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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담은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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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에만 의존하고 있으나 이 매체로부터 발하는 상상과 낭만, 기쁨은 제한된 자극이라는 제 태생적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미디어의 변이에 반하고 있음에도 라디오가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매력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바람도 괜한 것만은 아닐 테다. 듣기로만 가져왔던 감상을 꺼내 보인 영화들, 이 자리에서 몇 편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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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베트남 (Good Morning, Vietnam, 1987)


라디오는 친근하고 감성적인 매체다. 그래서 때로는 DJ의 멘트 한 마디가 대통령의 말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삶의 전쟁터에서도 이러한데 실제 전쟁터에서는 오죽할까.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에서 “Go~~od Mor~~ning Vietnam!!!!”이란 야단스러운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파격적인 방송, 그리고 재치있는 입담으로 군인들을 토닥거리는 DJ에 대한 이야기다. 


선혈이 낭자하는 잔인한 전쟁터에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의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What a Wonderful World)」가 울려퍼진다. 영화는 이 음악 하나로 미국의 영웅담이 아닌 전쟁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게다가 얼마전 우울증으로 자살한 배우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의 연기가 너무나 천진하고 유쾌해서 더 씁쓸함을 남긴다. 그가 죽다니.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니. 인간의 모순과 잔혹함은 그대로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세상인가. 


2014/9 김반야 (10_b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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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륨을 높여라 (Pump Up The Volume, 1990)


1990년에 개봉한 영화인만큼, 라디오라는 매체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청취자들과 같은 고등학교 학생, 디제이 해피 해리가 완전한 공감을 바탕으로 소통한다. 거칠지만 감싸주고 싶은 사춘기, 반항과 고민 그리고 낭만을 해적 방송으로 다뤘다.


10대는 라디오를 알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가장 예민하고 혼란스러울 때에 라디오는 이 질풍노도를 어루만져 잠재운다. 영화는 그런 부분을 짚었다. 발칙하면서도 부드럽다. 제 16회 시애틀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했고, 극중 방송 오프닝 곡, 레너드 코헨의 「Everybody knows」는 <옹달샘과 꿈꾸는 라디오>에서도 오프닝으로 쓰였다. 어렵지 않지만 여운은 꽤 진하다.


2014/09 전민석(lego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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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앤롤 보트 (The Boat That Rocked, 2010)


영화 < The Boat That Rocked > 영국의 라디오 해적방송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다. 1966년 반정부적인 메시지를 담은 로큰롤을 젊은 세대에게 전파하는 매체인 라디오 방송을 법으로 금지한 것이다. 이에 저항적 성향을 지닌 8명의 로큰롤 전문 DJ들은 해적방송선 '라디오 록 호'를 항만에 띄운다. 해적 방송인만큼 표현도 자유로운 '라디오 록'은 영국 전역에서 인기를 얻지만, 영국 정부는 이 배를 전복시키려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개성 넘치는 배우들의 열연은 극의 가장 큰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다. 물론, 로맨틱 코메디의 대가인 리차드 커티스(Richard Curtis)의 작품인 만큼 추억 속의 음악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귀를 들뜨게 한다.


2014/09 신현태 (rocker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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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로큰롤 : 앨런 프리드 스토리(Mr. Rock 'n' Roll: The Alan Freed Story, 1999)


미국의 디스크 자키 앨런 프리드는 로큰롤을 영미권 주류 음악으로 올려놓은 공신들 중 하나다. 이른 1950년대서부터 혜안을 갖고 빌 헤일리 앤 히스 코메츠, 척 베리, 플래터스, 리틀 리처드 등이 구사해온 음악을 꾸준히 소개했다. 그 덕택에 '흑인으로부터 시작된 난잡하고 불경한 소음'은 음악의 한 장르와 새로운 팝 컬처라는 거대한 의미를 조금 더 수월하게 획득할 수 있었다. 1999년에 나온 이 TV 영화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전설적인 DJ에 대해 다루고 있다. 팝 애호가라면 재밌을 앨런 프리드의 에피소드들이 영화 전반을 이룬다. 빌 헤일리, 제리 리 루이스, 버디 홀리 등으로 구성된 주변 인물들 또한 흥미를 자아내는 포인트. 영화 < 브렉퍼스트 클럽 >에 등장했던 주드 넬슨이 앨런 프리드의 역할을 맡았다. 라인업에서 폴라 압둘의 이름도 확인해볼 수 있다.


1957년, 앨런 프리드의 소개로 척 베리, 리틀 리차드, 클라이드 맥패터 등이 등장해 음악을 연주하는 공연 영화 < 미스터 로큰롤(Mister Rock And Roll) >이 등장한 바 있다. 작품의 제목은 여기서 따온 듯하다.


2014/09 이수호(howard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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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 (1997)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을 이어주는 것은 바로 '신청곡'이다. 케이블 TV 쇼핑가이드인 수현(전도연)이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를 신청하고, 이를 본 라디오 피디 동현(한석규)은 그가 혹시 갑자기 떠나버린 옛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피시통신으로 접속하기에 이른다. 지금과 같은 IT 시대에선 사연이 온 핸드폰 번호를 확인해 약속장소와 시간을 잡으면 끝나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그런 갑작스런 만남 자체가 어려웠기에 왠지 모를 설렘과 같은 아날로그의 감성이 아직 남아 있던 시기였다.


지금이야 기술이 발전해 문자나 앱을 이용,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쌍방향 시스템이 라디오의 대세가 되어버렸지만, 전보다 메시지는 가벼워지고 진정성은 휘발되어 버린 것도 사실이다. 오롯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만 집중하고, 다른 외부 자극 없이 단순히 텍스트만으로 감정을 나누는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감성과 정서로 서로의 이야기를 차근히 들어주며 사랑을 쌓아나간다. 우리는 분명 편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너무 많은 정보에 휘둘려 진짜 간직해야 할 것들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멀티태스킹이 만연한 요즘,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에 진심으로 접속하고 있는 걸까. 다른 일 다 제쳐놓고 라디오 전파 하나에만 매달려 울고 웃던 그때가 그립다.


2014/09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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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리 홈 컴패니언 (A Prairie Home Companion, 2006)


생방송 라디오 쇼의 마지막 날을 그린 2006년도 영화. 실제 존재하는 동명의 라디오 쇼를 소재로 했으며 주인공 게리슨 케일러는 이 쇼의 진짜 진행자이기도 하다.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다져진 사회자와 스태프들의 유대감은 가족 그 자체이며, 즐겁게 웃고 떠들며 장난치다가도 방송이 시작되면 완벽한 프로의 면모를 보인다. 시종일관 밝은 진행과 활기찬 게스트들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어두운 그림자다. 비현실적인 소재로 죽은 사람이 돌아오기도 하며, 늙은 가수는 마지막 쇼와 함께 운명을 달리한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쇼에서 우리는 삶의 마지막을 본다. 알고 보니 < 끝없는 사랑 >, < 내쉬빌 >로 유명한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유작이다. 


현실 속의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의 미래는 사실 어둡다. 쏟아지는 매체 속에 더 이상 대중은 라디오와 친숙하지 않다. 하지만 오늘도 라디오 종사자들은 하루하루 양질의 콘텐츠 전달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게다가 흔하지 않다고 하여 그 매력이 없다는 것 또한 아니다. 라디오는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영화와는 달리,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2014/09 김도헌(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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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스타 (2006)


한물간 왕년의 스타가수 최곤에게 의지할 구석이라고는 일편단심 자신을 따라주는 매니저뿐이다. 미사리 카페 촌을 전전하다가 겨우 발을 붙인 곳이 강원도 영월의 라디오 방송. 처음에는 사사건건 문제만 일으키고 시큰둥해하던 그였으나 차츰 방송에 정을 붙이며 방송도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 라디오 스타 >의 묘미는 20여년을 같이 붙어 지낸 가수와 매니저의 이야기에서 나온다. 한물간 가수의 인간관계를 지탱하는 매개가 역시 지난날의 매체인 라디오라는 점도 묘한 감정의 파동을 일으킨다. 특히 영화 후반부 매니저 박민수를 돌아오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는 영화의 잔잔한 마무리를 유도한다. 두 남자의 우정과 라디오가 빚어내는 이야기 덕분에 < 라디오 스타 >는 백이면 백 떠올리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2014/09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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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라디오 (2012)


“나 퍼플 신진아야!” 퇴출 위기 라디오 프로그램과 이를 지키려는 한 때 아이돌로 잘나갔던 디제이. 이민정은 다혈질로 돌변해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매니저를 맡은 이광수는 유쾌한 분위기를 영화 내내 품고 간다. 


청취율 바닥이었던 < 원더풀 라디오 >를 재기하게 해준 코너 '그대에게 부르는 노래'.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이 출연해 각자의 사연을 노래로 전한다. 흘러나오는 구절이 곧 내 얘기 같아 눈물을 흘리던 기억, 이 과정에서 용기를 얻고 무대에 서는 이민정의 모습은 청취자와 디제이 사이의 쌍방향 공감이 이루어지는 라디오만의 매력을 담아낸다. 돌다리를 연신 두들이며 안전한 로맨틱코미디의 공식을 섞어낸 전개가 아쉽지만 보는 이를 라디오 속으로 옮겨오려는 노력과 SBS < 두시탈출 컬투쇼 >의 이재익 PD가 쓴 따뜻한 시나리오가 한 덩어리가 되어 머리가 반응하기 전 마음이 먼저 동한다.


2014/08 정유나(enter_cruis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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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Play Misty For Me, 1971)


여자들은 목소리 좋은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디제이는 예나 지금이나 인기가 많은 로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디제이는 불특정다수인과 소통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디제이의 목소리를 자신에게만 속삭이는 밀어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착각에서 가슴앓이 혹은 불행이 시작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감독 데뷔작 <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는 심야 라디오 디제이와 하룻밤을 보낸 여성이 그에게 집착하면서 발생하는 공포와 비극을 섬세하고 타이트하게 묘사했다. 로버타 플랙의 처연한 알앤비 발라드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로 기억되는 <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는 디스크자키가 단지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직업만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2014/09 소승근(gicsucks@hanmail.net)



[관련 기사]

- 박상 “웃기고 싶은 욕구는 변하지 않아”
- 스뽀오츠 정신과 부드러움이 필요한 시대
- 박상의 턴테이블을 시작하며
- 수첩, 작은 곳에서 완성되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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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외로운 날의 펑크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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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너무 외로워서 부산에 여행 갔다가 충동적으로 현해탄을 건너고 말았다. 부산행 KTX 편도 가격보다 싼 후쿠오카 왕복 선박 티켓을 득템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부산에서도 아무 ‘썸’이 일어나지 않아 계속 외로워서였다. 어째서인지 가방에 여권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부풀렸다. 만약 나처럼 가을 특가 요금을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후쿠오카에 가는 여자 여행자를 배에서 만난다면? 살짝 마음이 통할 거고, 별 일 없으면 함께 여행하는 거다.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아, 어쩌면 밥도 같이 먹을 수 있을 거고, 같이 쇼핑하면서 서로 바보 같은 물건을 고르지 않도록 조언을 주고받을 수도 있을 거다. 심지어 그녀도 솔로라면 아름다운 ‘썸’을 탈 수도 있을 테고. 뭐가 됐든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오 예.


 배가 떠나는 날은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이었다. 하늘은 맑았지만 꽤 뒤끝 있는 태풍인지 파고가 높았다. 충동적 여행으로 인한 내 기대감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런데 배는 일단 출항을 하긴 했지만 여차하면 회항할 수도 있는 날씨였다. 먼 바다에 나가자 록 정신을 가진 파도가 출렁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몹시 흔들리는 배 안에서 멀미 증세를 느끼고 말았다. 괴로워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뿔싸. 이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 줄이야. 갑판에서 맥주 캔을 마시며 바다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을 때 나처럼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외로운 여행자를 발견해 슬쩍 눈인사를 건네는 그림을 그렸는데 그건 막상 초현실주의 화풍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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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배는 쾌속선이라 워낙 빨라서 선실 바깥으로 나갔다가는 배가 흔들릴 때 나가떨어지기 딱 좋아서 아예 선실 바깥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내 앞뒤 좌석은 알콩달콩 커플이고, 뒤에선 ‘아잉 우리 자기가 미리 멀미약 챙겨주지 않았음 어쩔 뻔했어. 고마운 자기.’ 같은 소리나 찍찍 내뱉고 있고, 앞에 앉은 서양인 커플은 아예 부산에서 대마도를 지날 때까지 입술을 뗐다 붙였다 쇼를 하고 있고, 내 옆자리에 앉은 촌스러운 니트 스웨터 차림의 중년 남자는 세로쓰기로 된 일본어 문고판 책을 그 요동치는 배 안에서 물끄러미 읽고 자빠져 있어 내 멀미 증세를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 심지어 그가 화장실에 갈 땐 내게 ‘실례 좀 하겠습니다’ 하고 유창한 한국말 표준어를 구사해 어지럼증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후쿠오카에 도착해 한참 시간이 지나서도 멀미가 가라앉지 않았다. 대체 그 남자의 국적은 어디인 걸까. 다 필요 없고 내 외로움의 끝은 어디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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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일단 숙소에서 쉴 생각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내 방 앞에 맥주 자판기가 있어 일단 한 캔 마셨다. 그제야 어지럼증이 좀 가라앉아 나는 거리로 나섰다. 외롭지만 관광은 해야지. 그런데 우선 유명하다는 텐진이나 하카타에 가서 반짝반짝 쇼윈도 사이를 바쁘게 걸어 다니다 보니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의외로 지루했다. 내가 쇼핑하기에 비싼 건 예쁘고, 싼 건 전혀 살 마음이 안 들었다. 뭔가 가격이 적당하면서 후쿠오카다운 건 ‘돈고츠 라멘’뿐이었다. 그런데 한 라멘집에 매운 라멘 메뉴가 있었다. 맵기의 단계까지 선택할 수 있었는데 일본 사람들은 매운 음식에 대해 좀 호들갑을 떤다고 판단해서 가장 센 ‘초특급’ 단계를 주문했다. 그건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매웠다. 매운 걸 먹고 나자 가슴 한 구석이 불을 지핀 듯 뜨거워졌다. 


 해가 저물자 번화가를 떠나 아무도 안 다닐 것 같은 남모를 골목에서 느긋한 걸음걸이를 하고 싶었다. 혼자 술 마시기도 궁상맞고, 나는 정처 없이 한적한 골목을 걸어 다녔다. 기왕 외로운 거, 나 자신의 은밀한 구석구석을 점검하고 되새기고 정돈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어느 이국적이고 아담한 골목 귀퉁이에서 낮게 떨어지는 가로등 조명에 반짝 빛나는 조그만 카페를 보았다. 그곳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고, 아예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안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쓰리코드인데 펑크 스트로크 주법이었다. 입술에 피어싱을 한 남자가 기괴한 창법으로 그 쓰리코드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뭐랄까, 노래는 개판이었지만 펑크 정신이 살짝 느껴졌다. 동시에 내 가슴속 어떤 부분이 꿈틀, 했다. 초특급 매운 라멘을 먹을 때 잠시 뜨거워졌던 부위였다. 그곳을 더블클릭해 보니 우와? 펑크록을 미친 듯이 좋아하던 시절과 그때 즐겨 듣던 곡들과 방방 뛰며 춤추던 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은 와락 내게 달려들더니 다짜고짜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이봐, 친구. 펑크록이 있는데 외로워했어? 느낌 괜찮았다. 마음 깊이 묻어둔 내 자존감이 그런 형태로 생생히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된 이상 펑크록 음악을 들어야 했다. 나는 노브레인 앨범을 처음부터 쭉 들어나갔다. 수없는 명곡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한밤의 뮤직’을 들으며 걸을 때 발걸음이 몹시 가벼워졌고, 지난 세월과 상처들을 잊게 되었으며, 혼자 술 마시기 싫다는 마음이 쏘옥 사라지면서 발길이 저절로 이자까야로 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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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무 이자까야에 들어가 아무 안주나 시켰다. 내가 주문한 건 꼬치구이 세트였는지 주인장이 꼬치를 종류대로 구워 내게 하나씩 가지고 왔다. 접시에 꼬치가 쌓이는 속도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나는 맥주를 계속 마셨고 노브레인을 계속 들었다. 그것은 혼자 마시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옛 자존감과 마시는 거였고, 노브레인과 함께 마시는 거였다. 그 작은 이자까야 안에는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이 많았다. 스모키를 진하게 한 채 혼자 줄담배를 피우는 정장 차림의 여자와 꼬치 두 개에 맥주 한 잔을 슬로우 비디오라도 돌리듯 천천히 음미하는 점퍼 차림의 2대 8 가르마 남자와, 여성성을 강조한 블라우스에 생머리를 하고 양손으로 사케 도쿠리를 들고 홀짝이는 여자, 왜 그러는지 몰라도 사시미에 콜라를 마시고 있는 짧은 머리의 젊은 남자 등등이었다. 


 그들은 혼자였지만 아무도 외롭거나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혼자 술을 잘 마시고 있었다. 나 역시 그 분위기에 녹아들며 노브레인의 ‘한밤의 뮤직’을 한 없이 반복해 들었다. ‘작지만 커다란 꿈을 안겨주던 너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아련하던 그 기억’을 만끽하며 ‘때 묻은 기타 한 대와 나를 울려주던 낡은 라디오’를 그리워했다. 내 자존감은 바로 그 지점에 남아 있었다. 외로워서 낑낑거리다 발견한 나 자신은 사실 외로움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살던 펑크록 마니아였던 것이다. 하도 신나 있어서 외로워도 외로운 줄 몰랐던 것이다. 외롭다고 부들부들 떠느니 춤추면 되고, 펑크 코드를 긁으며 소리 지르면 되는 거였다. 힘들면 매운 라면을 먹었고,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홍대에서 개판(?)치면서 외로움이 뭐 어쩌고 개입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날 이자까야에서 혼자 꽤 마셨지만 전혀 취하지도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 쉬려는데 어째서인지 내 주머니에 편의점에서 산 피스타치오 봉지가 있고, 복도의 맥주 자판기는 편의점보다 싸서 엔화 동전이 떨어질 때까지 맥주를 뽑아 먹었다. 노브레인의 음악과 함께 밤이 깊도록 머리를 흔들자 외로움 같은 건 어딘가로 꺼졌는지 코배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상태가 정말 좋았다. 자존감이 가득했다. 가을이라 외로움을 세게 탔지만 의외로 그 안에서 자존감을 건져냈으니 풍성한 수확을 한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선 옆자리에 분위기 좋은 어떤 여자애가 앉았다. 국적을 짐작할 수 없었지만 혼자였다. 그날은 파도가 잔잔해 멀미도 안 났고, 바깥의 끝없는 수평선과 드넓은 바다위에 태양이 쏟아지는 광경이 무척 아름답고 열정적인 펑크록처럼 느껴졌다. 나는 숙취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브레인과 크라잉 넛이 서로의 노래를 바꿔 부른 96이란 최신 앨범을 내내 들었다. 나는 전혀 외롭지 않았으므로 옆자리 여자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 아차, 근데 왜 그랬지? 미쳤구나. 어우 딱 내 스타일이었는데. 






Vol.4 - 라디오: 진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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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radio) 


[명사] 방송국에서, 일정한 시간 안에 음악ㆍ드라마ㆍ뉴스ㆍ강연 따위의 음성을 전파로 방송하여 수신 장치를 갖추고 있는 청취자들에게 듣게 하는 일. 또는 그런 방송 내용.


아마도 누구나 알고 있을 라디오의 뜻을 한 번 더 되짚어 보는 건 라디오가 점점 다양한 형체로 발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라디오의 행보는 음악 산업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어왔다. MTV의 화려한 개막 이전부터 라디오는 음악을 소개하는 강력한 플랫폼이었고 지금도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런 라디오가 기계의 발전을 통해 또 한번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은 라디오를 빛의 속도로 진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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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이름 자체에 탄생비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이팟'과 '브로드캐스트'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만들어진 팟캐스트는 근본적으로 스마트폰과 분리시킬 수가 없다. 음악을 'CD플레이어', 'MP3플레이어'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사용해 듣는 세대는 자연스레 아날로그 라디오나 주파수와 거리가 멀어졌다. 다만 팟캐스트에서 음악을 재생하는 데는 제약이 많다. 팟캐스트는 주로 음악저작권료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소규모, 소자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팟캐스트는 거의 말, '멘트' 위주로 진행이 된다. 


팟캐스트는 만드는 방법이 간단하다. 흑역사로 남아있는 이즘의 딴따라 초기방송은 빈방에서 휴대전화에 녹음을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때 쌓인 노하우를 하나 말씀드리자면 책을 쌓아놓고 그 가운데 휴대전화를 가로로 꽂아 고정시켜야 잡음이 적게 들어간다.) 녹음이 끝나면 검색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성편집프로그램'을 통해 편집을 하고 서버에 올리면 된다. 누구나 자유롭게 컨텐츠를 만들고 공유하게 되면서 팟캐스트는 수다부터 정치, 연애까지 정말 세분화된 주제로 만들어지고 있다. 



스트리밍 라디오 서비스


최근에 우리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시끄러웠던 이슈 중 하나가 삼성의 '밀크' 서비스였다. 밀크는 삼성전자 갤럭시 스마트폰 사용자가 소리바다에서 제공하는 음원 360만곡을 스트리밍 라디오 방식을 통해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서비스다. 이는 버튼만 누르면 음악이 절로 나오는 라디오와 그 방식이 매우 유사하다. 사실 삼성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음원 사이트에서 '라디오'라는 이름의 '스트리밍 선곡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이런 방식이 가능한 이유는 음악 소비자들이 음악을 찾아 듣는데 매우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TOP100'이 사랑받는 것도 터치 하나로 최신곡을 다 들을 수 있다는 이런 단순명료한 패턴 때문이다. 음원의 범람도 이런 소심한 소비 형태를 부채질 한다. 하루에도 몇백개의 음악이 쏟아지는 지금 무엇을 들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라디오'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기존의 라디오와는 분명 다르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개적인 전파가 아니라 개인에게 국한되어 있는 서비스의 일종이다. '기분이 좋아지는 힙합음악', '이별한 사람들을 위한 노래'등 다양한 주제별로 묶여있거나 장르별로 노래를 분류하는 세분화된 선택지가 존재한다. 기술의 발전과 고객의 편의도 좋지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무료 '스트리밍 라디오 서비스'가 지닌 '저작권' 문제와 '음악은 공짜'라는 인식이 주는 치명적인 문제점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난제다.


