에서 시끄러워 죽겠고 캄캄한 지하에 내려가야 비로소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 하다. 밴드 음악이야 워낙 볼륨이 크니 방음 때문에 지하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지상에 비해 현저히 환경이 나쁜 지하가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는 요람이 되는 게 경이롭다. 마음껏 소리 내며 살 수 없는 좁은 도시에서 값싼 지하 공간마저 없다면 밴드 음악을 하려는 사람들의 꿈들이 대신 땅속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아아 남들의 발밑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햇빛 안 드는 곳에서 예술혼의 불을 밝히는 이 땅의 모든 밴드들에게 제습기를 선물하고 싶다.

 

아무튼 벌써 결론이다.(죄송합니다;;) 이제 와서 비틀즈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얘기해봐야 의미가 희미하겠고 옛날 음악에만 집착하는 따분한 느낌을 지울 수도 없겠지만 밀폐된 지하에 앉아 비틀즈의 음악을 큰 볼륨으로 부르고 있자니 <Across the universe>의 노랫말이 내 기분을 땅 밑에서 우주로 끌어올린다. 소음에 대해 신경증 환자처럼 굴고 살면서 음악만큼은 크게 듣고 있자니 바보같이 시끄러운 소리들에게 공격받은 스트레스에 대한 해소감이 든다. 존 레논은 이 곡의 노랫말을 첫 번째 아내 신시아에게 잔소리를 심하게 듣다 영감을 받아썼다고 들었다. 뭔가 해소감이 드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Nothing gonna change my world(아무것도 내 세상을 바꾸지 못해요) 


이 후렴구 부분에서 나는 그의 강력한 멘탈을 느낀다. 어두운 지하에선 습기나 곰팡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나도 존 레논의 멘탈을 본받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내 세상을 만들고 싶어지는 것이다. 


끝으로 피오나 애플이 리메이크한 버전 영상을 링크해 본다. 아름다운 재해석이고, 특히 뮤직비디오는 이 세상의 시끄러움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못났고 그에 비해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인지 잘 표현한 영상이다. 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딱 이 말이다. 칼럼은 발로 쓰고 감각적인 메시지는 뮤비로 때운다.(죄송합니다;;) 

 

이 음악을 들으며 빨리 이삿짐 정리나 끝내야겠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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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지금은 야구 시즌! 야구 응원가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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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야구 시즌! 야구 응원가 특집 - 한국 프로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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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더워질수록 열기를 더해간다. 올해로 창단 33주년을 맞은 한국 프로야구다. 2006년 국가 대항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계기로 일대 중흥기를 맞으며 명실상부 국민 스포츠의 입지를 굳혔다. 스타 플레이어들의 활약과 지역 연대감, 보다 친근한 마케팅은 해마다 수백만을 야구장으로 끌어모은다.

 

한국 프로야구의 특징은 역시 신나는 응원 문화다. 일부 환호를 빼고 시종 차분한 분위기의 미국 야구장과 달리, 우리는 큰북과 응원단장, 치어리더를 앞세운 활기찬 응원이 익숙하다. 야구장은 기본적인 선수 응원가부터 팀의 상징곡, 배경음악까지 다양한 음악으로 가득한 노래방이다. 여기에 결정적 득점, 승리의 순간에 팀의 상징곡이 울려 퍼지는 순간은 명실상부 그 날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각 도시를 상징하며, 애향심을 듬뿍 담아 경기의 흥을 돋구는 노래들을 소개한다.

 

 

LG 트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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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 - 서울의 찬가”(1966)
“이용 - 서울”(1982)
“정수라 - 아! 대한민국”(1984)

 

원년 구단 MBC 청룡이 모태인 LG 트윈스. 팀이 리드하거나 결정적 상황, 쐐기를 박는 점수를 낼 때, 핀란드 메탈 밴드 스트라토바리우스의 록 발라드 명곡 「Forever」를 개사한 「승리의 노래」 후 '서울 메들리'가 등장한다. 우선 「잊혀진 계절」로 1980년대 초 히트 가수로 등극한 이용의「서울」이 있다. 아바의 「Does your mother know」를 그대로 가져온 곡이지만 「아, 아, 우리의 서울」의 후렴으로 도시를 상징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초 선풍적인 인기를 끈 「아! 대한민국」이 그 뒤를 잇는다. 건전가요 모음집 < 아! 대한민국 >에 수록된 건전가요였던 이 곡은 본래 정수라와 장재현의 듀엣 곡이었으나 정수라의 데뷔 앨범이 재발매되며 파워풀한 보컬의 독창이 되었다. 경기 전과 때때로 등장하는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도 엘지 트윈스를 상징한다.

 

 

두산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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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ch Boys - Surfin U.S.A" (1963)
"마그마 - 해야" (1980)

 

원년 구단 OB 베어스를 전신으로 한 두산 베어스. 충청도에서 출발해 1985년부터 서울 잠실야구장에 자리를 잡았다. 원년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프로야구 원년 챔피언 자리에 오른 후 1995년, 2001년 세 번 우승을 차지하며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두산의 승리 응원가는 1980년 MBC 대학 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한 마그마의 「해야」지만, 남자와 여자 파트가 나눠진 선수 개인 응원가가 더 유명하다. 타 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 팬을 보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응원으로, 대표적으로 비치 보이스의 「Surfin U.S.A」를 개사한 외야수 정수빈의 응원가가 있다. 한국에서 비치 보이스는 이 한 곡으로 모든 설명이 가능하지만, 사실 이 팀은 '천재' 브라이언 윌슨을 필두로 비틀즈에 대항했던 1960년대의 유일한 미국 밴드였다.

 

 

넥센 히어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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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ie Patton - I Shall not be moved" (1929)

 

2008년 재정 문제를 안고 있던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며 '우리 히어로즈'로 출발한 히어로즈는 마땅한 스폰서 기업을 찾지 못해 혼란을 겪었다. 타이어 그룹 넥센이 팀을 후원하고 나서부터 승승장구하여, 2013년과 2014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강팀으로 거듭났다. 넥센의 홈구장 목동야구장에는 비록 원정 응원단이 훨씬 많이 방문하지만, 화끈한 공격력으로 오히려 응원을 오래하는 쪽은 홈 팬들이다. 대표적인 응원가 「서울의 푸른 하늘에 히어로즈 기를 높여라」는 1920년대 델타 블루스 뮤지션 찰리 패튼(Charlie Patton)의 「I shall not be moved」가 원곡으로, 한국 축구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응원가로 먼저 유명하여 넥센이 사용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고려대학생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민족의 아리아」도 LG 트윈스와 함께 응원가로 부르고 있다. 원곡은 이탈리아의 테너 「Melodramma」.

 

 

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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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 돌아와요 부산항에" (1980)
"문성재 - 부산갈매기" (1982)

 

부산은 야구의 도시라 하여 구도(球都)라 불린다. 야구가 곧 생활이자 삶의 중요한 일부분인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전국에서도 손꼽힐 열정을 불태우기로 유명하다. 이 뜨거운 에너지 덕에(?)「부산갈매기」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메들리는 야구 팬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높은 지명도를 구가한다. 문성재의 「부산갈매기」는 1982년 발표된 곡으로, 구슬픈 멜로디와 가사의 악조건이 오히려 부진이 길었던 팀의 역사와 겹쳐지며 롯데를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가왕 조용필의 데뷔곡이자 누구나가 아는 최고 히트곡이다. 하지만 원래 이 곡이 김성술의 「돌아와요 충무항에」였으며, 1972년 처음 발매되고 나서 1976년, 1980년 조용필의 데뷔까지 숱한 버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팀 응원가 외에도 롯데는 대부분의 선수 응원가를 팝에서 따오는 사실로 유명하기도 하다.

 

 

SK 와이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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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트리오 - 연안부두" (1979)

 

인천 야구의 역사는 원년의 삼미 슈퍼스타즈부터 시작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못했다. 부진한 팀 성적으로 삼미가 해체된 후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까지 숱한 팀이 거쳐간 탓이다. 현대의 연고지 이전 소란을 거쳐 SK 와이번스가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천 야구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숱한 역사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연안부두」다. 삼미 시절부터 불려진 이 응원가는 1979년 남매그룹 김트리오가 발매한 디스코 풍의 트로트 송이다. 8회초 종료 후 홈 팀 공격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연안부두」를 만날 수 있고, 특히 반주가 꺼진 2절에 팬들이 스마트폰 플래쉬를 흔드는 장면이 장관이다.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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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호 - 영일만 친구" (1979)
"대구찬가(대구는 내 고향)"

 

프로야구의 최강자 삼성 라이온즈. 프로야구 역사상 단 한번도 최하위로 내려가보지 않았으며 무려 16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8회 우승했다. 특히 2011년부터 지금까지 프로야구를 4연속으로 제패하며 '해태왕조'에 이은 '삼성왕조'를 구축하고 있다. 이토록 무결점의 강팀이지만 이렇다 할 응원가가 없다는 점이 다소 심심하다. 대구의 캐치프레이즈 '컬러풀 대구'를 타이틀로 한 응원가와 「대구찬가(대구는 내 고향)」을 팀 응원가로 사용하지만 존재감은 미미하다. 2012년 포항에 제 2 야구장을 개장하며 최백호의 대표곡 「영일만 친구」도 부르고 있다. 선수별 응원가로는 김원준의 「Show」를 개사한 4번타자 최형우의 응원가가 유명.

 

 

기아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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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 목포의 눈물" (1935)
"김수희 - 남행열차" (1980)

 

한국 최초로 프로야구를 열번이나 제패한 팀. 공포의 '해태 왕조'로부터 내려온 기아 타이거즈의 역사는 찬란하다. 하지만 찬란한 역사 뒤에는 차별받던 호남 인구의 설움이 있었다. 문일석의 가사에 손목인이 멜로디를 붙이고, 한 서린 이난영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입혀진 「목포의 눈물」은 일제강점기 망국의 한으로부터 1970년대 호남의 눈물을 어루만졌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응원가 때문이었을까. 해태는 정규 시즌 다소 부진하더라도 한국시리즈에 올라가기만 하면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목포의 눈물」은 젊은 세대에 생소하다는 이유로 뜸해졌지만 같이 불렸던 김수희의 「남행열차」만은 여전히 기아 타이거즈의 응원가로 오늘도 남아있다.

 

 

한화 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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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 내 고향 충청도" (1976)
"대전의 찬가"

 

오랜 침체기 끝에 한화 이글스의 선전이 이어지고 있다. 2000년대 후반 최약체에 처져있던 한화는 올해 김성근 감독 부임 후 개선된 성적으로 팬들을 야구장에 끌어모은다. 「부산갈매기」나 「연안부두」처럼 호응이 높지는 않지만, 많은 응원가 중에서도 충청도를 대표하는 노래 「내 고향 충청도」가 2012년부터 불리고 있다. 전란 후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잘 그려낸 이 노래는 조영남의 빅 히트곡이지만 사실 19세기 민요 「Banks of Ohio」를 번안한 곡이며, 애잔한 한국 버전과 달리 원곡은 치정살인을 다룬 '머더 발라드(Murder Ballad)'다. 1980년대 팝스타 올리비아 뉴튼 존이 데뷔 앨범에 리메이크한 버전으로도 유명.

 

 

NC 다이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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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브레인 - 미친듯 놀자" (2005)
"노브레인 - Come on come on 마산 스트리트여" (2005)

 

프로야구의 오랜 8개 구단 체제를 깬 팀은 통합 창원시를 연고로 하는 NC 다이노스다. 신생 팀임에도 내실있는 투자와 착실한 보강으로 창단 2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강팀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NC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마산야구장은 본래 롯데 자이언츠의 제 2구장이었으나 대대적인 개조와 팬 서비스, 팀의 선전을 통해 이웃과는 다른 색을 입히고 있다. 응원가 중에서는 마산 출신 '불대갈' 이성우의 밴드 노브레인의 노래가 귀에 들어온다. < Boys, Be Ambitious! >「미친듯 놀자」를 개사한 응원가와, 고향에 대한 헌정곡 「Come on come on 마산스트리트여」를 합창한다.

 

 

kt 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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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 Gees - Holiday" (1967)
"김광진 - 마법의 성" (1995)

 

프로야구 10개 구단 시대를 열어젖힌 팀은 kt 위즈다. 과거 현대 유니콘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수원 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한다. 2015년 시즌은 승률 2할 초반대에 머무르며 부진하고 있지만 신생팀이기에 성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kt의 응원가 중에서는 미국의 3인조 밴드 비지스의 「Holiday」를 개사한 「We are the kt Wiz」가 있고, 김광진의 「마법의 성」을 개사한 「나의 사랑 kt Wiz」는 승리를 굳힐때 부른다.

