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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6 Gnossien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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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6개의 그노시엔느>(6 Gnossiennes)

 

지난 회에 에릭 사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사티가 젊은 시절에 떠돌았던 몽마르트르 언덕과 캬바레 ‘검은 고양이’, 또 사티의 어린 시절과 그의 음악에 담긴 ‘중세적 명상’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함께 들었던 곡은 사티의 초기작이었던 <3개의 짐노페디>였지요. 사실, 사티에 대한 언급은 그렇게 한 편의 글로 마무리할까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거론해야 할 음악가, 또 들어야 할 음악이 많아서였습니다. 한데 뭔가 영 아쉽고 찜찜했습니다. 사티는 생존했던 시절보다 20세기 중후반 이후에 그 존재가 더욱 빛나기 시작했고, 피아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레퍼토리는 아니지만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물론 대중이 좋아하는 곡은 사티의 음악 중에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칼럼의 목적은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보편적인 곡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는 것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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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염두를 굴리던 차에 어젯밤 TV에서 사티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물론 우연의 일치였겠습니다만, 어느 CF에선가 아주 귀에 익은 사티의 선율, <6개의 그노시엔느>(6 Gnossiennes)중에서 첫곡인 ‘Lent’(느리게)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애청곡들을 한 곡씩 짚어나가겠다는 이 지면에서<6개의 그노시엔느>를 빼놓고 가긴 어렵습니다. 이 곡은 앞서 들었던 <3개의 짐노페디> 직후에 작곡됐습니다. 처음 출판했을 때는 <3개의 그노시엔느>였지만 사티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전기 작가였던 로베르 카비(Robert Caby, 1905~1992)가 3곡을 더 출판해 지금은<6개의 그노시엔느>로 전해집니다. 작곡 시기는 1889년부터 1897년까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 곡도 앞서 들었던<3개의 짐노페디>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이고 중세적인 명상, 어찌 보자면 뉴 에이지 풍의 분위기가 짙은 음악입니다.

 

오늘은 지난 회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사티의 음악적 개성에 대해 좀더 얘기하고 싶습니다. 일단 <6개의 그노시엔느>의 각 곡 머리에 사티가 붙여 놓은 지시어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3?4곡에는 ‘Lent’라고 적혀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느리게’라는 뜻이지요. 한데 2곡에는 ‘Avec etonnement’(놀라움을 가지고)라는 독특한 지시어가 놓여 있습니다. 5곡의 ‘Modere’(절제해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6곡의 머리에 놓여 있는 ‘Avec conviction et avec une tristesse rigoureuse’(확신과 절대적 슬픔을 가지고)는 또 한번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사실 이 정도는 약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곡 중간의 지시어들은 더 특이합니다.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 같은, 어찌 보자면 해괴망측한 언어들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렇듯이 사티는 당시까지만 해도 악보에서 주로 사용하던 이탈리아어를 완전히 배제한 채 엉뚱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프랑스어를 사용합니다. 그런 경향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강해집니다.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 다행히 담배를 피우지 않는군’ 같은 언어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아예 곡 자체의 제목도 점점 도발적으로 짓기 시작합니다. 1910년대에 들어서면 ‘뻔뻔함’ ‘유쾌한 절망’ ‘바싹 마른 태아’ ‘개를 위한 엉성한 전주곡’ 같은 제목의 곡들이 태어납니다. 그밖에도 사티의 특이한 언어 사용법은 좁은 지면에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물론 사티가 공연히 장난을 친 것은 아니겠지요. 악보에 등장하는 그의 엉뚱하고 파격적인 언어들은 ‘의미있는 장난’이라고 해석할 만합니다. 당시의 음악적 주류, 혹은 기존의 고정관념에 대한 냉소와 풍자라고 해야 할 겁니다. 요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도발적인 현대성을 느끼게 할 정도입니다. 

 

화제에서 좀 벗어나는 얘기입니다만 사티는 개(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서른 두 살의 사티는 파리 근교의 빈민굴 아르퀘이유로 이사해 5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칩거하는데, 일부러 집 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았는지 아니면 사티를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는 방문객도 일체 없었다고 합니다. 유일한 가족(?)이 강아지들이었다고 하지요. 사티는 길거리의 유기견들을 집으로 데려와 주린 배를 채워주고 함께 놀았습니다. 친구인 시인 장 콕토에겐 이렇게 말했지요. “난 개들을 위한 음악을 쓸 거라네.”

 

자, 사티의 음악적 개성을 좀더 살펴보기 위해서는 1893년에 작곡한 <벡사시옹>(Vexations, 짜증)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보는 딱 한 페이지에 불과한데, ‘이 모티브를 진지하고 부담스러운 자세로 840번 반복하시오’라는 지시가 맨 윗자리에 적혀 있습니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해괴한 음악’이었습니다. 물론 아무도 악보의 지시대로 완주하지 못했지요. 대략 18시간이 걸리는 연주를 감내할 피아니스트도 없었거니와, 그 긴 시간 동안 단순하고 반복적인 선율에 귀를 기울일 청중도 없었던 까닭입니다. 처음으로 그 곡이 연주된 해는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인 1963년이었지요. 누가 했을까요? 이 곡을 감히 무대에서 연주하려는 생각을 품었던 이는 역시 존 케이지(1912~1992)였습니다.

 

물론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18시간을 연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몇 명인지 확인하긴 어려우나 그날 연주회장에서는 꽤 여러 명의 피아니스트들이 ‘릴레이 연주’로 840회의 반복을 이어갔고, 나름대로 사티의 작곡 의도가 그럴싸하게 재현됐다고 합니다. 예컨대 어떤 피아니스트는 느리게 또 어떤 피아니스트는 빠르게 연주했고, 부드럽게 연주하면서 나름의 선율을 구사하려고 애쓰는 피아니스트가 있었는가 하면, 또 어떤 피아니스트는 사티가 적어 놓은 음표들을 아주 기계적으로 재현했다고 합니다. 물론 ‘삑사리’라고 불리는 실수들도 간간이 튀어나왔겠지요. 다시 말해 악보는 똑같았어도 피아니스트마다 각양각색의 연주가 펼쳐졌다고 전해집니다. 5달러를 내고 연주회장에 들어선 청중의 태도도 가지각색이었겠지요. 먹고 싶은 사람은 먹고, 자고 싶은 사람은 잤습니다. 책을 읽거나 친구와 잡담을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연주회 중간에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지요. ‘우연성’과 ‘일상성’의 옹호자인 존 케이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당히 짜릿한 연주회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 다른 장면을 떠올려보지요. 1920년 3월 8일, 파리의 바르바장즈 갤러리(Barbazanges Gallery)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막스 자콥(1876∼1944)의 연극을 공연하던 중간에 사티가 작곡한 <가구음악>(Musique d’ameublement)이 초연됐습니다. 이 곡도 <벡사시옹>처럼 짧은 프레이즈를 계속 반복하는 음악인데, 말하자면 연극의 중간휴식을 위한 ‘배경음악’이었습니다. 한데 그날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관객들은 음악이 흐르는 동안 연주에 절대 신경 쓰지 말 것. 걸어 다니고 이야기하고 음료수를 마실 것.’

 

하지만 사티의 의도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연주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관객에게도 그 ‘지시’는 이상하고 낯설었겠지요. 연주자들은 단순한 프레이즈를 계속 반복하는 행위를 어색해했고 청중은 제자리에 꼿꼿이 앉아 음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결국 사티는 화를 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연주회장(갤러리의 전시공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연주자들에게 “계속 연주해”라고 소리쳤고, 관객에게는 “음악을 듣지 마시오!”라고 외쳤다고 하지요.

 

그것은 일종의 ‘반(反)예술 선언’이었습니다. <벡사시옹>도 그렇고 <가구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티에게 예술은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여야 했습니다. 예술가들의 과잉된 자의식, 혹은 청중이나 관객이 예술을 경배하는 태도, 그 모든 것을 사티는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물론 20세기로 접어든 그 시대에, 사티와 유사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동료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또 있었지요. 예컨대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와 시인 장 콕토, 화가 파블로 피카소, 사진작가 만 레이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시인 장 콕토는 발언은 그들의 예술관을 짐작케 합니다. 콕토는 이렇게 말하지요.“구름, 파도, 물의 요정, 밤의 향기를 이제 집어치우자. 우리는 지상에 뿌리내린 일상의 음악을 필요로 한다.”화가 피카소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남겼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피카소는 사티가 1917년 작곡했던 발레음악 <퍼레이드>의 무대미술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내 그림에 끌어들인 대상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물건이다. 물주전자, 맥주컵, 담배 파이프, 쌈지담배 한 꾸러미, 그릇, 갈대로 엮은 방석이 놓여 있는 부엌 의자, 늘 대하는 식탁 등. 나는 그 누구도 듣지 못했거나 변형시킬 수는 더더욱 없는 희귀한 대상을 얻어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중략) 예를 들면 나는 루이 15세의 안락의자를 절대로 그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대상이지 ‘누구나’를 위한 대상은 아니다.”

 

사티가 추구했던 ‘예술의 일상성’은 기존의 음악적 구조와 장식을 내팽개친 ‘앙상한 음악’에 대한 집착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기존의 음악적 주류들, 예컨대 바그너풍의 ‘중후장대함’이나 드뷔시풍의 ‘모호함’에 대한 반발이자 풍자였지요. 그렇게 사티는 당대의 주류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갔던 음악가였습니다.

 

알콜 중독으로 인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사티는 극음악과 성악곡들, 피아노 독주 외의 기악곡들도 여럿 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주로 애청되는 곡들은 비교적 초기의 피아노곡들입니다. <4개의 오지브> <3개의 사랑방드> <3개의 짐노페디> <6개의 그노시엔느> 등입니다. 중세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연상시키는, 신비하면서도 단순한 선율이 반복적으로 펼쳐지지요. 명상적이기도 하고, 어찌 보자면 약간 몽환적이기도 한 음악들입니다.

 

<6개의 그노시엔느>에 등장하는 ‘그노시엔느’는 그리스 남쪽의 섬 크레타, 혹은 ‘크레타 사람의 춤’을 뜻합니다. 아마 듣기에 어려운 곡은 없을 겁니다. 1곡 ‘Lent’는 TV CF에서까지 사용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곡입니다. 2곡 ‘놀라움을 가지고’도 사실 놀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앞 곡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나머지 곡들도 그렇습니다. 4곡에서 왼손으로 짚어나가는 저음이 살짝 무거워지는 듯하다가 5곡에서는 좀더 환한 느낌으로 돌아옵니다. 사티는 6곡에서 ‘절대적 슬픔’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밑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슬픔은 아닙니다.<6개의 그노시엔느>는 침묵과 음악의 중간쯤에서,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드러냅니다.

 

 

 


치콜리니.jpg▶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1966년/Warner Classics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도 치콜리니(1925~)는 1960년대와 1980년대, 두차례에 걸쳐 사티의 피아노곡을 레코딩했다. 첫번째는 아날로그, 두번째는 디지털 녹음이다. 연주 스타일은 밝고 청명한 편이다. 사티 음악의 명상성보다는 풍자성에 좀 더 방점을 찍는 연주로 들린다. 아울러 무뚝뚝할 수도 있는 사티의 음악에 생동감 있는 표정을 부여한 연주라고도 할 수 있다. 디지털 녹음은 5장의 CD 전집으로, 아날로그 녹음은 CD 2장짜리 음반으로 나와 있는데, 이 지면에서는 대중적인 곡들을 주로 수록한 후자를 권한다. <6개의 그노시엔느>는 7~12번 트랙이다.   

 

 

 

 

 

로제.jpg▶파스칼 로제(Pascal Roge)/1983년/Decca


현재 국내 매장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음반이다. 파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로제(1951~)는 드뷔시와 라벨을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녹음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사티의 음악을 연주한 음반도 호평을 받는다. 앞서 언급한 치콜리니와 달리 약간 드라이한, 좀 더 절제돼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딱딱하고 메마른 연주는 아니다. 섬세한 뉘앙스가 살아 있는 시정 넘치는 연주라고 평할 만하다. 음반 표지에 후안 미로의 그림 ‘어릿광대의 사육제’가 인쇄돼 있다. <3개의 짐노페디>를 첫 곡으로 사티의 주요 곡들을 선곡했다. 사티의 음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샹송풍의 ‘Je te veux’는 두번째 곡으로 담겼다. <6개의 그노시엔느>는 10~15번 트랙이다. 사티의 음반을 처음 구입하는 이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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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걱정해봤자 소용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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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되고 몇 주가 훌렁 지나버렸다. 그동안 새로 시작한 건 없고 걱정만 늘었다. 작년엔 매너리즘에 빠져 못 웃겼는데 올해는 어떻게 웃길까, 어우 올해는 또 뭘 해서 먹고 사나, 과연 다시 연애 할 수 있을까 없을까, 금연을 해버리면 확 웃길까? 왜 나는 웃기려는 강박에 시달리며 사는 걸까 등등 참으로 중대하고 막중한 고뇌들이 머리통을 무겁게 만들었다.

 

 문득 전인권 아저씨의 폭탄파마 머리가 생각났다. 왜 그렇게 연상되는지 모르겠지만 <걱정 말아요 그대>를 갑자기 듣고 싶었다. 음악을 검색하자 작년의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필, 곽진언 씨가 다시 부른 버전이 먼저 나왔다. 듣다보니 너무 좋아 한참 따라 흥얼거렸다. 그리고 홀린 듯 전인권 아저씨의 오리지널 넘버를 다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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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음악이 없는 삶은 되게 지루하다. 너무 평면적이라 그럴 것이다. 길은 길이고, 운전은 그냥 이동이고 카페는 목을 축이는 데고 로또 판매점은 걸리지 않을 종이쪼가리를 파는 곳이며 식사는 에너지를 보충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음악이 거기 끼어들면 입체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현상들의 의미가 확장된다.

 

 길은 시가 되고 드라이브는 이벤트가 되며 카페는 이야기와 향기가 되며, 로또 판매점은 꿈을 파는 상점이 되며 식사는 쾌락이 된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세상과 내가 단절되는 게 아니라 음악적 감각이 더해지며 아름답게 쩍 벌어지는 것이다. 


 <걱정 말아요 그대>를 들으니 내 쓸데없는 걱정들 또한 새해부터 마치 사색적인 태도를 취하는 걸로 멋져 보였다.

 나는 아직 베트남이다. 베트맨이면 돈 걱정 안 해서 참 좋겠는데 그냥 베트남이다. 슬슬 여비가 떨어져 가니 걱정이 많다. 내 숙박비 예산(하루 만 원)으로는 정말이지 형편없는 곳뿐이었고 잠을 잘 잔 적이 거의 없다. 하긴 방이 싼데 상태가 좋으면 주인이 미친 것일지도 모른다. 


 도미토리에선 꼭 옆 사람이 코를 골았고, 어떤 방은 습기와 곰팡이 냄새와 벌레가 지배적이라 사람이 거기 끼어 자도 되나 싶었고, 어떤 방은 옆 건물이 나이트클럽이라 새벽 5시까지 쿵쾅거렸고, 또 어떤 방은 창문 앞이 닭 농장이라 울음소리 때문에 잘 수 없었다. 베트남 닭은 깡다구가 상당하다. 울다 말겠지 했는데 그런 거 없었다. 목이 쉬어 꼬끼오~ 에서 `끼`가 자꾸 삑사리 나는데도 계속 울었다. 그쯤 되면 끼 부리려고 우는 게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울고 싶고, 울 수밖에 없는, 뭔가 처절하고 지독한 근성이 느껴졌다. 계속 잠을 설친 나도 따라서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어떤 창 없는 캄캄한 방에선 자꾸만 귀신이 나왔는데 내가 베트남어를 못 알아들으니까 뭐라 그러는지 알 수도 없고, 발음이 웃기기도 해서 그냥 잤다. 공통적으로 모든 침대에서 고린내가 났으며, 베갯잇엔 땀이 배어있고, 허리 부분이 꺼져있거나 매트에 쿠션이 없고, 뜨거운 물이 잘 안 나오거나 하수구 물이 안 내려갔다. 그럼에도 나는 숙박비 예산을 전혀 올리지 않았다.

 

 <걱정 말아요 그대>를 들으면 자꾸만 괜찮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라는 가사에는 어쩐지 가스펠송 같은 종교적 위안과 당부가 있다. 그러니까 음악이 있는데 왜 걱정했지? 하면서 풀어지는 것이다. 그래선지 암만 안 좋은 숙소에서도 이어폰을 꽂으면 현상을 극복할 수 있었다. 사실 편하고 좋은 침대에 잘 거면 집에 있지 여행으로 고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짧고 굴게 훌륭한 리조트나 근사한 호텔에 묵는 휴양 여행이 아니라 나는 베트남 지도처럼 최대한 가늘고 길게 버티는 중이니 숙소 사정은 신경 꺼야 했다.

 

 그동안 하노이에서 다낭, 호이안을 거쳐 호치민까지 남하했다. 호치민은 수도 하노이에 비해 훨씬 세련된 도시였다. 시내버스 차창이 더러워 거의 반투명이던 하노이와는 달리 이곳은 창이 깨끗해 바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차량이 훨씬 많지만 경적소리도 하노이보다 덜하다. 뭔가 하노이에선 앞에 아무것도 없는데 경적을 마구 누른다면 호치민 시민들은 필요한 이유가 있을 때 누르는 편이다. (그 이유가 좀 많긴 하지만.) 그런데 나름 하노이에서 오토바이 퍼레이드 사이로 횡단하는 데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토바이와 차량이 하노이보다 많은 호치민에선 그게 오만이라는 걸 알았다. (얼마 전 아시안컵에서 붙은 오만OMAN 얘기가 아니다.) 도로가 넓고 교통량이 많아 도저히 도로로 발 디딜 엄두가 나질 않는다. 넓은 대로엔 신호등이 있기도 하지만 벤탄 시장에서 로터리를 가로질러 버스 정류장까지 가려 했을 때 신호등도 없고, 어휴 이건 내가 건널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건너지 않으면 버스를 탈 수 없다. 타국의 도시에서 시내버스 타는 걸 좋아하는 건 궁상을 떨어 웃기려는 게 아니라 현지 생활에 깊숙이 동화되는 재미가 상당해서다. (라고 쓰지만 엉엉 택시비가 없다 엉엉)

 

 어쨌든 길을 건널 때 오토바이를 피하는 건 쉽다. 차폭이 작아서 피할 수 있는 각도가 크고 서로 리듬만 잘 맞추면 천천히 한 발씩 디딜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버스나 자동차가 문제다. 차폭이 크고, 피할 수 없을뿐더러, 멈춰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차와 오토바이가 섞여 있고 자기들끼리도 복잡하게 엉키는 로터리에서 관광객 수준의 초보 보행자가 길을 건넌다는 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워보였다. 절망하고 있는데 현지인 한 명이 쓰윽 길을 건넜다. 중년의 아저씨였는데 그는 마치 그곳에 차가 한 대도 없다는 듯 도로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차와 오토바이 사이를 유유히 지나갔다. 고수였다. 그것은 마치 초식이 없는 무공으로 알려진 ‘독고구검’과 흡사했다. 로터리 안쪽으로 갑자기 회전해 온 버스에 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는 내력을 이용한 ‘허공답보’를 구사한 듯 순식간에 길 건너편에 도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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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흉내 내고 싶었지만 걱정되었다. 택시비를 아낄까, 목숨을 아낄까. 당연히 목숨이 더 아까운 건데 돈도 걱정이고, 아아 그 순간<걱정 말아요 그대>를 입으로 웅얼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음악이 입체적으로 그 로터리의 카오스를 재구성하는 것을 보았다. 항상 무언가를 소극적으로 걱정하느라 내 인생이 지금까지 진취적인 성취를 거두지 못했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게다가 위험하긴 해도 어차피 사람이 건너다니는 길이며, 희미하긴 해도 바닥에 횡단보도 표시까지 있는데 건널 수 있다는 희한한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나는 전인권 아저씨처럼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걱정 말아요 그대>의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부르며 도로에 한 발을 디뎠다. 오토바이 한 대가 발 앞을 쌩 지나갔지만 오토바이들과 눈을 맞추며 한 칸씩 전진했다. 아, 그런데 갑자기 버스 두 대가 겹쳐 오는 것이었다. 그 사이엔 몸을 옆으로 세울 공간뿐이었다. 두 대가 동시에 경적을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딱 멈췄다. 그럴 때 피하려 하면 더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버스 두 대는 나를 사이에 두고 부르릉 지나갔다. 인간이란 얼마나 고독한 존재인가, 그 순간 생각했다. 그리고 오토바이 5대와 롤스로이스 한 대를 더 피한 뒤 건너편 육지에 상륙했다. 건너고 보니 등에 식은땀이 나 있었고,<걱정 말아요 그대>의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부분을 종교의 기도문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달콤한 성취감이 와르르 밀려왔다. 기어코 해낸 것이다.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법은 거의 없다. 걱정 그만하고 문제 속으로 한 발을 쭉 내디뎌야만 어떻게든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더구나 시작이 반이지 않은가. 호치민에서 길을 건넌 뒤 나는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헉 그런데 오늘 결론이 너무 교훈적이라 심히 걱정된다. 아아 다시 쓰라고 하면 큰일인데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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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Splash of the yea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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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깬 뮤지션들이 돌아왔다. 아이돌들은 전처럼 힘쓰지 못했고, 힙합이 굳건했다. 다양한 조합들도 흥미로웠다. 돌이켜보니 기형적이었던 2014년,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Splash of the yea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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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반기부터 올해 끝까지

 

콜라보레이션


부정할 수 없는 소유와 정기고의 합이 소녀시대, 투애니원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콜라보레이션이 많았다. 한 때 유닛들이 쏟아졌던 것처럼, 올해 짝 짓는 방식이었다.  이전의 「착해 빠졌어」, 「Officially missing you, too」가 다져놓은 바닥이다. 2월에 「썸」이 터지면서, 유사품들이 덤벼들었고, 피쳐링이라 해도 될 만한 협업에도 꼭 '콜라보레이션'이 붙었다. 그런 표현 덕인지, 조합은 더 다양해졌다. 웃음거리가 된 것을 역으로 이용한 비진아(비X태진아), 구분되어 있던 세대를 뭉친 아이유, 여름엔 싸이 X 스눕 독, 산이 X 레이나가 있었다. 근래 YG 힙합 프로젝트 역시 콜라보레이션이었다. 듣는 이에게 새로움을 주고, 다른 팬덤의 힘 받아오는 가요계 흐름이었다.

