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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민 「나이스바디」는 분명 문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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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민

 

 

효민의 「나이스바디」는 두 가지 면에서 꽤 인상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어쩔 수 없이 여러 사건과 부진 속에서 묻힌 티아라를 생각하게 된다는 점. 그리고 유튜브에서 접하게 되는 해외 팬들의 다이내믹한 반응이다. 티아라의 부침이야 워낙 유명한 사안이라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이후 티아라의 소속사인 코어콘텐츠미디어의 입장에선 ‘티아라’라는 브랜드가 상업적으로 오히려 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효민의 솔로 데뷔는 그런 전략 중 하나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극적이고 직설적이다. 「나이스바디」의 뮤직비디오는 일반과 19금으로 나눠서 공개되었는데, 19금 뮤직비디오는 굳이 19금을 달지 않아도 좋을 만한 내용이다. 내용이 없는 쪽에 가깝다. 그저 인트로를 반복하며 티저로 쓰일만한 영상들을 파편적으로 뿌려놓는다.

 

유튜브에서 시끌벅적한 부분도 이 부분이다. 특히 해외 팬들의 반응이 뜨악한데 이건 꽤 흥미로운 부분이다. 알다시피 유튜브에는 자막 기능이 있다. 구글 번역기를 활용한 기능으로 발음을 분석해 자동으로 번역해준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체로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만 하다. 그리고 유튜브에서는 공식 채널을 통해서만 뮤직비디오가 유통되는 것도 아니다. 많은 개인이나 집단들이 특정 계정을 통해 영상들을 큐레이션한다. K-POP 뮤직비디오도 대부분 이렇게 유통된다. 그런 계정들은 다수가 있고, 반응도 꽤 활발하다. 공식 계정과 다른 점은 칭찬보다는 여러 의견이 교차된다는 점이다. 그 중 몇몇 계정에서는 해외 팬들이 영어로 이 곡에 대해 논쟁 중이다. 노랫말과 영상 때문이다.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명백하게 차별적인 시선


「나이스바디」의 노랫말은 이렇다. “여자라면 누구나 노출을 원해요 / 여자라면 한 번쯤 다이어트를 하네요 / 여자라면 분명히 사랑 받길 원해요 / 꿈속의 왕자님은 분명히 나타날 거예요”라는 말로 시작되는 곡은 “(먹고 싶은 것도 참고) 독하게 살아가 / (아픈 것도 모두 참고) 난 예뻐질 거야 / 사랑할 거야 더 보여줄 거야 / 난 달라질 거야”, “나 정말 힘들었어요 / 그대 땜에 얼마나 노력한지 몰라요 / 맵시 나는 스타일 기분 좋아 스마일 / 당당해졌어 이젠 나도”로 이어진다.

 

사실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나이스바디’가 다이어트 욕구를 살짝 비튼 내용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정말로’ 남자를 위해 살을 빼는 여자의 이야기였다. 해외 팬들이 뜨악해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뮤직비디오에는 쌓아둔 도넛에 집착하는 ‘빅걸’이 등장하기도 한다. 만든 쪽에서는 유머 코드라고 생각했겠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명백하게 차별적인 시선이다.

 

 

효민

 

논점은 이 노랫말과 영상이 차별을 조장한다는 데 있다. 차별에 민감한 문화권에서는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얘기를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어떤 팬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어떤 팬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쟤는 흑인이라서 무식할 거야, 혹은 뚱뚱한 사람들은 게으르잖아, 라는 생각을 속으로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나 영국 혹은 남미나 여타 다른 나라들에서 이런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건 그 사람의 몰상식을 드러내는 걸로 여겨진다. 이것은 아마도 코어콘텐츠미디어나 용감한형제 쪽에서는 예상하지도 못했을 반응일 것이다.

 

이들은 그저 효민의 솔로 데뷔를 좀 더 ‘섹시하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을 테니까. 그저 다른 여자 솔로 가수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을 ‘뚱뚱했다가 날씬해진 여자의 자기만족’으로 잡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한 건 해외에서 소비되는 K-POP이 소녀시대나 빅뱅 같은 ‘메이저급’ 가수들만이 아니란 점이다. K-POP은 이미 어떤 형태가 되었든, 한국이라는 지역을 벗어나서 소비된다.