 

"윤수일 - 아파트" (1989)

 

10개 구단 공통의 응원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이닝이 이어지면 '으쌰라으쌰'와 함께 반드시 등장한다. 윤수일은 1977년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트로트로 히트를 기록했지만 1980년대 들어 과감한 록 사운드를 전면에 앞세우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가죽 바지와 선글라스로 무장한 그의 외양은 서구였으나 「제 2의 고향」과 「아파트」의 정겨운 멜로디는 우리의 것이었다. 역동하는 에너지로 대중음악의 귀감이 된 그의 노래는 오늘도 야구장 전역에서 울려 퍼진다.


2015/05 김도헌(zener1218@gmail.com)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새로운 시대의 음악가,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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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에서 1882년 태어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무렵에 프랑스 파리에서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후 러시아를 떠나 스위스에 정착했다가(1914~1920) 다시 파리로 귀환합니다(1920~1939). 그가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땅은 미국이었지요. 1939년 미국에 도착해 1971년에 그곳에서 사망합니다. 중간에 딱 한번, 미국과 옛소련에 극하게 대립하던 1962년에, 그러니까 그의 나이 80세에 48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적이 있기는 합니다.

 

며칠 전에 본 어떤 원고 때문에 그의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국내의 한 출판사가 머잖아 책으로 출판할 원고인데, 담당 편집자가 한번 읽어보라고 교정지를 건네줬습니다. 1939년 9월에 미국에 도착한 스트라빈스키는 하버드 대학에서 모두 여섯 차례의 강연을 했는데, 제가 건네받은 교정지는 바로 그 강연을 수록한 것입니다. 제목은 ‘음악의 시학’이지요.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매우 유명한 책인데 그동안 국내에서는 번역본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번에 좋은 번역으로 출간되기를 저도 기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늘날 많은 이들이 스트라빈스키에 대해 ‘혁신가’ ‘반항아’ ‘이단아’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지 않지요. 특히 파리에서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 그가 보여줬던 음악들이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곡들이 세 곡의 발레음악입니다. 당대의 예술기획자였던 디아길레프(1872~1929)의 의뢰로 탄생한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이 던져준 신선함과 파격으로 인해 스트라빈스키는 ‘새로운 시대의 음악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당시 파리의 비평가들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서 전해오는 이국풍(러시아풍)의 낭만성, 원초적인 에너지에 주목해 ‘원시주의’라는 타이틀을 부여했지요. 물론 20세기 초반의 파리 사람들이 이국풍을 열렬히 좋아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음악뿐 아니라 미술, 춤 등의 여러 장르에서 그런 경향이 모두 나타나고 있었지요, 앞서 언급한 디아길레프는 그런 파리 사람들의 요구에 발빠르게 부응했던 인물이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나타났던 파리의 ‘러시아붐’에 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영민한 예술기획자였던 그가 선택한 음악가가 바로 스트라빈스키였던 것이지요.

 

게다가 그의 음악이 초연되는 극장에서 벌어졌던 한바탕의 소동도 오늘날까지 ‘혁신가’의 이미지를 더욱 부채질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도 마치 하나의 전설처럼 회자되는 장면, 바로 <봄의 제전>이 초연됐던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일어났던 소동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날 관객들은 아주 흥분해서 난리를 쳤다고 합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자서전에 따르면, 객석에서 일어난 소동이 점점 번져서 한바탕의 시위로 확산됐고, 무대 뒤쪽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스트라빈스키는 잔뜩 화가 난 안무가 니진스키(1890~1950)가 무대 위로 뛰쳐나갈까봐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러시아 발레단(발레 루스)의 단장이었던 디아길레프는 조명기사에게 극장의 조명을 계속 껐다가 켜도록 지시했다고 하지요. 그렇게 해서라도 소동을 진정시키려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그날의 소동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니라 니진스키의 혁신적 안무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작곡가였던 스트라빈스키조차도 그날의 소동이 자신의 음악 때문이었던 것처럼 ‘은근히’ 피력하면서 전설을 조장한 측면이 있지요.

 

물론 오늘날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 ‘스트라빈스키=혁신가’의 이미지는 결코 잘못된 판단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꼭 기억돼야 할 점이 있는데, 사실은 그가 전통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 음악가였다는 점입니다. 그런 맥락과 관련해, 앞에서 잠시 언급한 1939년의 하버드대학 강의록 <음악의 시학>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초연하고 26년이 흐른 뒤에, 그 음악에 대해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편의상 군데군데 발췌해 소개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랍니다. “나를 무슨 혁명가로 간주한다면 단단히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해요. <봄의 제전> 발표 당시에 그런 얘기들이 참 많이도 나왔습니다.… 나는 졸지에 본의 아니게 혁명가가 되었더랬지요. … (물론) <봄의 제전> 같은 작품에서 오만한 자세를 느낄 수는 있습니다. 이 작품이 구사하는 언어가 새로운 탓에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요. … 예술은 그 본질상 구성적입니다. 예술은 혼돈의 정반대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센세이션을 일으키려고 분별없는 무질서와 노골적인 욕망에 대담함을 쏟아부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름지기 ‘말’은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가 중요하지요. 60세를 바라보는 스트라빈스키, 새로움을 향한 도전뿐 아니라 이른바 ‘신고전주의’로 불리는 두번째 파리 시기(1920~1939)까지 이미 경험한 그는 이 강연에서 ‘질서’와 ‘구조’를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전통에 기반하지 않은 새로움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얼핏 보수적인 음악관으로의 회귀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단지 음악 형식으로서의 전통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형식보다 더욱 본질적인 것으로 ‘예술가의 진심’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쓸데없이 과장해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욕심,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좀더 익숙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려는 태도 같은 것들을 “속물들의 허영심”으로 지칭하면서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중반의 서양음악사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라이벌로 손꼽혔던 쇤베르크(1874~1951)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습니다. 한때는 친밀했지만 미국에서는 불과 5km 거리에 살고 있었음에도 서로 내왕조차 안했을 정도로 불편한 사이였던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에 대해 이런저런 견해들이 있는 줄 압니다. 그의 작품은 종종 과격한 반발이나 빈정대는 웃음을 사기 일쑤였지요. 하지만 정직한 정신과 진짜배기 음악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달에 홀린 피에로>의 작곡가(쇤베르크)가 자신의 작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아무도 기만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모든 예술가들은 앞 세대의 영향을 받습니다.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에 대해서는 반발하지요. 같은 세대 안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지나쳐 감정싸움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예술사에서 비일비재하지요. 그들도 인간이었고, 특히나 예민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고르(러시아식 발음으로는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대음악가였던 림스키 코르사코프(1844~1908)의 직계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스승에게 직접 수업을 받는 것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나 가능했지요.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원(음대)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인 표트르 스트라빈스키는 당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성악가였지만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스트라빈스키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법학과에 다녔습니다. 어찌 보자면 바로크 시대의 헨델과 비슷하지요. 한데 헨델이 그랬던 것처럼 스트라빈스키도 법학에 전혀 흥미가 없었습니다. 법대를 졸업하자마자(1905년)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문하에 정식으로 들어가 수업을 받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것이 음악 공부의 첫걸음은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도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제자인 표도르 아키멘코에게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또 대학 시절에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두 아들과 친구가 됐기 때문에, 훗날 스승이 되는 림스키 코르사코르의 60회 생일파티(1905)에서 축하 칸타타를 작곡해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또 아버지가 당대의 유명 성악가였던 까닭에 스승의 집안과 이미 교분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에서 나고 자랐을 뿐 아니라 스승인 림스키 코르사코르를 통해 ‘러시아적 전통’을 이어받지요. 그래서 그의 음악에서는 러시아의 민속 선율들이 때로는 그대로, 또 때로는 완전히 변형된 형태로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또 20대 후반에 디아길레프의 손에 이끌려 건너간 프랑스에서 그는 바로 앞 세대의 음악가였던 드뷔시의 영향력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파리에서 공연할 발레용 음악을 작곡하면서 드뷔시 풍을 도외시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의 초기작들이 그렇게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까닭에 본국인 러시아에서는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했지요.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은 1911년 작곡을 시작해 1913년 초연됐습니다. 앞서 작곡한 <불새>와 <페트루슈카>보다 더 원숙한 음악으로 평가받습니다. 두 편의 발레음악으로 이미 성공을 얻어낸 스트라빈스키의 자신감이 느껴지기도 하지요. 이 음악은 샹젤리제 극장에서 발레공연으로 초연된 이듬해에 연주회용 버전으로 러시아와 파리에서 다시 연주됐습니다.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연주회에서는 쿠세비츠키가 지휘했고, 파리에서는 발레 초연의 지휘를 맡았었던 피에르 몽퇴가 지휘봉을 들었지요. 스트라빈스키는 특히 파리 연주회에 대해 흡족한 소감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샹젤리제 극장에서의 소동 이후 <봄의 제전>은 드디어 빛을 발했다. 연주회장은 만원이었다. 음악을 방해하는 무대 장치가 없는 연주회였기 때문에 청중은 집중해 음악을 듣고 열정적으로 박수를 쳤다. 작곡가로서 보기 드문 성공이었다.”

 

음악은 태양신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러시아 이교도들의 태고(太古) 의식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모두 2부(Part1, Part2)로 나뉘어 있지요. 1부에는 ‘대지에 대한 경배’(L’Adoration de la terre)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서주로 시작해 ‘봄의 징조, 젊은 처녀들의 춤’ ‘유괴의 유희’ ‘봄의 론도’ ‘서로 다투는 부족들의 유희’ ‘현자의 행렬’ ‘대지에의 찬양’ ‘대지의 춤’이 차례로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이런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원시의 들판에서 남녀들이 춤을 추다가 짝을 찾고, 부족 사이에 대결이 등장했다가, 부족의 장로들이 이를 진정시키고 대지를 경배하는 의식을 치르면서 춤을 춥니다. 
 
‘희생’ 혹은 ‘제물’(Le Sacrifice)로 제목을 번역할 수 있는 2부는 서주로 시작해 ‘처녀들의 신비한 모임’ ‘선택된 처녀에 대한 찬미’ ‘조상의 혼을 불러옴’ ‘조상들의 의식’ ‘희생의 춤, 선택된 처녀’가 이어집니다. 그렇게 이교도들의 제물 의식이 차례로 치러지는 것이지요. <봄의 제전>은 스트라빈스키의 초기작들이 대개 그렇듯이, 관악기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음악입니다. 에너지의 응집과 분출이 대단히 강렬하게 펼쳐지지요. 1부의 막을 여는 신비로운 파곳 선율, 이어지는 호른과 플루트의 선율이 프랑스적 인상주의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합니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원시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변박자의 리듬, 아울러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더해져 20세기 음악의 한 페이지를 강렬하게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피에르 불레즈/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1991년/DG

 

<봄의 제전>을 운위하면서 현대음악의 거장 불레즈의 음반을 빼놓을 수 없겠다. 악기 하나하나의 표정과 음색을 명징하게 살려내고 있는 연주다. 불레즈는 역시 치밀한 해석의 연주를 들려준다. 그래서 역으로 음악에 쉽사리 빨려들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음악의 회화적 측면을 부각한다거나, 리듬의 강렬함으로 듣는 이를 매료시키는 연주가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이토록 정교한 디테일로 음악의 구조를 쌓아나가는 연주를 놓칠 수는 없다. 불레즈는 1969년에도 같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봄의 제전>을 녹음했으나 이 지면에서는 1991년의 디지털 녹음을 권한다.


 

▶에사 페카 살로넨,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2005년/DG

 

핀란드 태생의 지휘자 살로넨이 LA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도전한 녹음이다. 그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는 확고부동한 연주라고 할 수 있다. 도전적이고 강렬한 사운드를 맛보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진지한 해석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적 리듬감을 이처럼 멋지게 구현하는 연주를 찾기는 쉽지 않다. 살로넨은 1989년에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같은 곡을 녹음해 소니(Sony)에서 내놓은 적이 있다. 이 음반도 좋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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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을 때 듣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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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드 레드헤드(Blonde Redhead)에 대해 글을 쓰자니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울고 싶을 때만 듣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자판에 콧물이 떨어질라 조심하고 있다.  


울고 싶은 순간이 많아봤자 좋을 게 없는데 원하지 않아도 감정이 슬픔을 와락 호소할 때가 오는 법이다. 


나는 터프가이인 척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울기 싫어서 주성치 영화라든가 박상 소설이라든가 가급적 웃긴 것들을 찾아본다. 오버해서 배꼽을 잡고 바닥을 뒹굴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러는 자신이 또 비참하게 느껴진다. 감정이란 놈은 한 번 찌그러지면 통제할 수 없는 양철 밥통 따위인가 보다. 심지어 꼰대처럼 강요까지 한다. 