 

섹시 콘셉트


걸 그룹의 섹시 콘셉트도 상반기 「Something」부터 최근 「위아래」까지, 2014년을 달궜다. 언제나 존재했지만 올해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방송 3사가 3대 금지 안무를 내놓았기 때문.(1. 무대에 눕지 말 것 2. 몸을 더듬지 말 것 3. 의상을 열어젖히지 말 것) 결단을 내려야했다.

 

역사적으로 대중음악, 예술이 '어른'들의 보편적인 견해보다 앞서간 경우가 많았으나 이번엔 다르다. 단순한 노출과 자극으로만 경쟁하여, 섹시 평준화를 이루고 있다. 이는 K-POP의 주된 소비자, 10대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 접근성이 높아져, 그 아래 동생들에게도 나쁜 화면과 가사가 전달될 수 있다. 실제로 따라서 춤추는 아이 보고 경악했다는 엄마들 많다.

 

걸 그룹의 입장도 어쩔 수 없다. AOA는 밴드, 걸스데이는 귀여운 콘셉트였지만 대중은 그들이 짧은 치마 입을 때부터 기대했다. 그전은 모른다. 선정적인 설정이 성공할 확률도 높고, 논란이 되면서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얻게 해준다. 양측 모두, 각성하지 않는다면 벗어나기 힘든 씁쓸한 악순환이다.

 

껍질뿐인 관능 : 대한민국 걸 그룹의 공허한 섹스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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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월호 사건의 여파

 

올바른 애도의 자세 ▶◀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295명이 허망하게 떠났다. 사건을 둘러싼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은 나라를 절망으로 몰았다. 몇 달간 일시정지, 흑백 톤이었다.

 

모든 뮤지션은 애도하기위해 앨범과 공연을 연기했다. 몇몇 클럽들도 휴업에 들어갔다. 개인의 경제적 부담을 뒤로하고, 국가적인 아픔에 동참한 것은 성숙한 판단이었으나 페스티벌은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안타까웠던 것은 < 뷰티플 민트 라이프 2014 >, 사고 바로 뒤에 예정되어있었다. 고심했지만 임박한 일정 때문에 행사를 축소해서 진행하려 했다고 한다. 시끄럽고 밝지 않게 애도하는 분위기를 지키려는 듯 보였으나, 고양시에서 일방적으로 취소를 통보했다. 하루전날에 취소해버렸다. 당시 백성운, 새누리당 고양시장 예비후보는 “세월호 통곡 속에 풍악놀이 웬 말인가”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에 여러 뮤지션들이 안타까움 드러냈었다. 음악은 '위로'라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펜타포트의 선전


3개월이 지나고 여름, 페스티벌 시즌이 다가왔을 때에도 세월호의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대중음악을 넘어 영화관에도 빈 의자가 많았다. 분명 위축되었었다. 여기에서 인천의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오랜 내공을 펼쳤다. 비가와도 능수능란한 진행, 라인업에 관계없이 폭발적인 분위기와 스테이지별 매력. 3일간 9만 3천명으로, 역대 최다의 관객을 모았다. 올해 최고의 페스티벌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그리고 2015년은 펜타포트의 10주년이다.)

 

[페스티벌 기선제압] ④ 나의 페스티벌 답사기 2014 : 펜타포트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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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힙합이 대세

 

연결고리


힙합이 대세라는 말은 식상해졌지만, 2014년까지 이어졌다. 여러 가지가 맞물렸다. 랩 스타와 현역 래퍼들, 그리고 아이돌 연습생의 캐스팅으로 성공한 < Show Me The Money 3 >가 그 중심에 있다. 나아가 걸출한 힙합 앨범들이 쏟아졌다. 에픽하이, 개코, 빈지노 그리고 알앤비 싱어 박재범과 크러쉬, 또 저스트 뮤직과 일리네어의 컴필레이션. 모두 만만치 않았다. 힙합신 안에서만 유행이었던 「연결고리」는 이렇게 파도의 파도의 파도를 타고 홍대에서 홍콩까지 갔다. 올해 설립된 박재범과 사이먼 디의 레이블, AOMG도 뜨거웠다.

 

디스전과 < Show Me The Money 2 >에서의 활약으로, 힙합 열풍에 방아쇠 당긴 스윙스의 올해 역시 뜨거웠다. 박수칠 때 입대했다. 때문에 2015년도 힙합이 대세일 수 있을지, 그 악동의 빈자리는 누가 채울지가 관심 가는 부분이다.

 

힙합인 척하는 MC몽


5년간의 자숙을 마치고 돌아온 엠씨몽을 두고 대중은 뿔이 났다. 감싸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민감한 문제였던 만큼 날카롭게 반응했다. 컴백에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군가, 「멸공의 횃불」이 100위권 내에 올라가기도 했다.

 

잘못을 넘어, 얄밉게 피해 다녔다. < Miss Me Or Diss Me >라며 자신감을 보이고는 숨어서 돈 벌었다. 컴백한 시기도 그가 군대에 갈 수 있는 나이(만 35세까지)가 갓 넘었을 때. 개운치 않다. 관계없이 음원차트에선 승승장구했다. 올해, 단기간에 사랑받았던 앨범 중 독보적이다. 이런 갖가지의 논란들을 야기하고도 엠씨몽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MC몽 - < Miss Me Or Diss 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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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돌아온 90년대

 

컴백과 향수


조용필의 「Bounce」 덕분인지, 김추자, 양희은 등 긴 공백의 뮤지션들이 돌아왔다. 특히 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가수가 많았다. 서태지, 이승환, 이선희, 이소라, 김동률, 토이, 임창정, 참 많다. 건재한 경우도,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모두 가요계를 다채롭게 만들어주었다. 알록달록, 풍성하던 한 해였다.

 

90년대는 향수로도 다가온다. 재작년의 < 건축학개론 >이 제시하고, < 응답하라 > 시리즈가 얼개 잡았다. 2015년 앞부분에 걸쳐있는 <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와 지오디의 성공적인 컴백이 여기에 일맥상통한다. 증명했다. 복고는 이제 '7080'에서 'Back to the 90's'로 넘어갔다.

 

그리고 신해철


신해철도 올해 돌아온 90년대였다. 건강상의 문제로 오랜 공백을 가졌었지만 다시 음악을 하고 싶다며 부인에게 무릎 꿇고 부탁했다. 음악을 시작하던 소년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정말 행복해보였다. 넥스트와 솔로로서 리부트할 것이라며 거친 날개 짓을 보였고, 올해 여름 TV와 라디오, 공연 무대를 넘나들었다.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렇게 의욕적인 모습으로, 그는 떠났다.

 

비상한 사람이었다. 90년대 아이돌 스타이면서, 깊이 있는 새로운 음악 고집하던 로커, 용기 있게 소신발언 하던 논객이었으며 따뜻하고 인간적인 라디오 DJ이기도 했다. 그의 자리가 컸기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방송사와 가요계 동료들도 그를 추모했다. 보내기엔 일렀고, 사인이 안타깝다.

 

올해 세상을 떠난 가수 고은비, 권리세, 박성신, 신해철, 유수연, 유채영의 명복을 빈다.▶◀

 

[굿바이 마왕] 당신이여 영원히

 

 


2015/01 전민석(lego93@naver.com)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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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핀란드의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1865~1957)의 탄생 150주년입니다.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무대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3월13일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지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내한 연주회에 애호가들의 기대가 쏠려 있습니다. 거장 마렉 야노프스키(76)가 지휘봉을 듭니다. 이 지휘자에 대해서는 제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2012년, 돌베개)라는 책에서도 길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제는 몇 차례 내한공연을 통해 한국에도 꽤 많은 팬들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지면에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덧붙이고 싶은 사실은 이날 연주회에서 협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프랑크 페터 침머만(50)이라는 점입니다.

 

2001?2008년에도 한국에 다녀간 적이 있는 침머만은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안네 조피 무터 등과 더불어 현재 독일의 간판급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봐도 괜찮습니다. 게다가 아내가 한국계인 까닭에 한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 감정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2008년 저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돌솥비빔밥 마니아”라고 소개하기도 하더군요. 음악적으로는 범(凡)유럽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독일에서 나고 자랐지만 러시아 음악가들의 영향을 적잖게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나는 유럽에서 자랐고 유럽의 모든 자양분을 흡수했다. 또 러시아 선생님들에게 음악을 배우면서 러시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1974)는 내게 신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서두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프랑크 페터 침머만 이야기를 길게 꺼내는 까닭은 그가 내한 무대에서 연주할 곡이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이기 때문입니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음악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곡입니다.

 

물론 대중적인 인기로 따지자면 1899년 작곡한 교향시 <핀란디아>를 먼저 언급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곡은 매우 ‘정치적인 음악’이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핀란드는 13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809년부터 1917년까지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공국(公國)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식민지적 지배는 1894년 니콜라이 2세가 차르(러시아 황제)에 즉위한 이후 한층 노골화합니다. 당연히 핀란드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부채질했겠지요. 그런 운동의 일환으로 1899년 11월에 핀란드의 언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고, 그 행사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것이 연극 <역사적 정경>의 상연이었습니다. <핀란디아>는 바로 이 연극을 위해 작곡한 음악의 일부였습니다. 말하자면 핀란드 사람들의 애국적 열정을 고취시키기 위한 음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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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음악은 때때로 선동적입니다. 어느 순간 가슴으로 확 밀려들어와서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온통 뒤흔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악용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럽의 현대사에서 이미 그 장면을 목도했거니와, 바로 히틀러와 나치가 바그너의 음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한 것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한 장면이지요. 유태인들이 죽음의 가스실로 끌려가는 그 순간에, 수용소의 스피커에서는 바그너의 음악 ‘순례자의 노래’가 울려 퍼졌으니 말입니다. 물론 세밀히 들여다보자면 꼭 바그너의 음악만은 아니었지요. 히틀러와 나치는 이른바 독일풍의 웅혼한 낭만음악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춘 ‘독일정신의 정화’로 포장해 악용했습니다. 베토벤과 브람스의 음악도 이 정치적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나치 이후의 독일 음악은 ‘감정의 배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감성적 음악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뼈저리게 겪은, 아울러 그 시대의 과오를 철저히 반성했던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전통을 부정하고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이른바 음렬주의, 조성에서의 탈피 등 쇤베르크(1874~1951)에서 발원하는 음악이 바로 그렇습니다.   

    

또 샛길로 빠져 말이 길어졌습니다. 다시 시벨리우스로 돌아오겠습니다. 자, 시벨리우스의 음악 중에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음악을 또 한 곡 꼽아본다면 뭐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극음악 <쿠올레마>에 삽입된 ‘슬픈 왈츠’라는 곡입니다. 연주시간 5분이 조금 넘는, 아주 짧은 곡이지요. 채널예스 편집자가 이 음악을 링크해 줬으면 좋겠군요. ‘슬픈 왈츠’에 대해 설명하려면 시벨리우스의 아내인 아이노 예르네펠트(1871~1969)를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벨리우스는 26세 때(1892년) 아름다운 외모의 아이노와 결혼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핀란드의 유명한 장군이고 위로 세 명의 오빠가 있었습니다. 한데 그 세 오빠들이 하나같이 핀란드의 유명한 예술가들입니다. 첫째 아르비드는 극작가, 둘째 에로는 화가, 셋째 아르미스는 작곡가였지요. <쿠올레마>는 ‘죽음’이라는 뜻인데 바로 아르비드가 극본을 섰던 연극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시벨리우스는 처남이 쓴 연극의 음악을 맡았던 것이지요. ‘슬픈 왈츠’는 그렇게 만들어진 짧고 아름다운 곡입니다. 왈츠는 왈츠인데, 왠지 스산한 북유럽의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한국에도 몇 차례 내한했던 빡빡머리 지휘자 파보 예르비(1962~)가 이 짧은 곡을 앵콜로 자주 연주하는 편입니다. 아마 인터넷 동영상으로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와는 별도로, 시벨리우스의 음악적 생애를 대표하는 곡들은 7개의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중에서도 2번이 가장 많이 연주됩니다. 그리고 시벨리우스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걸작이 바로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입니다. 이 곡은 청중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바이올리니스트들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음악입니다. 제가 몇 해 전 만났던 사라장도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이 곡을 손꼽았습니다. 또 최근에(사실은 며칠 전에) 만났던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신현수)도 자신이 애호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작곡가로 “브람스와 시벨리우스, 프로코피예프”를 꼽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시벨리우스 협주곡에 많은 애착을 보이는 걸까요? 신지아의 말 속에 그 단초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예를 들어서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2악장은 선율이 굉장히 아름다워요, 하지만 그걸로 그냥 끝이죠. 반면에 시벨리우스의 2악장에는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가슴이 아릿한 정서 같은 것이 있어요. 말로 설명하긴 좀 어렵지만요.”

 

신경숙의 소설 제목을 잠시 빌려온다면 그것을 ‘깊은 슬픔’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한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 곡을 애호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3악장이지요. 바이올린의 기교가 매우 화려하고 리드미컬한, 이른바 비르투오소 풍의 악장입니다. 연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짜릿한 쾌감을 느낄 만한 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기량을 마음껏 펼쳐내면서 알레그로 템포로 달려나갈 수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런 이유들 때문에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그것은 청중이 이 곡을 좋아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핀란드의 국민음악가’로 규정되는 시벨리우스는 20세기 초반에 주로 활약했지만 음악적으로는 전통적 어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온음계적 선율과 조성적 화성을 즐겨 사용했지요. 비슷한 시기의 유럽 작곡가들이 혁신적인 음악 어법을 찾느라 골몰했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그를 종종 보수적인 작곡가로 설명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의 음악에는 독일?오스트리아, 혹은 프랑스의 음악에서는 만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아마도 핀란드의 하늘과 바람과 바다에서 영감을 얻는 듯한 개성, 또 내용적으로 보자면 그 땅의 설화에서 건져 올린 듯한 회화성과 신화성 같은 요소들을 느끼게 합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슬픈 왈츠’와 같은 해에 작곡됐지요. 38세였던 1903년이었습니다. 이듬해 2월에 작곡가 본인의 지휘로 헬싱키에서 초연하지요. 하지만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시벨리우스 본인도 뭔가 미진했던지 퇴고를 거듭해 1905년에 개정판을 내놓지요. 일설에는 1905년 베를린에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창작의 자극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 주로 연주되는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는 바로 1905년의 개정판입니다.
 
음악적으로 가장 빼어나다는 평을 듣는 것은 1악장이지요.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듯한, 북유럽의 신화적 분위기를 풍기는 악구들로 문을 여는데 시작부터 바이올린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이어서 독주 바이올린이 애상적인 선율의 첫번째 주제를, 또 파곳이 두번째 주제를 연주합니다. 협주곡의 일반적 작곡 방식과 달리, 악장의 중간에 카덴차(cadenza, 독주악기가 무반주로 기교적 연주를 펼쳐내는 부분)가 있는 것도 1악장의 특징입니다.

 

아다지오 템포로 느릿하게 막을 여는 2악장에는 북유럽 특유의 서정이 확연하지요. 독주 바이올린이 어떤 표정을 띤 채 노래하는 느낌의 악구들을 연주하다가 관현악이 합세하면서 음악이 규모가 점점 확장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바이올린이 애조 띤 노래를, 앞에서보다 조금 빠른 템포로 부릅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원래의 템포로 느려지지요.

 

3악장은 팀파니와 저음 현악기들이 둥둥거리는 느낌으로 시작해서 곧바로 독주 바이올린이 첫번째 주제를 연주합니다. 그 주제 선율 밑에서 독특한 리듬패턴이 계속해 반복됩니다. ‘빰바밤빰 밤밤밤’하면서 반복되는 그 패턴을 몸으로 기억하면서 음악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3악장의 바이올린 테크닉은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짜릿합니다.

 

 

 

 

 


 

하이페츠.jpg야사 하이페츠, 월터 헨들?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1959년/SonyMusic


하이페츠가 연주한 시벨리우스 협주곡은 필청반이다. 토머스 비첨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도 있으나 1930년대의 녹음이어서 음질이 난감하다. 보편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음반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미국 지휘자 월터 헨들(1917~2007)이 이끄는 시카고 심포니와의 협연이 연주력과 음질에서 나무랄 데가 없다. 하이페츠 특유의, 차갑고 날카로운 마력을 느끼게 하는 연주다. 특히 비르투오소 풍의 악구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3악장이 눈부시다. 국내에서 두 가지 음반 중에서 구할 수 있다. <Jascha Heifetz plays Great Violin Concerto>는 6장의 CD에 하이페츠의 중요한 협주곡 연주들을 모두 담았다. 낱장 음반으로도 구입이 가능하다. 시벨리우스 외에 글라주노프와 프로코피에프의 협주곡을 함께 수록했다.

 

 

 

정경화.jpg정경화, 앙드레 프레빈?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1970년/Decca

22세 정경화의 신선한 에너지가 오롯이 담긴, 데카(Decca)에서의 데뷔 음반이다. 1970년 영국 런던의 로열페스티벌홀에서 유럽 데뷔 무대를 치른 정경화는 곧바로 음반사 데카에 발탁됐다. ‘동양에서 온 마녀’라는 별명은 그 연주회와 이 음반에서 비롯했다. 시벨리우스와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함께 담았다.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그러면서도 애틋한 분위기가 살아 있는 연주다. 특히 노래의 느낌을 머금은 2악장이 좋다.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호흡도 나무랄 데 없다. 이 음반을 듣다 보면 정경화에게는 유럽인들은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감성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국내에서 두 가지 음반을 구할 수 있는데, 이 지면에서는 오리지널 음반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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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촌스럽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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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베트남이다. 아니 또 베트남 얘기냐고 식상해 하실까봐 쫄린다. 이번이 마지막이고 이 원고가 업데이트 될 즈음엔 귀국할 것이며, 여독(旅毒)에 지쳐 엉망진창 뻗을 예정이니… 딱 한 번만 더 봐주세욤.^^;
 (귀여운 척을 하다니! 이미 여독이 발작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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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베트남의 고원도시 달랏(Da Lat)에서 들은 음악 얘기다. 기온은 사시사철 딱 우리의 가을 날씨고 예쁘장한 프랑스풍의 도시라 베트남 신혼부부가 허니문을 많이 와 있었다. 나 역시 순식간에 달랏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카페들 마다 틀어놓는 음악만은 곤란했다. 예외 없이 8-90년대 팝 발라드인데 목에 힘주는 창법, ‘연주’가 아니라 ‘반주’인 신디사이저, 감정을 과잉 폭발하는 후렴구 등이 내 귀엔 너무 촌스럽게 들렸다. 


 아, 그래도 오랜만에 들으니 빛바랜 추억이 새록새록…은 개뿔, 조악한 스피커로 어찌나 짱짱하게 트는지 고문에 가까웠다. 베트남 시외버스에서 몇 시간동안 강제로 베트남 뽕짝을 듣는 것에 비하면 덜 고통스러웠으나 카페만 가면 자꾸 몸이 스크류바처럼 꼬였다.


 아니 근데 달랏에선 왜 2015년에 이런 음악을? - 이유를 예상해 봤다. 


 1. 달랏 시민들이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어서. 