글/ 김반야(10_ban@naver.com)




드레스덴 축제의 매혹적인 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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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레스덴은 옛 동독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소문을 들었다. 미치광이 히틀러가 가장 좋아라한 도시였다고도 하고, 2차 세계대전 때 승기를 잡은 연합군이 마치 분풀이하듯 다 때려 빠개놓은 도시이기도 했다. 

 실제로 방문해 보니 드레스덴은 큰 상처를 입었지만 티 내지 않고 굳건히 살아가는 인상을 건넸다. 특히 성모교회(Frauenkirche)라는 건물은 다 부서지고 불에 타 그슬린 돌들을 재건할 때 다시 사용해 딱 그 느낌을 상징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세도시 같은 잿빛 건물들과 밋밋한 현대식 건물들이 공존해 있는 모습은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느긋하게 구시가 골목을 걷다가 드레스덴 한복판을 관통하는 엘베 강을 만났다. 강은 살랑살랑 잔물결을 일렁일 뿐 그 이질감에 대한 대답을 해주진 않았다. 문득 은유적으로 그 강이 도시를 아래위로 찢고 있는지 위아래로 촉촉하게 적시고 있는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모르겠고 나는 아름다운 강변에서 소시지에 맥주나 호로록거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도시는 마침 주말이었고 무슨 축제 중인 것 같았다. 축제 기간이라면 사람이 북적거려 정신없을 것 같기도 했고, 우연히 들렀는데 축제라니 재수가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견해는 100분 토론을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 다리 건너에 있는 대성당 앞 광장에 조그만 무대가 설치되었고 그 주변엔 음료나 음식을 파는 가판대와 천막들이 세워져 있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들이 분주하게 맥주 노즐을 닦고 있거나 지글지글 소시지를 굽고 있었다. 키다리 분장을 한 녀석도 성큼성큼 지나갔다. 마음 속 토론은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맥주를 마시며 축제를 팔랑팔랑 구경할지, 조용한 골목에 있는 노천카페에서 쉬엄쉬엄 차를 마실지 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 한 소프라노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목을 알 수 없는 아리아였는데 내 귓구멍엔 굉장히 구슬프게 인식되었다. 고음을 처리할 때 소프라노 언니의 표정엔 오만가지 시름이 스쳐가는 듯했다. 심지어 그녀는 검은 드레스에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축제인데 왜 까맣게 입고 슬픈 노래를 불러재끼는 거지? 몹시 의아했다. 나는 조용한 곳을 찾아 멍 때리겠다는 의견을 단박에 철회하고 그 궁금증을 해소하는 걸로 정했다. 그러기 위해 우선 맥주와 소시지를 사서 한 구석에 자리 잡았다. 맥주는 무슨 필스너 종류였는데 시원하게 넘어가면서도 씁쓸한 맛이 입안에 오래 남아 좋은 맛인지 나쁜 맛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가벼운 여운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헷갈리게 만드는 도시로군.’ 중얼거리며 나는 소프라노의 구슬픈 아리아를 끝까지 감상했다. 듣다 보니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슨 곡인지 알고 싶어 중간에 스마트폰을 꺼내 음원 검색 어플을 켰지만 소리를 입력시키려 할 때마다 옆에 앉은 덩치 큰 아저씨가 타이밍 좋게 코를 풀어대 실패했다. 

 검은 차림 소프라노의 진정성과 실력을 겸비한 독창이 끝나자 사람들은 환호 대신 잔잔한 박수를 보냈다. 엘베 강도 잔물결로 화답하는 듯했다. 그리고 음악은 뚝 끊겼다. 그 쓸쓸한 아리아를 필두로 축제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행사와는 상관없이 그냥 누가 나와서 노래 한 곡 뽑고 들어간 기분이었다. 나는 그 알쏭달쏭한 축제에 점점 흥미를 느껴 맥주를 원샷한 뒤 잔을 반납하고 성모교회 쪽으로 걸었다. 교회 앞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고, 연미복을 입은 남자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 축제는 여기저기 게릴라성 공연으로 승부하는 콘셉트인 건가. 피아니스트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조금 경직된 표정이었지만 이내 간단한 목례를 건넨 다음 여유를 찾고 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나는 멈칫 놀랐다. 아니, 또 단조의 슬픈 음악이었다. 우리에게 ‘사(死)의 찬미’라는 윤심덕의 번안곡으로 알려진 개 슬픈 멜로디였던 것이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그 음악은 피아노로부터 창궐해 전 광장에 퇴폐적 허무주의를 와락 끼얹는 듯했다. 

 물론 그 피아니스트는 사의 찬미가 아니라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왈츠곡인 ‘도나우 강의 잔물결(Donauwellen)’이라는 곡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상당히 음울한 음색으로 해석할 뿐이었다. 소리를 증폭하는 앰프나 스피커도 없이 길바닥에서 그랜드 피아노만의 생소리로 퍼지는 그 음률들은 흔치않은 소리의 맛을 선사했다. 더구나 연주엔 군더더기가 없었고, 불어넣는 듯한 숨결이 건반에 실리는 듯 했다. 전쟁 때 다 부셔졌다가 꾸역꾸역 재건한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성당 앞에서 울려 퍼지는 그 피아노 소리는 내겐 파괴된 도시를 기리는 진혼곡처럼 느껴졌다. 

 ‘어째서지? 왜 축젠데 다 슬퍼하지? 뭘까, 왜 그럴까?’

 연주가 끝난 뒤 나는 하도 궁금해 옆에 서 있던 독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축제… 인거죠?”
 “물론이지. 하지만 나도 매년 헷갈린다네.”

 할아버지는 그렇게 대답하곤 자기 갈 길을 갔다. 앙코르도 없고 이어지는 레퍼토리도 없었다. 정말 축제라면 좀 울적하지 않아도 되잖아. 다 부서진 건물들을 훌륭하게 복원해 놨고, 다시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었는데 왜 이토록 우울하고 슬픈 음악으로 기리는 걸까. 그러나 그 궁금증은 내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축제라고 꼭 시끌벅적 경쾌한 음악을 틀어놓고 희번덕거리는 것이어야만 하나. 형식을 너무 좁게 보면 못 생긴 것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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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나우강의 잔물결’을 작곡한 이바노비치는 루마니아의 군인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라는 곡에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하는데 그 곡은 언제 들어도 경쾌한 왈츠로만 느껴지는데, ‘도나우 강의 잔물결’은 같은 왈츠지만 단조인데다 여러 가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묘한 음악인 셈이다. 이바노비치는 이 곡을 군악대를 위한 행진곡으로 작곡했다고 하며 미국에서는 알 졸슨(Al Jolson)이라는 분이 가사를 붙여 번안해 ‘기념의 노래Anniversary Song’라는 제목으로 불렀으며 그걸 톰 존스(Tom Jones)아저씨도 특유의 쫀쫀한 음색으로 다시 불렀다. 그리고 또 우리에겐 현해탄에 뛰어들어 자살한 여가수의 ‘사의 찬미’로 알려진 곡인 것이다. 최초엔 군인들을 위한 곡이었다가 누군가 기념곡을 만들었다가 생의 허무를 쿡 찌르는 곡으로 만들었다가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한 희한한 멜로디인 셈이다. 

 요즘 가을이 깊어가고 추위가 찾아오자 나는 참지 못하고 옷장에서 후드 티를 꺼내 후드득 털다가 문득 이 음악을 떠올렸다. 그런데 나는 이 곡을 다시 감상하며 당당하게 겨울 속으로 행진해야 할지, 또 한 번의 가을이 사라지는 걸 쓸쓸히 기념해야 할지, 모르겠고 소주를 마시며 퇴폐적으로 허무해야할지 퍽 헷갈렸다. 

 드레스덴이라는 딱딱하면서도 화려한 도시의 작은 축제에서 피아노 독주로 감상한 ‘도나우 강의 잔물결’을 떠올리면 그 문제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단조로 노래한다고 해서 축제가 아닌 것은 아니며 겨울이 온다고 해서 무조건 쓸쓸한 건 아닐 거라고. 나름의 매혹이 있을 거라고. 그 느낌으로 다시 이 곡을 감상했다. 부서졌다 재건된 도시를 유유히 흐르던 그 강물이 간직한 시간의 어떤 층위를 느끼면서 나는 숙연해졌다.

 아 근데 드레스덴을 관통하는 강은 도나우 아니잖아. 도나우는 독일 남부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를 거쳐 흑해로 빠져 나가는 미친듯이 긴 강이고 드레스덴이랑은 상관없는데 왜 거기서 굳이 그 곡을 연주한 걸까. 맥락이 잘 연결되는 것 같았는데 이게 뭐야. 아아, 여전히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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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굿바이 마왕] 단 하나의 약속, 당신의 음악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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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내면 진다 눈물 흘리면 진다
웃지 못하면 티를 내면 진다
백번 천번을 고쳐 말해 봐도 천번 만번 매일 져버리네
탄식으로 단을 쌓고 한숨으로 향을 피워
이제 꽃 한송이 올려 희망이라 부르며 그대를 보낸다”
- 신해철 「Goodbye Mr.Trouble」

 

마왕의 노래가 음원사이트 상위권에 오르고, 라디오에서 하루 종일 그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멍하니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또 다시 안타까움과 슬픔이 복받쳐 올라옵니다. 그의 음악을 하나하나 돌이켜 보니 가사 한 줄도 쉽게 보이지 않고 걸어온 발자국 하나도 스쳐 지나기 힘듭니다. 이제는 없는 그를 조금이나마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 그의 노래에 대한 '기억'과 '의미'들을 모아봤습니다.

 

 


「그대에게」


1989 무한궤도 <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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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그대를 포기할 수 없어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나는 그대 숨결을 느낄 수 있어요”

 

패기 넘치는 관악의 도입부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사랑하는 그대에게 보내는 당당한 선포에서 신해철의 젊은 시절을 짐작할 수 있다. 신해철이 무한궤도라는 밴드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처음 알렸던 곡으로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했다. 생전 신해철의 모습처럼 「그대에게」는 비범한 일화가 많다. 작곡을 할 줄 몰랐던 신해철이 멜로디언으로 주먹구구식으로 곡을 썼고, 공연직전까지 신디사이저가 작동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무한궤도는 신해철뿐만 아니라 공일오비의 정석원도 몸을 담아 한국 대중가요를 풍요롭게 만드는 튼튼한 기반이 되었다.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1990 신해철 1집 <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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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궤도 해체 후 솔로로 데뷔한 첫 싱글. 개인적으로는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처음으로 머리를 스친 노래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면, 팬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난 포기 하지 않아요
그대도 우리들의 만남에 후횐 없겠죠
어렵고 또 험한 길을 걸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슬픈 표정 하지 말라면서. 포기하지 않는다면서. 아프지 말라면서. 그는 그렇게 떠났다. 그래서 이 노래와 마주할 때면 앞으로도 지금의 먹먹함이 다시 떠오를 것 같다.

여인협(lunarianih@naver.com)

 


「재즈카페」


1991 신해철 2집 < Myse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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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에서도 충분한 매력을 발산하나 외로운 도시인들을 묘사한 관조적인 가사가 시선을 잡아끈다. 묵직하게 끊어 읊는 첫 머리에서의 “위스키 브랜디, 블루진 하이힐, 콜라 핏자 발렌타인데이”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곡의 또 다른 포인트. 이 멋과 이 깔끔함을 보라. 이 얼마나 도회적인 단어들의 나열이란 말인가. (그리고 얼마 전 신해철이 게스트로 출연했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상대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할 피니시 블로우'로 위 구절이 활용됐다. 지금이야 그렇다.)

 

2집 < Myself >의 인트로 연주곡 「The greatest beginning」에서의 그루브를 「재즈 카페」가 받아낸다. 키보드와 색소폰을 주축으로 만든 재지한 편곡이 일품. 타이틀 트랙으로서 음반을 히트시킴은 물론이고 이후 신해철의 대표곡으로서도 오랫동안 지분을 가져갔다. 곡은 1991년 겨울의 컴필레이션 음반 < 변진섭/신해철 >과 2007년 아내에게 바치는 신해철의 재즈 음반 < The Songs For The One >에 한 번씩 더 실렸다. 여러 번의 재편곡 과정을 거친만큼 신해철에게서 「재즈 카페」, 그리고 '재즈'는 각별해 보인다. 5집 < The Songs For The One >은 아예 재즈곡들로 편성을 하기도 했다. 필자도 이 앨범을 통해 「재즈 카페」를 처음 만났고, 당시 말끔하게 턱시도 입은 신해철은 지금 영정 사진 안에 있다.

 

이수호 (howard19@naver.com)

 

 


「도시인」


1992 넥스트 1집 < Ho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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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처음 사온 '길보드 리어카 테이프' 그 첫번째 트랙이 바로 「도시인」이었다. 당시 8살이었던 나에게 신해철의 랩과 노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충격을 넘어 공포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그 때는 아는 노래라곤 동요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사실 그 때 형과의 권력 구도상 노래가 '좋다' 혹은, '나쁘다'는 기준 없이 무작정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의 난잡한 사운드의 향연은 '좋은 말'로 하면 신세계였고,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지금까지 이어졌다.

 

1992년 넥스트의 이런 과감한 시도는 지금의 잣대로 보자면 백화점식 장르 나열의 전형적인 '실패 사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992년 대한민국에는 이런 테크노도 없었고 랩도 없었다. 속주로 폭발하는 메탈 솔로는 더 듣기 어려웠다. 그가 떠난 오늘 다시 이어폰을 통해 「도시인」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모든 악기 세션과 전개, 멜로디와 가사까지 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는 새로운 시도와 양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한 선구자였다는 걸 이제야 실감한다.

신현태 (rockershin@gmail.com)

 


「이중인격자」


1994 넥스트 2집 < The Return Of The N.EX.T Part 1 : Be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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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 >의 키보드 사운드가 일반 대중을 포섭했다면 < The Return Of The N.EX.T Part 1 : Being >은 메탈 & 록 마니들까지 포로로 붙잡은 앨범이었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웅장함과 공격적인 메탈 사운드로 채워진 앨범은 혼란스러워하는 자아의 표상을 그려낸 한 편의 음악 드라마였다. 여기에 불후의 발라드 넘버 「날아라 병아리」까지 화룡점정, 걸작의 반열에 들게 된다. 하지만 굳이 한 곡을 꼽자면 「이중인격자」가 아닐까. 폭발하는 기타와 질주하는 드럼 사운드에 터져 나오는 신해철의 보컬은 수많은 팬들의 넋을 앗아갔다. 그의 음악에 미온적인 '중간은 없다.'

 

김도헌(zener1218@gmail.com)

 

 


「날아라 병아리」


1994 넥스트 2집 < The Return of N.EX.T PART I The Be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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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발단은 바로 '병아리'였다. 어린이들의 마음을 단번에 빼앗아버리는 귀여운 병아리들은 수명이 너무나 짧았다. 그들의 죽음은 수많은 동심을 파괴하며 상심하고 상처받게 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은 「날아라 병아리」를 듣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심오한 이야기지만 가사는 순수했고 멜로디는 아름다웠다. 이 곡은 미디어 뿐 아니라 노래방에서까지 애창되며 넥스트의 대표적인 발라드 넘버로 자리를 잡았다.

 

비극의 절정은 '신해철'이었다. 그의 비보가 들리고 생전에 몇 번 스친 일 없던 나도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나이를 빠짐없이 먹고 얼굴에 주름이 잡혀가도 '죽음'은 남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의 죽음, 그의 노래가 다시 한 번 '세상에 머무르는 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가르쳐 주었다. 그와 청소년 시절을 함께 한 세대에게 '신해철'은 '병아리 얄리'처럼 애틋하고 안타까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굿바이'라는 말은 해도 해도 힘들고, '이별'은 겪어도 겪어도 아프다. 부디 정말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기를 기도한다.

 

 

김반야 (10_ban@naver.com)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1995 넥스트 3집 < The Return of N?EX?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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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만 보면 평범한 우리네 사랑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해철은 단순한 '사랑'의 테마로 읽힐 수도 있는 이 노래를 같은 성씨를 가진 비극의 연인들에게 바쳤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고민거리도 되지 않는다만, 당시에는 엄격하게 동성동본은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신해철은 가장 뜨거운 이슈를 가장 솔직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이런 여론들과 세월의 힘으로 1997년 7월 16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에서는 동성동본금혼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효력을 중지시켰고, 2005년 3월 2일 국회에서 민법 개정안을 의결함으로써 동성동본금혼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신현태 (rockershin@gmail.com)

 


「절망에 관하여」


1996 < 정글 스토리 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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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중반 신해철의 창작력은 말 그대로 최고였다. <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 후 두 번째로 맡은 영화 사운드트랙 < 정글 스토리 >에서도 그의 비범함은 빛을 발한다. 낭만적인 선율과 그만이 가진 독특한 음악 세계가 아름답게 수놓아진 이 앨범은 그의 천직인 록을 강조하며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적 면모를 고루 갖췄다. 그 중에서도 포효하는 보컬이 깊은 인상을 남긴 「절망에 관하여」는 신해철 표 파워 록 발라드의 전형이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신해철은 이 곡에 대해 '보컬에 있어서 내 커리어 중 최고'라 평했다. 그야말로 모든 있는 것을 다 쥐어 짜내어 절망에 맞서 싸운, 당당한 사자후였다.

 

'눈물 흘리며 몸부림치며 어쨌든 사는 날까지 살고 싶어.
그러다 보면 늙고 병들어 쓰러질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냥 가보는 거야'

 

 

김도헌(zener1218@gmail.com)

 

 


「Here I Stand For You」


<1997 넥스트 Sin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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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례적인 싱글 포맷 발매 후 팀의 대표 발라드 넘버로 자리매김한 이 곡에서, 그의 보컬은 유난히도 처절해 보인다. 강인함 뒤에 슬며시 엿보이는 두려움과 유약함. 지금에서야 보이는 마왕의 인간적인 모습에 왜 좀 더 그를 따스하게 바라봐 주지 못했나하는 안타까움이 맴돈다.

 

실험적인 성향이 짙었던 넥스트가 대중들과의 연결점을 확고히 형성한 노래였다. 장대한 스케일의 편곡, 비장한 가사가 만들어내는 스펙터클함에 많은 이들이 압도당했고, 나 또한 어릴 적 이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카세트 데크에 공 테이프를 넣고 숨죽여 귀를 기울이곤 했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겨우내 그 소리를 담아냈지만, 긴 러닝타임 탓에 반 정도가 잘려 있어 아쉬워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기다림에 늙고 지쳐 쓰러지지 않게” 1절도 채 끝맺음을 하지 못하고 서서히 사라져가던 그는 내가 원할 때면 거짓말처럼 사라지던 그런 존재였다. 지금도 막상 그를 원하니 정작 마왕은 먼 길을 떠나버렸다. 이 노래를 간만에 들으니 어릴 적 잘려 듣지 못했던 부분이 더욱 아리게 들린다. '어서 나타나줘'라는 한마디. 고통 어린 절규를 눈치 채지 못했던 나의 둔함에 앞으로 얼마간은 후회하고 또 후회할 것만 같다. 한 뮤지션의 음악을 즐겨 듣고도 그에 대한 애정을 간과했던 어린 시절을 말이다.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해에게서 소년에게」


1997년 넥스트 4집 < Lazen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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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아, 저 모든 별들은 너보다
먼저 떠난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란다
세상을 알게 된 두려움에 흘린
저 눈물이 이 다음에 올 사람들이 널 인도하고 있는 거지”

 

노래 속 내레이션이 유독 저릿하게 들린다. 최남선의 시에서 가져온 제목이 가사와 어우러지고, 오케스트라와 록이 만나 뿜어내는 포스가 상당하다. 1997년 만화 < 영혼기병 라젠카 >의 주제곡으로 쓰여 넥스트의 전반기를 마감한 4집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넥스트는 “국내에서는 경쟁자가 없어 더 이상 록밴드로서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말을 남기고 해체한다.

 

아직도 당신에게 신해철은 유효한가?” 지난 6월 자신의 쇼케이스에서 그가 물었던 기억이 맴돈다. 그는 음악뿐 아니라 족적이 뚜렷한 말들을 남겼다. 미디어에 비치는 그는 까칠하고 제 멋대로인 것처럼 보였지만 누구보다 직설적이고 소신 있는 발언을 해왔다. 그래서인지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주제곡, 아마도 그가 청소년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특별하다. 현실에 순응해 살아가는 지금, 움츠려 들지 말고 세상이 만든 선을 넘으라는 그의 울림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정유나(enter_cruise@naver.com)

 


「일상으로의 초대」


1998 신해철 3집 < Crom`s Techno Work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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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미디에 관심이 있고 조예가 깊던 그였다. 넥스트 해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보인 < Crom Techno's World >(1998)의 기조가 전자음악이었다는 점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행보일 것이다. 당시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성향의 작품이었음에도, 그는 자신만의 수완으로 미개척지에 다시금 새싹을 키워내고야 만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일상으로의 초대」였다.