 

 “쯧쯧 그러지 말고, 자 눈물이 필요하단 말이야. 어서 울어봐. 착하지?”
 “뭐야. 이유나 알고 울잔 말이다.”

 

연기파 배우가 아닌 이상 눈물이 수도꼭지처럼 틀면 나오는 게 아니지 않나. 그렇지만 찬찬히 되새겨 보면 울고 싶은데 참고 넘어간 때가 얼마든지 있다. 통장을 스치고 사라진 월급을 아쉬워할 때(크흑), 출근하려고 신발을 신는데 몸이 배추절임처럼 축 처질 때(어흑), 지친 몸으로 돌아와 하나 남은 라면을 끓여먹다 실수로 엎었을 때(아옳옳), 화장실 휴지가 떨어졌는데 부를 사람이 없어 엉거주춤 가지러 나오다 혼자라는 게 사무치도록 외롭고 더럽게 느껴질 때(끄아아아) 일단 한 번 미뤄놨던 순간들이 와르르 쏟아지며 콧등에 딱밤을 맞은 것처럼 얼큰한 최루성 감상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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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희망적이어야 할 앞날은 황사와 초미세먼지로 뒤덮인 듯 뿌옇기만 하고, 힐링 어쩌고 하는 개념들은 사이비 종교처럼 같잖고,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는 후진기어를 넣고 질주하며, 인생의 지리멸렬함은 말라빠진 멸치대가리 같고, 아니 대체 행복이 뭐였는지, 언제 한 번이라도 행복했었는지 기억조차 안 나는 것이다. 그쯤 되면 울적함의 늪에 하반신을 빠트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질질 짜지 않고 쿨하게 개기면서, 시크하게 버티고 참으면서, 남들도 다 견디는데 혼자만 약해 빠졌구나 다그쳐도 보고, 아 궁상 좀 떨지 말라고 얼레리꼴레리 해본다. 


 - 역시 울고 싶어진다.

 

터프한 척, 쿨 시크한 척엔 한계가 있는 거다. 공교롭게도 울상이 되는 순간 욕실의 세면대 배관이 터졌다. 낡아서 불안했는데 올 게 온 것이다. 쉐엑 소리를 내는 물 분수를 맞으며 꼭지를 잠그고 나왔더니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키힝 물이 하필 눈가에만 튀었어) 순간 세면대 배관이든 사람의 눈물샘이든 한계에 다다르면 터져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다. 할 수 없다. 블론드 레드헤드의 음악을 듣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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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할 땐 더 슬픈 음악을 들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게 효과적인지, 반대로 신나는 음악을 들어 마음을 밝은 쪽으로 인도하는 게 장땡인지 잘 모르겠다. 우울한데 어떤 학설이 옳은지 따질 겨를도 없으니까.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면 좋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슬픔이나 우울의 스펙트럼도 사람마다 굉장히 다양해서 자기 상태에 맞는 음악을 고르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기도 하다. 나는 우울한 기분을 고조시키기도 싫고 차분하게 가라앉히기도 싫어서 블론드 레드헤드의 <Misery is a butterfly>를 골랐다. 블론드 레드헤드의 음악들은 기본적으로 암울한 마이너 톤인데 리듬감은 뛰어나다. 그런데 리듬이 빠른 곡도 감정을 차분하게 만들거나 축축 처지게 한다. 그러니 이들의 음악은 여행을 출발할 때 듣거나, 막 시작된 연인과 스테이크를 썰면서 들으면 곤란하고, 우울이 집적거려 귀찮아 죽겠을 때 들어야 그저 그만인 것이다.

 

 

오랜만에 <Misery is a butterfly>뮤직 비디오를 틀자마자 감정의 울림처럼 울적한 키보드 멜로디와 함께 그리 급할 것 없는 드럼비트가 우수의 심장처럼 공명한다. 쌍둥이인 페이스(Pace이탈리안 발음으론 파체) 형제의 똑같이 진지한 곱슬머리 페이스와 그들의 리듬에 이끌리다 보면 어느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보컬 카즈 마키노의 고음이 가늘게 떨며 밀려나온다. 진지하게 연주하는 두 명의 이탈리아 쌍둥이 남자 사이에서 몸치에 가깝게 흐느적거리며 이상한 춤을 추는 일본인 여자 한 명이 삼각관계처럼 존재하는 기묘한 밴드멤버의 조합이 이 곡의 묘한 몽환적 분위기와 슬픔을 증폭시킨다. 음악은 고통스럽게 흘리는 눈물처럼 고조되다 중반부에서 부드럽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한 번 쓰윽 올라갔다가 차분하게 정리되며 어느 순간 뚝 멈춘다. 아니 이건 마치 사람이 울어재끼는 과정과 흡사하다.

 

울고 싶을 때 듣는 음악이라고 주제를 잡았지만 이 음악을 들으면서 펑펑 울게 되지는 않는다. 그저 울고 싶은 감정이 그대로 눈에 보이고 소리로 들리며 내 감정을 바로 눈앞에서 직면하게 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멋진 아티스트들이 내 슬픔에 공감하며 대신 울어주는 듯한 환상을 보고 만다. 등을 두드려 준다거나 누군가 따듯하게 안아준 듯 음악으로 이해 받고 위로받는 기분까지 든다. 아아 역시나 이런저런 우울과 고통을 한 마리 나비처럼 승화시켜 날려주는 명곡이다. 음악이 끝나자 해소감을 느낀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말한다.

 

 “그래, 울고 싶은 건 없었던 일로 하지.”
 
감정은 그렇게 해결했고 다음은 세면대. 사람을 부르자니 출장비가 없어 직접 갈아본다. 빵꾸난 배관을 로킹 플라이어로 제거하고 연휴에도 문을 연 철물점을 끝내 찾아내 새 파이프를 사왔다. 배관은 처음인데다 자세가 안 나와 낑낑거렸지만 볼트를 단단히 죄자 수도관은 더 이상 새지 않는다. 울고 싶은 기분도 완전히 사라진다. 


찬물을 틀고 어푸어푸 세안을 하자 기분이 갓 갈아입은 팬티처럼 뽀송뽀송해진다. 


그래, 울고 싶었던 건 바로 이 기분이 되기 위해서였어. 이제 말끔하게 다시 또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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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닌 우리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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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댄스의 창시, 영턱스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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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만들자

 

1992년 내가 가요계에 데뷔했을 당시 음악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초반에는 팝음악 성향을 따랐고 어떻게 하면 팝처럼 만들까를 고민했다. 수많은 날들과 긴 시간을 팝음악 같은 톤을 연구하고 코드진행을 공부하는 데 보냈다. 이런 일들은 음악을 해 나가면서 꾸준히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일이기도 하고 최근까지도 새로운 편곡기법과 코드진행 등의 학습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현 시대의 흐름을 읽고 기본을 잃지 않기 위해서지 흉내내거나 따라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학습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에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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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일상홈페이지(http://www.ilsang.com/)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음악을 시작할때 경쟁자가 있었다. 데뷔 당시 크리스 크로스(Kriss Cross)라는 나이 어린 아이들로 구성된 힙합그룹이 인기였는데, 그 그룹을 프로듀싱하고 후에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작업을 해온 저메인 듀프리(Jermain Dupri)가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나의 경쟁자는 바로 저메인 듀프리였다. 

 

나름의 이유로는 데뷔 시기가 비슷하기도 했고 나이가 나랑 같아서였는데, 내가 데뷔할 때만 해도 가요계에 데뷔한 10대의 전문 작곡가는 나 하나뿐이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레 그 프로듀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는 미국에서의 그의 행적만큼 나도 한국에서 커리어를 쌓으리라 다짐했다. 언젠가는 빌보드를 정복하겠다는 꿈을 갖게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렇게 그의 음악에 자극도 받으면서 열심히 하루하루 공부해가며 활동에 매진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비디오 한편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한 흑인 어린이가 나와서 춤을 기가 막히게 추며 그루브를 타는 장면이 나왔다. 넋 놓고 그 영상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시작점이 다르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블루스나 알엔비 그리고 힙합을 접하고 팝음악이 자신도 모르게 생활의 일부로 녹아 동화되어 있는 그들과 나의 인생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따라하면 안된다.'

 

팝을 그저 따라만 가다가는 결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내 꿈인 빌보드의 정상을 밟는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만이 할 수 있는, 한국인만이 만들 수 있는 음악을 만들자.'

 

그것이 그 시절 나의 모토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어린시절부터 듣고 자라온, 어른들이 언제나 흥에 겨워 부르시던 음악, 우리의 전통가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통가요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리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음악 곳곳에 알게 모르게 국악기를 삽입하게 된 시기도 그때부터였다.) 그냥 전통가요를 하는 것은 전문 트로트 작곡가분들의 몫이니 나는 섞어야 했다. 전통가요의 색채에 현재의 트렌디한 리듬과 편곡기법을 믹스 시키자.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만들자. 그렇게 해서 처음 나온 곡이 바로 '정'이다.

 

 

 

'정'이라는 곡을 처음 만들고 난 정말 들떴다.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세상에 얼른 내 보이고 싶어서 흥분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곡 섭외가 들어 온 작업에 언제나 일순위로 '정'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퇴짜였다. 어린 신인 작곡가가 생전 처음듣는 음악스타일을 들고와서 자신만만해 하는 모습을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왜 이 두 장르가 만나야하는건가'라는 질문까지 하면서 '음악이 이상하다'라고까지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곡과 가수는 사람과의 만남 이상으로 '인연'이 중요한데 그래서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의 이주노 형님이 새로운 신인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철 형님이 다리를 놨고 나와 영턱스 클럽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전 처음 듣는 형식의 곡은 멤버들에게도 생소했을 것이며 그들 역시 확신을 갖기 힘들었을 테다. 하지만 꾸준한 믿음을 준 사람이 주노형님과 철이형이었다.

 

"이건 무조건 될거야~!"

 

천만금보다 귀한 그들의 '믿음'이라는 지원덕에 난 더욱 자유롭게 편곡작업과 마무리 작업에 빠질 수 있었고 드디어 '정'이 세상에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새로운 음악의 발표. 결과는 시쳇말로 초 대박이었다. 언론은 앞다투어 기사를 냈고 이 곡은 당시 10대 위주의 댄스음악 시장에서 아저씨나 아줌마를 비롯한 중장년층에게까지 폭 넓게 인기를 얻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음악의 장르를 누군가가 "뽕댄스(혹은 트롯댄스)"라고 칭했고 나는 "뽕댄스의 창시자"가 된다. "뽕댄스의 창시자"로 여러 번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고 그렇게 세상에 나간 뽕댄스는 수없이 많은 아류작을 만들어 냈다. 너도나도 이것에 영향을 받아 음악을 만들어내었고 시장에는 비슷한 류의 음악들이 쏟아졌다. 마치 락앤롤이 붐을 일으켰을 때 너도나도 락앤롤음악을 만들어서 발표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사실 90년대 댄스 전반에 이 코드의 음악이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내가 만든 이 음악장르 때문에 내 스스로 자괴감이 들어 슬럼프가 오기도 했다. 반복되는 비슷한 스타일의 재생산, 즉 자기복제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는데 그래서 이 형식의 음악은 2000년 이후 거의 10년이상 손대지 않다가 최근 김연자 선배님의 "아모르파티", 그리고 최근 발표된 조정민의 "살랑살랑"등에서 나름 심혈을 기울여 한층 업그레이드 된 뽕댄스 작업을 시도해 나가고 있다.)
 
쏟아지던 비슷한 장르의 음악 홍수 속에서도 영턱스클럽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 그 장르를 최초로 세상에 알린 그룹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 역시 영턱스클럽에 대한 애정이 남 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신인을 처음 만들어서 내 음악으로 색채를 입혀 나가는 것은 정말 흥분되고 기분 좋은 일이다. 더구나 그 팀이나 가수가 성공을 성취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행보를 걸어가면 더 힘이 나는 것도 물론 인지상정이다. 영턱스 클럽은 음악뿐 만 아니라 독특한 안무로도 수많은 이슈를 낳았는데 그것은 제작자인 이주노형님의 안무 메이킹 능력이 영향을 미친것이 분명할 것이다. 앞다투어 여러 연예인들이 '정'의 안무를 따라하였고 길거리에는 언제 어디서나 '정'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임성은, 송진아, 한현남, 지준구, 최승민으로 구성된 1집의 영턱스 클럽 1기 멤버는 화려하게 데뷔했다. 승승장구하는 영턱스 클럽의 기세에 탄력을 받아 다음 앨범작업에 들어가지마자 '타인'이라는 곡이 나오게 된다.

 

 

타인

 

데뷔작 '정'은 빠른 비트의 곡이었기 때문에 2집에는 미디움힙합풍의 비트에 전통가요느낌을 섞고 싶었다. 멜로디 작업이 끝나고 당시는 잘 없었던 후크송형식의 힙합곡을 만들었다.