 2. 관광객이 많이 오는 도시니까 아무 팝송이나 틀어놓으면 외국인들이 좋아할 거라고 오판해서. 


 3. 촌스런 음악만 골라 담아 싸게 대량 유통하는 개똥같은 업자가 있어서.  


 답은 모르겠다. 인터넷에 따로 달랏만의 뮤직차트도 없고 해서 궁금증만 커져갔다.

 

 어쩐지 현장감 있는 음악을 듣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나는 물어물어 달랏의 어느 뮤직라이브 클럽을 찾아갔다. <매일 밤 8시부터 10시 30분까지 생음악>이라는 안내가 적혀 있고 안에선 기타 조율하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오오, 이거야 이거. 하고 들어갔는데 객석은 캄캄하고 손님은 나 혼자였다. 촌스런 별 조명이 설치된 무대에서 반짝이 셔츠를 입은 중년의 연주자들이 구성진 색소폰과 함께 공연을 시작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딱 세 음절이었다. 카.바.레. 


 술값이 시중의 세 배였지만 매니저겸 남자 보컬이 내 옆에 앉아 어찌나 친절한지 나가기도 애매했다. 왠지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같은 애잔한 느낌도 들고 해서 탈출은 포기했다.

 

 나중에 베트남 중년들이 한두 테이블 오긴 했지만 손님이 별로 없어선지 연주자들도 점점 흥을 잃었고 음향도 좋지 않았다. 주 레퍼토리는 엘레지 트로트였고, 톰 존스의 Delilah, Grean green grass of home 같은 올드 팝을 종종 섞었다. 팝은 번안 가사로 불렀는데 ‘쎄시봉’ 같은 분위기가 날 뻔했지만 아쉽게도 아쉬운 수준이었다. 그곳에 나 말고 또 한 외국인이 들어오길래 반갑게 눈인사를 했는데 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버렸다.
 
 상당히 촌스러운 곳에 낚인 기분을 해소하려 다음날 폭풍 산책을 하다 그 친구와 우연히 마주쳤다. 


 “엇, 너는?”


 “아니 어제 거기?”


 서로 알아본 우리는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갔다. 그는 디자인이 촌스러운 스웨이드 무스탕을 입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의외로 통하는 점이 많았다. 


 이름은 띠오(Theo). 영국인이고 음악하는 사람이며 관광객이 아니라 달랏에 살면서 재능 나눔도 하고, 관광업 이면에 소외된 빈민들을 도울 방법이나 뭔가 가르칠 방법을 찾고, 커피 농장에서 죽어라 일하고 돈도 못 버는 사람들도 돕겠다는 계획으로 와서 분위기 파악 중이라고 했다. 어우, 그의 내면을 보니 그가 겉에 입은 무스탕이 전혀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생각 없이 관광이나 하고 자빠진 내 인생이 촌스러운 패션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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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꽤 멋지잖아.”


 “아냐, 그동안 의미 없이 살았기 때문에 이제라도 찾고 싶을 뿐. 잘 해낼진 모르겠어.”


 내 촌스런 영어실력 때문에 굉장히 띄엄띄엄 소통했지만 정중하고 눈이 맑고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였다. 그런데 그와 음악 이야기와 맥주를 나누다 문득 시원한 생음악에 대한 식탐이 또 발작했다. 우리는 동네 악기점 주인에게 여쭤 한 클럽을 소개 받았다. 주소만 듣고 어렵게 찾아간 그곳엔 이미 거나하게 취한 늙다리 미국인 사장이 있었다. 베트남 여자와 결혼해 현지에 정착한 케이스였다. 클럽엔 온통 서양인들뿐이었다. 


 “어서와 친구들. 록앤롤을 즐기기 딱 좋은 밤이라구.”


 록앤롤이라. 좋아하는 장르이긴 하고 베트남 젊은 친구들로 구성된 밴드의 실력은 훌륭했지만 몇 곡 듣다보니 으음, 연주에 영혼이 없었다. ‘Sweet home alabama’ 라던가 ‘Wind of change’ 같은 지나간 정서를 아마도 매일 밤 똑같은 레퍼토리로 연주하면서 영혼을 담기는 힘들지도 몰랐다. 잘 알려진 히트곡만 똑같이 연주할 뿐인 공연은 듣는 쪽이나 하는 쪽이나 참 의미 없는 일이다.


 실망감이 밀려왔다. 띠오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중엔 술 취한 사장이 트럼본, 색소폰, 하모니카 등등 각종 악기를 들고 나와 곡의 의미나 분위기와 상관없이 과도한 음역대의 재롱을 부리기까지 했다. 박자를 놓치고 숫제 연주를 방해하는 수준이었다. 밴드는 자기들 고용주라 어쩔 수 없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덕분에 겨우 음악적일 뻔한 분위기도 계속 망쳐졌다. 


 “음악이라기 보단 쇼 타임에 불과한데.”


 띠오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는 탈출을 결심하고 일어서려 했다. 그때였다. 사장의 베트남인 아내가 남편에게 “술 좀 그만 마셔 이 주정뱅이야!” 하고 외치면서 등장하자 사장이 찌그러지면서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것도 쇼의 일부인가 했는데 절대 아니었다. 그녀의 잔소리엔 롹 스피릿이 충만했고 급기야 무대에 올라 베트남어로 된 알 수 없는 장르의 힘 있는 노래를 불렀다. 


 “아 이건 진짜 음악이야!”


 띠오와 나는 동시에 외치며 스르륵 주저앉았다. 찌찌뽕이라 볼때기를 잡아당길 뻔했다.

 

 자, 오늘의 주제곡 얘기다. 오래 끌어 송구스럽다. 그 이름 모를 신선한 진짜 음악에 이어 굉장히 진보적이고 창의적인 기타 소리가 이어지더니 롤링 스톤즈의 <Paint it black>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롹정신 사모님으로 인해 각성의 스위치가 켜졌는지 연주자들 눈빛이 갑자기 궁서체였다. 오오 더구나 롤링스톤즈 저리가라 싶은 독창적인 솔로파트를 섞으며 훌륭하게 재해석 해내는 것이었다. 비로소 자신들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사실 롤링스톤즈가 카페에서 듣던 마이클 볼튼이나 필 콜린스보다 한참 더 오래된 아티스트인데 전혀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오래 된 게 문제가 아닌 것이다. 

 


 <Paint it black>은 아시다시피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그 바보같은 전쟁에 대해 시적 상징을 가진 자책의 노랫말을 외친 전설의 밴드 롤링 스톤즈의 명곡이다. 그리고 그 연주는 각성한 클럽의 밴드가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하는 소리 같았다. 훌륭한 실력으로 외국인 관광객들 앞에서 쇼에 불과한 연주나 하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선지 연주에 혼이 담겼다. 나는 그들의 사정에 감정이 이입되었다.

 

 클럽에선 관광객들이 비싼 술을 마시며 쇼를 즐기고 밖에선 무거운 봇짐을 진 행상 아주머니들이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언덕길이 많은 달랏 시내를 지친 모습으로 걷는다. 누군가는 커티스처럼 서양인 관광객을 위해 철지난 록앤롤 쇼를 하고 누군가는 띠오처럼 이곳의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나선다. 나는 그냥 음악 탐욕에 속만 시커멀 뿐이었다는 게 느껴져 <paint it black>의 노랫말이 착착 감겼다.

 

 아름다운 달랏에 왜 8-90년대 팝 발라드가 흐르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일부 관광업은 시끄럽게 쿵짝거리며 밀고 들어오는 서양식 록앤롤인 반면, 대다수의 소외된 계층 현지인들은 구슬픈 엘레지나 호소력 짙은 발라드가 착착 감기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 음악들이 현재 그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소리라면 단지 촌스럽다고 할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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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부터는 카페에서 암만 옛날 팝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작은 산골도시 달랏의 순박한 사람들이 자기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데 뭐. 도대체 시대에 뒤떨어져 촌스럽다는 게 뭔가. 우월감에서 비롯된 편협한 시각이지 않았나. 아니 좋아하는 음악을 듣겠다는데 팝 발라드면 어떻고 엘레지면 어떻고 롤링 스톤즈면 어떤가. 모든 음악은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운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음악은 마음을 열고 들을 때 빛나는 보석인 것이다. 음악이 비즈니스가 되는 것 말고는 세상에 촌스러운 음악이란 없다.


 아아, 달랏의 음악을 잠시 촌스럽게 생각한 내 편협한 감각이 몹시 부끄러웠다.
 
P.S. 띠오, 달랏에서 꼭 부조리를 까맣게 칠해버리길. 권투를 빈다. 원투 스트레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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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회 그래미 시상식 수상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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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8일, 제 57회 그래미 시상식을 통해 한 해를 빛낸 수 많은 아티스트들이 축하를 받았다. 각계 각 분야에서 힘을 쏟아 좋은 작품들을 내보인 이들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순간을 포착했다. 주요 부문을 가려 해당 상의 수상자와 수상작에 대해 다뤘다. 지난 특집, < 제57회 그래미 시상식 : 노미네이트 편 >과 연계하는 기획이다.

 

 

Record Of The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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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y with me (Darkchild version)」 by Sam Smith

 

다크차일드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의 노고에도 공로를 돌려야겠다. 로드니 저킨스의 터치를 더한 샘 스미스의 「Stay with me (Darkchild version)」가 레코드 오브 디 이어의 영예를 안았다. 샘 스미스의 목소리를 십분 살린 능력 좋은 프로듀서의 감각이 쟁쟁한 후보들 사이에 놓인 싱글의 생명까지도 살렸다. 영국에서 건너온 팝 소울 넘버가 어떻게 미국 시장에서 생존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Album Of The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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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rning Phase > by Beck

 

승리의 여신은 < Morning Phase >에게 미소를 보냈다. 이 미소에 반대를 제기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목가적인 포크 사운드를 훌륭히 풀어낸 벡 한센은 부문 후보가 발표된 순간부터 많은 이들의 예상 속에서 승자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응당 수긍이 가는 결과다. 다만 이견은 없다하더라도, 아쉬움이 생길 곳은 있겠다. 거대한 프로젝트 속에 제작된 비욘세의 < Beyonce > 역시 수상작으로 꼽히고도 남을 역작이었다.< Morning Phase >와 마찬가지로 많은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기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탄식의 크기가 실로 크다.


Song Of The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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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y with me (Darkchild version)」 by Sam Smith

 

뭔가 불편하다. 수상 현장에 있던 모두에게 개운하지 않았을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싱글 발매가 한참 지난 올해 초, 샘 스미스와 제임스 내피어, 윌리엄 필립스로 구성되었던 곡의 작곡 크레디트에는 톰 페티와 제프 린의 이름이 더해졌다. 1989년 톰 페티의 히트 싱글 「I won't back down」과 비슷한 멜로디를 가져간다는 것이 그 이유. 해당 곡을 쓴 톰 페티와 제프 린이 「Stay with me」의 로열티 중 일부를 챙겨가는 상황 속에서 샘 스미스는 송라이팅에 초점을 맞춘 송 오브 디 이어 부문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라섰다. 저작자 문제는 좋게 끝났지만 시상대에 오르는 그림까지는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Best New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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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 Smith

 

2014년이 샘 스미스의 해였다는 것에 확실한 쐐기를 박는다. 앞서 두 부문에서 트로피를 챙겨온 「Stay with me」 뿐만 아니라 「Money on my mind」, 「I'm not the only one」 등의 싱글, 정규 음반< In The Lonely Hour >로 1년을 성공적으로 달린 이 아티스트는 한 해 최고의 신인 아티스트라는 명예로운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됐다. 신인상은 자기네들 음악을 널리 퍼뜨려준 젊은 영국 청년을 향한 그래미의 선물이다. 2014년의 샘 스미스에게서 2008년의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2009년의 아델이 겹쳐보인다.


Dance/Electro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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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Dance Recording : 「Rather be」 by Clean Bandit featuring Jess Glynne


Best Dance/Electronic Album : < Syro > by Aphex Twin

 

발매와 동시에 커다란 칭송을, 연말 결산을 맞은 해외 유수 음악 매거진의 선택을 연이어 받아오더니, 결국 그래미 트로피까지 타냈다. 댄스/일렉트로닉 앨범 부문의 시선은 아일랜드 출신의 일렉트로니카 명장(名匠), 에이펙스 트윈의 < Syro >로 향했다.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따르는 작품이었다. 한편으로 같은 장르 아래에 있는 또 다른 분야인 베스트 댄스 레코딩 부문의 영예는 끝내주는 사운드 조합을 보여준 클린 밴디트의 하우스 넘버 「Rather be」가 가져갔다.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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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Rock Performance : 「Lazaretto」 by Jack White


Best Metal Performance : 「The last in line」 by Tenacious D


Best Rock Song : 「Ain't it fun」 by Paramore


Best Rock Album : < Morning Phase > by Beck

 

점점 거대해져가는 아우라의 소유자, 몇 안 되는 작금 록 신의 아이콘 중 하나인 잭 화이트의 「Lazaretto」가 록 퍼포먼스 부문에서의 승리를 챙겼다. 복각의 달인은 2014년에도 장르의 원류를 훌륭히 건드리며 멋진 복귀를 알렸다.

 

 베스트 록 송에서의 타이틀은 트렌드에 가까운 파라모어의 「Ain't it fun」에게, 베스트 록 앨범에서의 타이틀은 앨범 오브 디 이어와 마찬가지로 벡의< Morning Phase >에게 향했다.

 

한편으로 록 장르 아래에 있는 메탈 퍼포먼스 분야에서는 2010년에 사망한 로니 제임스 디오의 헌정 앨범< Ronnie James Dio This Is Your Life >에 수록된 테네이셔스 디의 커버 버전 「The last in line」이 트로피를 가져갔다.


R&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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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R&B Performnace : 「Drunk In Love」 by Beyonce featuring Jay Z


Best Traditional R&B Performance : 「Jesus Children」 by Robert Glasper Experiment featuring Lalah Hathaway & Malcolm Jamal Warner


Best R&B Song : 「Drunk In Love」 by Beyonce featuring Jay Z


Best Urban Contemporary Album : < G I R L > by Pharrell Williams


Best R&B Album : < Love, Marriage & Divorce > by Toni Braxton & Babyface

 

다양한 하위 부문 가운데서, 베스트 알앤비 퍼포먼스와 베스트 알앤비 송, 이 두 분야의 승자로 비욘세의 이름이 기록됐다. 프로덕션 부문에서의 상까지 합해 총 세 개의 트로피를 진열장에 더 올리게 된 비욘세는 그래미 수상 20회를 기록, 최다 수상자 공동 12위, 여성 아티스트 최다 수상자 단독 2위로 랭킹을 새로고침했다.

 

베스트 알앤비 앨범으로는 토니 브랙스턴과 베이비페이스의 합작 앨범 < Love, Marriage & Divorce >가, 베스트 어반 컨템포러리 앨범으로는 빅 히트의 성과를 올린 퍼렐 윌리엄스의 < G I R L >이 뽑혔다. 여기에 랄라 해더웨이, 말콤 자말 워너의 피쳐링을 얹어 「Jesus children」을 내놓은 로버트 글라스퍼 익스페리먼트가 베스트 트래디셔널 알앤비 퍼포먼스 부문의 수상자로 지목됐다.


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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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Rap Performance : 「I」 by Kendrick Lamar


Best Rap/Sung Collaboration : 「The monster」 by Eminem featuring Rihanna


Best Rap Song : 「I」 by Kendrick Lamar


Best Rap Album :< The Marshall Mathers LP 2 > by Eminem

 

네 개의 파트에서 우열을 가리는 힙합 분야를 에미넴과 켄드릭 라마 둘이서 갈라먹었다. 에미넴의< The Marshall Mathers LP 2 >와 리한나가 피쳐링한 「The monster」가 각각 베스트 랩 앨범과 베스트 랩/송 콜래보레이션 부문에서, 켄드릭 라마의 「i」가 베스트 랩 퍼포먼스와 베스트 랩 송 부문에서 수상작 칭호를 따냈다. '랩 갓'의 귀환을 알린 에미넴도, 작년 그래미에서 이렇다 할 만족감을 얻지 못했던 켄드릭 라마도 나름 적잖은 성과를 거둔 셈. 레이블 애프터매스 소속 래퍼 둘이 힙합 분야를 휩쓸었으니 기뻐할 사람에 닥터 드레 사장님까지 한 명 더 늘었다.

 


2015/02 이수호 (howard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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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 교향곡 1번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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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한데 애써 경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것을 ‘허위적 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대중가요를 종종 듣곤 했는데 그런 제 모습을 보고 후배가 한마디 툭 던지더군요. “이제 음악적 노선을 바꾸는 겁니까?” 물론 장난삼아 던진 말이겠지요. 한데 그 농담 속에도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 이를테면 클래식과 대중음악 사이에 놓인 견고한 장벽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클래식만을 ‘들을 만한 음악’으로 여기는 순혈주의자들도 종종 눈에 띕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면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에 가깝지 않을까요?

 

정작 음악에서 중요한 것은 개성과 깊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르 불문하고 그 두 가지를 품고 있는 음악은 훌륭합니다. 저는 최근에 싱어 송라이터 한대수의 옛날 노래를 몇 번인가 들었습니다. 18세의 천재가 뉴욕 롱아일랜드의 다락방에서 작곡했던 ‘바람과 나’를 혼자 흥얼거렸습니다. 신중현이 작곡한 ‘나뭇잎 떨어져서’라는 노래도 따라 불러봤습니다. 참 좋은 노래들입니다. 내친 김에 그리스 태생의 팝가수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회상의 감정에 젖어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요즘 젊은 세대들이 보기엔 ‘완전 아저씨 취향’이겠지요. 그래도 저 같은 50대들에게는 한 시절을 동행했던, 지금 들어도 여전히 좋은 노래들입니다. 이런 노래들을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육과 신경이 서서히 이완되고 마음도 착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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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이번에는 더 어린 시절의 노래 한 곡을 떠올려볼까요? 혹시 이런 노래가 기억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 불렀던 동요 가운데 ‘아 유 슬리핑, 아 유 슬리핑, 브라더 존~’ 하면서 시작하는 노래가 있지요. 영어로 써보자면 ‘Are you sleeping, are you sleeping, brother John~’이 되겠지요. 아마 기억나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여러 명이 함께 부르던 돌림노래 형식의 동요인데, 주로 영어 가사로 많이 불렀습니다. 뒷부분 가사는 이렇습니다. ‘Morning bells are ringing, Morning bells are ringing, Ding-dang-dong, Ding-dang-dong.’ 구글에서 검색하면 귀여운 애니메이션과 함께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소녀가 ‘잠꾸러기 동생’을 깨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군요. 제목은 ‘Brother John’입니다.

 

사실 이 노래는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불렸습니다. 아마 18세기 초반 무렵이었을 겁니다. 원래의 제목은 ‘플레르 자크’(Freere Jacque)였습니다. 이어서 오스트리아에서도 유행했지요. 제목이 ‘Bruder Martin’으로 바뀝니다. 또 이것이 영어권으로 건너가면서 ‘Brother John’으로 다시 한번 바뀝니다. 한데 이 제목은 ‘동생 마르틴’이나 ‘동생 요한’이 아니라, ‘마르틴 수사’ 혹은 ‘요한 수사’로 번역되는 게 맞습니다. 수사란 가톨릭의 수도자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말하자면 애초에는 게으른 수사들을 빈정대며 부르는 노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남동생’으로 해석해 불러도 별 무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꾸러기 동생을 깨우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 외려 더 친근합니다.

 

근대의 음악가들 중에서 음악에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인물로 구스타프 말러(1860~1911)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마지막에 자리하는 이 음악가는 자신의 몸속에 저장된 많은 음악을 교향곡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다시 말해 음악가로서 그가 보여준 태도는 ‘경계의 벽’에 갇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그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군대의 행진음악, 아버지가 운영하던 선술집에서 흘러나오던 유행가 가락, 농부들의 소박한 춤곡, 거리를 떠도는 장돌뱅이들의 음악을 과감하게 자신의 교향곡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졸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서 말러를 일컬어 ‘혼종의 음악가’ ‘융합의 음악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말러 이전에도 기존의 어떤 선율을 차용하는 작곡가들은 종종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그랬습니다. 낭만시대의 작곡가들에게서도 이런 식의 차용 기법은 종종 발견됩니다. 하지만 말러처럼 세속적 선율을 교향곡 속으로 과감히 끌어들인 작곡가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감수성이 활짝 열린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음악들, 그래서 자신의 몸속에 저장돼 있던 그 익숙한 선율들을 ‘교향악적 재료’로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혼종성, 혹은 성속(聖俗의 구분 없음이야말로 그의 음악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말러는 흔히 낭만주의 교향곡의 마지막 방점을 찍은 작곡가로 기억되지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음악의 경계를 허물면서 모더니즘의 전망을 보여준 음악가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돼야 할 겁니다. 베토벤이 고전과 낭만을 동시에 품었던 것처럼, 말러의 음악도 낭만과 현대를 함께 끌어안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완전히 종합되지 못한 채 때때로 분열의 양상으로, 다시 말해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당대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말러가 혹평 받았던 이유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고상함과 퇴폐, 서정과 광기, 공포와 안식, 세속적 갈등과 영원함에 대한 갈망 같은 것들로 뒤범벅된 그의 음악에 많은 이들이 마음을 뺏기고 있습니다.     