 

우리는 보통 아이돌 음악이 국내에서만 소비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K-POP은 지구적인 범위에서 소비되고 있다. 이걸 바꿔 말하면 어떤 경우엔 지역성이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소수자나 인종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사례들은 이미 여러 사례들을 통해 등장하고 있다.

 

사실 차별에 반대하는 태도는 선진국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며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나 ‘국격’과 직결되는 요소기도 하다. 그 점에서 효민의 「나이스바디」는 분명 문제적이다. 물론 이 문제는 좀 복잡하다. 나는 이 곡에 등장하는 여성의 욕망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남자를 위해 살을 빼고 싶은 여자의 마음도 존중하고 싶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노래는 누군가를 공격하면서 자신의 자존감을 지킨다. 그래서 나쁘다. 차별은 늘 그렇게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만든 쪽만 비난하고 싶지 않다. 이건 한국 사회의 문제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차별적인 시선과 태도에 대해 거의 무감각하다. 공공장소에서, 혹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소수자를 차별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다. 그러므로 효민의 「나이스바디」에 작동하는 시선은 제작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다.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K-POP이 국제적으로 소비되면서 점점 더 중요하게 다뤄질 게 분명하다. 차별적 인식과 태도는 거시적인 문제가 아니다. 노래 한 곡조차도 모두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별 것 아니라고 여기는 것들이 다른 관점에서는 문제다. K-POP의 세계적인 인기, 한국 대중문화의 국제적인 성공 같은 상황들은 오히려 우리 내부를 똑바로 마주볼 것을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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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에게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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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jpg

안톤 요제프 브루크너 [출처: 위키피디아]

 

지난 회에 들었던 브루크너의 교향곡 4번에 이어 오늘은 7번을 듣겠습니다. 이 두 곡은 브루크너가 남긴 교향곡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많이 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일 겁니다. 4번은 앞서 설명했듯이 ‘낭만적’이라는 표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측면이 있고, 브루크너의 다른 교향곡들에 비해 음악의 구조가 좀더 간명하고 곡의 분위기도 비교적 밝습니다. 그런데 7번은 왜 인기가 있는 걸까요? 그에 대한 해답은 아마 느린 2악장에 있을 겁니다.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약 20분가량의 긴 악장이지요. 듣는 순간에 곧바로 가슴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선율이 등장합니다.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저는 지금, 지휘자 오이겐 요훔(1902~1987)이 1965년에 베를린필하모닉을 지휘해 녹음한 LP를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지휘자는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카라얀이나 칼 뵘 등의 유명세에 가려져 이름이 덜 알려진 측면이 있지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요훔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특히 말년에 녹음한 음반의 표지에 실려 있는 그의 사진들을 보노라면, ‘아, 이렇게 늙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곤 합니다. 엄격하면서도 온화한 표정이 참으로 인상적이지요.

 

음악도 그렇습니다. 그의 음악은 엄격함과 온화함의 조화를 보여줍니다. 예컨대 젊은 시절의 요훔을 극찬했던 선배 지휘자 푸르트뱅글러(1886~1954)와 비교해보면 음악적 해석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푸르트뱅글러는 음악이 무엇보다 시간의 예술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던 지휘자였지요. 그에게 텍스트의 고정 불변성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해석, 다시 말해 낭만성과 즉흥성이 강한 연주를 들려줬다고 할 수 있지요. 반면에 요훔의 해석은 주지적이고 치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카니니(1867~1957)처럼 ‘악보에 있는 그대로’를 강조하면서 독재자로 군림한 지휘자는 아니었습니다. 훨씬 유연했다고 볼 수 있지요. 게다가 브루크너의 교향곡, 그중에서도 7번은 요훔에게 아주 특별한 레퍼토리였습니다. 스물네 살이던 1926년 뮌헨 필하모니를 지휘하면서 데뷔했는데, 이때 연주했던 곡이 바로 브루크너의 7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후에도 평생토록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자신의 대표적 레퍼토리로 삼았고 독일 브루크너협회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지요. 그래서 저는 적어도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을 들을 때면 요훔의 음반을 가장 자주 꺼내 들곤 합니다.
 