 

"한번만 안아주세요, 마지막 밤이잖아요. 이렇게 헝클어놓은 내맘을 달래주세요. 한번만 안아주세요, 마지막 부탁이예요. 이렇게 그대 그냥 가버리시면 다신 볼 수 없잖아요."

 

당시 콤비로 활동하던 이승호 형님의 전통가요 느낌이 나는 이 가사는 나의 곡과 그야말로 딱 맞아떨어졌다. 결과 역시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2집에서 아쉬운 점이 하나 있는데 '정'이라는 곡의 중요한 보컬리스트 역할을 했던 임성은씨가 2집에서는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빠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타인'은 심지어 임성은씨의 보컬을 염두하고서 곡을 쓰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임성은씨 버전의 '타인'을 한번 리메이크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다행히도 새로 바뀐 멤버들과 나머지 멤버들이 열심히 소화해준 덕분에 '타인'은 '정'과 함께 오랫동안 노래방에서 불리어지는 스테디셀러 중에 하나로 남게 되었다. 물론 타이틀곡이었던 '질투'도 당시에는 큰 인기를 얻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도 오래 기억되는 곡은 '타인'이다. '질투', '타인', 'Love Designer'로 참여한 2집에서는 임성은이 빠지고 박성현이 새로 투입된 2기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4집에는 '아시나요'라는 곡으로 3기 멤버 송진아, 한현남, 전현정, 김덕현, 남현준과 함께하였는데, 이 곡 역시 공전의 히트를 하며 영턱스클럽은 승승장구하게 된다. 5집은 4기 멤버 송진아, 한현남, 전현정 등 여성 멤버로 재정비되었다. 나는 '슬픈연인', '재회', '작은 연인' 이라는 곡으로 참여하였고 여기까지가 나와 영턱스클럽의 마지막 인연이었다. 이후 영턱스클럽은 여러 장의 앨범을 발표하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계속 멤버가 교체되다가 어느 순간 더이상 활동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당시 영턱스클럽 멤버들에게 지나치게 엄하게 디렉팅을 했던 것이 참 후회가 된다. 당시에는 요즘 같은 편집장비나 기술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보컬을 한번 녹음하면 수정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더욱 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데, 당시에는 필요하다 느껴서 그랬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조금 지나치게 채찍질을 가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과 후회가 많이 남아서일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가장 보고 싶은 친구들이 영턱스클럽 멤버들이다. 언제한번 둘러 앉아 소주한잔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워보고 싶은데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길을 걸어가고 있는 멤버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만남이었겠지만 최근 가요무대와 토토가 공연을 통해 다시 멤버들이 뭉친 것을 보니 정말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뭐라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생겼는데 무한도전의 토토가 기획이 성공하게 된 요인도 이런 감성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언제나 그렇듯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바뀌어도 음악은 영원히 그 사이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음악에 미쳐 음악만 알던 20대 청년에서 40대 두 아이의 아빠가 되니 이제서야 음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

 

영턱스 클럽은 사람냄새 나는 팀이었고 나는 그런 그들의 울림이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게 되는 힘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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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무 살이다윤일상 저 | 대교북스
대한민국 대표 작곡가 윤일상의 인생 이야기. 윤일상의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인기 가수들과 작업을 했다. 그만큼 한국의 가수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을 통해 그와 가수들이 지금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운 자기계발을 했는지를 책에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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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음악 시벨리우스 , 〈핀란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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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초에 이 지면에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를 설명했습니다. 한데 당시의 글에서 아주 잠깐 언급했던 음악이 한 곡 있었지요. 바로 교향시 <핀란디아>(Finlandia, op.26)입니다. 사실 이 곡은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시벨리우스의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로 손꼽힙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시벨리우스의 음악들은 이밖에도 더 있지요. 그는 모두 8곡의 교향곡(‘쿨레르보 교향곡’ 포함)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2번과 5번이 자주 연주됩니다. 또 극음악 <쿠올레마>에 수록돼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분위기의 ‘슬픈 왈츠’, 연주시간 5분가량의 이 짧은 곡도 인기곡으로 손꼽힙니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그 좋은 곡들을 모두 언급하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보편적으로 애호하는 음악을 중심으로 한 곡씩 소개해나가고 있는 ‘내 인생의 클래식 101’에서 교향시 <핀란디아>를 빼놓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핀란드는 인구가 600만 명이 안 되는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노르웨이, 스웨덴과 더불어 북유럽의 복지국가로 손꼽힙니다. 다시 말해 작지만 강한 나라인 셈이지요. 한데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핀란드는 외침에 시달여야 했던 약소국이었습니다. 서쪽으로는 스웨덴과 어깨를 맞댔고 동남쪽으로는 거대한 러시아가 버티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이리 맞고 저리 터지면서 오랜 세월을 견뎌왔던 나라였습니다.

 

수백년간 스웨덴의 영지(領地)로 존립했던 핀란드는 1809년부터 러시아의 지배 아래에 놓입니다. 스웨덴이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영지였던 핀란드를 빼앗겼던 것이지요. 한데 이 전쟁, 그러니까 러시아-스웨덴 전쟁(1808~1809)은 나폴레옹이 일으킨 유럽 전쟁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1806년에 영국과 유럽 대륙 국가들의 교역을 금지시킬 목적으로, 다시 말해 영국을 고립시키려는 의도로 이른바 ‘대륙봉쇄령’을 발표하지요. 그 이듬해에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일종의 외교적 협조를 요청합니다. 스웨덴에 압력을 넣어 대륙봉쇄령에 참가시키라는 것이었지요. 이때만 해도 나폴레옹과 러시아는 ‘같은 편’이었습니다. 물론 이후에 나폴레옹과 러시아는 적대적 관계로 돌아서지요.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깨고 영국과 교역을 했고, 이에 화가 난 나폴레옹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진격했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퇴각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 참패로 인해 나폴레옹의 권력은 크게 흔들리고 맙니다. 그게 1812년의 일이었지요. 훗날(1880년)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1812년 서곡’은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808년에는 나폴레옹의 의도에 의해 러시아-스웨덴 전쟁이 발발했고, 이 싸움에서 패배한 스웨덴은 러시아에게 핀란드 땅을 넘기고 대륙봉쇄령에 참가합니다.

 

한데 또 하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거의 전유럽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 특히 강국의 압제에 시달렸던 작은 나라들에서 민족의식과 애국주의를 불러일으킨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이지요. 그것은 전쟁의 필연적 부산물입니다. 당연히 핀란드에서도 민족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등장했던 유명한 인물이 엘리아스 뢴로트(1802~1884)였습니다. 그가 쓴 민족영웅 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는 19세기 중반에 핀란드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킨 대표적인 문학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뢴로트가 시를 직접 썼다기보다는 1000년 넘게 구전돼오던 전승 시가들을 수집해서 정리했다는 말이 더 옳겠습니다.

 

당시 핀란드의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너나없이 이 영웅시에 매료됐습니다. 물론 시벨리우스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는 베를린과 빈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1892년, 그러니까 27세의 나이에 <쿨레르보 교향곡>이라는 광대한 규모의 음악을 초연해 ‘핀란드 음악의 새로운 별’로 떠오릅니다. 이 곡이 바로 서사시 <칼레발라>를 토대로 한 음악이지요.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처럼 관현악에 독창과 합창이 어우러지는 ‘칸타타 심포니’인데, <칼레발라>의 텍스트를 가사로 삼고 있습니다. 이처럼 관현악과 성악이 어우러진 거대한 교향곡이, 당시만 해도 음악적 변방으로 치부됐던 핀란드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 해에 시벨리우스는 음악계의 떠오르는 별로 명성을 얻었고 사랑하는 여인 아이노 예르네펠트(1871~1969)와 결혼도 합니다.

 

이 무렵의 시벨리우스, 대책 없는 술고래이자 콧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근사한 양복을 빼 입은 패셔니스타, 낭만과 열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지녔던 젊은 예술가의 모습은 한 편의 회화 작품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벨리우스와 동갑내기 친구였던 화가 아크셀리 갈렌-칼레라 (Akseli Gallen-Kallela, 1865~1931)의 유화 작품입니다. 이 화가 역시 당시의 핀란드 민족주의(국민주의)를 강하게 드러냈던 예술가였지요. 그림의 제목은 <심포지움>입니다. 화면의 가장 오른쪽에 시벨리우스가, 가운데에는 시벨리우스의 많은 음악을 초연했던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로베르트 카야누스, 그리고 오른쪽에는 화가 자신이 등장합니다. 제목은 ‘심포지움’이지만 세 남자가 무뚝뚝하게,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림이 그려졌던 해는 1884년이었지요. 그로부터 5년 뒤, 34세의 시벨리우스는 드디어 핀란드의 애국주의를 표상하는 교향시 <핀란디아>를 작곡합니다. 앞에서 제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를 잠깐 언급했는데, 이후 러시아의 황좌는 니콜라이 1세를 거쳐 1894년부터 니콜라이 2세에게로 넘어갑니다. 이 사람이 바로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의해 쫓겨난 마지막 황제이지요. 한데 그는 과거의 황제들에 비해 속국이었던 핀란드에 더욱 강경한 정책을 펼칩니다. 그나마 좀 유지됐던 핀란드의 자치권을 거의 빼앗아버린 것이지요. 그러자 핀란드의 예술가들과 언론인들이 이에 반발합니다. <핀란디아>는 바로 그런 저항의 일환으로 태어난 음악이었습니다.

 

1899년 11월에 열린, 언론 탄압에 항의하는 3일간의 행사에서 마지막으로 순서로 열린 것이 연극 <역사적 정경>을 공연하는 것이었지요. <핀란디아>는 바로 이 연극 공연에서 사용한 일련의 음악들 가운데 한 곡이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연주된, ‘핀란드여 깨어나라’라는 곡이었지요. 오늘날 우리가 듣는 <핀란디아>의 원형이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시벨리우스는 이날 공연을 직접 지휘한 직후에, ‘핀란드여 깨어나라’를 별도의 교향시 <핀란디아>로 개작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7월에 ‘심포지움’이라는 그림에도 등장했던 로베르트 카야누스가 헬싱키 필하모닉을 지휘해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합니다. 1900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초연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연주회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이들에게 핀란드의 독립 의지를 음악으로 천명했던 역사적 장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국민음악답게 <핀란디아>는 듣기에 쉬울 뿐더러 8분가량의 짧은 곡입니다. 느릿하고 묵직한 안단테 소스테누토(andante sostenuto)의 서주로 막을 열지요. 금관악기와 팀파니가 음산하면서도 장엄한 사운드를 연출합니다. 오랜 고난의 역사를 표상하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목관과 현악기들이 비탄에 빠진 듯한 탄식조의 선율을 연주합니다. 차츰 음악이 고조되면서 관악기가 급박한 사운드를 토해내기 시작하지요. 현악기들의 호흡이 점점 빨라지고 관악기들은 의지를 고취하고 투쟁을 독려하는 것처럼, 선동적으로 연주됩니다. 하지만 이어서 목관과 현악기들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가 등장하지요. 평화로우면서도 경건한 분위기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맥박이 고동치는 느낌으로 음악이 전환돼 강렬한 관현악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6년/Warner Classics

 

카라얀은 이 곡을 여러 번 녹음했다. 대부분의 녹음들이 수작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고 1964년 녹음한 음반(DG), 말년이었던 1984년 역시 같은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음반(DG)도 빼어난 연주들이다. 디지털로 녹음한 1984년 음반은 카라얀이 여섯번째로 진행한 <핀란디아> 레코딩이고 마지막 녹음이기도 하다. 오늘 이 지면에서는 1976년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녹음을 권한다. 약간 느릿한 템포의 연주, 금관의 찬란함이 명불허전이다. EMI가 몇해 전 ‘Great Recodings’로 발매했다가 최근 매장에서 눈에 띄지 않았던 이 음반이 ‘Warner Classics’로 옷을 바꿔 입고 이달 16일부터 시판될 예정이다.

 

 

 

▶파보 베르글룬트(Paavo Berglund),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1972년/EMI


국내에서 카라얀 외의 <핀란디아> 명연을 구입하기가 영 쉽지 않다. 수많은 음반들이 품절 상태다. 예컨대 바비롤리가 할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1966년 녹음(EMI) 같은 것들이다.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음반은 핀란드 태생으로 시벨리우스의 명연을 숱하게 남긴 파보 베르글룬트의 음반인데, 이 역시 품절로 표시돼 있다. 그는 1972년에 본머스 심포니와, 또 1982년에는 헬싱키 필하모닉과 같은 곡을 연주한 수작을 남겼다. 두 녹음 모두 차갑고 음울하면서도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핀란드적 정서를 빼어나게 구현하고 있다. 비록 품절 상태이지만 놓칠 수 없는 음반인 까닭에 추천목록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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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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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못한 지 오래다보니 ‘러브쏭’을 들을 일이 없었다. 사랑을 주제로 한 곡이라면 어느 먼 별나라의 헬륨가스 방귀뀌는 소리로 들리는 나날이었다. 
 