 

딜레이를 건 몽환적인 신스루프와 나른한 보컬이 가져다주는 의외의 편안함. 밴드 시절의 치열함은 잠시 접어두고 쉬어가듯 툭툭 던지는 단어 하나하나로 위안을 주었던 그 노래다. 이렇듯 그는 타협 없이도 음악적 주권과 대중의 관심이 함께 살아가는 환경을 구축할 줄 알았다. 독재자와 같은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남을 배척한 적 없는, 오히려 틈만 나면 누군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던 이중인격의 반전남.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흔적이 이제 시간에 비례한 만큼 옅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고 또 두렵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평범한 생활 가운데 그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수밖에. 그렇게 하루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어느 샌가 그가 없는 세상의 길 위를 그렇게 걷고 있다. 생각해보면 크게 변한 건 없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달라진, 또 다른 일상으로의 초대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2014/10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1999 신해철 4집 < Monoc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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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의 해체 이후 신해철은 홀연히 영국 유학을 떠난다. 당시 발표한 두 장의 앨범들은 대중적인 인지도는 적을지 모르나 각각 테크노와 메탈음악으로의 과감한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프로듀서로 유명한 크리스 상그리디(Chris Tsangarides)와 같이 한 앨범은 이후 크리스 상그리디가 신해철의 음악을 표절했다는 시비에 휘말리면서 유명세를 치르기도 한다.

 

모노크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이 당시 앨범에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가 수록되어 있었다. 메탈 그룹 '크래쉬'의 리메이크로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졌으며 덕분에 TV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무기력하게 되는대로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신해철다운 일갈을 하는 곡으로 가사나 사운드 구현에 있어서도 대담하고도 획기적이다. 신해철의 직설화법이 음악과 긴밀하게 결합된 매우 신해철을 닮은 곡이기도 하다.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아! 개한민국」


2004년 넥스트 5집 < The Return Of N.EX.T Part III :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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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의 부활을 알린 이 노래의 제목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개'한민국이다. 6분의 러닝타임이 지나는 동안, 신해철은 이 나라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후벼 파며 시쳇말로 돌직구를 날린다. 그가 생전 발표한 곡들 중 사회적 메시지가 가장 강하게 반영된 곡으로, 골수 록 팬이라면 아마 가장 후련함을 느낄 노래가 아닐까. 이 노래가 발표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가 남긴 메시지는 2014년에도 100퍼센트 유효하다는 점이 우리를 한 번 더 절망케 한다.

 

여인협(lunarianih@naver.com)

 


「개판5분전 만취공중해적단」


2008 넥스트 6집 < 666 Trilogy Part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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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해철이 음반을 내는 주기는 점점 길어졌다. 물론 그를 미디어나 공개석상에서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대에 서는 모습, 그리고 노래를 하는 모습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었다. 직설화법에 따른 여러 구설에 휘말리고 예능의 출연이 빈번해지면서 그의 반짝이던 총기도 점점 빛을 잃는 듯 보였다. 후반기의 그의 음악은 신해철의 외모만큼 큰 변화를 겪는 듯 했다. 비장한 전사는 블랙 유머를 일삼는 해적으로 바뀌었고, 일렉트로닉, 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거쳐 도달한 곳은 로큰롤이었다. 노래는 '개판 5분전'이란 말이 암시하듯 혼란스러운 질주감, '만취'에서 나타나듯 온갖 노이즈가 판을 친다. 마치 뭔가를 놓아버린 듯한 혼란과 방황이 이 앨범에서 가장 가감없이 드러난다.

 

김반야 (10_ban@naver.com)


「A.D.D.A」


2014 < Reboot Myself Part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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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6년만에 음악에 대한 설렘과 흥미를 되찾았다며 아이처럼 해맑았다. 「A.D.D.A」도 그렇게 해맑은 얼굴로 하는 '장난'같은 노래다. 1000트랙 이상을 소화한 원 맨 아카펠라, 이건 천재들이나 할 수 있는 미친 '놀이'다. 그는 공연에선 이걸 어떻게 라이브로 연주할 것인지에 들떠서 설명했다. 본인 뿐 아니라 넥스트도 막 시작해보려던 참이었다. 그는 올해 참 행복해보였다. 뮤직비디오 속 익살스러운 모습도 미워진다. 신해철은 짖궂은 소년의 모습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전민석(lego93@naver.com)


「민물장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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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이 노래가 주목받는 이유는 생전 그의 바람 때문이다. 뜨지 못해 아쉬운 곡으로 「민물장어의 꿈」을 꼽으며, 그는 본인이 죽으면 뜰 것이라고 말해두었다. 그의 예측대로 노래는 음원 차트에 올랐고, 현재 그의 장례식장, 아니 대한민국 전체에 울려퍼지고 있다.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전민석(lego93@naver.com)

 

바다 -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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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1760~1849)의 채색목판화 ‘카나가와의 큰 파도’를 기억하는지요?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가츠시카는 후지산의 모습을 원경(遠景)으로 바라봤습니다. 바로 눈앞에서는 집채만한 파도가 사납게 으르렁대고 두 척의 배가 풍랑에 휩쓸려 흔들리고 있습니다. 배가 거의 뒤집힐 것 같은 급박한 상황입니다. 개미만한 크기로 묘사된 배 위의 사공들은 넋이 빠진 채 어쩔 줄 모릅니다. 그리고 멀리에서, 머리에 흰 눈을 얹은 후지산이 그 모든 상황을 점잖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화면 중앙의 오른쪽 아래, 그 난리법석인 상황에서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후지산의 모습이 작게 묘사돼 있습니다. 마치 파도 위에 오연하게 떠 있는 한 조각 섬 같습니다.
 

이 그림은 호쿠사이가 남긴 약 1000장의 목판화 중에서도 특히 유명합니다. 계절에 따른 후지산의 풍경을 여러 각도에서 묘사하고 있는 채색 목판화 시리즈 <후지산 36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1831년 무렵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그림을 ‘우키요에’(浮世繪)라고 하지요. ‘우키요’라는 말은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 말처럼 원래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의 풍속화를 뜻했는데, 점차 의미가 좁혀져서 채색목판화를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물론 ‘니시키에’(錦繪)라는 보다 정확한 용어도 있지만 우키요에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우키요에, 혹은 니시키에는 일본의 전통 문화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유럽에까지 알려지며 큰 인기를 끌었고, 오늘날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우키요에 스타일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아흔 살로 세상을 떠난 화가 가츠시카는 자신의 우키요에가 어느 정도까지 유명세를 얻게 될 지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의 유명세는 에도시대의 일본 화가가 상상할 수 없었던 지점까지 나아갔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유럽, 특히 프랑스에는 마침내 ‘일류’(日流, Japonisme)라고 부를 만한 이국풍의 문화애호 바람이 불어 닥쳤고 그 중심에 가츠시카의 우키요에가 있었습니다. 특히 ‘가나가와의 큰 파도’는 당시의 일류를 대변하는 그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1862~1918)도 어느날 이 그림과 대면했을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봤는지, 그림에 대해 드뷔시가 어떤 소감을 밝혔는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인상적인 채색목판화는 드뷔시의 교향적 스케치 <바다>(La Mer)의 모티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세기가 끝나갈 즈음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처음 접했던 인도네시아의 전통음악 ‘가믈란’과 함께, 이국풍(異國風)이 마침내 드뷔시의 음악 속으로 상륙했던 겁니다.
 
물론 19세기 후반의 많은 음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드뷔시도 청년 시절에는 바그너에게 매혹됩니다. 하지만 그는 청년 시절을 벗어나면서 ‘바그너적인 것’과 결별의 수순을 밟습니다. 그것은 드뷔시 개인의 음악적 특성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유럽 대륙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음악적 독점에 균열이 가는 장면이기도 했지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의 문화적 특성으로 거론되는 회화성과 이국문화에 대한 개방성이 음악가 드뷔시를 통해 동시에 드러났던 셈입니다.

 

 <바다>의 작곡 연도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입니다. 가츠시카의 판화 ‘카나가와의 큰 파도’처럼 드뷔시의 삶에서도 격랑이 일었던 시절입니다. 그중에서도 드뷔시와 사랑을 나눴던 세 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긴 어렵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드뷔시의 청년기는 무척 곤궁했습니다. ‘아르 누보’(새로운 예술)를 지향했던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은 너나없이 그랬을 겁니다. 보헤미안적 삶을 동경했던 그들에게 예술을 향한 열정과 궁핍은 동전의 양면을 이뤘고,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낭만적 연애였을 겁니다.

 

드뷔시 곁에도 가브리엘 듀퐁이라는 동거녀가 있었습니다. 10년 가까이 함께 지내다가 1898년에 헤어졌는데, 결별의 사유는 가난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물론 남녀의 결별이 오로지 가난 때문이었다고 보긴 어렵지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가난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파생시킵니다. 인간관계의 많은 갈등과 다툼이 가난 때문에 생기지요. 드뷔시와 듀퐁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드뷔시는 관현악곡 ‘야상곡’을 거의 마무리하면서 ‘인상주의’의 영역으로 깊숙히 들어서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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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퐁과 헤어지고 이듬해에 만난 릴리 텍시에와 법적인 부부 관계를 맺은 후에도 드뷔시의 여성 편력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1903년에는 은행가 바르닥의 아내 엠마와 도피행각을 벌였고, ‘버림받은’ 아내 릴리는 권총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지요.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당시 프랑스 문화계에 커다란 스캔들로 떠올랐습니다. 남녀상열지사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은 소재였을 뿐 아니라, 당시의 드뷔시가 어느덧 주목받는 음악가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파리 뒷골목을 함께 누볐던 과거의 동료들, 여전히 ‘보헤미안’의 삶을 살고 있던 친구들조차도 드뷔시를 손가락질했습니다. 그 삿대질 속에는 인간적 비난과 음악에 대한 비판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렇게 드뷔시를 비난했던 사람들 중에는 예컨대 에릭 사티(1866~1925)도 있었습니다.
    


관현악곡 <바다>는 바로 그런 시기에 태어났지요. 드뷔시는 치정(癡情)의 열풍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음악가로서의 명성이 점차 확고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바다>를 완성하던 1905년에 엠마와의 사이에서 딸 슈슈(Chouchou)를 얻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의 드뷔시는 격랑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았던 행운아였을 뿐 아니라 어느덧 40대에 접어든 그의 창작적 에너지는 하이라이트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가 펼쳐낸 ‘음악적 인상주의’는 외부세계의 질적인 고유성을 허물어뜨렸다는 점에서 ‘현대적’이지요. 이를테면 우리가 드뷔시의 음악에서 발견하는 것은 ‘풍경’이라는 이름의 객관적 외부가 마침내 자아(自我) 속으로 흡수돼 재구성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뷔시는 <바다>의 작곡에 착수할 무렵, 열 살쯤 손위인 작곡가 앙드레 메사제(Andre Messag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지요. “바다가 부르고뉴의 비탈진 언덕을 어떻게 씻어내릴 수 있겠냐고 당신은 말하겠지요. (중략) 그러나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객관적) 현실보다 나의 감각에 선명합니다.” 이후에도 그는 본인의 음악적 회화성에 대한 언급을 수차례 남깁니다. “자연과 상상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 또는 “바다의 술렁거림,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곡선, 잎사귀를 스치는 바람소리, 새 울음소리.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다양한 인상을 전해줍니다. (중략) 기억 하나가 우리들 밖에서 펼쳐져서 음악으로 들려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해 펴낸 책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서 드뷔시가 1892년부터 1894년 사이에 작곡했던 <목신에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프랑스 현대음악의 여명”으로 설명했던 적이 있지요. 사실 이 곡에 그런 의미를 부여한 이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1925~)입니다. 저는 졸저에서 그분의 견해를 다만 인용하고 있을 뿐이지요. 어쨌든 드뷔시는 그로부터 10년쯤 후에,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소묘’라고 이름붙인 <바다>에 이르러 모더니즘의 전망을 한층 멀리까지 확장합니다. 특히 그는 이 곡에서 풍경의 ‘한 컷’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집중하지요. 1악장은 ‘바다 위의 새벽부터 정오까지’, 2악장은 ‘파도의 희롱’, 3악장은 ‘바람과 바다의 대화’라는 이름을 내걸었습니다. 드뷔시는 “바다의 술렁거림,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곡선, 잎사귀를 스치는 바람소리, 새들의 울음소리”를 ‘우연성의 모자이크’로 보여줍니다. 그렇게 바다의 시간은 고정된 물리적 법칙을 벗어나 ‘나’의 주체적 인상 속에서 자유자재로 흘러갑니다. 그것이 바로 <바다>가 20세기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앙세르메.jpg▶에르네스트 앙세르메(Ernest Ansermet),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1957년/Decca


인터넷 매장에서 드뷔시의 <바다>를 검색하면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반들이 주로 검색된다. 물론 그 음반들도 들을 만하지만 앙세르메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데카의 녹음을 1순위로 권한다. 여러 지휘자들의 드뷔시 연주를 함께 수록하고 있는 편집 음반보다는 앙세르메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단독 음반을 고르는 것이 낫다. 본문에서 언급한 가츠시카의 목판화가 표지에 수록돼 있는 음반이다. 드뷔시 음악의 프랑스적인 감각, 몽롱함과 색채감 등을 잘 살려내고 있는 호연이다. 드뷔시의 다른 관현악 걸작들인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야상곡> <봄> 등이 함께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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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1993년/DG


현대음악의 거장 불레즈는 40대였던 1966년에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도 <바다>를 녹음했다. 이 연주도 호평을 받는다. 오늘 추천하는 1993년의 녹음에 비하자면 한결 뜨거운 열정이 넘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앙세르메의 해석과 좀더 선명하게 대비를 이룰 수 있는 녹음은 역시 1993년의 DG 음반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연주가 다소 건조하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앙세르메가 19세기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음악의 회화성을 구현하는 것과 달리, 불레즈는 드뷔시의 음악을 좀더 20세기 쪽으로 밀착시킨다. 애매한 표현 없는 정교한 연주다. 드뷔시의 음악를 정확한 언어로 설명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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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탈리아의 친절한 헤비메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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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 제의를 받을 때 채널예스 미남 담당자가 했던 말이 오늘 문득 떠올랐다. 


 ‘간혹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을 소개해도 좋아요.’ 


 그래 이때다. 그동안 잘 알려진 아티스트를 이야기해온 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 칼럼도 두 달쯤 지났으니 바로 그 ‘간혹’에 해당한다고 해도 되겠지. 그래서 오늘은 이탈리아 롹 밴드 데르디앙(Derdian)에 대한 얘기를 꺼내련다. (아아, 다 아는 뮤지션이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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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년 전에 이탈리아에 갔었는데 그때 제 점수는요, 굉장히 저렴했다. 사람들의 인간성이 개떡 같았기 때문이었다. 길에서 생선을 메고 가는 남자도 화보일 정도로 비주얼이 뛰어났으나 반대로 내면은 아주 못생긴 사람들이라는 표본을 잔뜩 수집할 수 있었다. 운이 나빴는지 모르겠지만 하필이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혈질이고, 갖은 지랄로 내게 까칠함을 선사했다. 성질 더러우면서 잘생긴 걸로는 나 역시 한반도에서 만만치 않았는데도 이탈리아 반도에선 오징어 신세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작년에 다시 이탈리아에 갔을 때는 그 성질머리들 다 전학 갔나 싶을 만큼 분위기가 싹 달랐다. 만나는 사람들이 죄다 착하고 살가웠다. 아니 무슨, 길을 묻는데 잘 안내해 주질 않나, 물건을 살 때 고맙다는 말을 하질 않나, 심지어 숙소의 리셉션 여직원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상큼한 뻐꾸기까지 날려줬다. 이게 뭐지? 내가 이탈리아 말고 삼탈리아에 잘못 왔나? 


 아마도 십 년 전엔 내가 돈 안 쓰게 생겼고, 꼬질꼬질한 냄새가 나는 백패커라서 배척당했던 건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바뀐 세대가 기성세대의 격심한 까칠함에 시달리다 못해 자신들은 안 그럴 테다, 하고 반항하며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한 건지도. 다만 사람들의 비주얼은 예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보였다. 외면을 포기하고 인격의 아름다움을 신장한 걸로 보였다.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나로선 받아들이기 참 요상했다. 운이 좋았을 뿐, 이탈리아에서라면 분명 어디선가 잘생긴 생양아치들이 대기하고 있다 보란 듯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한 달 넘게 여행하도록 까칠한 경험을 한 번도 맛보지 못했다. 다만 피렌체에서 아앙, 그 아름다운 피렌체에서 만난 한 할머니만 내 기대를 충족(?) 시켜줬다.


 나는 싼 숙소를 찾아 피렌체 외곽의 스칸디치라는 곳에 묵었다. 사람이 별로 없고, 매표소도 없는 트램 역이 하나 있는 동네였다. 플랫폼에는 십대 양아치로 보이는 남자애들 서넛이 섀도복싱을 하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티켓을 끊는 유일한 기계는 영문 지원이 안 돼 나는 그 앞에 서서 잠시 연구를 해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한 할머니가 이탈리아 축구선수 발로텔리처럼 공간을 파고들며 나를 밀쳤다. 


 “요 버튼 누르고, 돈 넣으란 말이야! 이러면 표가 나오잖아!! 이게 어려워?!!” 


 이탈리아어였지만 딱 그런 얘기가 아닐 수 없는 행동과 말투였다. 할머니는 엔터키에 해당하는 버튼을 누를 땐 주먹으로 뻑 때리기까지 했다. 발로 차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만큼 맹렬한 분노였다. 


 “오호, 역시! 이래야 이탈리아지!”


 나도 모르게 환호가 나왔다. 그녀는 표를 뽑고 나서도 계속 씩씩거렸다. 할머니 입장에선 트램이 곧 들어올 텐데 내가 버퍼링 중이라 마음이 다급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광판을 보자 5분이 남았다고 적혀 있었다. 혹시 그 할머니는 소싯적에 글로벌 소개팅 나갔다가 동양 남자한테 대차게 바람맞은 적이라도 있는 걸까. 난 평생 굼뜬 사람 취급받은 적이 없는데 그 아날로그 기계를 현지인처럼 사용하지 못한다고 욕먹은 게 좀 억울했다. 십대 남자애들은 섀도복싱을 멈추고 나와 할머니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할머니에게 따져보고 싶었다.


 “거 모를 수도 있지, 화부터 내다니 너무한 거 아니오? 한국에 초대할 테니 지하철 표나 제대로 끊는지 한 번 봅시다.” 


 그렇지만 자기네 동네 할머니에게 응전한다고 판단하면 껄렁한 십대들이 개입할까봐 나는 꾹 참았다. 그런데 다시 표를 끊기 위해 이탈리아어 스캔 어플을 켜는 내게 남자애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우 젠장, 피렌체 외곽의 칙칙한 동네에서 뭔가 투닥투닥 소리가 나겠다는 걱정이 밀려왔다. 거 참 액션 활극 찍기 딱 좋은 날씨였다. 한데 십대들 중 하나가 띄엄띄엄 영어를 썼다. 


 “우리가 도와드릴게. 어디까지 가?”

 “산타마리아 누벨라.”

 “그럼 이거 누르고, 여기 1.20유로 투입.”

 가까이서 보니 아주 착한 눈빛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고마워. 너희 엄청 친절한데?”

 “됐다고. 할머니 대신 우리가 사과할게. 부디 잊고 즐거운 여행 하는 걸로.”


 그 친구들은 내가 트램을 타자 창밖에서 손까지 흔들어줬다. 아아 여기가 이탈리아 맞나. 애들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그렇다. 이탈리아가 정말로 뭔가 달라진 거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게 이탈리아란 호감이 많이 가는 나라다. 오래전 이탈리아 프로그래시브 롹밴드들의 빠돌이었고, 이탈리아 음식은 뭘 먹어도 혓바닥이 감탄사를 내지르며,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장소가 넘치는 나라다. 예쁘고 감각적인 물건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죄다 만드는 데다 이제는 유일한 단점이었던 성질머리도 착해지는 추세인 것이다. 


 피렌체를 떠날 무렵 사람들의 친절과, 특히 그 십대 청소년들의 미소를 떠올리자 이탈리아 밴드의 음악을 듣고 싶어졌다. 나는 한 와이파이 빠방한 카페에 앉아 페로니를 마시며 데르디앙의 음악을 기분 좋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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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르디앙은 힘 있고, 시끄럽고, 빠르고, 묵직한 음악을 하는 메탈밴드다. 헤비메탈을 하는 친구들답게 일단 생양아치 같은 인상을 쓰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다들 눈빛이 선하다. 패션은 전혀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느낌이 안 들만큼 촌스럽게 입었으나 좋아하다보니 나름 감각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들의 음악은 강력한데도 쉽고 친절하고 신나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분명 쓰래쉬/파워/스피드메탈을 추구하는데 멜로디가 뚜렷하고, 일말의 서정성도 번뜩인다. 아래 소개할 뮤직 비디오에는 기타 치는 폼이 웃겨서 유머감각까지 담겨 있다. 굳이 무슨 카테고리를 대입해 이 친구들은 무슨 장르를 하는 밴드다, 그렇게 규정하는 게 어렵다. 사실 그러는 게 의미도 없고. 그냥 데르디앙의 음악 안에는 여러 종류의 음악적, 감각적 센스들이 녹아들어 있는데 이탈리아 음식들처럼 유난히 내 입맛에 다 맛있는 소리라는 생각이다. 

 

 그들의 음악 중에서 나는 흑장미Black Rose 라는 곡을 가장 좋아한다. 백문이 불여일청, 링크로 소개하고 오늘의 턴테이블을 마칠까 한다. 