자, 지난 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브루크너는 1868년에 음악의 도시 빈에 들어섭니다. 마흔네 살이었을 때입니다. 이때부터 교향곡 작곡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요즘 세상에서는 마흔두 살 정도면 젊은 축에 속하겠지만 옛날에는 사정이 많이 달랐지요.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처럼 거의 요절한 음악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베토벤이 수많은 걸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은 57세였을 때, 요즘으로 치자면 한창 일할 나이였습니다. 또 말러가 10번 교향곡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시기도 쉰 살을 갓 넘겼을 때입니다.

 

브루크너는 그렇게 뒤늦은 나이에, 날고 긴다는 음악가들의 각축장이었던 빈으로 옵니다. 그때부터 72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28년 동안 빈의 음악가로 삽니다. 하지만 순탄치 않았지요. 빈의 주류 음악가들은 안스펠덴 출신의 촌뜨기를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브루크너는 요즘말로 ‘듣보잡’이었지요. 게다가 브루크너는 사교와 정치에 서툰 사람이었습니다. 주류 사회를 비집고 들어갈 만한 세련된 매너와 화술을 전혀 갖추지 못한, 그야말로 ‘촌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브루크너가 빈에 도착했을 무렵, 당시 음악계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요. 한편에는 브람스를 지지하는 정통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바그너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찬양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19세기 음악사의 마지막 논쟁을 대변하는,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대립이 치열한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데 지난 회에도 언급했듯이 브루크너는 바그너 신봉자였습니다. 우직한 성품의 그는 대놓고 바그너 편을 들었지요, 당연히 그 반대파로부터 험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1825~1904)의 브루크너 비판은 집요하고 노골적이었습니다. 브람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브루크너를 아예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버렸지요. “음악적 논리가 결여돼 있고 표현이 부자연스러운 엉성한 음악” “바그너를 숭배하는 노예” 등의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물론 브루크너를 공격했던 인물들은 그밖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브람스 진영을 대표했던 평론가 한슬리크, 당대에 상당한 음악적 권력을 휘둘렀던 그의 악평은 브루크너를 꽁꽁 옭아매는 사슬로 작용했습니다. 그 덕분에 브루크너는 빈에서 고생이 막심했지요.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음악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빈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손꼽히는 빈 필하모닉은 한때 브루크너의 교향곡 연주를 아예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가요? 적어도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국한하자면, 브루크너는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음악가 브람스를 오히려 능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브람스는 브루크너보다 9살 연하이지만, 슈만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던 그는 브루크너가 빈으로 들어섰을 때 이미 음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요. 브루크너가 빈에 발을 들여놨던 1868년에 브람스는 <독일 레퀴엠>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1897년에 64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교향곡 분야에서 4곡의 음악을 남기는 데 그쳤지요. 반면에 브루크너는 빈에서 살던 28년 동안 교향곡 2번부터 9번까지(마지막 악장은 미완), 모두 8곡을 작곡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교향곡은 개성과 색감이 많이 다르지요. 회색빛 우울함을 주조로 삼고 있는 브람스의 교향곡에 견주자면, 금관악기를 전면에 내세운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훨씬 찬란한 음색을 구사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빈의 음악계에서 오래도록 조롱의 대상이었던 브루크너에게 마침내 한 줄기 햇살이 다가온 것은 1884년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딱 50이 되던 해였지요. 그 해가 저물어가던 12월 30일, 독일 라이프치히의 오페라극장에서 교향곡 7번 E장조가 초연됩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지요. 브루크너가 그때까지의 음악인생에서 맛 봤던 최고의 기쁨, 어쩌면 최초의 기쁨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본인도 이에 대해 “박수소리가 15분 동안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교향곡 7번은 그렇게 라이프치히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된 이후, 뮌헨과 빈에서도 연주되면서 브루크너에게 드디어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줍니다.
 