 

51세에 세상을 떠난 말러는 생전에 모두 9곡(‘대지의 노래’까지 포함하면 10곡)의 교향곡을 완성했지요. 첫 번째 교향곡을 구상한 것은 20대 중반부터라고 합니다. 본격적인 작곡은 1888년 초에 이뤄졌습니다. 앞에서 길게 설명한 ‘Bruder Martin’의 선율은 이 교향곡의 3악장 첫머리에서 들려옵니다. 한데 좀 이상합니다. 선율이 괴기스럽게 비틀려 있습니다. 원래 이 노래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을 뿐더러, 어린 아이들이 딱 좋아할 만한 유쾌하고 코믹한 돌림노래였지요. 하지만 말러의 교향곡에서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팀파니가 둥둥거리는 가운데 콘트라베이스가 연주하는 선율이 음산하고 비감합니다. 말러는 애초에 D장조였던 선율을 d단조로 바꿔 괴기스러운 느낌의 장송(葬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첫 번째 교향곡에서부터 희극을 비극으로 치환하는 독특한 패러디를 선보였습니다. 물론 지금의 감각으로 듣노라면 그 장송은 아름답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대에는 어땠을까요? 1889년 11월 부다페스트에서 말러의 지휘로 이 곡이 초연됐을 때, 청중이 느꼈을 당혹감이 충분히 짐작됩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어린 시절의 말러는 선술집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베른하르트가 군부대 근처에서 운영했던 술집에서는 매매춘도 일상사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린 말러는 동생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지요. 말하자면 술 취한 남자와 여자들이 드나들던 선술집 문으로 동생들의 시신을 담은 관들이 떠나가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특히 바로 아래 동생이었던 에른스트의 죽음은 말러에게 오래도록 상처로 남았던 기억이었다고 합니다. 그 동생은 말러가 열다섯 살이었을 때 세상을 뜨지요. 아마 형제는 ‘Bruder Martin’을 함께 불렀을 겁니다. 어쩌면 말러는 류머티스 고열로 시달리던 동생의 머리맡에서 이 노래를 불러줬을 지도 모릅니다.

 

1번 교향곡의 표제인 ‘거인’(Titan)은 작곡가 스스로 붙인 제목입니다. 연주시간 약 50분으로 말러의 교향곡 중에서는 비교적 길이가 짧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말러의 교향곡을 처음 듣는 분들은 이 곡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작곡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말러의 서정성이 짙게 배어 있는 곡입니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1876~1962), 말러의 제자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그는 이 곡을 일컬어 “말러의 베르테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요.

 

1악장은 느릿하게 막을 올립니다. ‘Langsam, Schleppend’(느리고 완만하게), ‘Wie ein Naturlaut-Im Anfang sehr gemachlich’(자연의 소리처럼, 매우 여유롭게)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지요. 현악기들이 A의 지속음을 길게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서서히 먼동이 터오는 새벽의 느낌입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팡파르, 또 꾀꼬리 같기도 하고 뻐꾸기 같기도 한 새소리들도 들려올 겁니다. 이어서 첼로가 말러의 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중 두번째 곡인 ‘아침 들판을 거닐 때’의 선율을 연주합니다. 매우 인상적인 주제입니다. 마지막에는 팀파니가 강렬하게 작열하면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2악장에서는 빨라집니다. ‘Kraftig bewegt, doch nicht zu schnell’(힘차게 움직여서, 하지만 지나치게 빠르지 않게)입니다. 현악기들이 표정 있고 활기찬 화성을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아주 리드미컬한 랜틀러 춤곡 풍의 선율이 펼쳐집니다. 이어서 음악이 잠시 멈추는 듯싶다가 목관과 바이올린이 주도하는 왈츠풍 선율로 넘어갑니다. 앞의 춤에 비해 좀더 세련된 도회풍의 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악장은 ‘Feierlich und gemessen, ohne zu schleppen’(엄숙하고 장중하게, 그러나 느긋하지 않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콘트라베이스가 ‘Bruder Martin’을 선율을 장중하고 서글프게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이어서 하프의 피치카토가 잠시 들려오다가 길거리 악사들이 연주하는 듯한 스타일의 음악이 펼쳐집니다. 약간 휘청거리는 듯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잔한 분위기의 선율입니다. 인생의 희비극을 암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요. 이어서 바이올린이 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중에서 네번째 곡인 ‘그녀의 푸른 눈동자’의 선율을 연주합니다. 젊은 말러의 서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아름다운 멜로디입니다.

 

4악장은 3악장에서 쉬지 않고 연결됩니다. ‘Sturmisch bewegt’(태풍처럼 움직여서). 거의 잦아드는 것처럼 3악장이 끝나자마자 폭풍 같은 총주가 터져 나옵니다. 말러가 왜 이 교향곡의 표제를 ‘거인’으로 지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연주시간 약 20분으로 교향곡 1번에서도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하는 악장입니다.


아바도.jpg▶클라우디오 아바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89년/DG


지난해 1월 타계한 지휘자 아바도는 자타 공인의 ‘말러 스페셜리스트’였다. 1989년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실황이다. 균형 잡힌 연주, 정직한 해석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혹자는 깔끔하게 정돈된 사운드에 박한 점수를 주기도 한다. ‘절충주의’라는 평가도 있다. 아바도의 음반 중에서 좀더 드라마틱하고 힘이 넘치는 말러 1번을 원한다면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1981년 녹음(DG)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1989년 실황이 보편적 호평을 받는 명연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현재 국내 매장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말러 1번이기도 하다.

 

 

 

얀손스.jpg▶마리스 얀손스,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2006년/RCO Live


최근의 녹음 중에서는 단연 추천작이다. 이 역시 실황 녹음이다. 얀손스와 로열 콘세르트헤보우가 2006년부터 진행해온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은 어느 곡이 됐든 후회하지 않을 만한 선택이다. 얀손스의 지휘봉은 구조와 디테일을 모두 장악하고 있을 뿐더러, 로열 콘세르트헤보우의 세밀한 연주력은 ‘역시!’라는 찬탄이 아깝지 않다. 말러의 교향곡들을 연주한 여러 지휘자들과 녹음들이 있지만, 정교한 디테일을 제대로 맛보고 싶다면 이 음반이 단연 적절하다. 말러 교향곡의 세기말적 뉘앙스 표현이 좀 미흡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놓치기 아까운 연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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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아,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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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재 칼럼의 첫 꼭지를 구상할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오, 산울림 얘기해야지’였다. 그러나 좋아하는 건 아끼고 있다 나중에 꺼내먹는 성격이라 이제야 슬며시 꺼내본다.

 

 산울림은 내 성장기를 비롯한 인생의 주요 시기를 흔들어놓은 밴드였다. 산울림이 한창 활동할 7~80년대엔 성장기가 아니라 꼬꼬마였고(저 생각보다 어려요) 친구들이 정신 차리고 입시공부를 시작한 나이에 뒤늦게 산울림 음반들을 중고 레코드점에서 수집해 들으며 계속 정신 못 차렸다. 음악 들으면서 하염없이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해 반에서 제일 힙업이 잘 돼 있던 그 소년은 산울림 음악에 홀딱 경도되면서 이렇게 외쳤던 기억이 난다.


 “이 음악들은 여태 새로워!”

 

 지나간 음악이 문득 신선하게 느껴지는 건 TV 프로그램 ‘무도 토토가’를 통해서 경험해본 분들이 계실 것이다. 미디어에서 화제로 삼은 엄정화 누나가 아직도 얼마나 섹시한지, 김정남 형이 아직도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는 음악과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시간 속에 묻힌 한 시절의 음악을 다시 꺼내볼 때 아련한 시각이 생기는 걸 즐길 수 있었다.

 

김창완밴드 2.jpg

 

 그처럼 뭔가 빤한 게 지겹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허겁지겁 산울림 음악을 찾아듣곤 한다. 그럼 내 궁둥이가 탱탱하던 시절을 추억할 수 있기 때문… 은 아니고 실험적인 산울림 사운드의 여전히 신선한 생명력을 충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7년 전 드러머 김창익 아저씨가 불의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상 초유의 삼형제 록밴드 산울림은 더 이상 새로운 앨범을 낼 수 없게 되었지만 리더이자 맏형인 김창완 아저씨는 <김창완 밴드>로 여전히 산울림 음악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김창완 밴드>는 동생의 허망한 죽음을 견딜 수 없는 심정을 담아 ‘난 지게차만 보면 쫓아가서 걷어차지(Forklift)’ 하고 쓸쓸한 목소리로 노래했고,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 1970년 무렵, 그날은 그날이었고 오늘은 오늘일 뿐이야(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라고 인생의 한정적 시기성에 대해 담백한 톤으로 노래했고, ‘인생 그거 별거 아니에요, 살아보니 거기서 거기에요, 서로 서로 아껴주세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금지곡)’라며 삶에 대한 견해를 교훈적인 목소리로 설파하기도 했지만 전혀 꼰대 같지 않았다. 그렇게 노래하는 동안 김창완 밴드의 연주톤은 산울림 때와는 달리 살짝 시시할 만큼 무난해졌고, 멜로디는 가급적 단순해졌으나 그 내용만은 점점 더 깊어져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근에 김창완밴드 3집<용서>가 나왔다. 웬 떡이냐 새해 선물인가 하고 듣기 시작했는데 나는 첫 번째 트랙을 듣자마자 놀라야 했다. 


 “아니 이 아저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또 넣었네. 너무 우려 드시는 것 아냐?”


 그러나 그 곡은 엄청난 실력의 국악밴드 ‘잠비나이’와 조화를 이룬 신곡이었다. 우려낸 사골 같은 음악이 아니라 새롭고 맛있는 퓨전음식이었던 셈이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세상에 처음 활성화 되던 시절, 산울림 음악 커뮤니티가 생겼다. 이 세상에 나 말고 산울림빠가 또 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고 그렇게나 많다는 점에도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산울림 동호회의 운영진이었던 K형의 홍대 술집에 옹기종기 모여 산울림 LP를 커다란 스피커로 감상하던 때의 전율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혼자 이어폰으로 산울림 음악을 듣고 다닐 때와 음색의 차원이 달랐다. 또한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취향 공감대가 그렇게 찐빵처럼 따듯하고 푹신하다는 걸 거기서 처음 알았다. 우리는 ‘울림교’ 신도들이라 설정하고 김창완 아저씨는 교주였던 시절이라 산울림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전도한 경험을 간증하는 시간까지 갖는 등 재미있게 놀았다. 채팅방에서 산울림 퀴즈를 내고 맞히며 밤늦도록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렇게 팬들이 수면위로 드러나자 활동을 중단했던 산울림 삼형제가 다시 모여 공연을 다시 하는 현재형 환희까지 찾아왔다. 아, 그렇지만 그땐 수험생 시절에 이어 또 내 인생의 주요 시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창 진로를 개척해야할 시기에 나는 산울림 공연마다 쫓아다니며 계속 정신 못 차려야 했다.

 

김창완밴드_용서.jpg

 

 나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긴 전주에 나오는 굉장히 사이키델릭한 기타솔로 부분을 너무나 사랑했고, 똑같이 따라 연주해보고 싶어 죽을 뻔했다. 그렇지만 기타에 재능이 없어 정말 많은 한계에 부닥쳤다. 노력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취업 이력서를 열심히 쓰고 있을 때 나는 옆에서 그 기타 솔로를 연습하고 앉아있었다. 24시간 오픈된 내 자취방에 학교 동창들이 술을 마시러 수시로 놀러왔는데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끼어있었다. 어떻게든 어필하고 싶어진 나는 연습이 덜 끝난<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들려주겠다며 폼을 잡았고, 전주부분을 베이스 반주도 없이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곡의 전주부분은 무려 3분이 넘는다. 길고 어설퍼 듣기 괴로워진 여자애가 그 아름다운 입술로 말했다. 


 “오빠, 미안한데 노래는 언제 부르는 거야?”


 실패였다.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주단을 깔아놓은 내 마음~’ 지금 들기엔 조금은 촌스럽게 느껴지는 이 곡의 폭발적인 고백의 노랫말을 그녀에게 전달해 보지도 못했다. 꼭 산울림 때문은 아닌데 아무튼 산울림 곡을 들려주려다 나는 좋아하던 여자애로부터 예능감 떨어지는 오빠로 인식된 것이었다. (아, 지금 눈가의 습기는 겨울비 때문이겠지)
 산울림을 원망하진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산울림이 좋고, 그들을 통해 록정신과 실험정신이라는 에너지와 포크적 감수성을 내 인생에 접목시킬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산울림 노랫말처럼 지나간 시간에 머무를 수는 없으므로 다시 최신 앨범얘기를 조금 더 소개하고 오늘의 턴테이블을 마칠까 한다. 이 앨범에선 「E메이저를 치면」이 가장 좋았는데, 뭔가 그녀가 입던 초록색 점퍼가 생각난다며 계속 구시렁대는데 랩이 아닌 일상적 말이 노래가 되는 그만의 표현력이 산울림 11집의 전설적 명곡 「도시에 비가 내리면」이후 오랜만이라 감탄하며 나도 기타를 잡고 따라 칠 수밖에 없었다. (노랫말로 코드를 다 불러주니까 어찌나 좋은지) 그리고 원고 분량이 모자라니까 한 곡만 더 얘기하자면 「아직은」이라는 곡에선 ‘아직 내 가슴이, 아직 내 추억이, 아직 내 인생이, 아직은 힘들다’고 노래하는 그의 고백에 내 막막한 인생이 고스란히 대입돼버려 가슴이 몽실몽실 해졌다.
 
 산울림과 김창완 아저씨의 음악은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노랫말인 ‘아,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라는 심정을 언제나 동의하게 한다. 이젠 한마디 말뿐만이 아니라 점점 더 그의 삶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는 중이라 생각한다. 나날이 늙어가지만 기존에 해왔던 걸 답습하는 고장난 기계가 되거나 고약한 꼰대 어른이 될 기미가 눈곱만큼도 안 보이는 김창완 아저씨. 저는 언제까지나 팬으로 남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독자님들 중에 산울림 음악을 잘 모르시는 분이 계신다면 1집부터 쭉 들어보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여태 신선하게 들릴 것임을 보장할게요. (보고 있나 울림교 신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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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영혼을 노래하는 가수 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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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가수들과 작업을 했고 함께한 모든 가수가 소중하지만 유독 특별한 인연의 가수들이 있다. 그 특별함은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복되는 운명적인 만남으로 만들어진 깊은 인연일 것이다. 앞으로 써 내려갈 본 칼럼은 나와 함께했던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그 중에 빼 놓을 수 없는 가수가 바로 ‘김범수’다.

 

범수와 작업한 곡들 중 잘 알려진 ‘하루’, ‘보고싶다’, ‘끝사랑’, ‘나타나’, 그리고 최근 발표된 ‘눈물나는 내 사랑’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곡에서 함께 호흡했다. (일례로 JTBC의 히든싱어, 김범수 편에서 부른 모든 곡이 내 곡이기도 했다.) 특히 ‘보고싶다’ 음반을 만들기 위해서는 30여 개의 데모곡을 제작했을 만큼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작곡가 윤일상과 ‘비쥬얼 대세’ 가수 김범수는 어떻게 이런 오랜 음악적 인연이 가능했을까?

 

Chapter 1. 강렬한 첫 인상

 

범수와의 만남은 그의 1집 <약속>을 발표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너도 들어서 알겠지만, 노래는 정말 잘해.”
진지한 표정으로 제작자였던 민혁이 형이 얘기했다.
“외모는 어때요?”
그냥 호기심에 물어본 나의 물음에 다시한번 민혁이 형이 얘기했다.
“노래 잘해. 일단 한번 만나봐.”

 

당시 청담동 신나라 레코드건물 2-3층이 범수의 기획사였고 그 곳에 있는 조그만한 녹음실에서 범수를 처음 만나기로 했다. 조금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으니 매니저처럼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꾸벅 인사를 하기에 그냥 인사만 받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민혁이형과 범수가 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뒤 도착한 민혁이형.

 

“어? 같이 있었네? 서로 인사 안했어?”

 

탈색한 머리, 깡마른 체구, 어찌보면 너무나 도전적여 보였던 범수의 첫인상은 강렬함 그것을 넘어섰다. 멋쩍은 듯 다시 한 번 범수가 인사를 해왔다.

“(힘찬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아…네가 범수구나…그래, 일단 노래한번 들어보자.”

 

그리고는 바로 부스에 들어가서 평소 연습하던 노래와 앨범에 수록된 노래를 쉼없이 불렀다. 그때까지의 목소리는 예상했던 대로 1집 음반을 위해 당시 작곡가로부터 훈련된 톤과 감성이었고, 나로서는 어색하고 와닿지 않았다. 나빠서가 아니라 진짜를 부른다는 느낌이 제대로 들지 않아서였다.

 

몇 곡을 부르고 나온 범수에게 지금 부른 노래 말고 평소에 좋아하는 노래가 없냐고 물어봤다.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하더니 연습곡도, 앨범에 실린 곡도 아닌 자기가 진짜 빠져서 즐기며 부르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를 듣고서야 가슴 한 귀퉁이에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이 아이가 진짜 보컬리스트가 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겠구나. 이 아이는 가지고 있구나, 진짜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그렇게 1집 음반이 발매되고 2집 음반에 들어가기 전 ‘하루’라는 곡을 썼고 이 곡을 제대로 표현하게 하기위해 6개월이라는 녹음시간이 소요되었다. 연애 경험도 풍부하지 않았고 사랑에 대한 상처와 아픔도 없는 아이에게 오직 자신이 가지고 있는 톤과 가슴 속 깊숙이 존재하는 감성, ‘슬픔을 제대로 연기하기’를 가르치기 위해 연습시키고 녹음하고를 반복했다. 호흡 하나, 음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말 그대로 달달 볶았다. 음악을 제 몸보다 사랑하는 그 아이는 불만 한마디 없이 깨우치려 노력했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루’가 세상으로 나왔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 사람들에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감성보컬의 대형신인을 알리게 되었다.

 

Chapter 2. 보고싶다

 

‘하루’의 성공이 있고 다음 앨범을 준비할 때는 비장을 넘어서서 의무감에 휩싸였다. 소위 말하는 ‘대형가수’를 만들고 싶었다. 심지어 업텝포음악까지도 완벽히 소화할 수 있는 제2의 김건모, 제2의 조용필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때의 ‘감정 제대로 연기하기’를 넘어선 ‘진짜 감성 가지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간접 경험이든 아니면 직접 경험이든 길지 않은 시간에 많은 자극과 경험을 주어야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뮤직비디오, 영화 등을 보여주며 음악 이전에 감성으로 이야기하고 느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곡을 범수를 위해 써 내려갔다. 10곡, 20곡, 범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쌓여가는 동안 나의 곡도 늘어났다.

 

드디어 제작자와 나, 모두가 만족하는 ‘타이틀곡’이 나왔다. 앞서 ‘하루’라는 곡이 그래도 많이 알려졌기에 그 분위기를 이어 마이너 곡을 만들었고 후렴구의 임펙트도 상당히 강한 곡이었다. 데모는 보통 내가 부르는데 데모를 듣고 울음이 난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가사가 나오고 드디어 녹음……

 

정말 단 한 줄도 마음이 들지 않았다.

 

힘들어했고 힘들게 들렸다. 임펙트가 센 그 곡은 범수 역시 부담감으로 더 세게 불러댔고 너무 세게 쥐면 결국 부러지듯, 듣기에도 힘든 곡이 되어버렸다. 결국엔 목이 완전히 가버려 몇 달을 노래 한마디도 부를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

 

목소리가 안 나와서 노래를 할 수가 없었기에 그 시간 동안 다시 감성 트레이닝에 집중했다. 그 즈음 내 솔로앨범 Soulist를 작업 중이었는데 내가 부를 생각으로 메이져곡 하나를 만들었다. 그런데 만들고 나니 왠지 범수에게 더 어울리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범수와 제작자형이 있을 때 혼자 피아노를 치며 흥얼거렸다. 후렴구에 채 들어서기도 전에 제작자형이 뛰어왔다.

 

“이 곡 뭐야? 범수줘~ 범수줘~”

 

작사가 윤사라는 그 노래를 듣는 내내 울면서 가사를 썼다고 한다. 그렇게 ‘보고싶다’의 녹음 준비가 끝났다. 거의 1년을 그렇게 준비작업으로 보냈고 가사와 편곡 작업까지 마친 후 드디어 보컬 녹음날. 범수는 부스에 들어간 후 단 30분만에 녹음을 완성하고 나와서 여느 때와 같이 언제 그런 감성을 표현했냐는듯 씩씩하게 밥을 먹었다.