그딴 삭막한 마음으로 걷다가 나는 어느 닭발 가게 앞에서 오늘의 주제곡 이승철의 <My love>를 듣고 말아버린 것이었다. 


 ‘힘껏~ 안아줄게 널~’


이 노래에서 가장 핵심적인 그 노랫말이 귓구녕에 꽂히자마자 든 생각은 이랬다. 어우 힘껏 안아 주다 갈비뼈 으스러지면 안 아플까. 그러나 다음 순간, 발매된 지 몇 년 된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생생히 떠오르고 말았다. 일반인 프러포즈 이벤트를 이승철 엉아가 도와주는 내용이었다.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연출에, 무용수에 오케스트라에, 이승철 라이브 깜짝 등장에, 완전 미친 스케일을 자랑하는 프러포즈였다. 프러포즈 받는 여자도 울고, 하늘도 울고, 뮤비를 보던 외로운 나도 우는데 프러포즈 수락하고 둘이 끌어안고 키스하고 활짝 웃으며 끝나는 엔딩.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으아 사랑하고 싶다...”


닭발에 양념을 바르던 아저씨가 나를 흘낏 쳐다보았다. 왠지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닭발엔 뼈가 없고 나에겐 연인이 없었다. 다음 순간 울분이 치밀었다. 아니 결혼하고 싶거나 연애하고 싶지만 사정이 있어서 안하고(못하고)있는 남녀들이 들으면 미치고 폴딱 뛸 것 같은, 이런 ‘위험한’ 음악을 길거리에 막 틀어놓다니! 게다가 거 승철 형님도 너무한 거 아니오? 딴 남자들이 앞으로 죽어라 머리 쓰고 마음 쓰고 신경 써서 프러포즈를 기획해도 이 뮤비를 본 여자들은 조금도 성에 안 찰 거 아닙니까? 어쩌자고 우리한테 이런 만행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나는 비분강개하며 닭발에 맥주를 잔뜩 사오고 말았다. (아래 뮤직비디오를 보시는 솔로남들은 이 심정에 공감하시리라 본다)

 

 

보컬의 신 이승철 하면 설명이 필요 없는 아티스트고, 말이 필요 없다보니 원고 분량을 채우기 곤란해 지금껏 안 쓰고 있었는데 닭발을 씹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얘기하고 싶은 추억이 떠올라버렸다. 사랑 얘기라 쪽팔려서 쓸까말까 고민하다 결국 써버린다. 이 칼럼은 애초에 음악과 추억의 찰떡연애 같은 앙상블로 기획되지 않았던가. 아니면 말고.
 

어쨌든 <My Love>가 나왔던 해에 나는 이탈리아 베로나를 여행 중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일지 모른다는 끼워 맞춘 콘셉트를 가져 연인들의 성지가 된 도시였다. 이야기일 뿐이지만 실제로 베로나엔 줄리엣의 생가가 있다. 나는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줄리엣의 집에 가서 로미오에게 고백 받았다는 발코니를 감상하거나, 변태처럼 줄리엣 동상의 가슴을 만질 생각은 없었다. (동상의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게 말이 되냐) 다만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 다니기만 해도 자그만 도시가 전반적으로 사랑에 빠지라고 독려하는 느낌을 내면서, 알프스가 발원지인 아디제 강에 로맨스가 흐르는지 민물이 흐르는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 강은 이탈리아에서 본 어느 강보다 맑고 신비한 빛을 띠었다.나는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대낮부터 어떤 선술집에 들어갔다. 배 나온 아저씨들 몇 명이 맥주잔을 비워대고 있었는데 술을 주문하려고 바텐더 앞에 서는 순간 나는 숨이 안 쉬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카운터 너머에 내 이상형이 서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쁜 여자는 아니었지만 긴 생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은 게 잘 어울렸고, 하루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게 100%의 여자아이가 거기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녀에게 내가 몇 퍼센트였는지 모르겠지만 순간 그녀의 눈에는 아디제 강보다 더 신비한 빛이 흘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페로니 생맥주를 부탁했다. 그녀는 이탈리아어가 능숙했지만 외모는 동북아시아계였다. 한, 중, 일 어디일까 궁금했다. 혹시나 해서 우리말로 날씨가 참 좋네 독백해봤는데 못 알아들었고 일본말로 맥주가 맛있다며 감탄사를 뱉어봤지만 쳐다도 안 봤다. 


의문은 다음날 풀렸다. 관광은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오후가 되자 또 그 술집에 찾아갔는데 그녀는 어떤 선량해 뵈지 않는 중국인 남자들과 중국어로 입씨름 하고 있었다. 양꼬치에 찡따오를 내놓으라는 건지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남자들이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한 남자가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자 그녀는 뿌리치며 항의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사이에 쓰윽 끼어들어 맥주를 주문했다. 그녀는 내 주문을 핑계로 그들로부터 벗어나 카운터로 돌아왔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 서글퍼 보였다. 


 “문제가 있나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녀는 무표정하게 페로니 한 잔을 내밀었다. 나는 사랑이나 낭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 중국인 남자들 옆 테이블에 굳이 앉았다. 내가 뽁뽁이 완충재가 되길 바랬다. 


베로나를 떠나기 전날 나는 또 그 바를 찾아갔다. 사무적인 맥주 주문 외엔 사흘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한 말을 그제야 걸었다. 준비한 주제와는 달리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전 내일 베로나를 떠나요.”
 “내일 페로니를 달라구?”
 “아니 떠난다고요.”
 “그래요?”


그녀는 시큰둥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았다. 내게 관심 없었구나. 떠도는 여행자 주제에 어쩌라고 그런 바보 같은 멘트를 날렸나. 씁쓸한 술을 삼키고 있을 때 그녀가 내게 접시 가득 감자칩을 담아 왔다. 


 “주문하지 않았...”
 “이별 선물.”


그녀는 최초의 그 신비하고 깊고 맑은 눈으로 찡긋 웃었다. 요즘 유행하는 허니버터칩은 그 감자칩에 비하면 별나라 헬륨가스 방귀뀌는 맛임에 틀림없다. 나는 감자칩을 최대한 천천히 먹고 그녀의 선술집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을 아끼고 싶었다. 그리고는 사랑이 그렇게 쉽나 베로나, 사흘 만에 떠나면서 사랑에 빠지면 어떡하나 베로나 어쩌고 라임도 안 맞는 개드립을 날리며 한 없이 걸었다.

 

그 당시 최신곡이었던 <My love>를 다시 듣자니 떠오른 기억이다. 평소라면 손발이 오그라들겠지만 베로나 선술집의 중국인 여자 얘길 하며 들으니 노랫말 중에서 이 부분이 박자에 맞춰 심장을 딱딱 때린다. 


 사랑해 그 말은 무엇보다 아픈 말 숨죽여서 하는 말 이젠 하기 힘든 말

 

 아무튼 이승철 님의 깊고 짙고 간절하고 감미로우면서도 바싹하고 부드러운 감자칩 같은 목소리를 당대에 들으며 살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은 사랑에 빠지려고 사는 것 아니었나. 그것 아니면 인생에 무슨 주제가 있단 말인가. 대체 무엇에 생애를 바쳐 몰두해야 한단 말인가. 아프더라도, 하기 힘들더라도 다시 사랑에 빠져야 하고 숨죽여서 간절히 고백해야 하는 거다. 솔로들에게 이 곡은 그런 느낌을 다시 일깨우는 아름다운 자극이 아닐 수 없다.
 
 PS 베로나에선 생맥주만 마셔 사진이 없으니 이승철 님의 곡을 라디오 생라이브로 한 번 더 들읍시다. <My love> 뮤직비디오 도입부의 그 경망스런 어깨 들썩 춤을 따라 추며 들으면 이른 더위에도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관련 기사]

- 지하에서 우주로, 비틀즈 〈Across the universe〉
- 스뽀오츠 정신과 부드러움이 필요한 시대
- 드레스덴 축제의 매혹적인 단조
- 공항에서 딱 떠오르는 노래, 거북이 〈비행기〉
-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닌 우리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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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야구 시즌! 야구 응원가 특집 - ML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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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선수라면 한번쯤 메이저리그를 꿈꾼다. 114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최정상급 선수들이 162게임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이들의 결승전은 아메리칸 시리즈가 아닌 '월드 시리즈'다. 세계 최고의 야구 리그라는 자부심이다.

 

100년을 훌쩍 넘는 리그와 그에 준하는 각 팀들의 역사는 미 대륙 전역에 고루 퍼져있다. 오랜 세월동안 각 지역과 함께 호흡하며 고장의 상징이 된 야구는 일상과도 같다. 이들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각 팀들은 고유의 응원가와 승리 노래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고 연대를 강화한다. 본 특집에서는 대표적인 「팀 상징곡」 대신, 대중 노래가 팀의 상징이 되어 현대까지 남아있는 경우 15선을 소개한다.

 

 

Jack Noworth & Albert Von Tizer - Take me out to the ballgame

 

20세기 초 뉴욕, 팝의 초석을 놓은 틴 팬 엘리(Tin Pan Alley)의 작곡가 잭 노워스와 알버트 본 타이저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공통의 응원가를 만들었다. 7회초가 끝나고 홈 팀의 공격 차례를 준비하는 「Seventh Inning Stretch」 시간이 오면, 관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 노래의 후렴을 합창한다. 「Home team」 가사에 홈 팀의 이름을 넣어 부르며 완성되는 완벽한 '미국 야구의 송가'. 1949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진 켈리, 프랭크 시나트라 주연의 뮤지컬 영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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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Yankees

“Frank Sinatra - New york, new york”

 

메이저리그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스포츠 팀 중에서도 정상의 위치를 점하는 명문 팀이 뉴욕 양키스다. 핀 스트라이프 줄무늬 유니폼은 말 그대로 '최 고의 상징'이며 재력, 미디어 효과, 우승 횟수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의 야구 팀이다. 이러한 팀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한 팀의 상징곡이 있으니 바로 「New York, new york」이다. 1977년 동명 뮤지컬 영화의 주제곡이었던 이 노래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목소리로 불려지면서부터 명실상부 뉴욕을 상징하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1980년부터 명문 구단의 상징이 되었고, 그 명성은 지금까지 살아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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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ton Red Sox

“Neil Diamond - Sweet caroline”

 

2004년 '밤비노의 저주'를 깨며 무려 86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 레드삭스는 이후 2회의 우승을 더하며 강팀의 이미지를 굳혔다. 리그에서도 유명한 보스턴의 인기는 열광적인 팬,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Sweet caroline」 한 곡에 잘 녹아있다. 8회말 공격을 기다리는 홈 구장 펜웨이 파크(Fenway Park)에는 미국 대중음악의 대표 싱어송라이터 닐 다이아몬드의 1969년 히트곡이 울려퍼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래의 가사는 물론 가수까지 보스턴과는 단 1% 연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2002년부터 야구장에서 불려졌고,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테러 후 닐 다이아몬드 본인이 직접 야구장을 방문하여 노래하는 등 팀의 대표곡임에는 분명하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상징곡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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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Francisco Giants

“Tony Bennett -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2010년, 2012년, 2014년. 2010년대 짝수 해마다 월드시리즈를 제패한 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다. '왕조(Dynasty)'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이은 이 팀은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승을 기록중이며 1883년 뉴욕에서부터 장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매 경기 자이언츠가 승리를 거둘 때마다, 아름다운 홈 구장 AT&T 파크에는 팝 스탠다드와 재즈 보컬의 살아있는 전설 토니 베넷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가 울려퍼진다. 1962년 발표된 이 곡은 명실상부 '20세기를 대표하는 명곡'의 반열에 올라있으며 낭만적인 분위기는 한 도시와 한 팀을 상징하기에도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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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as Rangers

“Pat green - I like texas”

 

박찬호와 추신수로 알려진 텍사스 레인저스는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에 소속된 팀이다. 1961년 워싱턴 D.C에서 창단하여 1972년 텍사스로 옮겨왔고, 월드시리즈 우승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제하면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텍사스 하면 떠오르는 여유로운 컨트리 송 「I like texas」가 텍사스 레인저스의 승리 노래로, 이 곡을 부른 팻 그린은 2003년 < Wave On Wave >가 빌보드 앨범 차트 10위에 오르며 이름을 알린 컨트리 아티스트다. 참고로 추신수의 등장음악은 GDX태양의 「Good bo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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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ttsburgh Pirates

“Sister Sledge - We are family”