브루크너가 이 곡을 작곡했던 것은 1881년부터 1883년까지였지요. 한데 그는 자신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빈에서 초연하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라이프치히에서 초연할 것을 권한 인물은 제자이자 친구였던 요제프 샬크였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인물이 바로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쉬(1855~1922)입니다. 훗날 한스 폰 뷜로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을 죽을 때까지 이끌었던 지휘자이고, 20세기의 여러 지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지요. 헝가리 태생의 그는 1879년부터 라이프치히 오페라단을 지휘했는데, 바로 그 몇 해 뒤에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E장조를 초연했습니다.
 
교향곡 7번 E장조는 본격적으로 금관의 규모를 확장한 곡이지요. 바그너가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했던 금관악기 ‘바그너 튜바’를 네 대나 배치해놓고 있습니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애도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바그너 신봉자다운 태도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브루크너는 이후의 교향곡들, 즉 8번과 9번에서도 계속해서 이 악기를 사용해 바그너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1악장은 앞서 들은 교향곡 4번과 마찬가지로 현악기의 트레몰로로 시작해 첼로가 상승하는 선율을 노래하듯이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여기에 호른이 가세합니다. 일설에는 브루크너가 꿈에서 들었던 선율을 옮겨놓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두번째 주제는 좀더 생기 넘치는 리듬감을 보여주고, 세번째 주제에서는 금관의 팡파르가 두드러집니다. 2악장은 앞서 얘기한 대로 바그너를 향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악장이지요. ‘매우 엄숙하고 아주 느리게’라는 지시가 붙어 있습니다. 바그너 튜바와 비올라가 함께 연주하는 애절한 멜로디에 귀를 기울여 보기 바랍니다. 연주시간 20분이 넘는 긴 악장입니다.

 

3악장은 빠른 템포의 스케르초 악장입니다. 첫머리부터 등장하는 독특한 리듬형을 몸으로 기억하면서 음악의 진행을 따라가면 됩니다. 중간부(트리오)에서 부드럽고 목가적인 선율이 등장했다가 앞에서의 리듬형이 다시 나타납니다. 마지막 4악장은 바이올린의 트레몰로에 이어서 1악장에 등장했던 주제를 리드미컬하게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일반적인 소나타 형식과 상당히 다른 전개방식을 보여주는, 어찌 보면 약간 혼란스러운 악장이기도 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금관의 활약이 점차 두드러지면서, 웅장하면서도 긍정적인 분위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다가 종결부에 이르러 처음의 주제가 다시 상승하는 음형으로 펼쳐지다가 힘차고 강렬하게 마침표를 찍지요.

 

p.s. 본문에서 언급한 오이겐 요훔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는 추천음반 리스트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국내 매장에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훔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두 차례에 걸쳐 녹음했습니다. 앞에서도 썼듯이 브루크너에 매진했던 지휘자입니다. 기회가 되면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카라얀▶카라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89년/DG


카라얀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지휘자다. 나치 시절의 정치적 행적을 물론이거니와, 20세기 중후반에 매체와 음반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카라얀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애호가들은 여전히 적지 않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빈 필하모닉을 이끌고 녹음했던 브루크너 7번은 피해 가기 어렵다. 한마디로 치밀하고 탐미적인 연주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과도 같은 곡을 녹음해 음반(1975년)으로 남겼지만, 빈 필하모닉과의 연주가 한 수 위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빈 필하모닉의 음색은 베를린 필하모닉에 비해 역시 좀더 밝다. 카라얀이 브루크너의 음악에 어느 정도로 정통한 지휘자인지를 잘 보여주는 연주다.

 

 

 

브루크너▶세르쥬 첼리비다케, 뮌헨 필하모닉/1994년/EMI


인터넷 동영상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연주다. 생전의 첼리비다케(1912~1996)는 녹음을 별로 탐탁찮게 여겼던 까닭에 남겨놓은 음반이 그다지 많지 않다. 카라얀에 비하자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1994년의 브루크너 7번 연주를 실황으로 담아낸 음반이 한층 가치를 지닌다. 이듬해에 녹음한 9번과 더불어 첼리비다케의 중요한 브루크너 녹음으로 남아 있다. 1979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했던 뮌헨 필하모닉 단원들과의 이심전심이 느껴지는 연주다. 악보의 이면에 담긴 어떤 명상을 탐구하는 듯한, 느릿한 템포의 해석을 들려준다. 브루크너의 종교음악을 대표하는 걸작 <테 데움>이 함께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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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음악 페스티벌 가이드, 골라가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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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8월이면 본격적인 페스티벌 시즌이다. 다양한 행사 중에서 이즘은 다섯 개의 페스티벌을 골랐다. 고민하는 음악 팬들을 위해 준비했다. 2014년 국내 페스티벌 가이드, 이제는 준비해야 할 때!! 준비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길 바란다.