어우, 노래도 영어로 부르네. 거 참 친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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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굿바이 마왕] 당신이여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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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궤도

 

리더 및 리드싱어, 기타리스트로 몸 담았던 6인조(대학가요제까지는 5인조) 캠퍼스 밴드. 마왕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관문이다. 과감하게 세 대의 키보드를 인트로에 배치한 「그대에게」로 무한궤도는 1988년 제 12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이후 1989년,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와 「여름이야기」 등이 수록된 첫 앨범 <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 를 내놓을 직전에는 멤버 보강을 통해 팀 구성을 확장하기도 했다. 다만 이들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 한다. 대학생으로서의 학업이 난관에 걸려있던 탓이다. 의견 조율에 실패한 밴드는 결국 해산을 맞는다. 대학가요제를 함께한 조형곤과 나중에 합류한 정석원은 곧 공일오비(015b)라는 이름으로 돌아온다. 오랫동안 회자될 대표곡 「그대에게」를 들고 신해철은 바로 솔로 활동 시작에 착수했다.

 

솔로 신해철

 

1990년, 첫 솔로 앨범< 신해철 >을 발표한다. 부드러운 선율이 놓인 타이틀 곡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가 당시 히트를 기록했다. 쉽게 들리는 감미로운 팝, 발라드 스타일이 대부분의 트랙에 녹아있었으나 음악적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석원이 쓴 「함께가요」에서의 록적인 연출이나 「연극속에서」, 「안녕」의 댄서블한 전자음악, 랩과 같은 특이 요소들은 향후의 등장할 다양한 실험의 전초에 해당한다.

 

이듬해 내놓은< Myself >에서 신해철은 자기 역량을 한 차례 토해낸다. 전곡을 작사, 작곡, 편곡했을 뿐 아니라 세션, 여기에 미디를 이용한 사운드 메이킹까지, 전반의 작업을 홀로 해내며 창작가로서의 남다른 입지를 다졌다. 지금도 시그너처 송으로 널리 알려진 「재즈 카페」와 다시 다듬은 「그대에게」, 발라드 넘버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등을 위시로, 전작의 「안녕」을 잇는 「나에게 쓰는 편지」, 극적인 구성이 보이는 「길 위에서」 등이 음반을 빛냈다. 독자적인 위치에 오르는, 앨범의 이름 'myself'와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N.EX.T

 

기타리스트 정기송, 드러머 이동규와 함께 내놓은 1992년의 앨범< Home >을 통해 넥스트의 존재를 처음 공개한다. 작품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 Myself >를 잇는 댄스 리듬의 「도시인」이 인기 싱글로 최전선에 나섰으나 작품의 의미는 본격적으로 프로그레시브의 요소를 가미한 「인형의 기사」, 「영원히」와 같은 곡들에서 더욱 크게 부각됐다. 콘셉트 앨범으로서의 접근 또한 신해철의 창작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회와 가정 속에서의 한 자아를 논하는 가사나 '증조할머니의 무덤가'를 가운데에 두고 사운드 성격을 반전시키는 연출은 상당한 수준의 기획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결과물이었다.

 

물오른 감각은 다시없을 역작, 깊은 내면으로 시선을 돌린 1994년의 두 번째 작품< The Return Of N.EX.T Part 1 : The Being >으로 이어진다. 더욱 끌어올린 프로그레시브의 컬러와 새로이 이식한 헤비메탈 사운드가 음반을 장엄하고 웅장하게 만들었다. 앨범의 축소판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 껍질의 파괴」가 무자비하게 귀를 파고들었으며 속도감 있는 메탈 넘버 「이중 인격자」와 드라마틱한 「The dreamer」, 「The ocean : 불멸에 관하여」가 작품 곳곳에서 경이로운 장면들을 자아냈다. 송라이팅과 사운드, 텍스트, 연주 그 어느 한 지점에서도 모자란 부분이 없었다. 명곡들 가운데서 「날아라 병아리」가 히트를 기록했다.

 

자아에 던졌던 비판의 방향을 이번에는 세상으로 돌릴 차례. 이 순서에 따라 1996년, 넥스트는< The Return Of N.EX.T Part 2 : World >를 세상에 공개한다. 크게 넓힌 스펙트럼이 주요 포인트. 전작에서 다진 프로그레시브, 헤비메탈 사운드로 구성한 바탕에 국악과 펑크(funk), 약간의 신스 팝과 같은 다양한 스타일을 더해 작품을 완성했다. 신해철의 감각은 안정궤도에 오른 밴드의 상태를 등에 업고 더 높이 솟았다. 2집에서의 성공이 입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향후 넥스트의 황금기라 불릴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의 라인업이 이합이 잦았던 멤버진에 안정감까지 갖고 왔다. 탄탄한 당시의 배경은 신해철의 이력에 「세계의 문」,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Kormerican blues」와 같은 훌륭한 기록을 남겼다.

 

최고의 조건을 단 신해철에게 제동장치는 필요 없었다. 1997년의 네 번째 정규 음반 < Lazenca (A Space Rock Opera)> 그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앨범의 부제에 맞는 우주적인 색감의 사운드와 통일성 있는 작품의 전개, 더욱 짙어진 아트 록의 면모가 한 음반에서 조화를 이뤘다. 「Mars, the bringer of war」, 「Lazenca, save us」에서의 웅장한 부피와 「The power」에서의 날카로운 마감이 완력을 과시하는가 하면 「먼 훗날 언젠가」와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매력적인 선율을 통해서는 안정감을 제공했다. 넥스트 식 록의 완성형이라고도 할 「The hero」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트랙. 음악에 있어서는 신해철과 밴드 모두 최상의 몸상태를 지니던 시기였다. 이보다 앞선 같은 해 2월에는 「Here I stand for you」, 「아리랑」을 담은 싱글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해의 말일인 12월 31일,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말과 함께 넥스트는 해산한다. 수많은 억측들이 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OST 작업, 노땐스

 

그 사이에 이루어진 번외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할 작품으로는 단연 1996년의 < 정글스토리 OST >를 꼽아야한다. 넥스트를 통해 절정에 다다른 신해철의 창작력은 작품을 걸작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김세황의 기타를 앞세운 록 넘버 「절망에 관하여」와 「백수가」가 강력한 펀치를 날렸고 김동률의 터치가 들어선 두 개의 테마를 통해 감성을 자아냈다. 장면이 빠르게 전환하는 연주곡 「Jungle strut」과 산울림의 원곡을 비틀어 낸 「내 마음은 황무지」에서의 실험적인 작법은 말할 것도 없다. <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OST >로 시작한 신해철의 영화음악 작업은 < 정글스토리 OST >를 거쳐 < 세기말 OST > 등으로 이어진다.

 

같은 해 10월에는 자신과 함께 1990년대 가요계의 신세계를 열어젖힌 윤상과 그룹 노땐스를 결성, 앨범 < 골든힛트 >를 내놓기도 했다. 그간 보여줬던 각자의 성향에서 알 수 있듯 둘은 일렉트로니카로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높은 멜로디 감각보다는 여러 시도가 혼재한 전자음이 부각돼 음바은 큰 인기를 끌지 못했으나 두 재기가 낳은 음악적 실험이라는 큰 의미를 확보했다. 캐치한 「달리기」와 각양의 방식으로 사운드를 운용한 「질주」, 「자장가」 등이 음반에 자리한다.

 

크롬, 모노크롬

 

1998년에 발매한 앨범 < Crom's Techno World >는 넥스트 해체 후 찾은 영국 유학길에서 만든 작품이다. 음반에는 전자음악, 특히 테크노에 대한 신해철의 큰 관심이 담겨있다. 또 다른 음악적 변이를 보여주는 이 과정 속에서 솔로 시절의 「재즈 카페」와 「나에게 쓰는 편지」, 「안녕」 등이 테크노 사운드를 품으며 재탄생됐고 「일상으로의 초대」가 대표곡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음악적 실험은 이듬해, 프로듀서 크리스 상그리디와 함께 결성한 모노크롬의 음반< Monocrom >에서 한 차례 완성된다. 하드코어한 테크노를 표방해 거친 사운드를 이끌어냈으며 「Go with the light」와 같은 트랙에서는 예의 넥스트에서처럼 국악의 요소를 적용시키기도 했다. 크래쉬의 버전으로도 유명한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도 이 음반에 실려 있다.

 

같은 해 연말, 1999년의 공연 실황과 그간의 미발표곡을 정리한 앨범 < Homemade Cookies & 99 Crom Live >를 발매했다.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는 훗날 대표 싱글이 되는 「민물장어의 꿈」이 있다.

 

비트겐슈타인

 

2000년 겨울, 신해철은 기타리스트 데빈, 드러머 빙크와 함께 밴드 비트겐슈타인으로 돌아온다. 보다 간편해진 록 사운드가 작품의 주요한 특징. 「수컷의 몰락 part 2」에서는 펄 잼 풍의 그런지 록을 보였으며 「The pressure」에서는 랩 메탈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간의 솔로 활동을 통해 보여준 일렉트로니카도 트랙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스타일에서의 또 다른 변화와 높은 퀄리티, 남자의 일생이라는 콘셉트를 녹인 촘촘한 구상이 수작을 완성시켰으나 1990년대만큼의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채 비트겐슈타인에서의 활동도 정지 상태를 맞는다.

 

다시, 넥스트

 

신해철은 다시 한 번 넥스트를 결성한다. 예전의 넥스트와는 멤버 구성면에서부터 완연한 차이를 보였다. 1990년대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의 이름이 사라지고 비트겐슈타인에서 함께 했던 데빈을 포함한 새로운 멤버들이 자리를 채웠다. 음악 스타일도 전과 달랐다. 강성의 록 사운드를 추구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스래시 메탈, 뉴 메탈 등의 새로운 문법을 도입했으며 신해철의 보컬 톤도 더욱 거칠어졌다. 비판을 넘어 비난을 가하는 텍스트 역시 또 다른 변화의 역점으로 둘만했다. 「개한민국」, 「Dear American」, 「Satan's bride」 등이 실린 2004년의 다섯 번째 정규음반< 개한민국 >은 여러모로 많은 기억을 남긴 결과물이었다. 이전과는 상이한 지점에 자리한 넥스트를 두고 갑론을박의 장이 수차례 일었다. 대중적 성과가 옛날 같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밴드로서(특히 넥스트로서) 무언가를 보여줬다는 점에 있어 신해철 스스로는 만족했다.

 

다시 한 번 밴드에 메스를 들었다. 5집 이후 넥스트에 다시 생긴 공석을 예의 3인방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과 키보디스트 지현수를 새로 들였다. 다시 만진 예전의 대표곡들과 신곡 「The last love song」 실은 중간 단계의 앨범(5.5집) < Regame? >을 2006년에 발표했다.

 

약간의 멤버 교체를 거쳐 2008년 6집 < 666 Trilogy Part 1 >을 내놨다. '삼부작'이라는 음반의 타이틀로부터 알 수 있듯 원래는 후속작이 따를 작품이었다. 다만 제작이 얼추 완성됐음에도 밴드의 기획 방향이 이후 여러 차례 바뀌는 탓에 남은 두 작품은 미발표 상태로 남게 된다. 1990년대의 넥스트과 대응하는 프로그레시브, 메탈 사운드가 작품에 깔려있다. 「The empire of hated (증오의 제국)」에서는 탁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며 「개판 5분전 만취 공중 해적단」에서는 스피디한 헤비메탈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 다른 솔로

 

그 사이인 2007년, 솔로 음반으로 내놓은< The Songs For The One >은 다시 한 번 팬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작품이었다. 빅 밴드를 대동해 중후한 톤의 보컬 연기를 구사하는 이 재즈로의 외도를 사람들은 달갑게만 여기지는 않았다. 흥미롭다는 옹호와 좀처럼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비판이 반응 속에 섞였다. 물론, 아내 '단 한 사람'에게 바치는 음반이었기에 논외의 대상으로도 빠질 수 있었겠으나, 세상으로 작품이 등장한 이상 사람들의 시선 밖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숙생」, 「장미」, 「My way」 등의 국내외 골든 넘버와 본인의 곡 「재즈 카페」가 앨범에서 풍성한 재즈 사운드를 입었다.

 

이후,

 

2014년, 여섯 번째 정규 음반을 앞둔 미니 앨범 < Reboot Myself Part. 1 >을 발표하며 솔로 커리어에 한 획을 더했다. 펑크(funk), 디스코 사운드를 주축으로 내세운 음반 속에서 수차례 목소리를 쌓아올린 원 맨 아카펠라 「A.D.D.a」가 많은 주목을 받았고 「Catch me if you can (바퀴벌레)」, 「Princess maker」가 향후의 행보에 기대감을 모았다.

 

같은 해, 원년멤버 정기송을 포함한 새로운 라인업을 내세우며 넥스트를 다시 출격시켰다. 새 앨범 < N.EX.T United >을 발매하기에 앞서 싱글 「I want it all (demo 0.7)」을 공개했다.

 

 


글/ 이수호 (howard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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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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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5번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은, 구스타프 말러의 어록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많이 회자됩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습니다. 말러가 네 살 아래의 슈트라우스를 처음 만났던 때는 1888년이었습니다. 스물여덟 살 때였지요. 성악가 요한나 리히테르를 향한 사랑이 실연으로 끝나고 첫번째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작곡했던 것이 그로부터 4년 전, 이어서 그 연가곡의 선율을 모티브로 삼아 교향곡 1번 ‘거인’을 완성했던 해가 바로 1888년이었습니다. 당시 말러는 ‘바흐의 도시’로 유명한 라이프치히에서 카펠마이스터로 일하고 있었지요.

 




이 시기에 첫 대면한 두 청년은 독일 후기 낭만음악의 대명사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크 시대의 바흐와 헨델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음악사의 라이벌’이라는 후대의 평가인 셈이지요. 하지만 말러와 슈트라우스를 바흐와 헨델에 비유하는 것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바흐와 헨델은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서로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지요. 그저 서로의 존재를 알았을 뿐이었고 실제로 생전에 대면한 적도 없습니다. 반면에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달랐지요.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의식했습니다. 기질과 음악적 스타일이 매우 달랐던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경쟁했습니다. 특히 상대방에 대한 의식의 정도는 슈트라우스보다 말러 쪽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말러가 성격적으로 더 내향적인데다 내면적으로도 복잡한 사람이었기에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앞에서 인용한 말러의 발언이 등장합니다. 그의 아내였던 알마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정확한 문장을 옮겨보자면 이렇습니다. “그의 시대가 가고 나면,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 문장 속에 등장하는 ‘그’가 슈트라우스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겠지요. 아내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는 내밀한 언어에서나 가능한 표현이었을 겁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을지라도, 아내인 알마가 살아남아서 ‘자신의 시대’를 목격할 것이라고 예감합니다. “나의 빛이여, 당신은 바라건대 확실히 그 시대를 보게 될 거야. 당신은 안개 사이로 태양을 알아본 사람이니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말러의 ‘말’은 알마가 말러 사후에 썼던 세 권의 책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이름을 내건 책을 평생에 걸쳐 세 번 썼습니다. 1924년, 1940년, 1960년에 각각 쓰인 그 책들은 때때로 상충되는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오늘날 ‘인간’으로서든 ‘음악가’로서든 말러 연구의 기초 자료로 빈번히 인용됩니다. 앞의 언급들은 첫번째 책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같은 책에는 말러가 쾰른에서 <교향곡 5번>의 초연을 준비하던 1904년 5월, 알마에게 보낸 편지에서 했던 언급도 등장합니다. “아, 내 교향곡들을 내가 죽은 지 50년 후에 초연할 수 있다면.”

 

말러의 현세적 자기 부정이 개인적 기질에서 비롯함은 널리 알려진 해석이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분열적 자아상은 이미 유년기에 또아리를 틀었습니다. 술집 포주라는 직업을 갖고 있던 마초적인 아버지 베른하르트, 만성두통과 심장병을 앓았던 심약한 어머니 마리, 부모의 불화와 술집에서 노상 들려오던 주정과 매춘의 소음, 열다섯 살에 겪었던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 등등. 훗날 말러가 “나는 3중의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고 술회했던 그 이면에는 ‘유태인’과 ‘가톨릭’, 그리고 ‘보헤미아 태생’이라는 세 가지 사실 이외에 이미 유년의 상흔들이 존재했음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말러는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이었던 1910년 여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를 만나 평생토록 자신을 지배해온 트라우마들을 털어놓고 시인하지요.
 
말러의 음악적 본령은 당연히 교향곡입니다. 그는 피아노곡이라든가 실내악, 오페라 등의 작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가곡을 여러 작품 남기긴 했지만 그 가곡들의 상당수도 종국에는 교향곡 속으로 들어옵니다. 한데 말러의 교향곡들은 이전의 교향곡들이 보여줬던 전통적 형식, 기승전결의 구조에서 멀찌감치 벗어납니다. 오히려 이중적 자아에 시달리는 개인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아울러 삶의 우연성이나 감정의 즉흥성 같은 요소들, 예컨대 계몽주의가 아직 건재하던 시절에만 해도 비이성적인 것으로 손가락질 받던 요소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런 까닭에 그의 교향곡들에는 ‘돌연한 변화’가 빈번히 등장하고, 듣는 이에 따라서는 장황하다고 느껴질 만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에게 내려져 있는 음악사적 평가는 아마도 ‘낭만파적 교향곡의 마지막 작곡가’일 겁니다. 뒤집어 보자면 근대음악의 입구에서 과도기의 혼란을 겪어야 했던 음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러는 그 과도기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분열적 자화상을 음악에 투영했습니다. 그렇게 근대로 접근해 갔습니다.

 

오늘 듣는 교향곡 5번에서 나타나는 악장들 사이의 급격한 변화들도 말러가 지녔던 짙은 고뇌를 보여줍니다. 물론 그 분열의 양상을 오로지 말러 개인의 내면으로만 읽어낼 수는 없겠지요. 당대적 현실 속에서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교향곡 5번이 보여주는 분열의 양상은 ‘세기말’이라는 외적 요인의 개입 없이는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미 검증됐다시피 세기말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맞이한 첫번째 좌절, 혹은 위기였으며 머잖아 다가올 공황의 전조(前兆)였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의 ‘거인’으로 다가와 있는 말러가 오스트리아 빈에 있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자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 곡을 쓰던 20세기 초반, 정확히 말해 작곡에 착수했던 1901년에 말러는 이미 ‘40대’라는 나이에 들어서 있었으며, 그는 세기말의 모든 양상이 집약된 도시 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1898년 빈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취임한 말러는 1907년 빈 궁정오페라극장을 떠나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지휘자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약 10년간 빈에 머물렀습니다. 당시의 빈은 베네치아와 더불어 세기말을 대표했던 도시였지요. 제국주의가 꿈꿨던 이상향은 적어도 겉으로는 실현된 것처럼 보였지만, 도시와 사람들의 외양을 수놓은 화려한 탐미주의는 황폐한 속살을 간신히 감춘 외피였습니다. 당시의 40대가 오늘의 동년배에 비해 얼마나 더 성숙했는가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말러는 유년기의 불안의식에 더해진 시대의 균열을 이미 특유의 촉수로 감지한 상태였습니다.

 

스스로 ‘4부작’이라고 칭했던 앞의 교향곡들(1번부터 4번까지)과 확연히 다른 다섯번째 교향곡은 바로 그 시점에서 탄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음악평론가 알렉스 로스가 <나머지는 소음이다>라는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급은 적확합니다. 그는 교향곡 5번을 작곡하던 무렵에 말러가 처해 있던 심적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이 도시의 표면 뒤에 숨어 있는 균열이 곧 터져버릴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말러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예민했으나 양심적인 음악가였던 그는 청년 시절에 자신이 동경했던, 적어도 세계의 일부라고 믿었던 이상주의적 서정과 평화로운 목가풍을 마침내 손에서 내려놓습니다. 그리하여 5번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으로 막을 올립니다.

 

1악장은 특이하게도 장송행진곡(Trauermarsch)이 10분 넘게 펼쳐지는 ‘해괴한’ 악장입니다. 게다가 군대의 행진 나팔처럼 들려오는 도입부의 트럼펫 팡파레. 그것은 오늘날 매우 감각적인 록음악처럼 들려오기도 하지만, 적어도 당대의 빈 사람들이 듣기엔 진부하다고 느낄 만큼 ‘보편적인 나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말러는 별다른 음악적 가공 없이 ‘날것’ 그대로의 나팔소리를 교향곡의 입구에 깃발처럼 내걸었습니다. 게다가 이어서 바이올린과 첼로가 연주하는 가요풍의 선율은 또 어떤가요? 마치 ‘저잣거리의 엘레지’와도 같은 그 선율은 군대의 행진나팔과 어울리면서 혼돈과 광란, 때로는 절규의 장면들을 펼쳐놓습니다. 말러는 그렇게 통속을 끌어들이면서 당대 사람들에게 여전히 익숙했던 ‘음악다움’과의 결별을 시도했거니와, 아울러 화해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치달려가는 세상의 단면들을 복잡하게 뒤엉킨 리듬과 선율로 묘사했습니다. 그리하여 훗날 철학자 아도르노는 이 첫번째 악장에서 어떤 파탄을 예감하는 “불길한 꿈”을 읽어내지요.

 

수많은 음악 연구자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듯이 2악장은 추락의 악장입니다. 치솟아 오르거나 가득 차올랐다가 힘없이 주저앉아 소멸하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주제를 재현하다가도 중간에 고개를 푹 떨군 채 그대로 침잠하고 맙니다. 아도르노는 이 뻥 뚫린 듯한 공허함을 중세의 신비주의에서 빌려온 개념으로 설명했거니와, 이른바 ‘파현’(破顯, Durchbruch)이 바로 그것이지요. “거대한 세상에 대한, 인간이 기계 부속처럼 맞물려 들어가 있는 사회의 맹목적 세계 운행에 대한 대응”이라는 해석입니다.