강정호 “노홍철 & 장미여관 - 오빠라고 불러다오”

 

내셔널리그 중부지구에 속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는 21세기 들어 영욕의 역사를 보냈다. 1882년 창단하여 5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냈으나 1992년부터 무려 20년 동안 5할 승률 이하의 성적을 낸 것. 다행히도 리빌딩 기간을 거쳐 최근에는 악명 높은 '해적' 팬들의 함성과 아름다운 PNC 파크를 지닌 매력있는 팀이 되었다. 바로 옆 동네 출신의 디스코 자매 시스터 슬레지의 「We are family」가 파이어리츠의 승리를 축하하는 노래다. 특이한 점이라면 팀의 패배시에도 비틀즈의 「A hard day's night」,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Sing a song」 등이 울려퍼진다는 점. KBO 야수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강정호의 등장곡은 장미여관의 「오빠라고 불러다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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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Angeles Dodgers

“Randy Newman - I love LA”

류현진 “PSY - Gentleman” / “The Who - Who are you”

 

한국인의 '국민 구단'.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박찬호의 팀이자 현재는 류현진의 팀으로 유명하다. 본래 브루클린에서 출발한 다저스는 1883년부터 시작된 긴 전통을 갖추고 있으며, 최초의 흑인 야구 선수 재키 로빈슨부터 공격적인 제 3세계 스카우트를 통해 메이저리그의 세계화에 기여한 팀이기도 하다. 이러한 LA 다저스의 승리 노래도 역시 도시의 이름이 들어간 곡으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랜디 뉴먼의 「I love L.A.」다. 로스앤젤레스 연고의 수많은 프로스포츠 팀의 상징곡이기도 한 이 노래는, 그러나 사실 도시를 찬양하기보다는 허영심에 가득한 1980년대 사회를 비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랜디 뉴먼은 오히려 우리에겐 대중가요보다 < 토이 스토리 > 등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아티스트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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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kland Athletics / Houston Astros /
Los Angeles Angels Of Anaheim / San Diego Padres 외
“Kool & The Gang - Celebration”

 

1970년대 펑크 그룹의 대표주자 쿨 앤 더 갱의 「Celebration」은 그야말로 완벽한 응원가다. 상기 언급한 네 팀을 제외하고서라도 수많은 팀들이 이 곡을 승리곡으로 삼는다. 'Celebrate good times, come on!'의 활기찬 후렴이 분위기를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그 사실이 더욱 이상할 테다. 1980년 발매 즉시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을 꿰찼고,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우리에게도 익숙한 곡이다.

 

상기 팀 중 특별한 팀이라면 오클랜드 어슬레틱스가 있는데, 이른바 빌리 빈 단장의 < 머니볼 >로 유명한 이 팀은 졌을 때도 노래를 틀며 관중들을 위로한다. 그 노래가 바로 위저의 맥빠지는 「Say it ain't so」니, 참 기막힌 선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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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ago Cubs
“Steve Goodman - Go cubs go”

 

시카고에는 두 개의 야구 팀이 있지만 압도적인 인기는 컵스의 것이다. 시카고 컵스는 1870년 출발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구단이자, 단 한 번의 연고지 이전도 없었던 고고한 팀이다. 덕분에 시카고의 인기는 컵스의 독차지이며 자자손손 내려오는 강력한 팬들의 충성심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 저명한 팀의 승리 곡은 시카고 출신의 포크 뮤지션 스티브 굿맨의 작품이다. 그 역시 컵스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팀을 위해 수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가 1984년 요절하자 구단은 그의 노래를 공식적인 승리 노래로 사용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Chicago White Sox
“Blues Brothers - Sweet home Chicago”

 

1894년 컵스의 동생(?) 팀으로 리그에 등장한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비운의 팀이다. 1917년 월드시리즈 우승 후 1919년 대대적인 선수들의 승부 조작 '블랙삭스 스캔들'로 근간이 휘둘리며 88년 동안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특출난 성적도 내지 못해 여러 모로 묻혀있었으나 2005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응원하는 구단으로도 유명한 이 팀의 승리 곡은 1980년대 코미디언들로부터 출발해 블루스 복고 밴드로 이름을 알린 블루스 브라더스의 「Sweet home chicago」다. 위대한 블루스의 대부 로버트 존슨의 원곡이며 블루스 브라더스 외 수많은 블루스 아티스틀이 리메이크한 블루스의 스탠다드 넘버다. 여담으로 이 팀의 가장 막강한 팬인 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2012년 백악관 공연에서 전설 B.B. 킹과 이 곡을 함께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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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adelphia Phillies
“Frank Sinatra - High hopes”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격렬한 팬층을 지닌 팀이 바로 필라델피아 필리스다. 전 세계 프로스포츠 사상 최초로 1만패의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운 약팀의 역사를 가졌지만, 열렬한 팬들의 성원은 전혀 식지 않아 필리스의 선수들은 아낌없는 칭찬과 지독한 야유의 천당과 지옥을 매일 오가게 된다. 미국 프로스포츠 선정 최고의 마스코트인 파나틱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승리곡의 유래인데, 1971년부터 2009년까지 팀의 전속 캐스터를 맡은 해리 칼라스가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의 「High hopes」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93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와 2008년 월드시리즈 승리 후 팬들 앞에서 힘차게 노래불렀던 해리 칼라스는 이듬해 워싱턴의 홈 구장에서 중계를 준비하다 그만 경기장으로 추락해 사망했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필리스는 그의 생전 목소리를 승리 노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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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ttle Mariners
“Kingsmen - Louie louie”
“Jimi Hendrix - Fire”

 

1977년 등장한 젊은 팀 시애틀 매리너스는 아직 월드시리즈 진출 경험이 없다. 한국에는 일본의 톱타자 이치로의 팀으로 알려졌지만 켄 그리피 주니어, 에드가 마르티네즈 등 든든한 스타를 보유한 팀이기도 하다. 이 팀의 승리곡은 1953년 리처드 베리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그룹 킹스맨(The Kingsmen)의 1963년의 「Louie louie」. 팝과 록 시장에서 스탠더드로 자리잡은 곡이며 빌보드 싱글차트 2위를 기록하는 등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또 다른 승리곡의 주인공은 시애틀 출신의 전설, 지미 헨드릭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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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sas City Royals
“The Beatles - Kansas City”

 

미주리 주에 위치해있지만 캔자스 주를 대표하는 캔자스시티 로열스도 강팀보다는 약팀의 이미지가 강했다. 1969년 창단 후 한때 뉴욕 양키스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는 등 선전했으나 1985년 우승 후 점차 전력이 약해졌다. 이 때문에 작년 월드시리즈의 임팩트는 그야말로 거대한 것이었다. 기동력과 최강의 수비로 무장한 로열스는 비록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가을 야구에 그들의 모든 것을 쏟아내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팀에는 다양한 승리곡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비틀즈의 「Kansas city」에 주목하고 싶다. 1952년 전설적인 작곡 콤비 제리 라이버-마이크 스톨러의 손에서 태어난 이 곡은 비틀즈의 함부르크 시절 애창곡이었으며 훗날 < Beatles For Sale >에 수록된다. 이후 제임스 브라운, 머디 워터스, 에벌리 브라더스 등 수많은 전설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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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lanta Braves
“Ray Charles - Georgia on my mind”

 

애틀랜타라는 도시 이름에서부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노래는 단 하나뿐이다. 레이 찰스의 「Georgia on my mind」는 비단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뿐만 아니라 애틀랜타 도시, 그리고 조지아 주 전체를 대표하는 시대의 명곡이다. 1871년 보스턴에서 출발해 밀워키를 거쳐 1966년 애틀랜타에 자리를 잡은 브레이브스는 1990년대부터 14년 연속 지구 우승을 차지하는 등 최강의 자리를 굳혔다. 본래 이 곡은 1930년 틴 팬 엘리의 작곡가 호기 카마이클이 작곡하였고 수많은 커버 버전이 존재하였으나 1960년 레이 찰스의 버전만큼 명성을 얻은 곡은 없다.

 

2015/06 김도헌(zener1218@gmail.com)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래칫 뮤직(Ratchet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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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칫 뮤직(Ratchet music)

 

2010년대 초반, 힙합 클럽의 트랩 뮤직(trap music)은 대체로 뚱뚱했다. 상위 장르 고유의 멋을 살린 굵직한 시류였으나, 뭐든지 고이면 썩는 법. 시간이 흐름에 단점이 부각되었다. 붕붕대는 베이스와 신경질적인 하이 햇 그리고 신스 사운드 등, 꽉 찬 편곡으로 과식한 귀는 거북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에 ‘미니멀’이 떠올랐고, 간소한 트랩 싱글 「No flex zone」, 「U guessed it」이 주목받았다. 중량을 덜면서 험악함은 사라지고 힙해졌다. 이 때, 앞서 말한 트랩과 다르게 미니멀한 구성으로 큰 흐름 만든 장르가 래칫 뮤직이다. 

 

릴 부시(Lil Boosie)와 웨비(Webbie)가 속한 트릴 엔터테인먼트(Trill)의 노래들을 듣고 영감 받은 디제이 머스타드(DJ Mustard)가 캘리포니아 스타일로 승화시킨 음악이다. 닥터 드레와 스눕 독의 후대로 자신을 내세운다. 일리 있다. 「My nigga」는 당시 갱스터 랩처럼 거칠고 「You and your friends」는 지 펑크(funk) 마냥 여유롭다. 웨스트 코스트 특유의 바이브가 느껴진다.

 

대부분 90 후반의 BPM으로 느긋한 드럼이다. 단조로운 리듬에 동글동글한 테마 멜로디가 떨어지고, 거친 베이스가 들어온다. 타겟이 이어폰보다 클럽 스피커라는 것 또한 놓쳐선 안 된다. 중간 중간 클랩 혹은 ‘헤이’ 샘플로 변주해준 뒤, 마무리로 고명 얹듯 Mustrd on a beat hoe를 외쳐주면 래칫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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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과 12년 겨울마다 각각 「Rack city」와 「I'm different」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세로 머스타드가 떠오른 것은 13년에 와이쥐(YG), 키드 잉크(Kid Ink)와 함께였다. 두 신인의 싱글 「My nigga」, 「Show me」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여러 아티스트들과 작업할 기회가 생겼다. 래칫 덕에 떠오른 신인으로 먼저 언급한 「You and your friends」에 훅을 부른 타이 달라 싸인(Ty dolla $ign)도 있다. 모두 캘리포니아 출신이다.   

 

2014년에도 「I don't fuck with you」, 「Post to be」 등으로 그는 뜨거웠다. 전년도와 달라진 건 다른 비트 메이커들의 래칫도 사랑받았다는 점. 대표적으로 빌보드 7주 연속 1위, 이기 아젤리아의 「Fancy」가 있다. 머스타드를 따라했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프로듀서 닉 낵(Nic Nac)의 경우는 다르다. 자신만의 색깔을 가미한 「Loyal」과 「Ayo」로 래칫의 범위를 넓혔다. 나쁘지 않은 레퍼런스였다. 「Fancy」의 프로듀싱 팀, 디 인비지블 멘(The Invisible Men)도 팝적인 요소들을 보태어 다시 래칫 싱글을 발표했으나 결과물, 「Pretty girls」는 예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선 AOMG의 그레이가 래칫 뮤직 대표주자다. 「자꾸 생각나」, 「하기나 해」부터 최근의 「몸매」까지, TK가 프로듀싱한 던 밀스의 「바람난 던밀스」도 그렇다. 갈수록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이 차용하면서 장르가 다채로워지고 있다. 그 와중에도 래칫 뮤직이 공유하는 것은 분명하다. 점과 점 사이가 선으로 이어져 보이는 착시현상처럼 노트들 가운데, 느긋한 그루브가 핵심이다.