 

< 다섯 페스티벌의 날짜, 가격, 위치 >

 

-날짜

 

페스티벌 

 

 

※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은 29일과 30일의 오후 3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진행된다.

 

-가격

 

페스티벌

1일

2일

3일

펜타포트

104,500원

146,300원

177,650원

 시티 브레이크

165,000원 

255,000원 

 

 슈퍼 소닉

165,000원 

 

 

AIA NOW 

126,000원 

185,000원 

 

WDF 

75,000원 

105,000원 

 

 

※모두 오늘(7/13), 공식 홈페이지에 기재되어있는 일반 정가로 할인을 적용하지 않은 가격이다. 각 페스티벌의 가격대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표로 만들었다. 할인이나, 티켓의 종류와 같이 자세한 사항은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 바란다.

 

 

-위치

 

페스티벌


< 다섯 페스티벌의 특성 >


※순서는 일정순이다.

 

페스티벌

 

-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2014

 

함께 즐길 사람 : (대학생의 경우) 동반 1인 까지 20% 할인이 가능한 인천소재 대학교 재학생. 인천시민의 경우는 본인만 20% 할인이 가능하므로, 대학생이 아니라면 인천 친구에게는 기대하지 말 것.

 

예상 떼창곡 : (헤드라이너 기준) 이승환 -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화양연화」 / Kasabian - 「Fire」, 「L.S.F」 / Travis - 「Sing」,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꼴불견 : 슬램존 근처에서 꼭 안고 애정행각을 나누는 커플들. 그러다 큰일 난다.

 

기대해 볼 만한 명장면 : 떼창과 별개의 이야기를 하자면, (언제나 그렇듯) 빗속에서 마시는 맥주. 마셔도 마셔도 맥주가 줄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페스티벌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 상당한 확률로 비가 내린다. 일기예보 체크는 필수다.

 

주목해야 할 부분 : 국내의 어떤 음악축제보다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는 페스티벌이 바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다. 때문에 화장실이나 교통편 지원 등의 편의적 측면에서, 그리고 기상 여건이나 기타 유사 상황에 따른 대응적 측면에서 운영이 원활함을 몸소 체감할 수 있다. 타임테이블도 거의 정확하게 지켜지는 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올해의 유일한 ‘야외형’ 음악축제라는 사실. 더 할 말이 있나. 가서 즐겨라.

 

여인협(lunarianih@naver.com)

 

 

페스티벌


-현대카드 CityBreak 2014

 

함께 즐길 사람 :페스티벌을 즐기고 싶지만 도심지에 있어 인천까지 가기엔 너무 먼 사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즐기는 것보다는, 짧은 동선 안에서 음식도 먹고 음악도 듣고 술도 마시고 싶은 사람. 관중들과 뒤엉켜 슬램을 하기보다는 적당히 콩콩 뛰어다니며 어깨정도 들썩이고 싶은 사람. 무엇보다 철퍽철퍽한 진흙이 싫은 사람.

 

안 간다는 녀석들의 이유 혹은 변명 : 마룬 파이브랑 싸이라니. 록은 죽었어. 적어도 시티브레이크 안에선.

 

내 왼손에 :현대카드 오른손에는 : 티머니카드

 

주목해야 할 부분 : 작년 첫선을 보인 시티브레이크. 좋은 라인업과 쾌적한 운영, 접근성 등의 이점으로 단숨에 도심형 페스티벌의 다크호스로 등극했다. 다소 헤드라이너에 치우친 출연진과 모든 걸 자본으로 해결하려는 대기업 특유의 운영방식은 감점요인. 음악을 즐길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은 좋지만 문화산업마저 대자본에 매몰되는가하는 씁쓸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현금을 반드시 티머니에 충전해 사용해야 하는 방식 또한 불편함을 야기했었다.   