 

호른이 분위기 반전을 시도하는 3악장은 스케르초 악장입니다. 스케르초로서는 보기 드물게 연주시간이 약 20분에 달하는 이 악장에는, 말러의 교향곡에서 빈번히 얼굴을 내비치는 왈츠풍 무곡이 역시 등장하지요. 그러나 그 춤은 빈의 은성한 무도회를 연상케 하기보다는 오히려 해골들의 괴기한 춤처럼 들려옵니다. 이어서 4악장 아다지에토(adagietto)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베니스에서의 죽음>(1971) 덕분에 유명세를 얻은 악장이지요. 하지만 말러가 “사랑의 고백”이라고 아내 알마에게 설명했던 것과 달리, 오늘날 이 악장은 유명 인사들의 장례식장에서 빈번히 연주되면서 ‘엇갈린 수용’의 한 사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5악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문제적 악장’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인이었던 말러는 마지막 악장에서 결국 한계를 보이고 맙니다. 앞의 3개 악장에서 ‘세계와의 갈등’이라는 측면을 극한까지 묘사했던 말러는 마침내 마지막 악장에서 힘이 빠진 모습을 드러내지요. 음악사적으로는 베토벤 이후부터 낭만까지를 관통해온 ‘어둠에서 광명으로’의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도르노는 이 절충주의적인 마지막 악장에 대해 “강요된 화해”라는 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말러의 교향곡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가장 널리 알려진 4악장부터 먼저 들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p.s. 레너드 번스타인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녹음(DG)은 말러 교향곡 5번을 얘기하면서 빼놓기 어려운 음반입니다. 실황연주입니다. 아마도 5번의 명연으로 가장 빈번히 거론되는 음반일 겁니다. 최근 LP로도 재발매돼 나왔는데 국내 매장에서 CD로는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듯합니다. 추천음반 목록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아바도.jpg▶클라우디오 아바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93년/DG
번스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아바도 역시 말러 음악의 메신저였다. 생전의 그는 세차례에 걸쳐 말러 사이클을 진행했다. 1970~80년대에 빈 필하모닉과 시카고 심포니를 이끌고 말러를 연주했고,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재임하던 시절(1989~2002)에도 역시 말러 교향곡 녹음을 남겼다. 말년에는 암과 싸우면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 다시 한번 말러 사이클에 나섰다. 추천하는 음반은 두번째 사이클의 일환이다. 번스타인의 낭만성 강한 연주와는 맛이 다르다. 과장없는 해석으로 객관성과 현대성을 구현하고 있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말년의 5번도 감동적인데 인터넷 동영상으로 쉽게 검색된다.   

 

 

 

샤이.jpg▶리카르도 샤이,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1997년/Decca
풍성하고 세련된 사운드로 말러 5번을 만날 수 있는 음반이다. 샤이는 확신과 자신감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콘세르트헤보우는 역시 명불허전의 연주력을 선보인다. 1악장 서주에서 터져 나오는 금관의 팡파레부터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역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그 점이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번스타인의 해석으로 4악장의 비극성에 익숙해진 이들은 샤이와 콘세르트헤보우의 연주가 너무 매끄럽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아바도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반이 음질에서 다소의 아쉬움을 남기는 것과 달리, 이 음반은 해상도 높은 소리를 충실하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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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아 대만에서 좋다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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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늦여름, 책 원고를 마감한 어느 날 굉장히 싼 타이페이행 특가 항공권을 발견했다. 두뇌의 판단력 파트에서 꺄르륵 소리가 났다. 한 번쯤 대만으로 들이대고 싶었는데 이게 웬 기회냐, 즉시 예약해버렸다. 좌석도 나를 위해 오롯이 한 자리 남아 있었고 어째서인지 내 카드 한도도 딱 남아있었다. 비행기는 바로 다음 날 출발이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짐을 쌌고, 룰루랄라 즉흥적인 여행을 떠났다. 공항 가는 길엔 선선한 가을 날씨가 도래해 있었다. 나는 산뜻한 가을여행 기분으로 개꼬리처럼 신났다. 다만 옆자리에 여자가 앉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나에게 있을 수가 없다는 듯 어떤 스님이 털썩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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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비행기는 저비용 항공사가 운항하는 노선이었는데 기내식으로 삼각 김밥과 떠먹는 요구르트가 나왔다. 나는 떠먹는 요구르트 뚜껑을 뜯었다. 그런데 내가 마침 뚜껑을 핥기 시작했을 때 옆자리 스님이 공교롭게도 동시에 뚜껑을 핥기 시작해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뭔가 어색했다. 어쩐지 누구든 먼저 말을 걸어야만 할 것 같았다. 


 “보아하니 스님께선 대만에 가시는 길인 것 같군요.”

 

 “그렇소이다. 난 대만에 살고 있어요.”


 스님은 젊고 잘생겼고 두상이 매끈했으며 내가 유머를 썼다는 걸-대만행 직항이니까 당연히 대만 가겠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꽤 진지한 사람이었다. 불가에 귀의하지 않았다면 중학교 도덕 선생님이 되었을 법한 인상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경을 읽는 것처럼 웅혼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대만엔 어인 일로 가시오?”


 “놀러 가요. 신나는 휴가죠.”


 “지금은 몹시 덥고 습할 텐데요.”


 “그런가요? 땀나게 잘 놀면 좋죠.”


 “허어, 진짜 덥고 습할 거요.”


 뭔가 중생을 가엾게 여겨 법문을 내리는 것 같은 스님의 표정을 보자 갑자기 어지러웠다. 일주일 넘게 밤샘작업을 한 직후였다. 진이 빠져 몸도 마음도 유머감각도 지친 상태이긴 했다. 과연 이런 컨디션으로 더운 나라 여행이 가능할까? 그냥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게 옳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안 웃기잖아. 나는 가급적 많이 안 돌아다니고, 호스텔에서 친구를 만들어서 맥주나 마시면 된다고 수습했다. 더울 때 마시는 시원한 맥주가 그게 또 으아~ 그런 상상을 하며 좋은 기분을 유지했다.

 

 그런데 송산 공항에 내려 공항 청사 바깥으로 몸을 내밀자마자 아주 후끈한 열기가 다짜고짜 나를 꽉 껴안았다. 더위가 어찌나 야무지게 끌어안는지 내가 한류스타라도 된 느낌이었다. 아미타불. 스님의 말은 뻥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폭염의 초강력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두어 발짝 움직이자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더운데 다리가 떨리긴 처음이었다.

 

 이번 여름, 에어컨도 없는 한국의 내 자취방이자 작업실에서 무더위 때문에 어지간히 고생했다. 원고를 쓰는 시간보다 선풍기를 껴안고 자빠지거나 찬물 샤워를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힘을 내려 해도 매미들의 샤우팅 떼창 때문에 좀처럼 집중하기 어려웠다. 마감 날짜를 얼마 안 남긴 시점에서 더위가 조금 수그러들지 않았다면 절대 원고를 끝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성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거다.

 

 그런데 그 더위에서 겨우 해방되자마자 찜통인 나라에 제 발로 찾아온 것이었다. 군대에서 전역했는데 다시 입영 영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위를 해버린 셈이었다. 맞은 데 또 맞는 것처럼 아팠다. 특가 항공권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지, 날씨가 어떨 건지는 전혀 생각도 못한 바보는 긴팔 차림으로 온몸에 딱 달라붙는 더위를 느끼며 눈물인지 땀인지 뭔가 주체할 수 없는 것을 흘려대야만 했다.

 

 여행가방을 끌고 지하철역에서 숙소를 찾아가는 동안 청바지와 팬티가 몸에 찰싹 달라붙어 걷기도 힘들었다. 스마트폰 GPS도 더위를 먹었는지 자꾸 내 위치를 뻥쳐 길을 헤맸다. 바보구나. 바보 맞네. 어이 바보. 나는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힐난했다. 나중엔 탈수 상태라 그럴 기운도 없었다.

 

 어렵게 찾아간 싸구려 호스텔은 바깥보다 더 더웠다. 에어컨은 먹통이었다.  


 “헉헉, 살려줘요. 에어컨이 켜지질 않아요.”


 “낮에는 냉방 안 됨. 다들 관광 나가니까. 에너지 절약.” 

 

 리셉션 직원이 부채질을 하며 단호박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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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이 빠져 휴양 왔으면 호텔이라도 예약할 걸 왜 호스텔을 선택했는지 나는 또 스스로를 욕했다. 이국의 낯선 도시에 놀러왔다는 들뜬 마음은 땀에 섞여 배출되고 하나도 남지 않았다. 찬물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지만 아이고 아무 의미가 없었다. 도미토리도 찜통, 밖에 나가도 찜통인 진퇴양난의 상황. 나는 할 수 없이 길에서 아무 버스에나 올랐다. 다행히 버스 안은 시원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좋다 말아버린’ 표정으로 허탈해 했다. 여행하는 동안 느닷없이 허리가 아팠지, 두통에 시달렸지, 맥주마저 맛없어 망연자실했지, 밤엔 에어컨이 너무 세 떨면서 억울했지, 유명한 망고빙수 가게를 안다던 중국인 룸메이트는 방향치였지…. 정말 잘 놀 줄 알았는데 아 좋다 말았다. 


 그래도 지금 방이 몹시 추운데, 더워서 바보 됐던 기억을 떠올리니 조금은 훈훈하다. 지나고 보면 힘들었던 것도 다 추억이 되니 좋다 말았어도 결국 좋다.

 

 오늘의 선곡인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을 들으며 원고를 쓰고 있자니 문득 그 대만 여행을 떠나던 순간처럼 신이 난다. 나같은 산울림 마니아에게 그들만의 특이한 사운드를 재해석해 들려주는 듯한 아스라한 추억의 맛은 매콤하다. 옛날 록 마니아인 ‘양평이형’의 싸이키델릭한 기타 톤과, 베이스의 달리는 리프, 해먼드 오르간소리의 조화로움은 한국 록이 한창 뜨거웠던 시절을 현재형으로 만든다. 거기엔 가슴으로 직통하는 후끈한 매력이 있다. 더구나 장기하만의 특별한 창법과 신선한 노랫말까지, 어우 매력적인 요소가 정말 많은 음악들이 고마워 땀이 다 나네.

 

그러고 보니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은 뭐 언제 들어도 ‘좋다 말았던’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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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프로그램이 다시 일어서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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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 슈퍼스타 K5 >는 이 오래된 오디션 프로그램의 종말을 고하는 시즌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유치하고 속보이는 방향으로 변질되어가던 악마의 편집, 시간이 지난 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는 대중의 관심과 참가자들의 역량이 해소되지 못한 채 켜켜이 쌓여만 갔다. 그런 인화성 물질 위에 특정 참가자 밀어주기와 제작진의 과도한 개입이라는 토치를 가져다 대었으니 결과는 뻔했다. 대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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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넷은 그럼에도 < 슈퍼스타 K >를 버리지 않았다. 작년의 실패를 한 번의 실수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패기일수도 있고 여태까지 끌고 왔던 < 슈퍼스타 K >라는 이름의 힘과 역사에 대한 미련일수도 있었다. 다만 같은 방송사에서 대박을 터뜨린 프로그램 < 쇼미더머니 > 때문에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도 많이 옅어진 상황이라 산재한 문제들까지 타개할 길은 멀어보였다. 프로듀서 교체 등의 내부 단장은 그런 상황에서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많은 우려 속에서 막을 내린 시즌 6는 '슈퍼스타의 회생'이라 이름 붙일 만했다. 최고라 일컬어지던 두세 번째 시즌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작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적절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 슈퍼스타 K >라는 시리즈의 종말은 일단 좀 더 나중까지 유보할 수 있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포맷이 상대적으로 이슈를 이끌 힘이 부족해진 상황인데다가 우후죽순 데뷔하는 오디션 출신 가수들이 막상 대중적 파급력 측면에서는 약세를 보이는 탓에 프로그램은 출연자들의 역량 저하를 우려해야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김필 임도혁 혹은 곽진언 등 걸출한 실력파의 등장은 불행을 딛고 일어날 회생타가 되었다. 결승전까지 김필과 곽진언의 투톱 중 뚜렷한 우승을 가리기 힘들어 시청자들에게 큰 기대를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 슈퍼스타 K6 >의 선전은 극적인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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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로를 운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슈퍼위크 경쟁방식이나 방송 편집에 있어서도 다른 노선을 택한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항상 논란을 일으켜왔던 슈퍼위크 콜라보 미션을 팀 간의 경쟁으로 변화시키면서 이기적 참가자의 등장을 방지한 것은 영리했다. 팀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욕심을 부리는 상황이 사라진 것이다. 더불어 악마의 편집과 참가자에 대한 과도한 설정부여도 사라지면서 편하게 프로그램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예선 과정에서 홍대 인디 뮤지션들을 수혈하려는 노력까지 보여주면서 < 슈퍼스타 K >의 정체성 확보 및 참가자 수준의 상승도 동시에 취할 수 있었다.

 

일단 올해는 체면치레에 성공했으나 앞으로의 상황까지 낙관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결과야 어쨌든 이번 시즌에는 작년의 실패에 대한 떨칠 수 없는 부담감이 보였던 것이다. 늘 공개해오던 문자투표수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부터 조심스러운 행보를 느낄 수 있었다. 참가자들의 역량이 좋아지면서 다소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생방송 기간만 되면 망가져 버리는 무대 수준도 여전하다. 스트리밍 위주의 집계와 톱 가수들의 차트 줄 세우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음악 시장에서 방송의 빛을 받지 못하는 참가자들이 앞으로도 혼자서 생존을 할 수 있을지 여부 역시 회의적이다.

 

벌써부터 경쟁 프로그램 < 케이팝스타 >의 크고 작은 이슈로 시끌시끌하다. < 케이팝스타 >가 첫 회부터 대형기획사의 가수 육성이 가진 허점을 노출하고 있을 때 반대급부로 주목받는 건 < 슈퍼스타 K >를 수놓은 싱어송라이터들이다. 동적 평형에 다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쟁 구도 속에서 이들이 획득한 정체성은 생각보다 크다. 그만큼 이곳의 참가자들이 대형 기획사의 흥행 논리에 의해 개성을 짓밟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셈이니 말이다. 자충수로 비틀대던 < 슈퍼스타 K >는 다시 회생하여 스스로를 기투하기 시작했다.

 

 

 

글/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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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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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864년에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위의 구스타프 말러와 더불어 후기낭만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자리매김돼 있지요. 한데 이 시기, 그러니까 슈트라우스와 말러 같은 이들이 활약했던 이른바 세기말과 20세기 초반은 문화사적으로도 큰 변동이 있었던 ‘전환의 시기’입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으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의 확산을 꼽을 수 있겠지요. 영화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1895년 12월 23일, 뤼미에르 형제의 필름을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유료로 상영한 날을 기점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대중적으로 복제하는 것을 가능케 했던 또 하나의 테크놀로지, 즉 음반의 탄생은 언제 일까요? 널리 알려져 있는 에디슨의 축음기 발명은 1877년에 이뤄졌고 12년 뒤에 일반에게도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납작한 형태의 음반은 미국의 독일계 이민자인 에밀 베를리너가 1887년에 개발했지요. 점차 기술이 발전해 1920년대 중반에는 베토벤의 모든 교향곡을 음반으로 구할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물론 당시의 음반은 한 장에 녹음할 수 있는 분량이 많질 않았으니 베토벤 교향곡을 전부 다 들으려면 아마도 수십장의, 거의 100장쯤의 음반이 필요했을 겁니다.

 

슈트라우스는 20세기 중반인 1949년까지 살았습니다. 향년 85세였지요. 하지만 말러는 1911년에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 두 명의 음악가는 작곡가인 동시에 당대의 지휘자이기도 했지요. 한데 말러가 지휘한 음악은 음반으로 남아 있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슈트라우스는 음반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세기말부터 활약한 음악가 중에서는 아마도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와 지휘를 음반으로 남겨놓고 있긴 하지만 그는 슈트라우스보다 거의 열살 아래입니다.

 


오늘은 이 무뚝뚝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러면서도 세속적인 두뇌회전이 빨랐던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뮌헨 궁정악단의 호른 주자였지요. 그러고 보니 유명한 음악가 중에는 아버지가 호른 연주자였던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시니가 그렇고요, 또 브람스의 아버지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콘트라베이스와 호른을 연주하던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로시니나 브람스의 아버지가 거의 무명의 연주자였던 것과 달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는 바이마르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연주자였고 음악원 교수이기도 했습니다. 또 어머니 요제피네는 뮌헨에서 유명한 양조업자의 딸이었지요. 그 시절부터 이미 뮌헨은 독일 맥주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시 말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매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바이마르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독일에서도 보수적인 곳으로 손꼽힙니다. 몇 해 전에 뮌헨에 간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 매우 배타적인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면에 일일히 옮기기는 좀 그렇지만, 뮌헨 사람들은 독일의 다른 도시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도도했고 아시아인에 대해 차별적 시선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다녀온 베를린은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도시는 젊고 개방적이고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화려한 상업도시의 느낌도 아니었습니다. 건축가 승효상씨가 어느 칼럼에선가 베를린을 일컬어 “성찰의 도시”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저 역시 베를린을 며칠간 돌아다닌 끝에 그 말에 동의하게 됐습니다.

 

어쨌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뮌헨의 유복한 집안에서,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음악적으로는 정통주의자인 아버지 밑에서 컸습니다. 당연히 아버지에게서 첫 음악교육을 받았겠지요.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의 직장인 뮌헨 궁정악단의 리허설에 가서 연주를 듣는다거나, 아버지의 동료들에게 피아노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궁정악단 악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마이어는 이 신동에게 작곡이론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정규 음악원에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20세기를 바라보는 시기였음에도, 정규 음악대학이 아니라 뮌헨의 음악계가 그를 키워낸 셈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아버지 프란츠의 영향력이 있었겠지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8살이 되던 1882년에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통과해 뮌헨대학에 들어가는 하지만 그가 공부한 것은 철학과 미학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대학을 다 마치지 않았지요. 이미 바이마르에서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고 있던 슈트라우스는 열아홉 살 때 당대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1830~1894)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훗날 뷜로와의 만남에 대해 자신의 음악인생에서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술회합니다. 그 만남은 두 가지 맥락에서 슈트라우스에게 큰 의미를 갖게 되지요. 하나는 지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바그너와 리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신독일악파’의 음악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슈트라우스의 재능을 높이 샀던 뷜로는 1885년에 자신이 지휘를 맡고 있던 마이닝겐 궁정악단에 부지휘자 자리를 마련해줍니다. 물론 슈트라우스가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그보다 한 해 전 뮌헨에서였지요. 하지만 마이닝겐에서 뷜로의 부지휘자가 됐다는 것은 스물한 살의 젊은이가 상상하기 어려웠던 영광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악단의 악장이었던 알렉산더 리터(1833~1896)는 열렬한 바그너 지지자였습니다. 슈트라우스는 훗날 서른 살 많은 리터와 나눴던 우정, 그로부터 받았던 음악적 영향에 대해 고백하기도 했지요. 음악적 정통주의자였던 슈트라우스의 아버지 프란츠는 아들이 ‘신독일악파’에 경도되는 것을 그토록 경계했지만 대세는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독일의 후기낭만 음악에서 바그너가 끼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슈트라우스도 결코 피해갈 수 없었지요. 그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대규모의 관현악 편성, 반음계적이고 불협화음적인 화성 등은 바그너에게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합니다. 또한 그는 리스트와 바그너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과 음악 외적인 것의 결합을 계승하고 있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음악에 문학과 철학, 역사 등의 결합을 꾀하면서, 음악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1825~1904) 등이 주도한 이른바 ‘음악의 순수성’과 대척점에 섰던 것이지요. 오페라와 더불어 슈트라우스의 대표적인 음악적 업적으로 손꼽히는 ‘교향시’가 바로 그 지점을 잘 보여줍니다. 슈트라우스는 음악 인생의 전반부에는 교향시에, 후반부에는 주로 오페라에 집중했지요. 

 

슈트라우스의 음악 인생에서 표제를 지닌 교향시에 집중했던 이른바 ‘교향적 시대’는<돈 후앙>(‘돈 주앙’으로도 표기)을 완성했던 1888년부터 약 10년간입니다. 그는 이 10년 동안에 그의 교향시들을 대부분 작곡했지요. <돈 후안> 이후에 <죽음과 변용>(1889),<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1895),<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96), <돈 키호테>(1897), <영웅의 생애>(1898) 등으로 이어집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듣겠습니다. 아마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일 겁니다. 스탠리 큐브릭이 1968년에 만든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덕분에 대중적으로도 유명해졌지요. 물론 이 영화에서는 리게티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도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인상에 더욱 강하게 남는 게 사실입니다. 음향 자체의 강력함 때문일 수도 있겠고 영화 속 장면이 인상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영화의 막이 오르고 서서히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또 유인원들이 정체불명의 돌기둥 앞에서 죽은 짐승의 뼈다귀를 들고 뼈더미를 내려치며 포효하는 장면에서도 이 곡이 등장합니다. 또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암시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역시 이 곡이 들려옵니다. 오르간의 지속음에 팀파니와 금관이 어울려 장쾌한 포효를 터뜨리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이 교향시는 니체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작곡의 영감을 받은 곡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니체는 이 저작을 1883년부터 1885년에 걸쳐 썼는데, 한때 뮌헨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슈트라우스도 물론 이 책을 읽었겠지요. 하지만 그가 니체의 자유의지와 초인 사상에 얼마나 절실하게 공감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니체적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지요. 니체는 안락한 삶을 거부하라고, 가혹한 운명 속으로 뛰어들어 투쟁하라고 말했던 철학자입니다. 그 투쟁 속에서 인간은 보다 강하고 심원하며 아름다운 존재로 고양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초인이 등장하는 겁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는 사람, 그 고난 속에서 자아를 완성하는 사람이지요.