 

2015/06 전민석(lego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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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적 색채와 에너지, 스트라빈스키 〈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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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20세기 음악의 싹을 틔운 사람은 클로드 드뷔시(1862~1918)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8년 전이었던 1910년에 한 러시아 청년이 파리에 진출해 <불새>(L‘oiseau de feu)라는 발레음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합니다. 드뷔시보다 스물 살 연하였던, 당시 28세의 청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였지요. 청년 시절의 그는, 특히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드뷔시의 인상주의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스트라빈스키도 훗날 “우리 세대의 음악가들은 드뷔시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하기도 했지요. ‘나’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우리 세대’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참 스트라빈스키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파리에 머물던 스물여덟 살의 스트라빈스키는 어느 날 드뷔시의 집을 방문해 환담을 나눴던 모양인데, 당시의 만남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드뷔시는 사진 왼편에 서 있고 스트라빈스키는 소파에 앉아 있습니다. 오른편의 커튼 사이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와 스트라빈스키의 손과 무릎을 비추고, 거실 바닥에 사각형의 햇살 무늬를 선명하게 새겨놓고 있습니다. 사진의 핵심은 ‘빛’일진대, 이렇게 빛을 잘 활용해 한 장의 멋진 사진을 만들어낸 그날의 ‘사진사’(?)는 누구였을까요? 재미있게도 에릭 사티(1866~1925)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날 드뷔시의 거실에서 20세기 초반의 ‘문제적 음악가’ 세 명이 모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드뷔시의 인상주의를 뛰어넘어 러시아적 색채와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훨씬 화려하고 근육질이지요. 스트라빈스키도 만년의 회고에서 자신이 지닌 러시아적 유전자에 대해 털어놓고 있습니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서 활약했던 음악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나이스가 쓴 스트라빈스키, 그 삶과 음악』(이석호 옮김, 포노)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서문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말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평생을 러시아어로 말하고 러시아어로 생각한, 체질적으로도 기질적으로도 러시아인이다. 어쩌면 내 음악은 그러한 러시아성을 명백히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배경과 숨은 본질에는 러시아성이 자리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게다가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유명한 성악가였던 표트르 스트라빈스키(1843~1902)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을 대표하는 베이스바리톤이었지요. 덕분에 어린 스트라빈스키는 아주 일찌감치 오페라와 발레에 흠뻑 빠질 수 있었습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도 종종 공연했지만 주요 레퍼토리는 대개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이었습니다. 미하일 글린카, 차이코프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들의 음악이 일찌감치 스트라빈스키의 몸속에 저장됐던 것이지요.
 
물론 그것만이 아닙니다. 드뷔시의 인상주의적 색채감과는 맛이 다른, 스트라빈스키의 좀더 강렬한 색채감은 스승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서 비롯하는 측면이 적지 않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른바 ‘러시아 5인조’의 일원이었지요. ‘러시아 5인조’에 대해서는 제가 차이코프스키를 언급하는 글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단행본 <더 클래식 - 슈베르트에서 브람스까지>(2015, 돌베개)에도 그 내용이 등장하지요. 이 그룹에 속한 다섯 음악가의 이름은 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입니다. 그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던 1868년에 음악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가 ‘모구차야 구치카’(강력한 소수파)라는 이름을 붙여줬지요. 훗날 ‘러시아 5인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서구와 다른 러시아적 음악을 지향했던 까닭에 ‘국민음악파’라고도 불립니다.
 
원래 직업이 해군장교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 5인조’ 중에서도 관현악법의 대가로 유명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서구에서 유입된 음악이론들, 이를테면 화성학이나 대위법 등의 전통에 대해 불편해했던 것과 달리,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비록 서구에서 왔다 하더라도 음악적 기초에 대한 학습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러시아 5인조’ 중에서 유일하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를 지냈고, 관현악법 교재를 직접 집필해서 많은 학생들이 그 책으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음악은 <스페인 기상곡>이나 <세헤라자데> 같은 곡들이지요. 독일ㆍ오스트리아 음악, 또 프랑스 음악 등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이국적인 정취와 화려한 색채감이 두드러지는 곡들입니다.
 
말하자면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에서 가장 관현악에 능통했던 음악가를 스승으로 만났던 것이지요. 스트라빈스키는 아버지 표트르의 강요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대에 진학했지만 그렇다고 음악에 대한 공부를 접지는 않았습니다. 법대를 다니면서도 ‘음악 과외’를 했는데, <봄의 제전>을 설명하는 5월 26일자 <내 인생의 클래식 101>에서도 썼듯이 당시의 선생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였던 표도르 아키멘코(1876~1945)였습니다. 또 바실리 칼라파티(1869~1942)에게서도 음악을 배웠는데 그도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운 제자였습니다.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인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처음으로 만난 때는 1902년이었습니다. 법학대학 동기였던 블라디미르가 바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만남이 이뤄졌던 것이지요. 한데 이 해는 암으로 투병하던 아버지 표트르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였는지 스트라빈스키는 어린 시절부터 흠모했던 대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마치 아버지처럼 따르면서 음악을 공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1908년 봄에 그 스승마저 타계하고 나자 스트라빈스키는 매우 애통해했다고 합니다.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거기까지가 스트라빈스키의 ‘수업기’라고 해야겠습니다. 이 글의 맨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 파리행은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행보를 뜻합니다. 물론 그것은 당대의 공연 흥행사였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의 예민한 촉수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의 초기작이었던 <불꽃놀이>(Feu d‘artifice)와 <환상적 스케르초>를 초연하는데, 그것을 마침 디아길레프가 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디아길레프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인 어느 젊은 작곡가의 이야기를 이미 전해 들었겠지요. 그의 음악을 눈과 귀로 확인한 디아길레프는 파리에서 공연할 발레 <불새>의 음악을 스트라빈스키에게 의뢰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스트라빈스키에게 작곡을 맡겼던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음악사에서 이름이 좀 희미해진 두 명의 러시아 작곡가(아나톨리 리아도프, 니콜라이 체레프닌)에게 의뢰했으나 작곡이 제대로 진행되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디아길레프의 머리에 전구처럼 불이 켜졌던 작곡가가 ‘아하! 스트라빈스키’였던 것이지요. 공연을 불과 6개월쯤 남긴 상태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작곡에 몰두합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기한 안에 작곡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이 중요한 작품에서 당대의 대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기뻤다”라고 회고합니다. 

 

1910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발레 <불새>((L‘oiseau de feu)는 큰 성공을 거둡니다. 미하일 포킨(1880~1942)이 대본과 안무를 맡은 발레 <불새>는 러시아의 신화와 민담들을 뒤섞어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지요. 간단히 말해 왕자 이반이 불사의 마왕 카슈체이의 정원에서 불새의 도움을 받아 마왕을 죽이고 마법에 갇혀 있던 공주를 구출해 아내로 맞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발레의 성공으로 인해,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작곡가가 될 수 있었지요. 그는 1911년, 1919년, 1945년에 발레를 떼어낸 관현악 모음곡으로 이 음악을 손질합니다. 그래서<불새>는 전막 발레 외에도 세 개의 모음곡 버전으로 존재하지요. 지휘자마다 각자의 기호에 따라 그중 하나를 선택해 연주하곤 합니다. 관현악 모음곡으로 출판된 것 중에서는 1919년 버전이 자주 연주되는 편입니다. 

 

음악은 한마디로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구현된, 러시아풍의 낭만주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지요. 마법의 걸린 밤의 정경을 묘사하는 음산한 서주에서부터 슬라브적인 느낌을 풍깁니다. 러시아에서 초자연적인 판타지를 오페라와 발레의 소재로 쓰는 일은 서유럽보다 흔했지요. 스트라빈스키도 <불새>를 작곡하면서 앞 세대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었나 봅니다.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작곡한 두 편의 오페라, <불사의 카슈체이>와 <황금닭>에서 영향을 받았음직한 음형들과 기악적 테크닉이 자주 등장합니다. 또 러시아 민요의 선율들도 차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발레의 1막에 등장하는 이반 왕자를 묘사하는 선율이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이 파리의 청중을 의식한 듯한, 인상주의풍의 선율도 간간히 튀어나옵니다. 그렇게 스트라빈스키는 기존의 음악적 재료들을 자신의 오선지 속으로 끌어들여, 다른 이들은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로 화려한 관현악의 향연을 펼칩니다.

 

▶오자와 세이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1983년/Warner Music


전막 발레 음악을 연주한 녹음이다. 올해 80세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는 몇해 전 하루키와의 대담집이 출간되면서 새삼 그 온후하고 개방적인 인간성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정작 지휘자로서는 국내에서 그다지 애청되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새>와 <봄의 제전> 등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지휘자로서의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레퍼토리다. 특히 보스턴 심포니를 이끌고 있는 1983년 녹음은 날카로운 리듬감과 화려한 색채감을 잘 살려낸 연주로 호평받는다.


▶피에르 불레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1992년/DG


지난 번 <봄의 제전>을 언급하면서 소개했던 피에르 불레즈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음반은 어느새 국내 매장 품절이다. 이번에 추천하는 시카고 심포니와의 <불새> 녹음은 다행히도 매장 물량에 여유가 있어 보인다. 이 녹음도 발레 버전이다. 2장의 CD에 <불새>와 <페트루슈카>를 함께 담아 가격적으로 유리해 보인다. 명확하고 분석적인 해석에 기반을 뒀지만, 그럼에도 음악적 흥취를 잘 전해주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9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음악을 지키고 있는 거장 불레즈가 67세에 지휘봉을 들었던 녹음이다. 지휘자의 원숙함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음악을 대하는 어떤 정신성을 느끼게 한다.

 

 

[관련 기사]

- 사랑에 미친 예술가의 환상적인 세계
-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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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후진 분위기를 경감시키는 감성 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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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몇 년 전 사스(SARS)가 진상칠 때 하필 유럽 여행 중이었다. 사스는 중국 광둥성에서 시작해 인근의 홍콩, 대만, 싱가폴 등의 아시아에 집중적인 피해자를 낳으며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진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이었다. 유럽 대도시 차이나타운마다 갑자기 파리가 날릴 지경으로 중국인 기피 현상이 벌어졌다. 나는 중국에 가본 적도 없었는데 유럽 애들은 동양사람 국적을 워낙 구분 못해 순조롭게 여행 다니기 곤란했다. 지하철 타면 사람들이 슬금슬금 다른 칸으로 이동하고, 술집에 들어가면 대놓고 나를 째려보며 나가버리기도 했다. 페스트로 몇 천만이 죽은 역사 때문일까. 동양인이면 일단 보균자로 보는 분위기였다. 나는 사스가 원망스러워 숙소에 돌아오면 냇킹콜(Nat King Cole)의 퀴사스 퀴사스 퀴사스를 들으며 쓸쓸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때 우리나라엔 감염자가 거의 없었다. 마늘과 김치 면역력 세이브 설도 있었지만 다꽝국 일본엔 아예 감염자가 없었으니 낭설에 가깝고, 당시 정부가 초기에 선발 등판해서 잽싸게 호투한 게 컸다고 본다. 그렇게 멀쩡하고 당당한 청정국 선수 신분으로도 어깨 펴고 여행할 수 없다는 게 좀 억울하긴 했다. ‘중국인 아님’ 이라 적힌 모자라도 쓰고 싶었지만 유럽에서 그런 걸 어디서 사나. 할 수 없이 사람들 많은 데 피해 다니고, 혹여나 사래가 들려 기침이라도 할까봐 밖에선 물과 음식도 고양이처럼 조심조심 삼켰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파리의 어느 지하철역 벤치에 앉은 늙은 주정뱅이한테 결국 싫은 소리를 들었다.  


 “너네 나라로 썩 꺼지지 못해? 이 바이러스야!” 


듣자마자 빡쳐서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킬까 했지만 웃어 넘겼다. 나는 멀쩡한 선진국가의 성숙한 여행자라는 자부심으로 오해를 이해하는 태도를 보여야 옳았다.
 
또 다른 심각한 호흡기 증후군인 메르스 사태로 메롱인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완전 다르다. 보건 자부심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여행 가고 싶어도 쫄려서 못 가는 신세가 되었다. 사스 때와는 달리 우리가 세계 2위 감염국이자 민폐국으로 찍혔는데 나가서 무슨 푸대접을 받을지 안 봐도 HD화질인 것이다. 역병이 도는 비극도 서러운데 국제적 오명으로 쪽팔리기까지 해서 짜증 두 배다. 마침 딱 돈이 없어 어차피 아무데도 못 나가니까 짜증 세 배. 세월호 때도 그러더니 초기 어눌한 정부 대처가 사태를 키웠음에도 반성보단 엄포, 대책보단 쇼를 더 선호하는 구태에 짜증 네 배.

 

 아아 짜증날 땐 짜장면은 옛말이고, 나는 크리스 가르노(Chris Garneau)를 듣기로 한다. 오늘의 주제곡 <릴리프Relief>를 듣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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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달달하고 우아하고 건조하면서도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이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을 왜 짜증날 때 듣느냐면, 그의 목소리엔 짜증기라곤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곡의 긴장이 가장 고조되는 부분에서도 성질내거나, 울분을 토로하지 않고 감정을 꾹꾹 다독이는 성숙한 뉘앙스를 아슬아슬 유지하는 게 아주 딱 그만이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담백한 곡물빵에 저염 버터를 부드럽게 발라놓은 느낌과 유사한데 그게 또 전혀 전형적이거나 촌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 수수한 빵을 감각적 인테리어의 스카이라운지 바에서 예쁜 접시에 플레이팅 해놓고 은제 식기로 살짝살짝 잘라 먹는 분위기다. 하나 더, 그런 고급스런 느낌에 상반될 정도로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약한 바이브레이션 발성이 음절 끝부분마다 적절하게 섞여있는 게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크리스 가르노 좋아하시는 분은 그의 목소리 간지를 작가라는 인간이 요렇게 밖에 묘사 못하나 싶겠지만, 아무튼 그러하다.