 

디렉팅은 내가 ok하지 않으면 끝이 나지 않고 앞서 ‘하루’처럼 6개월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30분만에 완성된 ‘보고싶다’의 보컬녹음은 그동안 우리 모두가 심혈을 기울였던 ‘감성만들기’에 대한 보상같은 느낌이었다. 그 후 ‘천국의 계단’ OST에도 실리게 되면서 ‘보고싶다’는 아직까지 노래방 애창곡 순위 상위에 랭크되는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범수와 나의 대표곡이 된다.

 

윤일상김범수.jpg

 

Chapter 3. 끝사랑

 

범수의 소속사가 바뀌면서 우리가 함께하는 작업도 잠시 끊어지게 된다. 아마도 새로운 색깔을 표현하기 위한 범수만의 노력이 있었으리라. 그러다가 내가 시크릿가든의 OST작업을 하게 되면서 범수에게 딱 맞는 곡이 나왔고 우리는 다시 한번 ‘나타나’로 뭉치게 된다. 드라마의 히트와 더불어 그 곡은 범수의 업템포 히트곡이 된다. 그 여세를 몰아 다음 미니앨범을 준비했다.

 

범수는 지고지순 순정파였다. 세상물정 모르고 노래밖에 모르는, 그래서 내 핸드폰 범수의 이름은 ‘노래쟁이 김범수’이다. 그런 순정파 순수남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제 ‘이별’이 찾아왔다. 그 풀 스토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에겐 당시 범수의 감정이 어떤지 가슴으로 공감해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곡을 만들었고, 범수의 이별 이야기를 담아낸 가사를 입혀 바야흐로 리얼 스토리의 작품이 탄생했다.

 

‘끝사랑’

 

연습실에서 처음 범수의 목소리로 들은 ‘끝사랑’은 실로 감동 그 자체였다.

‘이제 정말 진짜를 노래하는구나.’
‘영혼을 노래하는 가수’, ‘비쥬얼 최강’ 김범수!

희노애락을 거치면서 발전되어 왔고 앞으로도 발전될, 지면으로 다 이야기 하지 못한 범수와의 스토리는 앞으로 발표될 음악에서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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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의 ‘갑툭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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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mama she told me dont worry about your size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사이즈 때문에 걱정하지 말랬어


She says, Boys like a little more booty to hold at night.
남자들은 밤에 안을 맛이 나는 실한 엉덩이를 좋아한다고

 

그의 노래에 어떤 고민이 담긴 메시지나 기교는 없다. 오히려 평범하고 낙천적이며, 어떤 부분에서는 치기 어리게 들리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이 부분이 중요하다. 메간 트레이너가 갖는 캐릭터가 바로 이 지점에서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치기와 솔직함, 당당함이 뒤섞인 틴에이지 감성의 결정체 - 여담이지만 이 대목에서는 그간 우리가 조숙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자문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델과 제이크 버그, 로드 등 그동안 우리가 열광하던 십대들은 언제나 어린 듯 어리게 볼 수 없는 '애어른'형 가수들이었으니까. 말하자면 메간 트레이너는 이 공식을 뒤집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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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과거 두왑 사운드의 재현이나 그의 싱어송라이팅을 능력을 거론하는 것은 초점을 잘못 짚은 것이리라 생각한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던 가장 큰 배경에는 유튜브, 더 나아가 소셜 네트워크의 세계가 있다. 맞다. 싸이의 경우처럼, 그 역시 시대를 타고난 가수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메간 트레이너와 동떨어진 캐릭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시아(Sia)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조심스레 예측하자면, 앞으로는 '멋'과는 거리가 먼, 좀 더 친숙한 이미지의 스타들이 다수 등장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캐릭터들이 뜨고 질 것이다. MTV 콘텐츠의 힘이 멋, 혹은 독특함에서 나왔다면, 유튜브와 소셜 네트워크 콘텐츠의 절대적 파워는 '재미와 감동'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의심이 간다면 지금 당신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인기 있는 콘텐츠가 어떤 것인지를 확인해 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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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의 송라이팅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전곡에 작사/작곡으로 참여한 첫 정규앨범 < Title >에는 처음 듣고도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팝'이 있으며, 그 방법론으로 두왑을 택한 것 역시 모험적인 요소였으니까. 다만 그의 성공요인이 그동안 시장에 없던 그의 캐릭터였으며, 그것을 알린 채널이 바로 유튜브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메간 트레이너는 최근의 시류를 제대로 탔다. 다만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시류를 탔기 때문에 단편적 현상으로 남을 공산도 크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역시 나이를 먹어갈 것이고, 지금의 철없는 소녀 캐릭터는 사라져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유튜브는 그런 그의 변화하는 모습과 대중의 피드백을 가감 없이 그대로 기록하겠지. 과거보다는 분명 몇 배나 부담스러워진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를 꿈꾸는 많은 뮤지션들은 캐릭터와 유튜브 콘텐츠를 통해 활로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많은 스타들이 뜨고 지며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앨범 시장은 앞으로도 계속 하락하고, 싱글 시장은 더욱 강세를 보일 것이다. 음악시장에도 '타임라인에서 주목받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들이 팽배해질지도 모른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음악시장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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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세대의 클래식(고전)을 대중적으로 향유할 수 없는 세대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메간 트레이너의 성공이 그것을 재확인할 수 있던 계기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더욱 즐거워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일반인이 페이지를 만들고, 스타가 되어 기회를 잡는 시대가 도래했다.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의 세상, 지금 당신의 타임라인은 누구의 콘텐츠가 장악하고 있는가.

 

2015/01 여인협(lunarianih@naver.com)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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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

 

"정말 물건이 나왔어."

 

흥분한 얼굴로 내게 말하던 형님들이 있었다. 좀처럼 나오기 힘든 목소리와 무대매너를 가진 가수를 발견했다며, 그녀의 폭발적인 성량과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에 대해 연신 쏟아내듯 이야기했다.

 

1992년, '기억 속으로'라는 곡으로 대중 앞으로 나서기 몇 년 전. 신촌블루스의 앨범에 참여하며 알려진 이은미라는 이름은 몇 해 동안 언더그라운드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당시 갓 데뷔한 작곡가인지라 풍문으로 떠도는 이 미스테리한 가수에 대해 그저 막연한 호기심만 가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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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나는 대중음악 작곡가로 오버그라운드를 대표하며 성장했고 은미 누나는 '맨발의 디바', '무대 위의 잔다르크', '라이브의 여왕' 이라는 애칭과 함께 라이브 음악계에서 자신의 영역을 굳혀 나가며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좀처럼 만나기 힘들 것 같아 보였던 두 사람이었지만,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는 중국 속담도 있지 않은가? 


2004년 어느날, DJ철이형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은미 누나가 나를 한번 보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두 분의 식사자리에서 대화 도중 자연스럽게 내 얘기가 나온 듯했는데, 누나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이 정말 듣기 좋았다. 그렇게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은미 누나를 드디어 만났고 그 첫인상은 실로 놀라웠다. 무대를 통해 보여온 강한 이미지 혹은 언론을 통해 접해온 직선적인 언변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은미 누나에게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독특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솔직히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본 은미 누나는 달랐다. 완벽히 겸손했고 너무나 온화했다. 거기다 음악적인 넓은 포용력까지 실로 기대 이상이었다. 박지윤의 'Steal Away'를 좋아한다며 내 작품에 대한 호감을 표현해 준 은미 누나와의 첫 만남은 마치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듯 놀랍고 행복했다. 그렇게 인연은 시작되었고 어느날 전화 한통이 울렸다.

 

2. 애인...있어요

 

누나의 6집 앨범에 함께하자는 연락이 왔다. 어느 라이브바에서 누나를 만났고 누나가 그리고 싶은 앨범에 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했다. 당시 누나는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지쳐있었고 여린 감성에 입은 상처는 극으로 항해가고 있었다. 무대를 맨발로 휘젓고 다니는 디바였지만 무대를 내려오면 상처받기 쉬운 여린 여자였고, 나는 그런 인간적이며 자연스러운 누나를 그려내고 싶었다. 모든 사람을 휘잡을 것 같은 외형보다는 마치 조금만 닿아도 상처 날 것 같은 속 살.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은미 누나와의 미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몇 곡의 스케치를 그렸고, 그 곡들이 만나 하나의 곡으로 완성되었다.

 

곡이 나왔고, 작사가에게 가사를 맡겨야 하는데, 머릿속엔 오직 한사람만이 떠올랐다. 이 곡을 진심으로 이해해 줄 사람. 나와 몇 곡을 작업한 후 돌연 몇 해 동안 잠적해 있었던 최은하 작가에게 메일을 썼다.

 

'음악을 들어보고 가슴이 움직이면 글을 보내줘.'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완성된 가사가 왔다.

 

'아직도 넌 혼자인 거니? 물어 오네요. 난 그저 웃어요. 사랑하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좋은 글 때문이었을까? 은미 누나와 나는 몰입해서 녹음을 했고 실로 몇번의 Take만에 '애인...있어요'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간 6집 Ma non tanto. 당시 모 유명 음악평론가는 나에게 "왜 '애인있어요'같은 곡을 이은미에게 줬냐? 왜 '보고 싶다'같은 곡을 주지 않았냐?"고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보고싶다'는 김범수의 노래이고 '애인있어요'는 이은미의 노래니까요.'라고 답했다.

 

'애인있어요'는 발표한 지 3년 뒤인 2008년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실리면서 다시 재조명을 받았다. 그 후로 수 년 간 노래방 애창곡 1위를 하며 긴 수명을 이어갔고, 지금까지도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보게 된 누나의 첫 콘서트.

 

누나의 라이브는 그 전에도 본 적이 있었지만 짧은 행사였고, '애인있어요' 발표 이후에 비로소 단독 콘서트를 처음 보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공연을 봤고 직접 연출도 해왔던 나였지만 은미 누나의 콘서트는 그야말로 이은미 아니면 안 되는 이은미만의 공연이었다. 무대 위는 오직 이은미만이 보였고 터져나오는 목소리는 심장을 내리쳤다. 그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엔 한없이 부족할 뿐이다. 정말 누나의 공연은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봐야만 한다. 

 

여담으로, 평소 가수 이은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던 친한 누나 한 분을 일부러 은미 누나의 공연에 모시고 갔는데 공연을 다 보신 후 얼굴이 빨개져서 흥분하며 "뭐 저런 가수가 다 있냐!!!"며 크게 감동을 받으셨고, 그때부터 가수 이은미의 팬이 된 후, 두 분은 지금까지도 절친한 사이로 지내고 계신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은미 누나와의 음악 인연은 다음앨범 '소리위를 걷다'에서도 이어졌다. 드라마도 시리즈가 있듯 이은미 앨범에도 시리즈가 있다. '애인있어요' 속의 여자 이야기는 다음 앨범에서 '헤어지는 중입니다', '결혼 안하길 잘했지'로 이어진다. 가사는 계속 최은하 작가가 썼는데 '애인있어요'와 '헤어지는 중입니다', '결혼 안하길 잘했지'의 스토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이 곡들을 한번 이어서 들어보길 추천 드린다.

 

3. Nocturne

 

이상하게 은미 누나의 앨범 발매 시기는 내 인생의 행로의 중요한 시점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내 인생을 송두리 채 바꿔버린 여인인 현재 내 아내를 만나 그것에 대한 영감으로 곡이 하나 만들어졌고, 그 곡이 바로 Nocturne이었다. 가사가 슬픈 느낌으로 채워지긴 했지만 원래 이 곡을 쓸 때 나의 느낌은 '사랑의 찬가'를 만들자였다. 실제로 이 곡을 아내에게 처음으로 들려 준 날 첫키스를 하기도 했다. 결혼 전 외로움과 슬픔의 정점에서 쓴 곡 '죄인'과 사랑에 대한 찬미를 그린 녹턴은 어찌 보면 은미 누나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 밖에 나간 나의 수필 같은 음악이기도 하다.

 

그 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란 곡으로 함께 고 노무현대통령을 추모하기도 했고, 나의 쌍둥이 아이들이 태어난 시점에 설레고 들뜬 복합적인 나의 마음을 '가슴이 뛴다'라는 곡에서 누나와 공감하기도 하였다. 이 곡의 원래 제목은 '가슴이 운다'로, 곡을 만들며 가사를 동시에 내가 직접 썼다. 그 후 누나와 함께 가사를 수정해 나가며 '가슴이 뛴다'로 제목과 글의 이미지가 바뀌기도 했다. 누군가의 의견이 곡의 원래 의도와 변환되어 진행되는 경우는 나에겐 좀처럼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은미 누나이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그만큼 가수 이은미는 내게 각별한 존재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최근 누나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누나와 내가 함께 손잡고 걸었던 길을 되돌아봤는데, 난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이 느껴진다. 더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이야기를 나누며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고, 드러내지 못했던 누나의 아픔과 기쁨을 고스란히 음악으로 기억되게 하고 싶은 욕심이 크기 때문이다.   

 

11년 동안의 누나와의 음악적 인연이 앞으로 또 어떻게 발전되어지고 펼쳐질지 모르기에 더 기대가 된다. 이렇듯 난 아직 가수 이은미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사막의 방광 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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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라조의 <니 팔자야>를 처음 듣는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몇 년전 용하다는 점쟁이를 만난 기억이었다. 친구 지인의 지인의 잘 모르는 사람인데 어째선지 모든 걸 맞춘다고 했다. 나와 우연히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된 그는 범상치 않은 역학 지식과 예지력과 직관력을 가진 것임에 틀림없는 눈빛과 기세를 하고 내게 딱 잘라 말했다.

 

 “오줌 마려우면 못 참지?”


 나는 즉시 빵 터졌다. 실례였지만 몹시 웃겼다. 아니 오줌 마려운데 누가 참는다고. 용하다는 사람이 겨우 그런 거나 맞추고 앉아있다니. 


 그런 일이 있고 한참 뒤 나는 기획 프로젝트로 몽골에 여행 갔다가 그 점쟁이의 말을 새롭게 상기해야 했다. 장소는 고비 사막 한복판에 있는 만년 얼음의 신비한 계곡 ‘욜린암’이었다. 말 타고 한참 들어가 계곡입구에 진입했을 때 나는 투어를 진행하는 몽골인 가이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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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갑자기 오줌 마려운데 여기서도 자연을 이용하면 되나요?”


 가이드가 즉시 정색했다. 


 “아니오! 절대 싸면 안돼요. 여기서 오줌 싸면 한 달 안에 죽어요. 여긴 굉장히 신성한 장소예요.”


 고비 사막과 몽골 초원에서 대자연이 아닌 화장실을 쓴 적이 거의 없었는데 농담인가 싶었지만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전날 밤 함께 보드카를 마시며 끝없는 저질 농담 레이스를 겨룰 때와는 정반대 태도였다. 


 “네? 진짜 죽나요?”


 “예. 여긴 산양들이 다음 세계로 가는 곳이에요. 전에 한 유럽관광객이 여기서 오줌 쌌다가 갈 때 비행기가 추락했대요.”


 “어우 저런!”


 요의가 쏙 들어가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계곡에는 빈 PET병이나 담배꽁초가 잔뜩 버려져 있었다. 저런 걸 막 버린 사람은 괜찮나 의문이 들었다. 사실 산등성이에 산양들의 실루엣 같은 바위들이 보이는 것 말고는 신성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저 대자연일 뿐이고 동물들은 거기서 다 볼일 보는데 인간만 규제한다니 샤머니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목숨이 걸릴 정도로 중요한 사항이면 계곡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성인답게 참기로 했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그 웃긴 점쟁이의 말이 불현듯 떠오르더니 방광에 무한 반복되는 게 아닌가.

 

 오줌 마려우면 못 참지? 오줌 마려우면 못 참지? 오줌 마려우면 못 참지….

 

 이게 뭐야 젠장. 나는 집요한 요의를 잊기 위해 깔끔한 도시인처럼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그런데 재생 목록에서 엘비스 코스텔로의 <쉬(She)>가 나왔다. 아아, 왜 하필… 하필이면. 그 음악을 듣자 갑자기 요의를 참을 수 없어 미칠 것 같았다. 질질 끌 문제가 아니었다. 평소에 안 그랬는데 어쩌다 이런 일을 그때그때 해결해야 하지 않으면 곤란한 사람이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유야 모르겠고 가이드를 따라 계곡 안쪽까지 들어가는 동안 나는 방광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계곡을 건너다 발을 헛디뎌 신발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빠져버렸다.

 

 “세상에, 발 시리죠? 말리고 천천히 오세요. 얼음 계곡은 저 모퉁이 끝에 있어요. 우린 거기서 기다릴게요.” 


 가이드가 말했다. 감각이 없을 만큼 발이 시렸다. 일행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신발을 벗고 양말을 말렸다. 그런데 구조적으로 매우 적절해 보이는 구석진 바위틈이 보이는 게 아닌가. 싸야했다. 아아, 나는 미안하지만 거기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부디 한 번만 자비를, 신성한 곳에서 바지에 싼 다음 울고불고 할 수는 없잖아요.’ 뇌까리며 청바지 단추를 풀었다.

 

 “아아 쌀 것 같았는데 이제야 살 것 같아.”


 그런 안 웃긴 언어유희가 바로 생각날 만큼 당장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정상의 인격으로 돌아온 나는 흔적을 남긴 자리에 대한 문명인으로서의 수치심을 느껴 손 바가지로 계곡물을 떠다 몇 번이고 바위틈을 씻어냈다. 손 시려 죽는 줄 알았다. 아, 그런데 그 계곡에선 신기하게도 젖은 양말이 금방 말랐다. 내가 볼일을 본 자리도 몇 분 만에 흔적도 없이 말짱해져 있었다. 그런 곳에서 계곡물이 어떻게 안 마르나 놀라울 지경이었다. 몹시 건조한 곳이거나 몹시 신비한 곳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거룩한 곳에서 일을 저질렀으니 가이드가 말한 죽음이라는 낱말이 머릿속에 뚜렷이 명멸했다.

 

 “흥, 인간이란 언젠가는 죽는 거야.” 그런 혼잣말로 무서움을 떨치려 애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게르(유목민의 이동식 집)에서 자는데 곤충의 습격을 받았다. 느낌이 이상해 깨 보니 내 게르 안에 새카맣게 나방 떼가 날아들어 있었다. 나방들은 날갯짓으로 하나같이 나를 힐난하는 것 같았다. 끝없는 초원 어디서 이렇게 많은 나방이 날아왔을까. 이것이 저주의 시작인 걸까. 내겐 바퀴벌레 다음으로 끔찍한 게 나방인데 혼비백산해 게르 문을 열고 달아났다. 어쩐지 나무 문짝이 푹신하다고 생각했는데 거기 나방이 빽빽하게 달라붙어있어 그런 거였다. 으아아아 손을 털며 캄캄한 어둠속으로 뛰다 나는 내 발에 걸려 자빠졌다.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손을 짚었는데 앞에 뭔가 있는 것 같았다. 라이터를 켜 보니 고깔 모양의 뾰족한 원통뿔이었다. 손을 짚지 않았다면 내가 뛴 속력의 관성과 자빠지는 중력을 합친 힘으로 그 뿔에 미간을 폭 찔렸을 것이었다. 어째서 사막에 이런 게 세워져 있지? 왜 하필 거기서 자빠졌지? 신기하고 무서워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저주 때문인지 나방 가루 때문인지, 얼굴을 찔릴 뻔했기 때문인지, 다음 날 나는 눈에 커다란 다래끼가 생겨버렸고 한 쪽 눈을 뜨지도 못하고 눈퉁이 반탱이 상태로 남은 일정을 여행해야 했다. 아무래도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일이 내게 일어나는 중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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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금지된 곳에서의 방뇨라는 중대 잘못을 저질렀으니 고난을 당하며 죽더라도 억울하진 않을 것 같았다. 다만 겁에 질려 죽고 싶지는 않았다. 무서움을 극복할 게 필요했다. 내게 그런 도움을 줄 건 역시 음악뿐이었다. 가져간 음악은 몇 곡 되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 엘비스 코스텔로의 ‘쉬’를 들으면 이상하게 자꾸 오줌 마려운 증상이 반복되었다. 신기했지만 ‘쉬~’ 할 때마다 웃겨서 죽음이나 저주의 공포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웃겨도 꼭 일차원적으로 방광이나 방귀 같은 걸로 웃기는 내 팔자가 한숨 섞인 쓴 웃음을 짓게 하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웃긴 걸 너무 좋아하며 살아온 나머지, 웃을 때 방광에 힘이 자꾸 들어가서 그 용적량이 계속 작아지나 추론해보기도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만큼 내가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게 더욱 웃겼다.
 