 

어쨌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니체의 책 제목을 음악의 표제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니체의 서문을 악보의 머리에 게재하기도 했지요. 말하자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곡은 음악에 철학의 결합을 꾀하고 있습니다. 물론 슈트라우스는 “나는 철학적 음악을 쓰려는 것이 아니고 니체의 위대한 저작을 음악으로 그리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음악으로 인류의 기원과 발전의 여러 양상을, 니체의 초인이라는 관념에 이르기까지를 전하려고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니체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모두 4부로 구성했던 것처럼 이 곡도 4부로 이뤄져 있는데 책의 순서를 똑같이 따르진 않았습니다. 곡의 진행에 따라 8개의 에피소드적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일출’(Sunrise)로 흔히 부르는 서주가 끝나면 1 ‘세상 저 편의 사람들에 대하여’(Of the people of the unseen world), 2 ‘위대한 동경에 대하여’(Of the great longing), 3 ‘기쁨과 열정에 대하여’(Of joys and passions), 4 ‘만가’(Dirge), 5 ‘학문에 대하여’(Of Science and Learning), 6 ‘치유 받고 있는 사람’(The convalescent), 7 춤의 노래(Dance Song), 8 ‘밤 나그네의 노래’(Night Wanderer‘s Song) 등이 이어집니다. 영화<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사용돼 유명해진 부분은 바로 이 곡의 서주입니다. 전곡 연주시간은 30분이 조금 넘습니다.

 


라이너.jpg▶프리츠 라이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1954년/RCA
오래도록 애청돼온 명연이다. 50년대의 녹음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음질도 좋다. 최근 SACD로도 나왔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의 프리츠 라이너(1888~1962)는 1953년부터 시카고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를 맡아 타계할 때까지 이끌었다. 여러 녹음 중에서도 특히 바르토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에서 명연들을 내놨다. 지금 들어도 지휘자의 카리스마와 단원들의 집중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휘자의 명쾌한 해석에 단원들이 기민하게 호응하는 연주다. 곡의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현악기와 목관,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금관이 곡의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카라얀.jpg▶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83년/DG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1973년에 녹음한 음반도 수작으로 손꼽힌다. 그 이전에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1950년대의 음반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카라얀의 대표적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다. 1973년의 레코딩에 비해 1983년 녹음은 보다 섬세한 해석을 보여준다. 앞의 레코딩에서 힘이 느껴지는 반면에 후자는 디테일에서의 표현력이 돋보인다. 특히 현악기의 음색이 부드럽다. 관악기들도 거칠게 뻗어나가는 부분 없이 정제된 소리를 들려준다. 이 곡이 지닌 묘사적 특성을 잘 살려내면서 음악의 세부가 생생히 살아 있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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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이스트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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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엔 눈뜨자마자 침대에서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스마트폰 자체 스피커의 알량한 음색이 정말 싫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되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사야지 하면서 지갑 눈치만 보고 있다.

 아침에 음악을 듣는 습관이 생긴 건, 낭만적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침대에서 기어 나올 빌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땡 겨울이라 더더욱 이부자리를 못 벗어나겠다. 그러나 어차피 눈뜨면 쥐게 되어있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다 보면 좋아서 잠도 홀딱 깰뿐더러 뮤지션들이 최선을 다해 만들어 낸 결정적 소리들이 자빠져 누워있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게 되는 효과가 있다.

 

 

 

 요즘 더 이상 미루거나 개길 수 없는 책 원고를 마감하느라 날짜를 모르겠고, 요일도 관심 없고, 폐인처럼 작업하는데 오늘은 딱 일요일이라는 걸 알았다. 유난히 창 밖에서 경적 소리가 많이 나면 일요일인 거다. 집 뒷골목에 교회가 있는데 하나뿐인 진입로가 좁아 차들이 엉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짜파게티를 끓여먹고 싶었 ‘더 벨벳 언더그라운드 & 니코’의 『선데이 모닝』을 듣고 싶었다. 1967년에 나온 음악이다. 문득 너무 오래된 음악만 좋아하는 것 아닐까 고민했다. 어릴 땐 스펀지처럼 수많은 음악을 빨아들이고, 소화해 내면서도 계속 배가 고팠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고 싶지만 흡수하고 소화시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심지어 체하기도 한다. 아, 쓸 만한 기능을 하나씩 세월에게 내주다 보면 어느 순간 정말 좋은 음악을 만나도 시큰둥한 꼰대가 될까봐 무척 쫄린다.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 주름살은 어쩔 수 없지만 감각의 쇠락에 대책 없이 당하긴 싫다. 고로 침대에서 발딱 일어났다.

 

 각설하고, 선데이모닝의 음울하면서도 달달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라면 냄비에 물을 올리자 런던의 한 성당이 떠올랐다.

 

 어느 안개 낀 일요일 아침 나는 이스트 런던의 칙칙한 거리를 ‘쓰레빠’ 끌며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가진 돈으로 방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동네였다. 일자리도 없고 대책 없이 런던에 체류 중이던 나는 런던에서 가장 은혜로운 가격의 식료품인 ‘감자’님을 구입하기 위해 마트에 가는 길이었다. 쓸쓸하고 춥고 가난한 거리가 내 주머니 신세 같아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그런데 동네 분위기에 맞게 평소에 낡고 초라한 모습으로 고요히 찌그러져 있던 성당에서 문득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문틈으로 빠져나오는 묘하게 몽롱한 소리에 호기심을 느끼곤 살짝 들어가 보았다. 마침 일요일 미사 중이었고 몇 명 안 되는 신도들이 모여 앉아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신도 수가 급감해 고민이라는 영국 성공회 성당의 분위기도 어쩐지 그 무렵 내 신세와 비슷한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애잔했다. 그런데 남루한 동네사람들이 모여 앉아 부르는 노래는 의외로 그레고리안 성가풍이 아니라 현대적인 리듬감이 있었는데 신자 대부분이 흑인이라 애절한 흑인 영가처럼 들렸다. 노래하면서 박수를 치기도 하고 춤추듯 몸을 흔들기도 하는데 경건하고 아름다운 느낌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뒷자리에 끼어 그 경건함에 탄복했다. 


 런던 한복판에 있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미사에 간 적이 있었는데 미사 시간에 가면 입장료를 안 받으니까 거대하고 아름다운 대성당에 울려 퍼지는 엄청난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최정예 성가대의 화음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다지 경건함을 느끼진 못했다. 오히려 내 인생과 동떨어진 화려함만 잔뜩 느꼈을 뿐이었다. 


 그날 만난 볼품없이 작은 성당의 소수정예 신도들이 훨씬 더 경건하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사제의 짧은 설교가 이어졌는데 조금 듣다 슬쩍 빠져나왔다. 런던생활 한 달도 안 된 시기라서 영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내 ‘쓰레빠’가 경건한 분위기를 깰까봐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선데이 모닝을 들으며 시작한 오늘 아침, 나는 그 몽롱하면서도 쓸쓸하던 경건함을 선명하게 다시 느꼈다. 분명 다른 음악인데 칼럼 쓰려고 막 연결하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때 런던의 가난한 성당에서 들었던 성가는 분명히 빈자를 위안하고 천상을 앙망하는 영적인 힘이 있었다. 그런데 다시 들어보니 『Sunday morning』은 성가가 아니라 팝 음악이지만 내겐 똑같은 경건함을 주는 음악인 점이 비슷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일부 착한) 음악들은 묘하게 지친 마음을 위안하는 영적인 힘이 있다. 어떤 음악을 오랫동안 좋아하면 신앙심이 생기는 걸까. 그들도 나처럼 힘들었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런던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음악 중 하나였고, 감자만 먹으며 버티던 그 시절의 쓸쓸함을 조건반사로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보컬 루 리드Lou Reed 아저씨가 발성하는 차분하면서도 쓸쓸한 목소리와 멜로디에서 나는 록 정신의 기본 교리중 하나인 소외와 고통의 근원적인 심장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처연하게아 호로록 호로록 짜파게티를 먹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활동 당시 인기가 많지 않았다. 앤디 워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앨범을 내긴 했지만 잘 팔리지 않으니 가난하고 스산했을 것이다. 비틀즈가 다 해먹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창백한 파란 눈 Pale Blue Eyes』 처럼 우리에게 알려진 예쁜 곡을 만든 밴드이기도 했지만 사실 퇴폐적으로 막가는 어둠을 주로 표현한 밴드였다. 대중이 생 깠던 그들의 코드는, 그 뒤로 낸 기괴한 불협화음으로 더욱 비틀린 채 표출되었을 것이다. 다만 첫 앨범의 첫 곡인 『선데이 모닝』은 세상에 정상적으로 접근하고 싶은 그들의 친절한 껍데기였는지도 모르겠다.

 

velvet underground album jacket2.jpg

 

 그럼에도 이 곡의 노랫말은 친절하지 않다. 해석해 보면 일요일 아침, 등 뒤에 있는 새벽을 상기하는 내용이다. 노랫말에 따르면 그 새벽은 쉬지 못한 감정이고, 낭비한 날들이고 알고 싶지 않은 느낌이고 얼마 전에 건너버린 모든 길이다. 주위엔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항상 있지만 그것도 개뿔 소용없는 일요일 아침이라는 내용이다.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먼저지만 시를 읽듯 음미하면 깊은 허무가 느껴진다. 일요일 아침의 이스트 런던의 쓸쓸한 성당과 가난한 나날들이 내게 건네던 그 경건한 허무처럼.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기타 겸 보컬 루 리드 아저씨는 작년 가을에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을 건넜다. 일요일 아침이었다고 한다.
 
 (* 딴지일보 식의 이런 것도 허락 받고 써야 하나이 같은 문장 제스처를 허락 안 받고 써서 미안하다. 오늘은 경건한 내용이라 달리 웃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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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올해의 팝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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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파도로 밀고 들어온 작품도 있었고 조용히 파문을 일으킨 작품도 있었다. 안정감 있게 정도를 택한 앨범도 보였으며 과격함이 실린 실험 가득한 앨범도 보였다. 핫 샷 데뷔를 알린 신인도 존재한 반면 명성에 맞는 활약을 펼친 거물도 또한 존재했다. 늘 그래왔듯 올해도 다양한 작품이 한 해를 빛냈다. 올해의 팝 앨범 10선. 순서는 아티스트 알파벳순으로 순위와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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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Beck) - Morning Phase

 

이번 앨범에는 포크와 컨트리가 있다. 밥 딜런과 닐 영 식의 접근에 다분한 사이키델릭 컬러, 핑크 플로이드의 느낌을 약간 가미해 각양각색으로 짜 맞췄다. 목가적인 선율에 공간감이 깃든 「Morning」과 「Heart is a drum」, 「Blue moon」을 시작으로 포크, 컨트리의 전형으로 접근한 「Blackbird chain」, 「Country town」, 앨범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Waking light」에 이르기까지 놓칠 수 없는 순간이 가득하다. 고요하게 파급력 없이 등장했으나 올해의 음반으로 주목 받기에 충분하다. 늘 그래왔듯 벡 한센의 실험은 성공으로 귀결된다.

 

 

2014/12 이수호(howard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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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세(Beyonce) - Beyonce

 

수록곡보다 비디오가 많은 비주얼 앨범을, 홍보 없이 어느 날 내놓았어도 비욘세는 비욘세였다. 대중을 놓치지 않았다. 본인의 철학을 어필하면서 퍼포먼스로 밀리지 않는다. 굳건하다. 퀸 비(Queen B)는 괜히 붙은 별명이 아니다.

새로운 형식의 앨범, 새로운 방식의 마케팅, 비교를 거부하는 무대가 논외여도, 앨범은 음악 자체로 뛰어나다. 트랩, 디스코, 슬로우 잼 등 다양한 스타일에 각각 어울리는 노래한다. 곡마다 느껴지는 오리지널리티도 짙다. 카리스마 있는 디바, 딸아이의 엄마,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 결국 앨범 제목, 비욘세다. 다채로우면서 유기적인데, 결정적으로 깊다. 동시대 여가수들 중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올해, 그에게 치명적이었던 엘리베이터 사건도 소름 돋는 가사로 승화시켰다.

 

2014/12 전민석(lego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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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키스(The Black Keys) - Turn Blue

블랙 키스는 < Turn Blue >로 또다시 스펙트럼을 확대한다. 이번엔 공간계 사운드의 노브를 잔뜩 올려놓은 몽환적 싸이키델리아의 정수다. 방향을 돌려 기존과 다른 노선을 택했지만, 이번에도 훌륭하게 해냈다. 개러지 블루스에 천착했던 지금까지의 디스코그라피 모두를 빠짐없이 수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로큰롤 듀오의 능력이 어디까지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2014/12 신현태 (rocker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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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컨즈 오브 썸머(5 Seconds of summer) - 5 Seconds Of Summer

꽃미남 록밴드임을 내세워 10대 팬들로 흥행을 보장하려는 선입견을 갖게 하지만 이들의 음악에는 팝 펑크(Punk)의 생동감이 살아있다. 무더운 여름 국내 CF를 통해 이 앨범이 주목 받은 것도 '5초 여름' 소년들이 뿜어내는 열정적인 긍정성 덕분이었다. 「She looks so perfect」, 「Good girls」 모두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멜로디 위에 보컬과 기타가 사뿐하게 얹어진 양질의 곡이다. 호주 신인 틴에이저 록밴드 5 세컨즈 오브 서머의 빌보드 정복기는 그린 데이가 「Basket case」 이후 펑크 밴드의 정점에 올랐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2014/12 정유나(enter_cruis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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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KA 트윅스(FKA Twigs) - LP1

 

아예 안 들을수는 있어도, 한 번만 들을 수는 없다. 아직도 낯선 이름이지만 유혹의 수에 빨려들어가는 순간 끝장이다. 농밀하고도 치밀하게, 나풀대다가도 치명적이게 접근하는 FKA트윅스의 음악은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끈적거리는 늪과 같다. 몽환적인 PBR&B, 앰비언트, 아방가르드, 어떤 단어로도 환언하기 어렵지만 팝 음악에 자신의 이름을 깊게 새겨놓았다.

 

페미니스트들은 열광했고, 남성들은 숨을 죽였다. 2014년 한 해도 사랑과 섹스를 주제로 한 노래는 차고 넘쳤지만 짜릿한 흥분을 가져온 앨범은 < LP1 >뿐이었다.

 

 

 

2014/12 김도헌(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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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화이트(Jack White) - Lazaretto

개러지 블루스를 예술의 반열로 올려놓았던 사내가 돌아왔다. 특유의 완력과 로 파이의 사운드, 중독성 있는 리프, 날카롭게 내뱉는 보컬이 록 신 최고 아이콘의 귀환을 알린다. 잭 화이트의 작법이 그대로 묻어나는 「Three women」과 「Lazaretto」, 아티스트가 적을 두고 있는 또 다른 원천, 컨트리의 모습이 보이는 「Temporary ground」, 「Entitlement」, 자신감 넘치는 인스트루멘틀 「High ball stepper」 등에 달하는 하이라이트들을 집중해서 들어보자. 가감 없이 드러난 아티스트의 역량이 작품을 다시금 베스트의 대열에 자리하게 한다.

 

 

 

2014/12 이수호(howard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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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 - G I R L

장담하건데 적어도 수천, 수만의 뮤지션이 오로지 '여성'을 계기로 음악을 시작했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호기심, 감탄, 사랑, 존경.. 수십 년 동안 다뤄진 이 주제는 퍼렐의 관점을 통해 다르게 주목받았다. 마치 본능인양 줄기차게 보여준 새로운 것, 남다른 것 대신 안정감을 택했다. 덜 긴박하지만 그만큼 여유롭다. 퍼렐이 재차 나열한 소울, 펑크(Funk), 디스코로 많은 사람들이 몸을 흔들고 웃었다. < G I R L > 은 번뜩이는 아이디어 이상으로 솔로 커리어를 빛낸 한 점이다.

 

2014/12 조아름 (curtzz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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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Royal Blood) - Royal Blood

록 씬의 지속적인 성장은 결국 이런 음악을 잉태해냈다. 베이스와 드럼이라는 생소한 조합은 사운드에 대한 실험과 실력으로 투박한 개러지의 질감을 200% 재현한다.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와 칼끝을 목 밑까지 들이대는 보컬은 밴드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이를 널리 공표하는 데에도 성공한다.

 

베이스라는 악기의 한계를 거의 극복하는 듯한 「Ten tonne skeleton」의 높고 예리한 사운드와 「Figure it out」의 사정없이 치닫는 곡 구성에서 본인들의 명함을 제대로 내밀었다. 곡 사이사이 베이스 솔로 파트를 찾아듣는 것은 또 다른 백미를 자랑한다. 반복과 복제가 만연하고 거물밴드의 자기 우상화가 실패로 귀결하는 지금 이 순간에 더욱 빛나는 2014년의 록.

 

2014/12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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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더 쥴스(Run The Jewels) - Run The Jewels 2

올해, 힙합 앨범들이 약했던 것은 명백하다. 수작이 몇 있었지만, 작년엔 에미넴, 제이 지, 카니예 웨스트, 드레이크가 있었다. 몰렸었다. 랩 스타들의 컴백으로 치열했던 2013년, 올해의 힙합 앨범 중엔 런 더 쥴스도 있었다.

 

1년 만에 더 강렬한 색으로 돌아왔다. 트랩 비트에 비어있는 플로우, 또는 디제이 머스타드의 사운드가 시류였던 올해, 그들은 독자적인 길을 갔다. 하드코어 트랙에 타이트하게 뱉었다. 번갈아가며 쉴 틈 없이 쫓아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하나하나 강력하지만 귀가 피로하지 않다. 엘피(El-P)와 킬러 마이크(Killer Mike)가 구성한 범죄 앨범, < 보석 들고 튀어라! 2 >는 치밀하다. 작년에 이어 다시 한 번 쫄깃하고, 이미 3편도 작업 중이다.

 

2014/12 전민석(lego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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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Sia) - 1000 Forms Of Fears

광기 어린 소녀의 춤사위, 금발 뱅 머리... 그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늘어간다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97년 데뷔. 그동안 무명 아닌 무명으로 좌절의 쓴잔을 연거푸 들이킨 그가 드디어 축배를 들었다. 「Chandelier」의 성공은 그의 과거까지 재조명한다. 호주 출신의 여성싱어송라이터로 대중보다는 뮤지션들에게 먼저 인정을 받았다. 비욘세, 리한나, 케이티 페리 등 슈퍼스타에게 곡을 제공했으며 플로 라이다, 데이비드 게타의 노래에 피쳐링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의식이 강하고 내공 충만한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계승하면서 현시대의 트랜드를 꿰뚫어보는 천부적인 감각을 지녔다. 독창적인 보이스와 힙한 사운드에 명료한 멜로디를 더해 남다른 매력을 배로 발산한다. 더구나 지난해 은퇴를 발표해 인터뷰와 콘서트를 지양함으로서 온갖 추측과 해석, 그리고 신비감까지 남긴다. 때가 조금 늦긴 했지만 그의 성공은 많은 아티스트에게 희망과 가능성으로 새겨질 것이다.

 

2014/12 김반야 (10_ban@naver.com)

 

 


2014/12 I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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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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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드뷔시의 음악 중에 이 지면에서 이미 언급한 것으로는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가운데 ‘달빛’, 또 지난 달 게재했던 <바다 -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소묘>가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드뷔시의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인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골랐습니다. 연대기적으로 보자면 1890년 작곡했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과 1903년부터 3년간에 걸쳐 썼던 <바다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소묘>의 중간쯤에 위치합니다. 드뷔시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1892년부터 3년 동안 작곡했습니다. 인상주의 음악의 문을 마침내 열어젖힌 걸작, 독일?오스트리아 음악과는 확연히 맛이 다른 프랑스 근대음악의 첫걸음으로 기억되는 관현악곡입니다.

 

음악으로 들어서기 전에 드뷔시의 성장 과정을 잠시 복기해 보겠습니다. 그는 1862년 8월 22일, 생 제르맹 앙레(Saint-Germain-en-Laye)라는 곳에서 태어났지요. 파리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20km쯤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드뷔시는 다섯 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고 부모는 그릇가게를 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풍족한 집안은 아니었지요. 게다가 장사도 잘 안됐던 모양입니다. 드뷔시가 태어나고 2년 뒤에 가게를 정리하고 파리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그후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던 드뷔시의 아버지는 1871년에 시민들과 노동자들의 봉기로 세워졌던 혁명정부 ‘파리 코뮌’(3월 18일~5월 28일)에 참여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파리 코뮌은 2개월 만에 정규군에게 진압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드뷔시의 아버지도 이때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드뷔시가 다섯 살로 추정되는 시절에 찍은 사진이 한 장 남아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누구나 귀엽지만 드뷔시도 역시 그렇습니다. 모자를 쓰고 망토를 두른 꼬마가 세발자전거에 앉아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지요. 눈매를 약간 찡그리고 있는 꼬마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고집스러워 보입니다. 1862년부터 1918년까지 살았던 드뷔시는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겨놓고 있는데, 이 다섯 살 무렵의 사진이 가장 어린 시절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아홉 살 무렵부터였지요. 한데 이 대목에서 또 재미있는 것은 드뷔시의 음악선생이었던 모테 드 플뢰르비유(Maute de Fleureville) 부인이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Paul Verlaine)의 장모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베를렌의 아내였던 마틸드 모테의 어머니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모테 부인이 드뷔시를 가르치기 시작하던 그 무렵에 베를렌은 17세의 천재시인 랭보를 향한 동성애적 사랑에 광적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된 아내 마틸드와 장모인 모테 부인이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모테 부인은 그렇게 속을 끓이면서도 어린 제자를 손주처럼 아끼며 정성껏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마 교습료도 거의 못 받았을 겁니다. 드뷔시의 아버지는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경제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모테 부인은 참으로 탁월한 선생이었습니다. 어린 드뷔시를 가르친 지 1년 만에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시킵니다. 그러니까 드뷔시는 고작 열 살 때 이 유명한 음악원의 입학을 허가받습니다. 할머니뻘인 모태 부인 덕택이었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때부터 드뷔시는 12년 동안 이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합니다.