 

 

크리스 가르노는 이로운 전염성을 가진 감성 바이러스다. 아니 ‘감성 백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나른하고 차분한 음색을 들으면 강력한 항체가 형성되면서 몸 안의 짜증 바이러스들이 쫓겨 나가고 만다. 그야말로 속이 끓어 콧김이 나온다 싶을 때 들으면 특효가 있는 음악인 것이다. 


추어탕 집에 붙어있는 ‘미꾸라지의 효능’ 같은 촌스런 안내문처럼 음악이 꼭 무슨 효능을 가져야 한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이 음악 릴리프(Relief)는 제목 그대로 안도, 안심, (통증, 불안 등의)경감, 완화, 등을 선사한다. 지금 메르스 사태를 한 달 넘게 겪는 우리들에게 사뭇 필요한 음악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최근에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다 2차 노가리집으로 가는 길에 어느 뮤직 카페 간판을 보고 혹해서 들어갔는데 오디오 장비가 참 좋고 시디가 만 오천 장 있는 곳이 얻어걸렸다. 오디오 쪽엔 문외한이지만 스피커도 굉장히 비싼 거고 앰프도 끝내주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보유한 음반들은 장당 만원씩만 쳐도 일억 오천 아닌가 싶어 무릎이 떨렸다. 그래선지 맥주도 몹시 비쌌지만 비싼 스피커가 내는 훌륭한 음색은 돈이 비싸다다는 느낌을 깨끗이 삭제해버렸다. 즉각 크리스 가르노를 신청했더니 바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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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서 라이브를 감상하는 것 같은 현장감 그 자체였다. 우울해서 외출도 안 하고 집에서 혼자 술 마시며 컴퓨터 스피커로 음악 듣고 산 게슴츠레한 내 신세를 걷어차며 꾸짖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의 향연이었다. 그런 멋진 시스템을 가진 카페에서 음악을 감상하자 내 두뇌 속의 구질구질한 공기들이 시원하게 환기되며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상업적인 음악 말고 나머지는 찬밥 취급받는 천박한 사회 분위기에서 망하기 딱 좋은 업종인 뮤직 카페가 깔끔한 문화적 공간으로 강남 한복판에 아직도 건재 하는 게 몹시 반가웠다. 손님이라곤 우리 일행밖에 없었지만 고음질로 듣고 싶었던 이런저런 신청곡들을 써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묵묵히 음반을 찾아 틀어주는 중년의 사장님이 정말 멋진 존재로 보였다. 
 
거기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전반적으로 싸구려 후진국이 되어버린 것 같은 분위기가 요즘 들어 더욱 염려되는데, 짜증만 내고 있으면 변하는 게 없을 거고, 환기 시키듯 어떻게든 개인이라도 감각적으로 멋있게 살며 자기 주변을 점점 괜찮은 공기로 감염시켜 나가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감각의 감염이 자꾸 확장된다면 후진을 멈출 섬세한 사회적 항체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음악이라는 아름다운 백신이 그런 태도를 도와주지 않을까. 꽃청년 크리스 가르노의 목소리를 통해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크리스 가르노의 세 번째 내한 공연때 어떤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나는 나를 슬픈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익살스럽고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라서 심각해지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정도다. (출처- Elle 인터뷰)

 

그 말을 통해 딱 하나 우려되던 점도 해소되었다. 엘리엇 스미스 때문에 실은 조금 걱정했는데 크리스 가르노라면 정말이지 하루 종일 들으면서 왕창 감염되더라도 우울증 같은 부작용이 안 생길 것 같다. 아아 기분이 후질 때마다 마음껏 들어야겠다.

 

 

[관련 기사]

- 지하에서 우주로, 비틀즈 〈Across the uni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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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데이비드 레터맨 쇼 베스트 라이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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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라이브 영상을 찾아 유튜브를 열람하는 음악 애호가들이라면 데이비드 레터맨의 토크쇼를 아실 테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뮤지컬 게스트의 라이브 장면은 < 레이트 쇼 윗 데이비드 레터맨(Late Show With David Letterman) >의 명물이었다. 1982년부터 33년 동안 미국의 안방을 지켜온 이 토크쇼를 통해 수많은 이들이 얼굴을 알렸고, 대중과 호흡하였으며 길이 남을 역사의 기록을 남겼다. 지난 5월 20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초호화 게스트를 끝으로 화려한 막을 내린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서 한 번 쯤은 봤을 저명한 베스트 라이브 클립 12선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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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 Radio Free Europe(1983)

 

인디 록의 신화이자 얼터너티브의 신기원을 열어젖힌 R.E.M도 이 프로그램으로 메이저 TV 데뷔를 이뤘다. 세계를 점령한 마이클 잭슨의 < Thriller >도 제치고 롤링 스톤 선정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된 < Murmur >의 시절이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풍성한 더벅머리의 마이클 스타이프와 친구들은 메인 싱글 「Radio free europe」과 무제의 한 곡을 열창했다. 그 노래는 다음 앨범 < Recokning >의 대표곡 「So. Central rain」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tjr6P9Cep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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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zer - Say ain't it so(1995)

 

네오 펑크의 한 축을 이룬 밴드 위저도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서 기념비적 라이브를 선보였다. 1995년 뮤지컬 게스트로 초빙된 이들은 데뷔 앨범< Weezer >의 마지막 싱글 「Say ain't it so」를 완벽히 선보였다. '완벽'이라는 표현은 사실 실력보단 영상의 분위기 때문이다. 기타리스트 리버스 쿼모는 차분한 데 반해 전(前) 베이시스트 맷 샤프와 브라이언 벨은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미쳐 날뛰는 모습이 곡의 모순적 내용과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8RFTB5vgV_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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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stie Boys - Ch-check it out(2004)

 

1992년 '악동 밴드'로 이들을 소개했던 데이비드 레터맨은 2004년의 재회에서 깜짝 놀랐을 것이다. 지하철역에서부터 걸어 나온 비스티 보이즈는 그대로 브로드웨이를 가로지르며 녹화장인 에드 설리번 극장까지 정신없는 랩 폭격을 퍼부었다. 이 모든 과정이 물고기 눈(Fish eye) 렌즈를 통해 생중계로 안방에 송출되었다. 6년 만의 컴백 싱글 「Ch-check it out」의 홍보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Z2ZHkBzmH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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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McCartney - Get back(2005)

 

앞서 '에드 설리반 극장'에 흠칫했다면 당신은 이 라이브를 꼭 챙겨야 한다. 로큰롤의 역사를 바꾼 비틀즈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출발지가 바로 이 극장, 1964년 < 에드 설리번 쇼 >니 말이다. 비틀즈 시대의 개막을 알린 지 꼭 44년인 2009년, 네 명에서 홀로 돌아온 폴 매카트니는 극장의 간판 옥상에서 밴드와 함께 화려한 라이브를 펼쳤다. 비틀즈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 에드 설리번 쇼 >와 비틀즈 최후의 옥상 공연을 아우른 이 공연은 폴 매카트니 커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았다. (덤으로 폴 매카트니는 이날도 6곡을 소화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AlbmZ6qf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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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atles Medley (Get back / And I love her / Drive my car 外)

 

비틀즈의 미국 점령 교두보로써 데이비드 레터맨 쇼는 2014년 '비틀즈 주간'을 선포한다. 이 기간에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비틀즈의 명곡을 자신의 스타일로 커버하며 색다른 기념의 방식을 선보였다. 이 독특한 비틀즈-커버 트리뷰트에서 레니 크라비츠의 「Get back」, 데인저 마우스의 브로큰 벨스와 링고 스타의 「And I love her」, 로린 힐의 「Something」, 플레이밍 립스와 션 레논의 「Lucy in the sky with a diamonds」, 스팅과 모델 아이비 레반의 「Drive my car」를 들을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jTW6ZXdC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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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 Dylan - Jokerman(1984)

 

'신비의 인물'처럼 여겨지는 밥 딜런도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는 자주 얼굴을 비쳤다. 1983년의 라이브는 밥 딜런의 커리어 중에서도 흔치 않은 1983년의 < Infidels > 수록곡 공연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기타 장인 마크 노플러가 프로듀싱한 이 앨범에서 밥 딜런은 「License to kill」과 「Jockerman」을 선택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뮤지컬 게스트로 참여한 그는 5월 20일 최후의 방송에도 새 앨범의 싱글 「The night we called It a day」로 자리를 빛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P85Uc6H79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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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rown (There was a time / Sex machine / Cold sweat) (1982)

 

펑크/소울의 왕 제임스 브라운의 1982년 데이비드 레터맨 쇼 라이브는 쇼의 역사와 제임스 브라운의 TV 퍼포먼스를 통틀어 가장 화끈한 공연이다. 「There was a time」, 「Sex machine」, 「Cold sweat」 메들리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임스 브라운이 관객들에게 외친다. '모두 일어나세요!'. 이후 10분은 말 그대로 광란의 현장이다. 가정불화와 사생활 문제로 침체기를 맞기 전, 최후의 위대한 라이브 공연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4m_dv5Z7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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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head - Karma police (1997)

 

1997년 '브릿팝을 죽인'< OK Computer >는 발매 동시에 평단의 극찬을 받았지만, 미국에서 라디오헤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밴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라디오헤드는 「Creep」이었고 심지어 어떤 평단은 '대학가의 감상적 음악'이라며 이들을 격하하기까지 했다. 1997년 뉴욕에 상륙한 이들이 「Karma police」를 완벽에 가까운 라이브로 선보이고 나서야 미국인들은 「Creep」보다 넓은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후 기세를 몰아 다음 앨범< Kid A >는 당당히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https://www.youtube.com/watch?v=NlQhgdVsuI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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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ren Zevon (2002)

 

시카고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워렌 제번은 재치 있는 가사와 독특한 작법으로 주목받았다. 1978년 앨범 < Excitable Boy >가 성공의 물꼬를 텄고, 플리트우드 맥의 존 맥비와 믹 플리트우드가 힘을 보탠 「Werewolves of london」으로 알려졌다. 데이비드 레터맨의 가장 절친한 뮤지션 동료였던 그는 쇼의 단골로 참여해온 터였다. 그러던 2002년 10월 30일, 그 날의 데이비드 레터맨 쇼는 워렌 제번 단독 게스트로 진행되었고 밴드는 「I'll sleep when I'm dead」를 오프닝 송으로 연주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방청객들에게 'Enjoy every sandwich'라는 말을 남기고 워렌 제번은 11개월 후 눈을 감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MqWqyjUsC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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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 - The Boys(2012)

 

데이비드 레터맨 유일의 한국인 뮤지컬 게스트는 소녀시대다. 테디 라일리가 프로듀싱을 맡으며 해외진출의 야심을 드러낸 「The boys」로 2012년 1월 31일 전파를 탔다. 저명한 토크쇼 출연 사실이 한국에서는 큰 화제였지만 정작 기대한 만큼의 해외 실적은 없었다. 편곡된 버전의 「The boys」와 그 공연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지만 어쨋거나 데이비드 레터맨은 '감사합니다'로 이들을 환영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xa5-P0_u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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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ture Islands - Seasons (Waiting for you) (2014)

 

인디 밴드 퓨처 아일랜드는 데이비드 레터맨 쇼 출연이 커리어의 일대 전기가 된 경우다. 볼티모어 출신의 이들은 몇 장의 앨범을 낸 상태였지만 거의 무명이었다. 2014년 3월의 「Seasons」 라이브가 광명을 안겨줬다. 리드 싱어 사무엘 헤링의 애절한 목소리와 깜짝 놀랄만한 절규, 아저씨 댄스는 곧바로 다음날 인터넷의 히트 영상이 되었다. 유튜브로 이 라이브를 본 사람들은 400만이 넘었고, 그 해 < 피치포크 >는 「Seasons」를 올해의 노래로 선정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Ee4bfu_t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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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 Fighters - Everlong(2000)

 

푸 파이터즈의 2000년 출연은 데이브 그롤의 심장 수술 이후 최초의 라이브였다. 데이비드 레터맨이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가장 좋아하는 곡(My favorite band's favorite song)'이라 극찬한 「Everlong」은 밴드의 두번째 앨범 < The Colour And Shape >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15년 후 5월 20일 데이비드 레터맨 쇼의 마지막 노래가 되었다. 33년 역사의 하이라이트 영상과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불멸의 심야 토크쇼는 '영원(Everlong)'의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https://www.youtube.com/watch?v=anjGYjgIml4


“The only thing I'll ever ask of you
You've got to promise not to stop when I say when”

 

2015/06 김도헌(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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