 …아아 어쨌든 그로부터 이제 3년이 지났다. 이렇게 칼럼을 쓰는 걸 보면 아직 안 죽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는 지금도 마음 한 쪽이 불편하고 서늘해지며, 남의 나라 신성한 장소에 볼 일을 본 게 죄송스럽다. 내가 차가운 계곡물을 퍼서 수세식으로 뒤처리를 잘 했기 때문에 영험한 욜린암이 봐준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엘비스 코스텔로의 감미로운 음악이 그 일 때문에 자꾸 웃기게 들리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곡은 엘비스 코스텔로가 아니고 얼마 전 신작 뮤직 비디오로 우리를 충격과 공포에 빠트려버린 ‘노라조’ 얘기다.
 <니 팔자야> 이 뮤직비디오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도대체 이게 뭐야? 하는 감정에서 출발해 약 빨았나? 드디어 미친 건가? 등등으로 감정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 같은 광팬은 급기야 이 음악을 무한 반복하며 봄을 기다리게 되었다.
 
 노라조는 그동안 내 삶을 웃고 울린 음악들을 만들어왔다. 인생살이가 힘들다고 느낄 때 <형(兄)>을 들으면 매번 눈물이 찔끔 났고, <롹가수>를 들으면 눈물이 펑펑 났고, <슈퍼맨>, <고등어> 등등 그들 특유의 기괴하고 유쾌하며 롹정신 가득한 전위적인 히트곡을 들을 때마다 속이 시원했으며, 가장 좋아하는 곡인 <포장마차>를 포장마차에서 들으며 빚더미에 빠진 나를 달래곤 했다. 그들이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샘플링한 이번 신곡은 내게 과연 용한 점쟁이처럼 말한다.

 

 ‘가슴 쫙 피고 어깨 쫙 피고 완전 쫙 피는 인생 이것이 바로 니 팔자야 아 대박 왕 대박 또 대박 걱정은 개나 줘’

 

 ‘오줌 마려우면 못 참지?’ 에 비하면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언이란 말인가! 내가 노라조의 팬인 건 팔자인가보다. 음악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가공할 뮤직비디오 또한 이렇게 훌륭한 전위예술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줬다. 얼마나 황홀한 보너스란 말인가. (최면에 걸린 걸지도 모르겠지만) 노라조가 나날이 똘끼를 더해가며 존재감을 자랑할수록 대중음악의 식상한 천편일률에 대한 실망을 잊을 수 있어 나는 노라조가 너무 너무 너무 좋다.

 

 

 

 

 그러고 보니 노라조 음악을 전부 챙긴 다음 쫙 펴진 몽골 초원에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내 잘못을 눈감아준 욜린암에 감사 인사도 할 겸. 빌어먹을 방광 걱정은 개나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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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색채의 마술사 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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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본 영화 중에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여주인공은 줄리아 로버츠였는데, 의처증 있는 남편 역으로 나왔던 남자 배우가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는군요. 어쨌든 20여 년 전에 본 이 영화에서 아직도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남편의 정리벽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욕실에 물 한 방울 떨어진 것도 못 견디는 성격이지요. 집안의 모든 사물이 정확하게 정돈돼 있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런 그가 욕실에 타월을 걸어두는 장면을 카메라가 근접 촬영합니다. 흰색 타월을 정확하게,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이등분해서 걸어두는 장면입니다. 물론 남자 주인공의 결벽적 캐릭터를 드러내려는 감독의 의도였겠지요. 

 

오늘 우리가 만나려는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도 집안을 깔끔하게 정리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는 작고 정교한 물건을 모으길 좋아하는 이른바 ‘소품 애호’ 취향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파리에서 1시간쯤 떨어진 몽포르 라모리에 라벨이 1920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집이 있는데요, ‘르 벨베데르’라고 불리는 그 집은 라벨의 마지막 생애를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작은 방들과 일본식 정원, 사진과 그림 액자들, 작은 골동품들, 심지어 라벨이 썼던 화장품과 향수병들까지도 생전 그대로 놓여 있다고 합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집’처럼 말이지요.

 

그렇다고 라벨이 다른 이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을 정도로 특이한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그런 내용을 담은 기록들을 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깔끔하고 세심한 성격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150cm의 작은 키였던 그는 늘 깔끔하게 정돈된 헤어스타일에 세련된 옷차림이었고 하지요. 르 벨데베르의 정원에서 찍은 말년의 사진에서도 나타나듯이 그는 담배를 즐겼고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사진 속의 그는 나비넥타이를 맸고,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작은 짐승 한 마리를 안고 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그는 평생토록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양음악사에서 결혼하지 않았던 음악가들은 허다하지요. 라벨이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그는 법적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에 대해 담을 쌓고 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몇 차례의 연애가 있었고 사창가 출입도 종종 했다고 전해집니다. 한데 이 사창가 출입이라는 것은 당시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매우 흔한 일이었지요. 라벨보다 50년쯤 먼저 태어난 시인 보들레르는 사창가에 수많은 ‘애인’들이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종종 외상을 지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가 남겨놓은 잡기장을 보면 여성의 이름 옆에 그 외상값을 죽 적어놓고 있기도 합니다. 마리 5프랑, 줄리엣 3프랑… 하는 식으로요.

 

자, 이제 라벨의 음악 속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가 라벨의 음악을 들으면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드뷔시와 더불어 프랑스 근대음악의 양대 산맥이라는 점이겠지요. 두 사람이 주도했던 프랑스 근대 음악의 특징을 한마디로 ‘감각적인 음악’이라고 요약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웃 나라인 독일?오스트리아에서도 말러가 과거보다는 훨씬 감각적인 음악을 구사하고 있었지만, 드뷔시나 라벨에 비하자면 말러의 음악은 여전히 ‘생각이 많은 음악’이라고 해야겠지요. 어쩌면 그것은 독일과 프랑스의 사고방식, 혹은 문화적 태도의 차이 같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드뷔시가 했던 유명한 말을 잠시 떠올려봅니다. 이렇게 말했지요. “음악으로 사람들을 생각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귀를 열고 듣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말하자면 이 말은 ‘음악이란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다. 감각적으로 느끼면 된다’라는 뜻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드뷔시는 <내 인생의 클래식 101>에서 이미 여러 번 언급했기에 이 지면에서 길게 재론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른바 ‘인상주의’로 불리는 감각적인 프랑스 근대음악의 문이 그에게서 열렸고, 열세 살 아래의 라벨이 그 바통을 이었다는 점은 기억해두면 좋겠습니다.

 

인상주의의 요체인 ‘음악의 회화성’은 라벨에게서도 고스란히 발견됩니다. 예컨대 라벨은 1901년 작곡했던 <물의 유희>(Jeux d’eau)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나는 떠들썩한 폭포, 분수,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서 이 곡의 영감을 얻었다.” 이 곡보다 3년 뒤에 작곡했던 <거울>(Miroirs)도 감각적인 인상주의 수법이 돋보이는 음악이지요. 모두 5곡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2곡 ‘슬픈 새들’(Oiseaux tristes)에 대한 라벨의 언급이 흥미롭습니다. “이 새들은 여름의 가장 더운 시간에 아주 어두운 숲 속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

 

이렇게 인상주의적 회화성을 보여주는 라벨의 음악들은 허다합니다. 1907년 작곡한 <스페인 랩소디>(Rapsodie espagnole)도 다채로운 음색으로 인상주의적 화폭을 펼쳐놓고 있고, 이듬해에 작곡한 피아노 걸작 <밤의 가스파르>(1908)도 1악장 ‘온딘’(물의 요정)에서 물의 이미지를 화려하고 난해한 테크닉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한데 라벨이 드뷔시와 더불어 프랑스 인상주의의 계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라벨만의 독창성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다시 말해 라벨의 음악은 회화를 지향하면서도 드뷔시와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앞에서 함께 들었던 드뷔시의 음악들, 예컨대 <달빛><바다><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같은 음악들은 어땠나요? 그렇지요. 굉장히 몽환적이고 불투명합니다. 언어에 비유하자면 음절과 음절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듯한 화성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반면에 라벨의 회화는 보다 투명하고 분명하지요. 어찌 들으면 건조하고 날카로운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드뷔시의 음악이 일부러 윤곽선을 흐릿하게 뭉개놓은 그림이라면, 라벨은 좀더 분명한 색감과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교한 것, 또 깔끔한 것을 좋아했던 라벨의 기질이 그렇게 음악에 투영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드뷔시에 비해 훨씬 율동감이 강조돼 있는 곡들이 많습니다.

 

또 한 가지 라벨의 음악적 특징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국풍(異國風)이지요. 특히 스페인의 분위기가 물씬한 곡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 스페인적 정서라는 것이 프랑스 음악에서 라벨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닙니다. 조르쥬 비제(1838~1875)는 스페인을 배경으로 삼은 유명한 오페라 <카르멘>을 작곡했고, 에마뉘엘 샤브리에(1841~1894)도 스페인 풍의 음악을 많이 썼습니다. 라벨도 바로 그 샤브리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요. 특히 20대 초반에 그랬습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은라벨이 스물네 살에 썼던 곡인데 “샤브리에로부터 받은 영향이 짙다”고 스스로 고백했을 정도입니다.

 

물론 라벨의 스페인 풍에는 더 뿌리 깊은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1875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지역인 바스크 지방의 시부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피레네 산맥 근처입니다. 아버지인 피에르 조제프 라벨은 스위스 태생의 철도 토목기사였고, 어머니 마리 들루아르는 대대로 바스크에서 살아온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프랑스보다 스페인 쪽에 훨씬 가까운 혈통이었지요. 라벨이 선호했던 스페인 풍은 바로 거기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유추됩니다. 물론 그는 생후 3개월의 갓난아기였을 때 부모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지요. 하지만 평생토록 외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거기에는 어머니와의 특별한 애착 관계도 깔려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는 라벨이 42세였을 때 세상을 떴는데, 라벨이 평생 결혼하지 않은 배경에는 그 어머니와의 강한 애착이 깔려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 얘기가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이진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라벨의 특별한 기질이 어머니와의 애착과 무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28년 작곡했던 <볼레로>(Bolero)바로 그 스페인 풍을 진하게 느끼게 하는 음악입니다. 뿐만 아니라 라벨이 남긴 음악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유명한 곡으로 손꼽힙니다. “1928년, 이다 루빈슈타인의 요청에 따라 나는 관현악을 위한 <볼레로>를 작곡했다. 상당히 느린 무곡으로 선율, 화성, 리듬이 시종일관 반복되며, 특히 리듬에서 작은 북소리가 끊임없이 뒤따른다. 이 곡에서 변화의 요소는 관현악 합주 부분의 크레센도밖에 없다.”

 

라벨은 이 곡을 작곡했던 해에 한 음악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구술해 기록합니다. 그가 사망한 이듬해인 1938년에 ‘자전적 소묘’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발표되지요. 앞의 인용문은 그 중의 한 대목입니다. 사실 오늘 이 지면에서 인용한 라벨의 언급이 대부분 그 ‘자전적 소묘’에 등장하는 것들입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이다 루빈슈타인(Ida Rubinstein, 1888~1960)은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나이지요. 말하자면 그녀가 발레를 위한 음악의 작곡을 라벨에게 요청했던 것이지요.

 

‘볼레로’는 18세기에 생겨난 스페인의 전통춤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곡이 실제 볼레로가 지닌 리듬이나 템포와 다르다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생전의 라벨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며 일축했다고 합니다. 연주시간 15분가량의 이 관능적인 음악은 작곡된 그 해에 파리오페라극장에서 발레 공연으로 초연돼 엄청난 인기를 얻습니다. 라벨 스스로 설명했듯이 작은북이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한 리듬을 반복하지요. 그와 동시에 두 개의 선율 주제를 계속 반복하면서 점차 음량이 고조됩니다. 바로 그 음량의 점차적 고조, 라벨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관현악 합주 부분의 크레센도”가 이 음악의 유일한 변화입니다. 어찌 들으면 매우 단순한 음악하지요. 하지만 귀 기울여 들으면 음색의 변화가 매우 미묘합니다. 역시 라벨은 ‘색채의 마술사’라는 느낌을 절로 갖게 만드는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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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클뤼탕스,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

  /1961년/Warner Classics

 

가장 보편적으로 애청돼온 녹음이다. 벨기에 안트워프 태생의 앙드레 클뤼탕스(1905~1967)는 샤를 뮌슈와 더불어 프랑스 관현악에서 일가를 이룬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61년부터 이듬해까지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라벨의 관현악 전곡을 녹음했다. 이 음반은 그중의 하나다. 라벨 음악의 색채감을 빼어나게 구현해내고 있는 명연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물감을 덧씌워 음악의 격을 떨어뜨리는 장면은 전혀 없다. 절제와 균형을 잃지 않는 고품격의 연주다. 특히 관악기 파트의 연주가 고급스럽다. 템포는 약간 느린 편이다. ‘볼레로’와 함께 ‘스페인 랩소디’, ‘어미 거위’, ‘쿠프랭의 무덤’, ‘파반느’ 등을 수록했다.

 

 


샤를-뮌슈.gif▶샤를 뮌슈, 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1962년/RCA

 

샤를 뮌슈(1891~1968)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휘자다. 그가 녹음한 ‘볼레로’는 두 종이 거론된다. 1962년 보스톤 심포니를 지휘한 것, 또 1968년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음반도 수작의 반열에 올라 있다. 특히 1968년 녹음은 클뤼탕스가 암으로 타계해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가 해체된 후, 다시 오케스트라를 재건해 파리 오케스트라로 명명한 직후에 뮌슈가 지휘봉을 들었던 연주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 해 뒤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두 연주가 모두 훌륭하지만 이 지면에서는 1962년 녹음을 권한다. 앞서 추천한 클뤼탕스의 해석과는 완전히 맛이 다른 남성적 호연이다. 템포는 빠르고 리듬은 힘차게 도약한다. 라벨의 음악으로는 ‘볼레로’ 외에 ‘라 발스’와 ‘스페인 랩소디’, 또 드뷔시의 ‘영상’을 함께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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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대의 쇼, 슈퍼볼 하프타임 쇼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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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1억 명의 시청자, 143억 달러가 쏟아지는 밤, 6,000달러에 육박하는 티켓값, 100억 원을 들여야만 차지할 수 있는 1분 광고. 미국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이자 지상 최대의 이벤트, 미국 프로미식축구 리그의 결승전 슈퍼볼(Super Bowl)이 임박했다. 현지 시각으로 2월 1일, 한국 기준으로 2월 2일 오전 8시 30분 애리조나 유니버시티 오브 피닉스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이번 49번째 빅 이벤트를 하루 앞두고 미국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다. 미식축구가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그저 남의 잔치일 뿐이지만, 압도적인 물량공세와 어마어마한 파급력에 한 번쯤 가십난에서 관심 깊게 접할 수 있는 행사이기도 하다.

 

음악 애호가들이라면 절대 슈퍼볼을 놓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바로 4쿼터제인 경기 중간 하프타임에 펼쳐지는 장대한 콘서트, 슈퍼볼 하프타임 쇼(Superbowl Half Time Show)다. 초창기 마칭 밴드나 전문 퍼포먼스 팀의 몫이 말 그대로 음악계의 슈퍼 아티스트들로 옮겨지며 해마다 환상적인 10분의 콘서트가 펼쳐진다. 미국에,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무대지만 입이 벌어지는 엄청난 무대와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 아티스트들의 열정은 한 해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뽑을 만하다. 아무나 설 수 없지만 전설들에는 증명의 자리가 되고, 신예 팝스타들에게는 검증의 자리가 되는 슈퍼볼 하프타임 쇼. 그 매력을 물씬 느낄 수 있는 10개의 베스트 퍼포먼스를 소개한다.

 

* 2015년 2월 2일 슈퍼볼 하프타임 쇼의 주인공은 케이티 페리와 레니 크라비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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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 1993년 슈퍼볼 27

 

슈퍼볼 하프타임 쇼의 출발이자 영원한 상징. 하프타임 쇼 최초의 단독 퍼포머가 된 마이클 잭슨의 10여 분은 미국 TV 방송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유명한 「Dangerous」 포즈로부터 출발하며 「Jam」 「Billy jean」, 「Black and white」의 연타석 히트가 작렬한다. 그 후의 5분간은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다. 관중석의 카드 섹션과 지구촌 합창단의 「We are the world」와 「Heal the world」는 백 번 설명보다 한 번 영상을 추천한다. 마이클 잭슨은 영원한 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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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나 로스/ 1996년 슈퍼볼 30

 

30주년을 맞은 슈퍼볼의 선택은 아메리칸 사운드의 상징 모타운이었다. 단독 퍼포머로 낙점된 모타운의 여제 디아나 로스는 무려 열곡을 소화하며 살아있는 신화를 증명했다. 「Stop! In the name of love」, 「You can't hurry love」 등 슈프림스 시절의 곡들뿐만 아니라 「Ain't no mountain high enough」, 「I will survive」 등의 선곡에서 알 수 있듯 말 그대로 모타운의 역사를 총망라했다. 2년 후 1998년 모타운 40주년을 맞아 또 다시 슈퍼볼은 스모키 로빈슨, 템테이션스 등과 함께 모타운을 기렸지만 확실한 각인은 1996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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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비 원더 & 글로리아 에스테판 / 1999년 슈퍼볼 33

 

라틴 리듬이 팝 시장을 정복한 세기말 팝 시장은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 쇼 슈퍼볼에까지 입지를 굳혔다. 이른바 '소울, 살사, 스윙에 대한 헌사'로 기획된 33회 하프타임 쇼에는 전설 스티비 원더, 라틴 팝의 여왕 글로리아 에스테판, 스윙 리바이벌 밴드 빅 배드 부두 대디와 아프리칸 랩퍼 사비온 글로버가 무대를 꾸몄다. 특히 후반부 스티비 원더와 글로리아 에스테판이 함께 꾸민 「You'll be mine - Another star - My cherie amour」 메들리는 그야말로 열정의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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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싱크, 에어로스미스, 브리트니 스피어스, 넬리, 메리 제이 블라이지 / 2001년 슈퍼볼 35

 

1991년의 뉴 키즈 온 더 블록 이후 최초의 아이돌 퍼포먼스. 틴 팝이 시장을 장악했던 그 시절 최고의 스타 엔싱크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출연은 기정사실이었다. 여기에 당시 최고의 랩퍼 메리 제이 블라이지와 넬리도 더해졌지만, 정점을 찍은 것은 영화 < 아마겟돈 > OST 「I don't want to miss a thing」으로 시장에서 부활에 성공한 아메리칸 하드록의 전설 에어로스미스였다. 최첨단 리스트에 경륜이 더해진 성대한 축제는 모두가 어우러진 「Walk this way」로 역사에 그 모습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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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 / 2002년 슈퍼볼 36

 

9/11 테러 참사가 미국을 삼켰던 2002년, 2000년과 2001년 그래미를 2년 연속 수상한 U2는 음악으로 멍든 미국의 마음을 치유했다. 끝없이 올라가는 테러 희생자들의 명단과 함께 울려 퍼지는 「MLK」,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에서 보노는 가슴에 하트를 그리며 ‘Love‘를 외친다. 성조기가 그려진 재킷 안을 들어 보이며 끝을 맺는 장면은 미국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을 합당하게 받아들일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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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 롤링 스톤즈, 더 후 / 2005년, 2006년, 2010년 슈퍼볼 39, 40, 44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는 종종 엄청난 전설들이 등장해 음악의 역사를 그대로 증명하곤 한다. 그리고 이는 미국 본토가 아닌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시대에도 동등하게 적용된다. 2005년 폴 매카트니로 비틀즈를 소환해내더니 2006년에는 롤링 스톤즈를 불러냈고, 2010년에는 피트 타운젠트와 로저 달트리의 더 후를 역사 속에서 끄집어냈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역사의 기록으로도 슈퍼볼 하프타임 쇼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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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 / 2007년 슈퍼볼 41

 

프린스의 라이브는 언제나 전설로 회자한다. 41회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도 그는 유감없이 명불허전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 유명한 「We will rock you」의 짧은 커버를 시작으로 프린스는 「Let's go crazy」, 「Baby I'm a star」의 히트곡 속으로 달려든다. 특히 CCR의 「Proud mary」, 밥 딜런의 「All along the watchtower」, 푸 파이터스의 「Best of you」 등 타 아티스트의 곡을 커버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자신에게도 '생애 최다 관중들' 앞에서였던 공연은, 정말로 비에 젖은 그라운드에서 거대한 실루엣과 함께 「Purple rain」으로 끝을 맺었다. '가장 위대한 퍼포먼스'라는 찬사를 가장 많이 받는 하프타임 쇼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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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스프링스틴 & 이 스트리트 밴드 / 2009년 슈퍼볼 43

 

미국의 상징, 더 보스(The Boss),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그의 이 스트리트 밴드(E-Street Band)보다 슈퍼볼에 어울리는 아티스트는 없다. 화려한 퍼포먼스 팀 대신 관중들과의 소통을 택한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그야말로 무대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늘 그러하듯 최고의 라이브를 선보였다. 모두가 하나 되어 합창했던 「Born to run」과 「Working on a dream」의 임팩트와 「Glory days」의 무아지경 공연을 보고 나면 곡 중간의 'It's Boss Time!'이라는 외침이 이보다 더 선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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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세 & 데스티니스 차일드 / 2013년 슈퍼볼 47

 

음악으로는 < Beyonce >였지만 진정한 비욘세의 월드 팝 여왕 대관식은 2013년의 슈퍼볼 하프타임 쇼였다. 「Love on top」, 「Crazy in love」, 「Halo」 등 이름만 들어도 척척의 히트곡 퍼레이드의 향연과 눈부신 퍼포먼스, 여기에 구(舊) 데스티니스 차일드 멤버들의 등장으로 자신의 음악 인생을 자축했다. 이들과 함께한 「Bootylicious」, 그리고 「Single ladies」는 그야말로 압권. 비욘세에게 슈퍼볼 하프타임 쇼는 전설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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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마스 & 레드 핫 칠리 페퍼스 / 2014년 슈퍼볼 48

 

 여러 우려와 논란을 실력으로 증명해낸 케이스. 직접 드럼 스틱을 잡고 화끈한 오프닝을 만들어내더니 2013년 한 해를 점령했던 히트곡 퍼레이드로 무아지경의 축제를 빚어냈다. 「Runaway baby」에 이어 등장하는 '차력사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Give it away」로 특유의 화끈한 무대를 펼치며 화끈한 무대에 힘을 더했다. 모든 미국인을 위한 송가 「Just the way you are」로 무대가 마무리되고, 브루노 마스는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2015/02 김도헌(zener1218@gmail.com)

 

메탈리카는 에너지를 촉진하는 노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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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를 때렸다. 굉장히 저렴한 반면 놀라울 만큼 상태가 안 좋은 집을 구했다. 싸고 훌륭한 집이란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 이사할 때마다 그랬듯 이번에도 싸고 엉망인 집을 리폼해서 잘 버텨보는 걸로 선택했다.