 

비슷한 연배의 동시대 작곡가들인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처럼 드뷔시도 한때 바그너의 음악에 매료됐지요. 하지만 어린 시절의 고집스러운 눈매에서도 느껴지듯이 드뷔시에게는 반골 기질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파리 국립음악원 시절에도 정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교수들과 충돌이 잦았다고 전해집니다. 게다가 그는 혁명기의 프랑스를 몸으로 겪으면서 독일?오스트리아의 음악어법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에 대해 늘 고민했다고 합니다. 학창시절에 접한 바그너의 음악을 통해 풍부하고 새로운 화성에 대해 눈을 뜬 것이 분명하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예술가적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드뷔시의 음악을 통해 독일?오스트리아와는 다른 ‘프랑스적 분위기’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드뷔시 개인의 기질과 취향에서 비롯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동시에 드뷔시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예술에서 나타났던 흐름들을 도외시하고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의 ‘달빛’을 설명하는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드뷔시의 음악은 당시 프랑스 예술의 새로운 조류였던 시에서의 상징주의, 또 회화에서의 인상주의와 깊은 연관성을 갖습니다. 파리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드뷔시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와 ‘화요회’ 멤버로 참여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했습니다. 시인 말라르메가 자신의 집에서 매주 화요일 밤마다 열었던 이 모임에는 상징주의 시인들과 인상주의 화가들이 참여하고 있었지요, 참, 조금 전에 등장했던 시인 베를렌도 이 모임의 멤버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듭니다. 술독에 빠져 살았던 이 천재시인은 랭보와 말다툼 끝에 권총을 발사했다가 감옥에 다녀왔고 아내인 마틸드와는 이혼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여전히 시들지 않았지요.
   
시에서의 상징주의가 언어의 지시적 측면을 벗어났던 것처럼 회화에서의 인상주의는 사물의 고유한 색에서 탈피합니다. 언어가 나의 심상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재생되는 것처럼, 사물의 색감이란 빛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이 당시 인상주의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고유한 색’이란 일종의 고정관념일 수 있지요. 인상주의자들에게 ‘사과는 빨간색, 바나나는 노란색’이라는 관념은 의미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사물의 정해진 모양, 그 항구적인 형태도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대상과 배경을 구분해주는 경계, 이른바 윤곽선이 흐릿해지면서 아련한 느낌의 몽환적 화풍을 낳았던 것이지요. 
 
물론 드뷔시 본인은 ‘인상주의’라는 표현을 자신의 음악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을 불편해했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음악이 보여주는 인상주의적 특징마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 지면에 썼던 글에서<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을 ‘귀로 듣는 회화’라고 표현했었는데요, 말하자면 그 음악은 피아노 한 대로 그려낸 인상주의적 회화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세 번째 곡인 ‘달빛’은 몽롱하면서도 달콤한 달밤의 정경을 인상적 색채감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이번에 듣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관현악으로 그려낸 인상주의 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곡은 ‘화요회’의 리더였던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의 시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지요. 사실 말라르메가 <목신의 독백>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를 처음 썼던 시기는 1865년이었습니다. 드뷔시가 고작 세 살 때였지요. 11년 뒤에 말라르메는 이 시를 개작해 <목신의 오후>라는 시집으로 다시 간행했고 당시 그 시집에 삽화를 그린 인물이 인상주의 화가 마네였습니다. 그도 역시 ‘화요회’의 멤버였지요.

 

시에 등장하는 ‘목신’(牧神)은 그리스 신화에서 판(Pan)으로, 로마 신화에서는 파우누스(Paunus)로 불립니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염소(양)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는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시칠리아의 초원을 배경으로, 물의 요정 님프와 나이아드에게 완전히 반한 목신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잊은 채 그 요정들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몽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드뷔시는 이 상징주의 시를 모티브로 삼아 관능성마저 느껴지는 인상주의 풍의 음화(音畵)를 그려놓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요. “이 곡은 말라르메의 시를 극히 자유롭게 회화로 표현한 것이다.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목신의 갖가지 욕망과 꿈이 열기 속을 헤맨다. 님프와 나이아드는 겁을 먹고 달아나고, 목신은 깊은 잠에 빠져들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꿈에 취한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악장 구분 없이 약 10분간 연주되는 곡입니다. 가장 먼저 플루트가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게 흔들리는 주제를 연주합니다. 아라베스크 풍의 선율이지요. 잠에서 깨어난, 하지만 아직은 정신이 몽롱한 목신이 갈대피리를 부는 모습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이어서 오보에와 클라리넷, 하프가 가세합니다. 이 주제를 여러 번 변주하면서 목신의 욕망과 몽상을 관능적으로 그려냅니다. 빠른 선율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겁을 먹고 달아나는 요정들의 모습을 상상하길 바랍니다. 이어서 환상에 빠진 목신이 관능에 빠져드는 장면이 점점 고조됩니다. 후반부로 접어들면 약간 우스꽝스러운 느낌의 목관 선율이 잠시 울려 퍼지다가 음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되돌아옵니다. 처음의 아라베스크 주제선율이 다시 연주되고, 아스라한 여운을 남기면서 다시 잠에 빠져드는 목신을 묘사합니다.

 

 

 


앙세르메.jpg▶앙세르메,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1957년/Decca


드뷔시의 <바다 - 3개의 교향적 소묘>를 언급했을 때도 추천했던 음반이다. 드뷔시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색채감, 아지랑이처럼 퍼져나가는 몽롱함을 잘 표현해낸 연주다. 앙세르메의 지휘를 구식일 것이라고 예단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실제로 그의 지휘는 요즘 들어도 여전히 생기 넘치는 감흥을 전해준다. 드뷔시의 다른 관현악 걸작들, <바다>와 <야상곡> <봄>이 함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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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르티농, 프랑스 국립방송교향악단/1973년/Warner Classics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즐겨 듣는 음반이다. 프랑스 태생의 지휘자인 마르티농이 프랑스 악단을 이끌고 들려주는, 깔끔하고 세련된 연주다. 과도하게 표현하지 않으면서 음악의 표정을 충실하게 살려내고 있다. 드뷔시의 음악에 관한 한, 교과서처럼 가까이에 둘 필요가 있는 음반이다. 1910년 태어난 마르티농은 1970년부터 프랑스 국립방송교향악단을 이끌다가 1976년 세상을 떴으니 이 녹음은 그의 말년작이라고 해야겠다. 8장의 CD에 드뷔시와 라벨의 관현악곡들을 수록한 전집을 구매하는 것이 낱장 구매보다 가격적으로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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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감상실의 핑크 플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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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때였다. 내가 문학 천재인 줄 알고 바보 같은 행동만 골라서 하고 다녔는데 신기하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관대한 여자였다. 아니면 나처럼 상태가 좋지 않은 여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그녀를 여자박상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녀와 부산 가는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내 인생에서 여자와 함께 하는 첫 여행이었다. 대전 쯤 지났을 때 그녀가 물었다. 


 “오빤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 뭐야?”
 “하나만 꼽기 아니꼬운데.”
 “그럼 지금 가장 듣고 싶은 음악은?” 


 나는 시디플레이어를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아주었다. 안에 들어있는 앨범은 핑크 플로이드의 <Wish you were here>였다. 

 

 


 “음악이 아니라 라디오가 나와.”
 “앞부분이 그래. 좀 있으면 나온단다.”
 “볼륨이 너무 작아.”
 “잠시 후 커진단다.”


 곧이어 그녀는 전설의 명반이 건네는 서정성에 빠져들었다 -고 생각한다. 턱을 괴고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으니까.

 

 차가운 겨울, 이 음악을 다시 들으며 방구석에 찌그러져 있다 보니, 그때의 기차 여행이 사무치게 그립다. 당장 부산 가서 아나고와 소주 앞에서 흡성대법을 쓰고 싶다. 여자와 함께 부산스런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싶다. 그러나 곁엔 아무도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나이를 먹어서도, 21세기가 되어서도, 내가 문학 천재인 줄 알고 바보 같은 행동만 골라서 하고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앨범은 나 같은 바보가 아니라 진짜 천재들이 만들었다. 언제 다시 들어도 완벽한 짜임새와 아름다운 음률에 몰입되어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런 앨범이 존재할 수 있다니. 핑크 플로이드라는 거장의 존재성 자체가 예술의 반열 아닌가 싶다. 타이틀곡 <Wish you were here>를 듣다 보면 음악적인 측면은 둘째 치더라도, 내가 쓴 어설픈 습작보다 이천 배쯤 시적(詩的)인 가사에 전율하게 된다.

 

 그 무렵 부산에는 음악다방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음악 좀 듣고 갈까.”


 

 여자는 공감보단 단순한 호기심인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벽에 LP가 잔뜩 꽂혀있는 디제이 부스가 복판에 있고, 그걸 바라보는 극장식 테이블이 있는 가게였다. 망해가는 중인지 손님은 몇 없었다. 우리는 맥주를 주문하고 신청곡을 써내려갔다. 내가 신청한 곡을 틀어주기에 앞서 디제이 엉아가 긴 머리칼을 한 번 쓸어 넘겼다. 그는 목소리를 밑장빼기 하는지 어지간히 낮게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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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우, Wish you were here. 이 명곡을 신청한 분이 계시군요. 이 곡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일화가 생각나요. 건강이 나빠져 핑크 플로이드 활동을 함께 할 수 없게 된 기타리스트 시드 배릿이 병원에 입원하자 베이시스트 로저 워터스가 문병을 갔답니다. 그때 병상에서 시드 배릿이 악보를 하나 건넨 거죠. 자기가 새로 만든 곡이라면서. 근데 집에 돌아와 펼쳐보니 그건 백지였어요. 로저 워터스는 잠시 눈물을 흘린 다음 그 백지에 즉흥적으로 곡을 써내려갔답니다. 그 곡에 <네가 여기 있다면>이라고 제목을 붙였죠. 이 앨범에 담긴 Shine on you crazy diamond라는 곡도 시드 배릿에 대한 우정과 애도의 뜻이 담긴 곡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 좋은 곡을 신청해 주신 분은 음…. 해방촌에서 온 천재시인, 이라고 씌어있는데 오오, 누구시죠?……. 부끄러워서 손을 못 드시는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부디 좋은 시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 Wish you were here 같이 들어요.”
 
 정말 믿거나 말거나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그럴 듯한 스토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음악 감상실의 키 큰 스피커가 뿜어낸 LP음질의 고풍스러운 감상은 이 곡을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얼마 전 리마스터링 된 이 앨범을 다시 들었을 때 매끈해진 음질이 정말 좋았지만 그때의 고슬고슬 공명하던 음악 감상실의 질감만은 여전히 그리웠다.
 
 밤이 되자 우리는 광안리 해변에 앉았다. 여자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여행에 나는 통기타를 들고 갔었다. 서정적인 낭만이 파도치는 듯 했다. 문득 그 순간이 인생에 다시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먼 훗날 그리운 장면이 될지도 몰랐다. 나는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대뜸 기타를 꺼냈다. 난 기타에 매우 소질이 없지만 그때 이곡을 죽어라 연습하고 있었다. 내가 전주 부분을 다섯 마디 쯤 치자 그녀가 기타 목을 콱 잡았다. 


 “분위기 깨지 마 오빠. 여기서 좋은 곡을 왜 망쳐?”


 나는 주섬주섬 기타를 집어넣었다. 연습 좀 더하고 들려줄 걸.
 잠시 후 그녀는 내 등짝을 강 스매싱으로 후려쳤다. 


 “생각하니 선곡도 열 받아. 나 여기 있는데 또 누가 있길 바래?”
 
 오랜만에<Wish you were here>를 다시 듣고 있자니 음악도 아련하고, 뜨거운 문장을 쓰던 그 후배도 아련하다. 그리고 등짝이 아직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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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올해의 가요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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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되돌아 보면 매년 그랬지만 올해는 더욱 힘이 들지 않았나 싶다. 여파가 상당했기에 어려운 환경일 수 밖에 없었다. 음악계도 악전고투했다. 순간을 채우고자 노력한 많은 작품들이 그 결과물이리라. 이 중에서도 의미가 더욱 남다른 2014년의 가요 음반 열 장을 이즘에서 꼽았다. 순서는 아티스트 이름 가나다 순이다.


눈뜨고코베인 - 스카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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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을 면치 못했던 인디 시장에서 굳건함을 보여준 건 이미 잔뼈가 굵어있던 눈뜨고코베인이었다. 아마추어의 무모함에 괴악한 이야기로만 승부를 보는 듯했던 이들은 어느새 풍부한 사운드로 무장하고 있었다. 「스카이워커」의 기타솔로나 「캐모플라주」의 익살맞고 다채로운 코러스에서 이미 맘을 빼앗는다. 음악적으로 매력을 드높이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터득한 뒤 이들은 여전히 주효한 능청과 날카로운 가사로 다시 한 번 마음의 가장 약한 부분을 깨부순다. 이미 모든 것을 보여준 줄 알았던 밴드가 또 다른 진화의 불씨를 당겼다.

 

 

2014/12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박재범 - 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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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2PM을 나간 것은 신의 한수'라고들 하지만 박재범은 치열했다. 그게 더 직접적이다. 즐거움과 자유분방을 동반한 노력 4년 차, 본격적으로 비범해졌다. AOMG와< Evolution >이 증명한다.

 

열정으로 꽉꽉 채워진 앨범이다. 실력을 쌓아서 이젠 설득력도 생겼다. 산뜻한 「So good」, 스타일리시한 「메트로놈」과 무식하게 신나는 「미친놈」까지, 본인의 다양한 매력을 한 방에 어필한다. 박재범 '비긴즈'를 마무리 지었다. 실력으로 증명했고 이젠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플레이어로 진화했다.

 

 

2014/12 전민석(lego93@naver.com)

 


서태지 - Quiet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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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의 아이콘'이 한 번 더 시동을 걸었다. 1990년대 복고 열풍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건만, (그리고 늘 그래왔지만) 괜한 추억 팔기나 답습을 구사하지 않는다. 근래 많은 아티스트들이 소재로 사용하는 신스 팝을 토대로 다양한 색감을 부여하며 서태지는 다시 한 번 자신이 훌륭한 창작자임을 밝혀냈다. 아이유를 보컬로 내세우기도 했던 「소격동」과 타이틀 트랙 「Christmalo.win」 뿐 아니라 일렉트로니카 넘버「90s icon」, 빈티지한 사운드의 「숲 속의 파이터」 등에서 재기 넘치는 터치가 드러난다. 반향도 상당했다. 예의 서태지 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새 세대의 어린 친구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했다. 작품 내외를 아우르는 성공이다.

 

2014/12 이수호(howard19@naver.com)

 


아시안 체어샷 - Hori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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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rizon >의 주 무기는 제각각 터져 나오는 소리 조합의 유기적인 산물이다. 귀곡(鬼哭)에 가까운 황영원의 보컬과 국악의 타악기를 상기시키는 둔탁하고 육중한 박계완의 드러밍, 싸이키델릭 사운드를 가지고 노는 손희남의 기타에 기인한다. 이들의 출사표는 만족에 차고 넘치는 약진이다.

 

 

 

2014/12 신현태(rockershin@gmail.com)

 


에픽 하이 - 신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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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의 불명예스러운 남루함이 싹 잊힐 만큼 이번에는 특유의 명석함과 서정성, 강도를 회복했다. 타블로와 투컷이 주도해 제작한 비트는 힙합의 여러 장르를 섭렵하면서 에픽 하이의 전통이 된 부드러운 양식까지 커버해 다채로운 멋을 보유해 보인다. 또한 인생사, 이성 간의 사랑, 청년의 공상, 불만스러운 사안과 인물을 향한 맹렬한 태도 등을 편안하고 재치 있게 풀어내 가사로도 즐거움을 준다. 객원 뮤지션의 인지도와 장기를 두루 감안한 영악한 게스트 섭외도 앨범의 튼실함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했다. 에픽 하이스럽고, 에픽 하이다운 괜찮은 음악을 들려줬다. 이런 복귀를 기다려 왔다.

 

2014/12 한동윤 (bionicsoul@naver.com)

 


이규호 -세상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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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만의 솔로작'이라는 이유만으로 박수를 쳐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를 대표하는 '하나음악' 내지는 '푸른곰팡이'라는 브랜드를 배제하고도, 이 작품은 올해의 앨범 감으로 손색이 없다. 누가 빨리 잊혀지나를 겨루는 듯한 소모전 속에서, 흔들림 없이 한발 한발 꼿꼿하고도 오롯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모습은 그를 장인으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모던 록의 색채가 존재했던 전과 비교해 좀 더 담백해진 인상이지만, 감상이 거듭될수록 다가오는 화자의 강한 의지는 전작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그만큼 이 작품이 담고 있는 감정과 문제의식의 밀도가 높다는 뜻이다. 개인의 건재를 알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건만, 한발 더 나아가 음악 자체의 힘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크다. 그의 '기다려줘서 고마워요'라는 수줍은 고백에, 도리어 고마운 것은 우리다.

 

 

 

2014/12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이승환 - Fall To Fly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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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몸을 던져 대작을 만들어냈다. 심플하면서도 세심한 편곡, 공을 들여 쌓아올린 사운드는 그가 25년 동안 쌓은 집념의 결과기도 하다. 어설프게 트랜드를 따르지도 본인의 고집을 피워 정체되지도 않았다. 본인의 색깔을 그대로 고수하면서도 장인의 손길로 한땀한땀 박음질해 불로(不老)의 이승환표 팝을 견고하게 했다. 대형 공연장부터 홍대 클럽까지 종횡무진하는 부지런함도 올해 그를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

 

 

2014/12 김반야(10_ban@naver.com)

 


이장혁 - Vol.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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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색과 신념을 유지하면서 성숙으로 변화하는 것'의 예를 제시하는 앨범이다. 이장혁 음악은 세상과 불화한 듯 여전히 헐벗어 있고 고립되어 있지만 연주의 비중이 늘고 사운드가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노래가 호흡할 공간이 마련된 결과일까, 질식할 듯한 어둠의 습도가 적절히 조절되어 음악의 품이 이전보다 한결 넓어진 느낌이다. 어느 곳 하나 지나친 부분도 모자란 구석도 없다. 듣고 또 들어도 견딜 만하고 거듭 들을수록 멜로디와 더불어 끝없이 젖어들게 된다.

 

노래들은 애써 덮어 둔 고통을 들추고 그 통각의 감각을 날렵하게 곧추세운다. 언제나 그랬듯, 앨범에는 아파해야 할 것을 외면하지 않고 용감하게 아파하는 음악이 주는 어떤 '각성'이 있다. 때문에 그의 어둠은 결코 불온하지 않다.

 

2014/02 윤은지(theothersong@naver.com)

 


크러쉬 - Crush On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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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예의 데뷔앨범은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고 유려했다. 멜로디를 만드는 능력이나 프로듀싱이 벌써 앨범을 서너 장 낸 중견 뮤지션처럼 완숙하다. 블랙뮤직이 주는 느낌을 온전히 전달하겠다는 목표로 알앤비, 뉴 잭 스윙, 디스코 등 할 수 있는 흑인음악을 이 한 장에 모두 펼쳐놓았다. 꽉 차게 편곡을 하다 보면 중간에 한 번 쯤 처지는 트랙이 나올 법도 하지만, 크러쉬는 끝까지 완성도를 유지한다.

 

무엇보다 농밀한 가사 속 감성을 표현하는 재능이 출중하다. 단단하면서 때로는 살랑살랑한 목소리,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힘을 가져 이제는 힙합 밖에서도 그를 찾는다. Crush on you, 모두를 완전히 빠져버리게 할 새로운 알앤비 대세의 등장이다.

 

2014/12 정유나(enter_cruise@naver.com)

 

 


한승석, 정재일 - 바리abando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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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이들의 이야기. 비극이면서도 희극이고, 고난의 길이면서도 즐거이 노래부른다. 한승석과 정재일의 음악 세계에선 온 우주 삼라만상이 평화롭게 공존을 이룬다. 국악이냐, 퓨전이냐, 현대 음악이냐를 구분짓는 장르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들이 빚어낸 세상은 지극히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이 담겨있고, 그 거울에 비춰진 우리의 모습은 울고 있기도, 웃고 있기도, 절망하기도 행복하기도하다.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없는 노래」로 만들어낸< 바리abandoned >의 소중함을 2014년이 잊어선 안된다.