 

 이삿짐을 올린 직후부터 나는 정리할 겨를도 없이 집을 꾸며나갔다. 사람을 쓰면 돈이 드니까 페인트 몇 통 사서 시작한 셀프 인테리어 작업이었다. 친구들이 인테리어로 밥벌이를 하지만 그들도 먹고살기 빡세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가 암만 작가라도 친구들이 홍보 문구를 부탁했을 때 마감에 쫓겨 도움이 안 됐던 것과 마찬가지니 할 말 없었다.

 

 서울 접근성을 과감히 포기하고 집을 원룸에서 투룸으로 바꿨더니 넓어서 공사기간이 질질 끌렸다. 이사 오기 전 이 칼럼을 썼고 공사 끝난 뒤 이 칼럼을 다시 쓰니 2주를 잡아먹힌 셈이다. 더구나 집이 워낙 낡아서 손볼 곳이 많았다. 내 경험치와 기술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재료나 장비를 살 돈은 그보다 더 엽기적으로 부족했지만 핑크색이 난무하는 공간에 남자 혼자 살기는 너무 민망해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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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서 나는 내내 중얼거렸다. 17년밖에 안 된 빌라가 어떻게 이만큼 낡을 수 있지? 아아 더구나 전에 살던 사람은 얼마나 삶이 각박했거나 방만했던 것인가?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나는 내 17년전 과거를 떠올렸다. 집을 탓할 게 아니었다. 17년 전의 팽팽하고 총명하던 나에 비해 지금의 나는 대단히 각박하고 방만한 상태다. 특히 피부가 그렇다ㅠㅠ 그땐 열 번 웃기면 세 번 이상 성공했는데 지금은 한 번도 웃기기 힘든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토록 형편없는 몰락이 어디 있다고 집이 좀 낡은 걸 탓하랴.

 

 나는 곰팡이에 점령당한 베란다를 탈환하고, 미친 핑크색 문을 칠하고 때가 덕지덕지 탄 벽을 하얗게 만들며 지난 17년간 늙어간 내 나이를 덮고 싶다는 심정을 대입했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동기 가지고는 일할 당위성과 에너지가 쉽게 부여되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지쳤고, 포기하고 싶었다.
 
 아니 무슨 내 것도 아닌 월세집을 꾸미고 앉았지? 기술이나 감각 없이 일하다보니 예뻐지지도 않는데 회의감이 들었다. 가급적 쪽팔리지 않는 공간에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명제가 나를 채찍질했지만 작업 속도는 더뎠다.


 결국 썩어서 뒤틀린 문짝을 방에 달다 아귀가 안 맞아 끝내 못 달고 주저앉아버렸을 때, 아 여기까지인가 느끼는 절망적인 순간이 왔다. 그때였다. 나는 음악이라는 영롱한 단어를 떠올렸다.

 

 내가 왜 빙다리처럼 침묵 속에서 일했지? 음악이 사람의 노동 에너지를 뻥튀기 시켜주는 걸 알면서 깜빡했다. 그냥 걸을 때보다 음악을 들으며 걸을 때 좀 더 오래 걸을 수 있지 않은가. 음악은 언제나 무언가를 견디게 해 주지 않았던가.

 

 문제는 선곡이었다. 자, 어떤 음악이 일할 때 듣기 좋을까 고르다 음악을 너무 기능적으로 이용하려는 게 미안해 우선 최근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작업했다. 그런데 요즘 좀 조용하고 차분한 음악들만 좋아해서 그런지 작업속도가 안 났다. 일이고 나발이고 차 마시면서 쉬고 싶어지기만 했다. 인테리어 노가다는 크리스 가르노나 다니엘라 안드레아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리듬감 있는 곡을 듣지롱 싶어 좋아하는 2NE1을 틀어보았다. 그제야 작업 속도가 났다. 2NE1의 좋아하는 곡을 모두 듣자 방 하나를 말끔하게 끝낼 수 있었다.
 
 좋았는데 곧 한계가 왔다. 하루하루 공사만 하며 대충 먹고 쓰러져 자는 일과를 반복하다 보니 점점 체력이 떨어지고 몸살기가 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 끝내고 앓아야하지 않겠니? 몸을 다독였지만 몸은 자꾸만 배 째든가 하며 시위했다. 어릴 때의 무구한 체력이 그리웠다. 동시에 어릴 때 미친 듯 듣던 시끄러운 음악이 확 땡겼다. 지금 다시 들으면 힘과 스피드만 내세우거나, 왜 이렇게 부산스럽고 화가 나 있지? 하는 느낌이 드는 헤비메탈 넘버들이었다. 그러나 피로를 물리치고 체력을 뻥튀기해줄 음악으로 딱 적절할 것 같았다.

 

 그렇게 헤비메탈의 제왕 메탈리카(METALLICA)의 플레이 리스트를 틀어놨더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이건 뭐 몸이 뿌아아 살아나면서 작업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젖 먹던 힘이 아니라 메탈리카 듣던 팬심이 다시 넘쳐 팽팽했다. 페인트칠이 마르길 기다리는 동안 쉬기는커녕 헤드뱅을 하고 슬램댄스를 출 정도였다. 물리적인 에너지 법칙이 뭔지 몰라도 무언가를 무구하게 좋아했던 심정적 에너지가 몸을 활발히 움직이도록 만드는 게 틀림없었다.


 힘 있고 시끄러운 곡이 요즘의 트랜드는 아니지만 메탈리카의 빠워풀한 음악을 노동요로 삼은 초강수 끝에 나는 끝내 일을 끝내버렸다. (아... 라임이 어설프다)
 
 그때 듣던 곡 중에서 <Whiskey in the jar>를 오늘의 주제곡으로 꼽는다. 슬슬 늙어버릴 줄 알았던 메탈리카가 1998년에 낸 앨범에 수록한 곡이다. 내가 이사 온 집 준공연도와 같다. 그들은 젊었을 때만큼의 에너지와 광기와 음악성과 시끄러움이 건재함을 다시 보여주었다. 헤비메탈 인기가 저물고 그런 일탈이 시들해진 시대에도 그들은 여전히 힘 있는 모습을 꾸준히 보여준 것이었다. 거기엔 막강한 에너지가 있었다.

 

 원곡인 아일랜드 민요를 씬 리지(THIN LIZZY)가 록넘버로 커버했고 그걸 다시 리메이크한 곡인데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그들이 어떤 하우스 파티에서 연주를 하며 집 하나를 작살내는 내용이다. 그런 파괴적인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집을 꾸미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재미있었다. (* 이 영상은 별 거 없지만 어째선지 성인만 볼 수 있다)

 

 

 

 파괴와 일탈의 욕구는 재건과 복귀에 대한 열정과 비슷한 것일까. 만약 또 집을 셀프 인테리어 해야 한다면 우아한 음악보다는 가장 힘 있고 개판이고 폭발적인 음악들의 리스트부터 먼저 만들기로 결심했다.

 

 아무튼 집은 이렇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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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감각적이지 않지만 온통 싸구려 일색이었던 노동력, 페인트, 도구, 기술, 감각, 조명기구 등등으로 이 정도라도 만든 건 순전히 메탈리카 형님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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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진짜, 김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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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라는것은 발 뒷꿈치를 들어 올리는 것"

 

데뷔 24년차, 국민가수로 불리는 한 남자가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 이야기이다.


억지로 발 뒤꿈치를 들어올려 힘들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려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는 색다른 김건모에 대한 발견이자 삶에 관한 공감과 질문을 던져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알아왔던 건모 형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이런 이면에 대해 나는 항상 형에게 이야기 해왔다.


"사람들이 형의 진짜 모습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걸 왜 아무도 모를까요? 왜 아무도 모르게 하세요?"

 

92년 데뷔 동기, 나이는 6년이 차이 나는 건모 형과 나는 결혼하기 전날까지, 또 불과 어제까지도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음악 이야기, 인생 이야기를 나누어 왔고 주위사람들에게 "사귀냐?"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막역한 사이다. 그 사랑은 일종의 동지애이며 형제애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닮아있는 두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작곡가 윤일상과 가수 김건모는 어떻게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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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일상홈페이지(http://www.ilsang.com/)


김건모 그리고 소주

 

내가 살아온 날의 반을 훌쩍 넘긴 기간 동안 가요계에 있어 오면서 수많은 가수와 작업을 했고, 그 만남은 매번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10대 후반에 가요계에 들어온 후, 나의 20대는 바쁜 일정의 연속이었고 이 설렘은 때로는 피곤함에 묻혀 무덤덤해 질 때도 있었다. 특히 1997년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사람들과 약속을 하고 미팅을 하는 시간을 내기조차 빠듯한 시기였다. 그러던 중 걸려온 전화 한통.

 

"윤일상씨? 저 김건모인데요. 곡 좀 부탁하려고요, 얼굴 한번 봐요."

 

아...

작업 얘기를 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가슴 설렜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국민가수 김건모에게 전화가 오다니. 나는 단숨에 곡 한곡을 완성해서 건모형의 작업실에 찾아갔다. 어색한 인사를 잠깐 나누고 테잎데크가 플레이 되었다. 나는 두근 반 세근 반의 심정으로 내가 만든 음악을 들었고, 건모 형은 심각한 얼굴로 곡을 끝까지 다 들은 후 특유의 한쪽 입술이 살짝 올라가는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이거 <타인>이랑 너무 비슷한데요? "


당시 영턱스 클럽의 <타인>이 공전의 히트를 막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 작업 연장선에서 전환을 하지 못한 채 내 색깔에 건모 형을 억지로 집어넣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나에게 얘기를 한 사람은 당시까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곡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후, 그는 나를 믿는다며 색다른 느낌으로 자신과 맞는 곡을 써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주었다. 뮤지션으로서,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을 정확히 하고 있는 그를 뒤로하고 나의 작업실을 향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설렜던 마음을 가다듬고 건모 형의 무대와 목소리를 떠올렸고 그와 나의 교집합이 될 수 있는 음악형태에 대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갔다.


'내 안에 건모 형을 넣는게 아니라 둘의 소울이 합쳐져야 한다.'

 

며칠 뒤 '자유에 관하여'라는 곡이 만들어졌고, 나는 다시 건모 형을 찾았다. 전주가 나오면서 씩 미소를 짓더니, 음악을 다 들은 후 형은 활짝 웃으면서 "이제 소주 한 잔 해도 되겠는데요?" 라며 위층에 있는 형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때 소주를 형에게 처음 배웠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자연스레 호형호제가 편해졌고 그의 음악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 하나 둘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다른 작업이 없는 시간에는 형과 함께 했다. 다른 사람의 곡에 디렉팅 하는 일은 없었던 나였지만, 내 곡 아닌 형 앨범 다른 곡의 보컬 디렉팅까지 도맡았다. 그렇게 5집<Myself>는 완성되었고 나는 'Never, Never, Never, 자유에 관하여,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라는 곡을 썼고 '사랑이 떠나가네'의 편곡에 참여해 그의 앨범에 힘을 더했다. 그 후 6집에는 '꼭, 버담소리', 7집에는 'Y, Goodbye yesterday'를 썼고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면 시간과 공간을 상관하지 않고 달려갔었다.

 

잠시 이별

 

7집 'Goodbye yesterday'가 복선이 되었을까? 그 후로 우리는 3년 간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모 형의 작곡 작품인 '미안해요'가 공전의 히트를 하며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나는 <Soulist>라는 내 개인 앨범을 준비 중이었고, 형에게 피쳐링을 부탁했다. 당시 그냥 부탁드리기 뭐해서 컴퓨터도 하나 사드리면서 필이 맞지 않으면 굳이 안해도 된다고 나름 여유를 드렸다. 하지만 녹음을 하기로 한 당일에 매니저의 입을 통해 거절의 멘트를 들었다.


“요즘 너무 여기저기서 피쳐링 제의가 많아서…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고 할 수 없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인데, 그땐 그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해주고라는 말이 정말 모멸스럽게 느껴졌다. 그것도 바로 옆에 있던 형의 입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서 더욱 속상했던 것 같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형을 도왔다고 생각했고, 나는 결코 형에게 그 누구 중의 한명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당시 그렇게 건모 형에게 일방적인 절교선언을 하며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참,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생각이지만 당시의 나는 그랬었다.

 

형이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3년 동안을 나는 가끔 우연히 형을 만났을 때조차 고개를 돌렸다.

 

그리움, 그리고 재회

 

형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서였을까? 당시 신인들을 제2의 김건모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지고 이기는 것이 없는 음악에서 형을 꺾기 위한 어이없는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가슴 한 켠에 알 수 없는 공허함과 그리움은 더해져갔다. 내게 손을 들어올리며 인사하던 형을 본체만체했던 영상이 흑백필름처럼 타들어갔고 처음 배웠던 소주가 이젠 익숙해졌지만 함께할 수 있는 형이 없음에 허무했다.


그러다가 내가 네트워크라는 회사를 만들고 작품자 중심의 컨텐츠를 많이 만들려고 노력했던 시기에 당시는 생소했던 디지털 싱글 프로젝트를 위한 곡을 썼는데, 그 곡은 단 한 사람만 부를 수 있었다. 같이 일하던 친구에게 이 곡은 건모 형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자 친구가 얘기했다.

 

“그럼 전화 드려봐."


맨 처음 만남에선 형이 내게 전화를 걸었지만 재회의 전화는 내가 먼저 걸게 되었다.


“형... 일상이에요.”

“그래 일상아, 정말 오랜만이야~"


기대 이상으로 밝게 받아주는 건모 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참 부끄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재회했다. 그 후 11집 'Jam, 장난감, 한량'을 함께 했고, 형이 회사를 이적한 후 다시 떨어져 지내다가 13집에서 '피아노'라는 곡을 형에게 선물하였다. 또 그 사이 OST음악 '울어버려, 내모습을'으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결혼 전날까지도 함께 소주를 기울였으며, 내 결혼식 부케를 받아주기도 하였고, 내 쌍둥이 아기가 태어나자 조카가 생겼다며 자기 일 같이 기뻐해주기도 했다.

 

너무나 음악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나 가정적인

 

건모 형의 살갗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볼까?

 

흔히 건모 형은 익살맞고 진지하지 않으며 여자관계가 복잡할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이것을 정 반대로 생각하면 건모 형의 실제 본 모습에 가깝지 않나 싶다. 속은 한없이 진지하고 지고지순한 순정파, 게다가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하는 연습벌레에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아무도 모르게 보약 한 채를 쓱 놓고 가는 남자 중에 남자가 진짜 김건모의 본 모습이다. 거기다 환상적인 요리솜씨와 집안 살림까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다. 정말 건모 형을 데리고 가는 여성은 시셋말로 봉 잡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왜 그리 지독히도 인연이 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준비된 신랑감이자 아빠인 건모 형에게 곧 멋진 형수님이 나타나리라는 희망은 계속 놓지 않고 있다. 건모 형은 절대로 남이 보는 데서 연습하지 않는다. 물론 내 앞에서는 연습곡을 틀리게 연주하며 멋쩍게 웃기도 하고 컨디션 난조의 목소리도 종종 듣지만 내가 아는 연습벌레 가수 김건모는 남이 볼 때 '나 열심히 해요' 하는 스타일이 절대 아니다. 만날 술 마시고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 연습과 음악에 대한 연구는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지지 않으려는 나조차도 존경의 눈길로 바라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토록 그는 너무나 음악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

 

오늘도 우리는 다시 소주 한 잔을 주고받으며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음악으로 놀고 음악으로 웃고 음악 안에 산다.

이제는 발꿈치를 내리고 편안히 걷는 건모 형의 새로운 앨범에는 또 어떤 형의 흔적이 채워질까?

또 나는 어떻게 함께 걸을까?

 

8년동안 블루스피아노를 공부해오며 단 하루도 빼놓치 않고 노래연습에 매진해온 건모 형의 2015년은 어떤 음악일지, 목소리일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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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언제 어디서 들어도 좋은 노래, 최호섭 「세월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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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섭 -「세월이 가면」

 

최호섭이 부른 「세월이 가면」은 히트곡이지만 그의 대표곡은 아닐 수 있다. 1988년 「세월이 가면」은 상업적 성공을 창출했지만 그를 대표하는 노래는 그보다 12년 전인 1976년에 '취입'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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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림픽이 끝난 1988년 가을, 「세월이 가면」은 발표된 지 6개월여 만에 전국적 인기를 획득하며 찬란하게 비상했지만 그때까지도 최호섭이 < 로보트 태권 V >의 주제가를 부른 꼬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 브이'로 시작하는 < 로보트 태권 V >의 주제가를 만들고 우리나라 뮤지컬의 대부로 추앙 받는 최창권 선생의 둘째 아들이고 1980년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한 그룹 샤프의 「연극이 끝나고 난 후」를 작사한 최명섭이 그의 형이라는 가족관계 역시 나중에 밝혀진 팩트였다. 「세월이 가면」의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고 현재는 작곡가로 활동하는 최귀섭은 최호섭의 동생이다.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애의 결과물이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 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은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아련하고 가슴 여미는 이 유명한 가사는 형 최명섭의 언어다. 인연의 마지막을 예감한 이 노랫말은 앞으로 다가올 그리움과 회한을 현재의 시점에서 담아내며 이런 상황에 놓인,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곧 놓일 사람들과 감정의 쓰라림을 공유한다. 나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얘기였다. 공감대를 형성한 「세월이 가면」의 성공은 월등한 멜로디뿐만 아니라 최명섭이 써내려간 이 시적이며 가을을 품은 가사 역시 일등공신이었다.

 

이상은과 함께 1988년을 빛낸 신인 가수 최호섭은 이 노래로 < 가요 톱 텐 >에서 1위를 차지했고 짧지 않은 우리나라 가요 역사에서 여전히 빛을 발한다. 최호섭의 유일한 히트곡 「세월이 가면」이 여러 편의 드라마에서 배경음악으로 그리고 많은 가수들에 의해 계속해서 부활하는 이유는 누가 들어도, 언제 들어도, 어디서 들어도 좋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2015/03 소승근(gicsuc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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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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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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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검색창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입력하면 꽤 많은 사진이 뜹니다. 어떤가요? 상당히 가부장적인 느낌을 풍기지요. 완고하고 과시적인 표정, 힘을 주고 정면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매 같은 것들이 지금 보면 좀 웃기기까지 합니다. 물론 100여 년 전의 ‘아저씨’들은 잘 웃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표정은 유난히 사납고 강해 보입니다. 예컨대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던 구스타프 말러와 비교하면 그런 느낌이 더 확연합니다. 어딘지 불안하고 쓸쓸해 보이는 말러에 비하자면 슈트라우스의 표정은 확신과 저돌성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그런 슈트라우스에게도 귀여운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여섯 살 무렵의 슈트라우스는 마치 여자 아이처럼 ‘예쁜’ 꼬마였습니다. 구글에서 검색하면 당시의 사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인터넷으로 검색되지 않는 사진들도 있지요. 예컨대 사육제 의상을 입고 어린이 악대의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슈트라우스와 관련해 꽤 유명한 자료 가운데 하나인데, 인터넷으로는 검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사진 속의 꼬마 슈트라우스는 다른 친구들이 모두 부동자세인 것과는 달리, 혼자서 오른손을 번쩍 들어 보이면서 좀 ‘튀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더 귀여워 보입니다.