 

 

 

 

2014/12 김도헌(zener1218@gmail.com)
2014/12 I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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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e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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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edies)>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은 지금도 예술가들의 거리로 유명합니다. 이 고갯길에 예술가들이 몰려든 것은 19세기 말부터였지요.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로 손꼽혔던 오스트리아 빈의 영광이 마침내 저물면서 프랑스 파리가 새로운 예술가들의 도시로 떠오릅니다. 19세기 말의 프랑스는 식민지를 급속히 늘리면서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고 있었고 파리에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에너지가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앞의 칼럼에서 언급했던 말라르메와 드뷔시 같은 이들이 당시 파리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예술가들이었고, 화가로는 고흐와 르누아르, 로트렉 등이 몽마르트르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아직 10대였던 피카소가 부푼 꿈을 안고 찾아와 머물렀던 곳도 바로 몽마르트르 언덕이었습니다. 이곳에 모여든 예술가들은 과거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지요. 또 관습적인 예술 표현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으로 들끓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자유로웠고 낭만적인 연애에 열정을 쏟아 붓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무렵 몽마르트르 언덕에 ‘검은 고양이’(Le Chat Noir)라는 카바레가 있었지요. 에드거 앨런 포의 공포스러운 소설 ‘검은 고양이’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개 ‘카페’라는 용어로 ‘검은 고양이’를 소개하는 글들이 많은데 정확히 표기하자면 ‘카바레’입니다. ‘검은 고양이’를 홍보하는 당시의 포스터를 찾아봤더니 ‘Cabaret du Chat Noir’라고 적혀 있습니다. 요즘에는 ‘카바레’를 중년 이상 남녀들의 사교장으로,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의 무도회장으로 대개 생각하지요. 하지만 당시의 카바레는 요즘과 좀 달랐습니다. 물론 술을 파는 곳이다 보니 진한 농담을 나누거나 맘에 드는 이성을 유혹하기도 했겠습니다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그곳은 무엇보다 젊은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아지트였습니다. 시를 낭송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고 샹송을 노래했습니다. 때로는 정치적 토론이 격렬하게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연극이나 풍자적 만담을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검은 고양이’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공연은 인형과 불빛을 이용한 ‘그림자 연극’이었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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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말이 나온 김에 카바레 얘기 조금 더 하겠습니다. 이렇듯이 프랑스 파리에서 19세기 말에 꽃피었던 카바레 문화는 20세기 초반에 접어들어 독일에서 한층 성행합니다. 독일어로는 카바레트(Kabarett)라고 불렀는데, 간판으로 내걸렸던 이름들도 아주 특이합니다. 1900년대 초반에 베를린에는 ‘위버브레틀’(궁극의 캬바레)이 있었고 뮌헨에는 ‘디 엘프 샤르프리히터’(11인의 처형인)라는 카바레트가 있었습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건설되면서 독일에서는 카바레트가 크게 융성하지요. 정치적 검열이 완화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표현의 자유가 분출했던 까닭입니다. 기존의 체제에 불만을 품은 많은 예술가들이 카바레트 무대에 자신들의 작품을 올리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오늘까지 유명한 두 명의 인물이 바로 극작가 겸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작곡가 쿠르트 바일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 공연했던 연극으로 <서푼짜리 오페라>가 유명하지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자본주의를 야유하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쿠르트 바일과 더불어 이른바 ‘좌파 음악가’로 불리는 한스 아이슬러도 브레히트와의 공동 작업으로 카바레트에서 공연을 올렸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융성했던 카바레트는 1933년에 철퇴를 맞지요. 주지하다시피 히틀러가 권력을 잡으면서 이곳은 불법적 공간이 됩니다. 나치는 카바레트에서 인기를 끌었던 음악들을 ‘퇴폐음악’으로 규정해 연주와 청취를 아예 금지해 버리지요.
 
자, 다시 19세기 말의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돌아오겠습니다. 1887년이 거의 저물어가던 무렵, 어느 날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 새로운 피아니스트가 한 명 등장합니다. 바로 군대에서 막 제대한 오늘의 주인공, 에릭 사티였습니다. 1866년 프랑스 북쪽 노르망디의 바닷가 옹플뢰르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기에 어머니를 잃고 조부모 밑에서 성장하지요.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진한 고독감은 유년기의 경험에서 비롯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외로운 10대 시절을 보낸 사티는 1878년에 아버지가 있는 파리로 이주하지만 새어머니와 불화와 갈등의 나날을 보내지요. 얼마 뒤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지만 ‘게으르고 집중력 없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중도 탈락하고 맙니다. 1886년에 군에 입대해서도 여전히 ‘부적격자’였던 모양입니다. 기관지염, 정서 불안 등을 이유로 조기 제대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티는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내향적인 젊은이였습니다. 그렇게 군대에서마저 방출된 사티가 찾아간 곳이 바로 몽마르트르 언덕이었고, 마침내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는 이 카바레에서 주로 ‘그림자 연극’의 피아노 반주를 맡습니다. 그렇게 음악가로서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사티는 역시 몽마르트르에 있었던 ‘못의 주막’(Auberge du Clou)으로 자리를 옮길 때(1891년)까지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오늘날 많이 이들이 사랑하는 사티의 초기 피아노 작품들이 바로 몽마르트르 시절에 작곡됩니다. 예컨대 <3개의 사라방드>(1887), <3개의 짐노페디>(1888), <3개의 그노시엔느>(1890, 사티 사망 후 3곡이 추가돼 지금은 6곡) 같은 곡들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3개의 짐노페디>는 작곡가로서의 사티를 세상에 알린 곡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훗날(1911년) 드뷔시가 세 곡 중의 두 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해 자신의 지휘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3개의 짐노페디>가 보여주는 특징을 요약하자면 정서적 고독감, 단순한 선율, 종교적 신비로움 같은 표현들이 떠오릅니다. 물론 그것은 다른 두 곡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특징들이 제각기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한데 어울려서 사티 음악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티의 고향은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옹플뢰르입니다.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은 사티가 특히 좋아했던 곳이 성당이었다고 하지요. 어린 사티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유심히 바라보거나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10살 무렵에 옹플뢰르의 성 네오나르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던 비노(Vinot)에게서 음악을 배웁니다. 말하자면 사티에게 첫번째 음악선생이었던 것이지요. 사티는 그 선생님한테 피아노를 배웠고 그레고리안 성가 등 중세 음악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됩니다. 그의 초기 피아노곡들에서 나타나는 흐릿한 존재감,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듯한 리듬, 그레고리안 성가를 연상시키는 신비한 선율 등은 바로 그런 경험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사티의 초기 음악들은 ‘중세적 명상’이라고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지요.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 고리타분한 종교주의가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에서 날마다 대중적 음악을 연주했던 그는 명상적이면서도 듣는 이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곡들을 선호했습니다. 그것은 당대의 주된 흐름이었던 후기 낭만주의, 또 프랑스의 드뷔시가 개척한 인상주의 음악과도 사뭇 달랐습니다. 사티는 감정의 과잉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더러 인상주의 음악가들이 애호했던 관념적 소재, 모호한 표현법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티의 음악은 차갑고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듣는 이에게는 감각적으로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3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edies)는 제목처럼 모두 3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짐노페디(Gymnopedies)는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소년들’이라는 뜻이지요. 고대 그리스의 축제에서 소년들이 벌거벗고 추는 춤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인 제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벌거벗었다’라는 표현은 사티의 음악에 매우 적절한 제목이기도 하지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린, 말하자면 불필요한 장식이나 감정의 과다 노출이 없는 단순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사티의 친구였던 시인 장 콕토는 이 곡을 듣고 “벌거벗은 음악”이라고 평하기도 했지요. 사티의 음악이 대개 그렇듯이 연주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가령 이 곡을 가장 느리게 연주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태생의 피아니스트 라인베르트 데 레우(1938~)은 15분 52초에 걸쳐 연주합니다. 하지만 대개의 피아니스트들은 10분 안팎으로 연주하지요. 1곡에는 ‘느리고 고통스럽게’(Lent et Douloureux), 2곡에는 ‘느리고 슬프게’(Lent et Triste), 3곡에는 ‘느리고 엄숙하게’(Lent et Grave)라는 지시가 달려 있습니다.

 

 

 

 


치콜리니.jpg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1966년/Warner Classics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도 치콜리니(1925~)는 1960년대와 1980년대, 두차례에 걸쳐 사티의 피아노곡을 레코딩했다. 첫번째는 아날로그, 두번째는 디지털 녹음이다. 연주 스타일은 밝고 청명한 편이다. 사티 음악의 명상성보다는 풍자성에 좀 더 방점을 찍는 연주로 들린다. 아울러 무뚝뚝할 수도 있는 사티의 음악에 생동감 있는 표정을 부여한 연주라고도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한 라인베르트 드 레우의 연주로 이 곡에 익숙한 이들이 들으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드 레우의 연주가 극단적으로 느린 템포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녹음은 5장의 CD 전집으로, 아날로그 녹음은 CD 2장짜리 음반으로 나와 있는데, 이 지면에서는 대중적인 곡들을 주로 수록한 후자를 권한다.

 

 

 

 

 

로제.jpg파스칼 로제(Pascal Roge)/1983년/Decca


현재 국내 매장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음반이다. 파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로제(1951~)는 드뷔시와 라벨을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녹음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사티의 ‘짐노페디’를 연주한 음반도 호평을 받는다. 앞서 언급한 치콜리니와 달리 약간 드라이한, 좀 더 절제돼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딱딱하고 메마른 연주는 아니다. 섬세한 뉘앙스가 살아 있는 시정 넘치는 연주라고 평할 만하다. 음반 표지에 후안 미로의 그림 ‘어릿광대의 사육제’가 인쇄돼 있다. <3개의 짐노페디>를 첫 곡으로 사티의 주요 곡들을 선곡했다. 사티의 음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샹송풍의 ‘Je te veux’는 두번째 곡으로 담겼다. 사티의 음반을 처음 구입하는 이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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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함의 반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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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를 베트남 하노이에서 덜컥 맞았다. 쌀국수 값과 맥주 값과 호스텔 숙박비가 굉장히 착해 보여 안 올 수가 없었다. 보일러 땔 돈에 감기약값을 보태면 얼추 여행비용이 되겠다는 계산도 했다. 그러나 와 보니 계산이 틀렸고(아아 비행기 값을 간과하다니 바보 아냐) 한파에 싸늘하게 얼어붙은 고독한 가슴은 이곳의 날씨에도 전혀 녹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하노이 구시가를 걸으며 삭막한 오토바이 떼와, 매캐한 매연과, 자비 없는 경적소리에 영혼을 빼앗길 뻔했다. 멈출 생각이 없는 오토바이 사이로 길을 건널 땐 인생에 회한도 느꼈다. 음악이 필요했다.

 

 나는 카페로 피신해 진하고 달콤한 베트남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귀에 꽂았다. 하지만 낯선 이국에서 너무 많이 걸어 지친 상태로 달콤한 음악을 진하게 들었더니 긴장이 풀리면서 헐렁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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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숙소에 갈 때 흥정도 안 하고 씨클로(베트남 자전거 교통수단)에 타고 말았다.(아아, 계속 바보 아냐) 그저 귀에 흐르는 카멜CAMEL(담배 아닙니다)의『Stationary Traveller』(문방구 여행자 아닙니다. 정체된 여행자?)에 경탄하며 하노이 시내를 바라보았다. 음악의 힘으로 혼란스럽기만 하던 풍경이 낭만적인 뮤직비디오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정초부터 추억의 턴테이블이 뱅뱅 돌면서 어떤 강력한 기억이 떠올랐다. 서울 거리가 베트남처럼 무척 혼란스럽고 시끄럽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따듯한 동남아에서도 현실은 차갑고 냉정한 법. 목적지에 내릴 때 감상에 빠졌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씨클로 아저씨가 바가지 금액을 요구한 것이다. (나는 평생 돈이 넉넉했던 적이 없는데 타고난 귀티 때문에 꼭 있는 놈인 줄 안다니까.)


 “5분 탔는데 20만동(만원)을 부르다니, 꽁안(경찰)을 부르겠소.”


 라고는 했지만 경찰 번호가 뭔지 모르고, 내 휴대폰은 데이터만 되는 심카드고, 아저씨가 너무 삭막하게 바락바락 우겨 게임오버.

 

 오늘의 주제곡 『Stationary Traveller』를 오랜만에 들은 값이 아주 비쌌던 셈이다. 어쨌든 이 곡을 들으며 떠올린 그놈의 비싼 추억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돈 아까워서 안 되겠다.
 
 나는 서울의 기동대에서 군복무를 했다. 데모가 무진장 많은 시절이었고 그걸 막는 전투경찰 부대였다. 우리가 출동할 땐 ‘페퍼포그’ 차라는 게 동행했다. 그것은 최루탄 발사기를 장착한 장갑차다. 그 시커먼 게 시위대 한복판에 다연발 지랄탄을 우다다 터트리면 웬만한 시위대는 개다리춤을 추며 이리저리 흩어져야 했다. 열 받은 시위대가 뒤집으려 하면 차체에 전류를 흘리는 기능도 있었다. 참 삭막한 장비였던 셈이다. 몸으로 쇠파이프와 화염병(시위대도 삭막했다)에 부닥쳐야 하는 일개 기동대원으로선 그 차에 탑승하는 놈이 정말 부러웠다. 


 그 부러운 친구는 사회에서 음악을 하다 온 녀석이었다. 그가 그 어려운 ‘잉베이 말름스틴’의 곡을 치면 둘이 듣다 하나가 탈영해도 몰랐다. 아무튼 상황 출동을 하면 차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겠다며 그는 카세트테이프를 챙기곤 했다. 차벽이 두꺼워 훌륭한 음악 감상실이 된다는 거였다. 그 삭막한 차에서 군복무 중에 음악이라니, 상당히 부러운 보직이었다.

 

 우리는 어느 날 대규모 시위 현장에 투입되었다. 정부에 화가 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냥 군대에 왔을 뿐인데 공권력의 앞잡이로 거리에 나가 시위대의 샌드백이 되는 내 팔자가 못생겼다고 구시렁댔다.


 그날은 평소와 비교할 수 없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위대가 정예 네임드였고 평화시위 따윈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옷 그런데 시시한 해산 안내방송이 나와야 할 우리 페퍼포그 차량에서 뜬금없이 빵빵한 음악소리가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바로 오늘의 주제곡 『Stationary Travelle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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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말한 기타리스트가 차에서 음악을 듣다 실수로 외부 스피커를 켜버린 것이었다.

 

 시위대와 전경들은 순간 멈칫하며 잠시 그 아름다운 팬 플루트 소리로 시작하는 음악을 들었다. 삭막한 시위현장 한복판에 퍼지는 음악의 이질적인 황홀함이란! 이 곡의 끝내주는 톤을 가진 기타 솔로 부분이 나오자 캬아, 그건 뭔가 상황을 그림처럼 달라보이게 만들었다.

 

 카멜의 음악은 싸우기 직전의 대치국면에 마치 ‘뽀샵질’을 하는 듯 했다. 수많은 시위대와 전경들이 내 눈엔 카멜 콘서트에 몰린 팬들로 보였다. 무거운 국방색 진압복과, 시위대의 처절한 눈빛과, 등 뒤에 숨긴 쇠파이프와, 땀에 쩐 방독면과, 지휘관의 신경질적인 고함소리 또한 평소와는 다르게 전혀 현실이 아닌 것으로 느껴지며 꿈을 꾸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대로 음악을 계속 들었다면 모두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라는 마음이 들어 진압도 안 하고, 시위도 그만두고 그것 참 좋은 선곡이었다며 악수한 뒤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음악이 나가고 있다는 걸 지휘관이 알았는지 소리가 뚝 멈췄다. 감상적인 분위기도 뚝 끊겼다. 동시에 음악의 톤과 주파수가 차지하던 자리에 화염병 하나가 빨간 선을 그으며 날아왔다. 경찰 무전 은어로 ‘꽃병’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음악의 여운이 남아 내 눈엔 정말 꽃병이 날아오는 걸로 보였다. 그리고 그게 바로 옆에서 터지자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는 자세히 묘사하고 싶지 않은, 폭력진압과 폭력시위의 악순환이 이어졌고, 그날 우리 중대는 개박살이 났다. 나는 쫓기다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시위대에게 포위되어 발가벗겨졌다. (아잉 부끄)
 
 다음 날 베트남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타보니 그때의 시위현장에서 느꼈던 막막함이 다시 연상되었다. 나름 오토바이끼리 합의된 질서가 있었지만 적응하기 쉽진 않았다. 마구 누르는 시끄러운 경적소리는 직접 달려보니 이해가 갔다. 이 사람들 습관이기도 하지만 엽기적인 교통상식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좀 그러지 마라”고 경고해야 하는 순간이 많은 거였다. 역주행에 신호위반, 차선위반에, 아무데서나 유턴해대는데 안 박으려면 나도 경적에 의존해야 했다. 오래전 군복무 당시 대한민국 수도가 그토록 시위로 시끄러웠던 것도 엽기적인 정치 수준에 “아 좀 제발 그러지 마라”는 경적소리가 난무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그 오토바이 위에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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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거나 베트남의 빠른 경제발전이 문화발전으로도 잽싸게 이어지길, 나는 새해 소망으로 빌어보았다. 나 역시 문제나, 아픔이나, 분노 없이, 그래서 싸울 일도 없이 평화로운 한 해가 되면 좋겠다고 빌었다. (뭔가 역사가 거꾸로 흘러 자꾸 경적을 울리고 싶다는 게 촌스럽다.)  


 그러려면 음악을 많이 들어야 할 것 같다. 음악이야말로 삭막함의 딱 반대말이다. 경제고 사회고 정치고, 삭막하게 정체된 우리의 지금 여행이 ‘뽀샵빨’로라도 좀 아름다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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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가’의 1990년대, 순간이 되지 않기 위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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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최초의 유행은 1990년대의 유산이다. 음원 순위 정상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유행가 CD 트랙리스트와 거의 흡사한 노래들이 안착해있고,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옛 가요는 모두의 과거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 < 무한도전 >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특집이 온 나라를 타임머신에 태웠다. 음원 차트 성적이 단순한 대중의 관심 집중도를 투영한다고 해도 현재 레트로에 바치는 헌신은 상당한 수준이다.

 

기현상이라면 기현상이다. < 응답하라 > 시리즈, 추억의 가수들을 소환한 < 히든싱어 > 등 단발적 복고의 흐름은 존재했으나 이처럼 폭발적인 유행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1990년대 가요계의 중심에 서 있었던 1970년대, 1980년대 생들뿐만이 아니라 태어나지도 않았을 현 십 대들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다. < 무한도전 >이라는 포맷 자체 파워를 고려하더라도 그 옛날 역사 속에 잠겨있던 김건모, 이정현, 김현정, 소찬휘, 터보를 다시금 현실 속에 숨 쉬게 한 대중의 사랑은 확실히 흔치 않은, 가요계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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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뻔하고', '단순한' 기획이라 평가받았던 '토토가'가 불러온 복고의 재림은 역으로 현시대가 얼마나 빈곤한 문화적 갈증 상태에 빠져있는지를 반증한다. 한국 문화 역사상 제반은 가장 풍족하면서도 콘텐츠 적으로는 가장 빈곤한 때가 요즈음이다. 허울만 좋은 음원 차트는 오디션 프로그램 등장곡, 드라마 OST, '직캠'의 자극과 논란의 아슬함을 무기로 삼은 노래들의 우후죽순 난립이다. 그 완성도를 일일이 평가하기 어려울 정도의 성과 차용, 천편일률이 가득하다. 염증을 느끼는 이들이 찾을 곳은 유튜브 속, 음원 어플리케이션 속의 과거뿐이다. 행복했던 학창 시절, 청춘 20대 시절의 1990년대는 그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보금자리이자 '문화적 피난처'다.

 

1990년대 가요가 다소 어설픈 테크노 리듬과 투박한 가사로 완성도 면에선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그 아우라는 감히 현재의 빈곤함이 맞설 것이 못 된다. 대한민국 경제&문화의 최전성기였던 IMF 이전의 1990년대는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행복했던', '살만했던' 시절로 남아있다. 늘어난 수요에 맞춰 수많은 장르의 각축전이 벌어졌고,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는 슈퍼스타들이 탄생했다. 1990년대를 열어젖힌 신해철부터 십 대를 주도층으로 격상시킨 서태지와 아이들,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이 나타났으며 팔색조 매력을 갖춘 김건모는 250만 장 앨범을 팔았다.

 

인식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시절의 가요는 대중의 눈과 귀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을 멜로디가 있었고,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가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공감대를 형성했다. 쿨, 터보와 같은 그룹의 노래는 말 그대로 우리의 노래, 팝 그 자체였다. 이미지 면에서도 소홀하지 않아, 엄정화의 고혹, 이정현의 강력한 퍼포먼스, 소찬휘의 폭발적 가창은 수많은 후배의 귀감이 되었다. 투박했을지언정 억지로 지어내지 않았다. 작금의 가요계에선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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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이 '토토가' 열풍에서 교훈을 얻고 개선을 찾아낸다기보다는 그저 그 타성에 젖거나, 이를 이용한 한 철 장사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 가요가 환기하는 추억의 아름다움은 쏟아지지만, 그 장단점과 개선의 여지, 현 가요계가 본떠야 할 부분과 과감히 쳐내야 할 부분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토토가'에 등장한 기성 가요는 단순히 한 단어로 정의하기엔 너무나도 넓었던 그 시절의 음악 토양 중 일부임에도 대중은 이를 전체로 인식한다. 저명한 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의 저서 레트로 매니아』를 인용하자면, '디지털 미래가 아날로그 과거의 최면에 걸린 꼴'이다.

 

미디어에 좌우되는 가요계 흐름 또한 우려스럽다. < 나는 가수다 >, < 무한도전 가요제 특집 > 등의 전례를 보듯 방송 주도 하의 가요 열풍은 결국 미풍에 그치고 말았다. 비록 그 저의는 순수한 것이라 해도 산업 전체가 방송에 이끌려가는 현실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대중의 자연스러운 의제 형성보다는 몇몇 프로그램, 산업, 개인의 의제가 중심이 되는 문화계 모습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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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완결된 네이버 웹툰 < 미결 >은 시간 여행의 개발로 인해 모든 창의력이 잠식되고 과거의 레퍼런스만을 문화적 낙으로 삼는 미래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추억을 기념하는 것과 옛것에 얽매이는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지만, 추억 향유 그 이상의 대안을 내놓기엔 현재 대한민국 가요계의 자생력이 너무나도 낮아 무비판적 수용에 그치고 만다. 레트로의 함정은 지금보다 더한 독창성과 자립성의 잠식을 불러올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복고를 통한 새로운 미래의 창조냐, 아니면 더욱 깊은 과거로 흘러만 가느냐. 단순히 1990년대 가요에만 국한되지 않은 21세기 문화 산업의 핵심 화두다.

 

'토토가' 자체는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초기 기획대로 이 특집은 단순히 '1990년대 스타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기억하는 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판을 만들어준 것뿐이다. 문화계 경종을 울린 복고의 역습은 너무나도 즐거운 축제 속에 날카로운 맹점과 변화의 필요성을 깊이 녹여놓았다. 기억할 것은 하나다. 선택은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 바로 이 순간 현재에 달려있다는 것.

 

 

 

2015/01 김도헌(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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