 

바로 이렇게 친구들과 어린이 악대를 하며 흥겹게 놀던 여섯 살 무렵에, 슈트라우스는 작은 손으로 악보에 음표를 써넣는 놀이를 시작합니다. 훗날 그가 남긴 회고록에는 이런 술회가 담겨 있습니다. “여섯 살 때 내 첫번째 작곡 시도는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악보를 그렸고, 어머니가 그 악보 아래에 가사를 써넣었다. 나는 아직 작은 글씨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캐럴) 다음에는 ‘재봉사 폴카’를 작곡했다.”
 
지난 해 말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 언급했던 적이 있습니다. 교향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곡을 설명했지요. 이번에는 그에 대한 두번째 글입니다. 일단, 지난 번 칼럼에서도 썼던 “슈트라우스는 음악 인생의 전반부에는 교향시에, 후반부에는 주로 오페라에 집중했다”는 언급을 다시 한번 떠올려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개의 장르(교향시, 오페라)는 슈트라우스의 음악 인생을 대변합니다. 물론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가곡을 꼽을 수가 있겠지요. 슈트라우스의 회고에도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캐럴은 ‘성탄의 노래’(Weihnachtslied)라는 곡인데, 그 곡부터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48년에 작곡했던 <네 개의 마지막 노래>까지 셈한다면, 슈트라우스는 평생 동안 200곡에 달하는 가곡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연주되지 않는 곡들이 워낙 많지요.

 

여섯 살 때부터 작곡을 했던 ‘뮌헨의 신동’도 처음에는 이른바 ‘순수음악’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20대 초반까지 그가 작곡한 음악에서 가곡 외에는 ‘제목’을 단 음악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뮌헨 궁정악단의 호른 연주자로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 프란츠의 영향이 컸겠지요. 슈트라우스는 아직 어렸고 아버지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음악관이 당연히 교육의 지침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한데 거꾸로 보자면 이러한 시절은 슈트라우스의 음악 인생에서 오히려 득이 됐을 공산이 큽니다. 말하자면 고전적 이론과 작곡 기법에 충분히 숙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지난 칼럼에서도 짧게 언급했지만, 슈트라우스가 교향시에 눈을 뜬 것은 스물 한 살이었던 1885년 이후의 일입니다. 마이닝겐 궁정악단에서 당대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부지휘자로 일하게 된 슈트라우스는 이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알렉산더 리터에게 결정적인 가르침과 영향을 받게 되지요.“리터는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거기서 나는 음악적 발전을 위한 결정적인 자극을 경험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받았던 교육을 통해 바그너의 작품, 특히 리스트의 작품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터의 계속되는 가르침 덕택에 나는 바그너와 리스트의 음악에 눈을 떴다.”
 
그래서 슈트라우스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교향악의 계보가 다시 정리되기에 이릅니다. 그 역시 독일 교향악의 계보가 베토벤에서 브람스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여겨왔지만, 그래서 브람스에게 적잖은 경외감을 품고 있었지만, 새로운 음악적 멘토였던 바이올리니스트 리터는 슈트라우스의 그런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이제 그것은 베토벤에서 리스트로 이어지는 것, 그래서 슈트라우스는 이런 언급을 남깁니다. 베토벤의 모방자들, 특히 브람스의 소나타 형식은 텅 빈 집이다. 브람스와 브루크너는 불안하고 미완성적이다. 이제 내 교향악 작업은 리스트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슈트라우스는 그렇게 교향시의 세계로 들어섭니다. 이른바 ‘교향시 10년의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나이로 치자면 <돈 후안>을 작곡했던 24세(1888년)부터<영웅의 생애>를 썼던 34세(1898년)까지입니다. 그래서 교향시는 40대 이후에 집중했던 오페라와 더불어 슈트라우스의 대표적 장르로 자리합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도 기억해야 할 전제가 하나 더 있지요. 슈트라우스는 왜 작은 규모의 실내악보다는 교향시나 오페라 같은 ‘큰 장르’에 집중했을까요? 그런 물음 앞에서 우리는 그가 말러와 더불어 당대의 지휘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마이닝겐 궁정악단에서 뷜로의 보조 지휘자로 일하며 빠르게 지휘를 습득한 그는 1886년 뮌헨 궁정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취임합니다. 3년 뒤에는 바이마르 궁정극장의 부지휘자, 1897년에는 베를린 궁정오페라단 수석 지휘자, 55세였던 1919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지휘자 인생의 절정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슈트라우스는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확고한 위치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중요한 장르는 수많은 청중이 모여드는 콘서트홀이나 오페라극장에서 한 편의 장관을 빚어내는 음악이었겠지요.

 

오늘 듣는<영웅의 생애 op.40>는 ‘교향시 10년’을 마무리하는 음악입니다.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는 문학이나 철학에서 표제를 빌려온 것이 많은데, 예컨대<돈 주앙><맥베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돈키호테>등이 그렇습니다. 또 하나의 방식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상념을 토대로 작곡했던 경우인데,<죽음과 변용><영웅의 생애> 등이 거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요. 특히<영웅의 생애>는 베를리오즈의<환상 교향곡>이 그랬던 것처럼 작곡가 본인의 ‘자전적 음악’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말하자면 스스로를 한 명의 영웅으로 음악 속에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간혹 이 곡을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과 연관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별로 적절한 해석 같지는 않습니다. 베토벤이 자신의 교향곡으로 찬미하고 갈망했던 것은 공화주의적 영웅이었다고 봐야 하겠지요. 스스로를 영웅과 등치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는<영웅의 생애>에서 자신을 한 명의 영웅으로 인식하려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의 서두에서 슈트라우스의 가부장적 표정과 쏘아보는 눈빛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아울러 어린이 악대의 친구들 속에서 오른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나 여기 있어요!’라는 동작을 취했던 여섯 살 꼬마까지 슬쩍 거론했던 겁니다. 슈트라우스는 이 곡에서 자신을 적들에게 둘러싸여 고난 받는 영웅, 하지만 그 고난을 극복해가는 꿋꿋한 의지의 주인공으로 묘사합니다. 아울러 높은 이상과 고상한 품격을 지닌 인물로 그려냅니다. 앞에서 들었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마찬가지로, 슈트라우스의 관현악적 묘사력이 매우 정밀하게 펼쳐지는 음악입니다. 

 

연주시간은 40여분인데, 모두 6부로 이뤄져 있지요. ‘영웅’이라는 제목의 1부에서 저음의 현악기와 호른이 영웅을 표상하는 주제 선율을 제시합니다. 기운이 넘치는 대범한 인물, 동시에 플루트와 바이올린, 오보에 등이 섬세하고 기품 있는 영웅상을 묘사합니다. 2부 ‘영웅의 적’은 플루트가 재잘대는 느낌으로 연주되면서 시작하지요. 이어서 금관이 꽥꽥 소리를 지릅니다. 영웅을 적대시하고 공격하는 인물들, 말하자면 슈트라우스에 대한 비판자들을 묘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웅의 주제가 단조의 저음 현악기로 연주되면서 영웅은 잠시 낙담에 빠집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고 씩씩하게 전진하는 악상이 펼쳐집니다.

 

3부 ‘영웅의 동반자’는 독주 바이올린으로 문을 열지요. 슈트라우스의 아내 파울리네의 아름다움과 우아함, 아울러 변덕스러움, 그것을 바라보는 영웅의 사랑스러운 시선 같은 것들을 묘사합니다. 간혹 방해꾼들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무너뜨리진 못하지요. 4부 ‘전장에서의 영웅’은 멀리서 들려오는 트럼펫 소리로 막을 올립니다. 전쟁의 시작이지요. 이어서 트럼펫의 팡파르가 영웅의 기상나팔처럼 울려 퍼지고 거기에 아내의 격려가 섞이기도 합니다. 영웅과 적들의 전투를 화려하고 율동감 있는 관현악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지요. 물론 영웅이 이겼음을 암시하는 승리의 음악으로 끝납니다.

 

5부 ‘영웅의 업적’은 가장 과시적이고 어찌 보면 유아적입니다. 슈트라우스 본인이 작곡했던 여러 음악의 주제를 차례로 등장시키면서, 영웅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발상은 좀 유치하지만 음악은 화려합니다. 귀 기울여 들으면 슈트라우스의 여러 음악들이 계속 귓전을 파고듭니다. <돈 후안><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죽음과 변용> <돈 키호테><맥베스> 등의 교향시뿐 아니라, 오페라 <군트람>과 가곡의 선율들도 섞여 있습니다. 마지막 6부 ‘물러남과 완성’은 이제 세상의 떠들썩함에서 물러난 영웅의 휴식을 묘사합니다. 템포는 느리고, 음악의 전체적 분위기는 목가적이고 서정적입니다.

 

 

 

 

▶루돌프 켐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1972년/Warner Classics

 

루돌프 켐페(1910~1976)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휘자다. 그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이끌고 슈트라우스의 관현악 작품 전곡을 녹음했다. 그중에서도 <영웅의 생애>는 필청반이다. 섬세하고 견실한 연주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현악과 목관에서는 어떤 향기마저 풍겨 나오는 듯하다. 두 장의 CD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틸 오일엔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돈 주앙> <영웅의 생애> 등을 수록했다. 지난해 슈트라우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새로 발매된 <슈트라우스 관현악 작품집>은    9장의 CD로 이뤄져 가격 부담이 있지만, 눈 딱 감고 구입해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전집이다.

 

 

 

 

 

 

 

카라얀.jpg▶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85년/DG

카라얀은 1950년대와 1970년대에도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고 <영웅의 생애>를 녹음했다. 1959년 녹음은 뛰어난 연주로 손꼽히지만 국내 매장에서 구입이 용이하지 않다. 아울러 음질이라는 측면을 따지자면 1985년 녹음을 선택하는 것이 안전해 보인다. 음향적 손질이 과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카라얀이 지휘하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탄탄한 연주력과 더불어 빼놓고 갈 수 없는 음반이다. 일사 분란하고 유려한 현악기, 힘 있고 정제된 관악기의 사운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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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의 성급한 반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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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나라 출신의 남자들이 회담을 하는 TV프로그램을 보다 독일인 대표 다니엘 린데만 씨가 미남 투표 1위를 차지하는 장면을 보았다. 점잖고 안 웃기고 이지적인 그는 내가 겪은 전형적 독일인 이미지와 달라 생소했다. 화끈한 마초 이미지가 독일에 대한 내 고정관념이었다. 나는 괴리감을 느껴 한때 독일을 대표하던 인더스트리얼 헤비메탈 밴드 람슈타인(Rammstein)의 음악을 오랜만에 찾아들었다. 십년 전 독일을 여행할 때 끼고 다닌 아티스트였다.

 

 그때 나는 베를린 중앙역에 내리자마자 아름다운 미술관과 박물관을 등을 섭렵하기 위한 기대에 부풀었고, 인포메이션 부스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어느 모퉁이에서 딱 스킨헤드 양아치 셋을 만났다. 대가리를 빡빡 밀었고 눈빛에 장난기가 없으며 스터드 박힌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아마도 지나가는 외국인을 위협하는 게 하루 일과인 네오나치 애들로 보였지만 차림새가 너무 전형적이라 오히려 장난 같았다. 게다가 헤비메탈을 좋아하게 생긴 친구들이라 친근감마저 느꼈다. 내가 입은 헬로윈(HELLOWEEN) 티셔츠를 알아봐주길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그때였다. 양아치들이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어이 거기 잘생긴 자식, 당장 너희 나라로 안 꺼질래!”


 독일어를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내 뒤엔 아무도 없었다. 분명 나한테 하는 말이고, 욕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쩐지 찰지지가 않았다. 듣는 순간 모욕감을 느낀다거나,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다. 뭐라는 건지도 모르겠고 착착 감기는 맛도 없었다. 독일어 딕션은 아무 말이나 해도 욕처럼 들릴 수 있어 매우 유리한 고지에 있는데 실망스러웠다. 형이 소싯적에 욕 좀 하고 다닐 때 쓰던 18단 콤보 기술을 전수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진짜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는 가는 길을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자 빡빡머리 세 녀석의 눈빛이 독일제 카메라 렌즈처럼 번뜩였고 초점이 내게 맞춰졌다.


 “&Affe@! X#Hundesohn*#!Mistkerl@$%!!!"


 오, 그건 맹견 짖는 소리와 흡사했으며 섬찟한 찰기가 있었다. 모르는 단어들이었지만 딱 들어도 쌍욕이었다. 이야 수준급이네. 하려는데 하필 걔네들은 태양의 역광으로 서 있어 나는 찡그린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는 셈이 되었다.


 내 반응을 응전으로 간주한 그들은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차, 빌어먹을! 시선을 마주치며 인상을 써버렸어. 엿 됐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닥치고 쨌다. 십년 전이라 젊고 잘생겼을 때니까 얼굴을 지켜야 했다. 사실 외국에서 양아치들이 시비 걸면 뭐라고 지랄하든 생까고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깜빡했다. 


 긴 배낭여행에 지쳐있었고, 등에 멘 짐은 무거웠지만 나는 꽤 빨리 달렸다. 아마도 내 100미터 달리기 개인기록인 16초는 넉넉히 깼을 것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다 정신차려보니 나는 어느 패스트푸드 햄버거 가게 안에 피신해 있었다. 다행히 녀석들은 더이상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어느 나라를 가든 독일인 여행자들과는 쉽게 친구가 되고, 꽤나 유쾌한 캐릭터를 많이 만났는데 실제 본토에서의 이미지가 확 나빠져 버렸다. 자리에 앉아 햄버거를 처묵하는 사람들도 남녀를 불문하고 음식이 몹시 맛없거나, 삶은 엄숙한 것이라는 표정을 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갑자기 뜀박질을 해서인지 강력한 시장기가 밀려왔다. 다른 식당을 찾기엔 발도 아프고, 피신처가 되어준 게 고마워서라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버거를 먹어야 했다. 함부르크도 아니고 베를린에서 하필 버거라니. 한데 메뉴 중에 Kinder라는 게 있었는데 꽤 저렴했다. 나는 가격이 더 친절한 메뉴인가 보다 하고 주문했다. 그러자 주문받는 직원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잘생긴 동양인 처음 보나요 생각했는데 나온 음식을 보니 어린이용 메뉴였다. 아아, 부끄러워서 음식을 받아갈 때 ‘냠냠 맛있게땅’ 하고 어린이인 척 했는데 하고 보니 그게 더 부끄러웠다. 떡대 좋은 직원이 고개를 살짝 꺾으며 나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양 적고 쪽팔린 햄버거를 먹는 동안 내 표정도 독일인들처럼 딱딱해졌다. 애들이 먹다간 당장 뱉고 울어버릴 것 같은 맛이었다. 제기랄. 나는 가슴이 비딱해지기 시작했다. 쫓기듯 사는 게 싫어 배낭여행 나왔는데 양아치들에게 쫓기다 미국식 패스트푸드로 쫓기듯 끼니를 때우는데 맛대가리 없고 이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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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햄버거 가게 안에는 람슈타인의<두 하스트>가 깔려있었다. 성질 급한 사람이 듣기 좋게 쿵쿵거리는 비트에다 게르만족 마초 같이 짧고 굵게 외치는 노랫말 톤이 내 반항심을 일깨웠다. 그것은 마치 독일 친구 람슈타인이 내게 보내는 격려 같았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특히 중간에 “나인Nein!” 하고 두 번이나 외치는 부분은 내가 아는 독일어였다. 영어론 NO, 한국말론 아니아니. 그 낱말은 곧 베를린에 대한 내 견해가 되었다. 


 “를린 언니, 저 맘에 안 들죠?”

 

 잔뜩 기대했던 베를린 미술관들의 현란한 컬렉션이 문득 흥미롭지 않았다. 베를린이 나를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어버린 데다 일정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싫었다. 베를린에서 꼭 봐야할 것들을 본다는 게 배낭여행자들이 쫓기듯 치러야 하는 전형적인 숙제처럼 느껴졌다. 가슴속엔 오랜 여행으로 지친 피로감과 혼자 여행하는 쓸쓸함과 공허함이 스멀스멀 자리를 폈다. 그쯤 되자 베를린에 더 머물 기분이 아니었다. 숙소를 예약한 것도 아니니 여행에 대해 반항심을 부릴 찬스였다.
 
 내가 가진 유레일패스는 날짜별 플렉시블이라 하루에 몇 번을 타든 상관이 없었다. 나는 꽤 반항적인 심정으로 뮌헨 행 기차에 올라버렸다. 햄버거 하나 먹고 베를린을 떠나긴 아까웠지만 반항심이 그보다 컸다. 첫인상에 빈정상한 것이다. 처음부터 생양아치들을 만나버린 건 단순히 운이 나빴던 거지만 어린이 메뉴를 먹어선지 애처럼 베를린 탓을 하고 싶었다. 기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할 때 나는 람슈타인의 <두 하스트(Du Hast)>를 귀에 꽂았다. 강력한 비트가 내 반항심과 연동하자 위로받는 것 같아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이 글을 쓰며 람슈타인의 <두 하스트>를 다시 듣는 지금은 기분이 좋지 않다. 이 음악은 내재된 반항심을 발화시키는 데 탁월한 명곡인가보다. 이번엔 나 자신에 대한 반항심이 터졌다. 아니 이봐, 유럽에 자주 갈 수 있는 인생도 아니고, 베를린에 내가 좋아하는 예술적 분위기와 어마어마한 컬렉션들과 즐길 문화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무시하고 그때 그냥 떠났단 말이냐. 양아치에 쫄고, 애들 거 먹고 쪽팔려서 “너랑 앙 놀아”를 시전하다니. 어린애 바보 똥구멍 같지 않냐. 아아, 후회스럽다!

 

 지금은 만약 또 양아치들을 만나더라도 베를린에 다시 가보고 싶어 죽겠다. 반항심이란 부조리와 불의를 지나칠 수 없을 때나, 지루한 반복을 탈피하고 싶을 때 좋은 효과가 있지만 그냥 삐친 놈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독일어 사전을 찾아보니 <Du Hast>의 뜻이 이렇다. Du- 너, 자네 / Hast- 조급, 성급. 이럴 수가. 용례가 맞는지 모르겠고 Hast가 영어의 Have에 해당하는 단어로 더 많이 쓰이는 것 같은데 모르겠고, 람슈타인은 내 반항심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 성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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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M의 뿌리깊은 나무, 캐시트로콜리「Everything chan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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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 트로콜리(Kathy Troccoli) - 「Everything chan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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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뉴욕에서 태어난 CCM 가수 캐시 트로콜리가 1991년 가을에 발표한 「Everything changes」는 에이미 그랜트와 마이클 W. 스미스의 성공이 밑바탕이었기에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1991년에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두 가수의 파급력으로 미국의 CCM 음악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1980년대 초반에 에이미 그랜트 남편 형인 댄 해럴의 도움으로 CCM 계에 입문한 캐시 트로콜리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주어졌다.

 

버클리 음대에서 재즈와 오페라를 전공한 캐시 트로콜리는 블루 아이드 소울 여가수 테일러 데인이나 알앤비 싱어 아니타 베이커를 떠올리는 알토 톤의 보이스로 노래를 기름지게 장식하며 가창실력을 인정받았다.

 

1990년에 빌보드 차트 4위에 오른 테일러 데인의 「I'll be your shelter」에서 백 보컬리스트로 참여한 캐시 트로콜리는 이 곡을 만든 다이안 워렌의 눈에 들었고 두 사람의 화학작용으로 탄생한 곡이 바로 밝고 경쾌한 「Everything changes」다. 다이안 워렌의 다른 작품들처럼 「Everything changes」 역시 확실한 멜로디 훅을 소유하고 있는 대중지향적인 노래로 1992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14위에 오르며 캐시 트로콜리의 이력에 히트 가수라는 양력을 추가했다.

 

「Everything changes」는 CCM 노래라고 하기엔 극히 세속적이고 상업적이지만 이 곡으로 많은 사람들이 캐시 트로콜리를 알게 되었고, 1990년대 초반에 붐을 이룬 CCM 열풍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 노래 이후에도 20여 장의 CCM 음반을 꾸준히 발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캐시 트로콜리가 히트곡 하나에 좌초되지 않은, 뿌리 깊은 나무임을 증명한다.

 

2015/03 소승근(gicsuc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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