 

일단 타임테이블을 보면, 메탈리카와 뮤즈를 헤드라이너로 세웠던 작년에 비해 조금은 힘이 달린다는 느낌이 강하다. 다만 그것은 골수 록 팬들에 한정된 이야기일 터. 한국이 사랑하는 밴드, 마룬 파이브의 출연으로 대중성 하나는 확실히 확보한 셈이 되었다. 여기에 헤비메탈의 시조 오지 오스본이 가세하며 전설과 아이콘이 하루 차이를 두고 같은 무대에 서는 진풍경이 펼쳐질 예정이다. 여기에 월드스타 싸이의 '내한'은 보너스. 그 밖에 넬, 이적이나 후바스탱크와 루페 피아스코 등 강성 록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채의 라인업으로 마니아와 라이트 팬 이 두마리 토끼를 다 잡아보려는 야심이 돋보인다.

 

헤드라이너도 그렇고 출연 아티스트 목록을 보니 토요일과 일요일의 분위기가 굉장히 다를 것이라 예상된다. 진짜 몸 부대끼면서 확실히 놀고 싶다면 첫째날을, 월요일을 앞둔 상황에서 무리하고 싶지 않다면 두번째 날을 택하는 것이 좋을 듯. 잠실 주경기장에서 서울 월드컵 경기장으로 장소를 옮겼지만, 작년을 비추어보자면 운영상의 큰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굳이 누가 나오는지 신경 안쓰는데 음악은 즐기고 싶고, 멀리 나가기 귀찮은 이들이라면 시티브레이크가 최적의 선택이 될 듯 하다.

 

기대해 볼 만한 명장면 : 우선, 블랙 사바스의 「Iron man」 리프 떼창. 많은 이들이 '아 그게 이 사람 노래였어?' 할 공산이 크다. 하지만 나는 5만명이 함께 하는 「강남 스타일」의 말춤이 가장 장관을 이루리라 본다. 빌보드 2위곡과 함께 다그닥다그닥. 케이리그 팬들이 잔디 망가진다고 우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린다. 아, 3~4시간 전부터 펜스를 선점하고 있을 마룬 파이브 팬들도 예상되는 베스트 컷. 리치 샘보라가 은연중에 혜택을 볼 듯 하다.  

 

후유증 : 끝나고 나면 '아 돈이면 다 되는구나' 싶어 헛헛할 것이다.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페스티벌


-Super Sonic 2014


2012년 ‘본격 도심형 뮤직 페스티벌’을 표방하며 등장한 슈퍼소닉 페스티벌. 좋은 접근성과 신구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라인업으로 페스티벌계의 은근한 신흥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허나 올해 슈퍼소닉 페스티벌은 지난 두 번의 페스티벌 진행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장소가 올림픽공원이 아닌 잠실 종합 운동장으로 변경되어 넓은 공간을 확보하였고 이틀에 걸쳐 진행되던 공연도 8월 14일 목요일 단 하루로 축소되었다. 당연히 페스티벌 라인업도 예년에 비하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 하지만 전설의 밴드 퀸(Queen)을 소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슈퍼소닉 페스티벌의 가치는 충분하다. 여기에 잘나가는 신예 밴드 The 1975, 어 그레이트 빅 월드(A Great Big World)를 더했으며 한국 밴드 최초로 글래스톤버리(Glastonbury) 무대를 장식한 술탄 오브 더 디스코까지 어우러진다.

 

함께 즐길 사람 : 퀸 음악에 미쳐있다 / 영미 인디 록 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 / 붕가붕가레코드의 광팬

 

기대해 볼 만한 명장면 :'Mama~ 우우우우~’ 이 땅에서 처음 울려 퍼지는 「Bohemian Rhapsody」. 비록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아무렴 어떠랴.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 그리고 열심히 하는 아담 램버트(Adam Lambert)와 함께 다시는 없을지도 모르는 그 순간을 즐기면 된다.

 

주목해야 할 부분 : 지방으로의 불편한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일부 페스티벌과는 달리 도심형 페스티벌을 지향하는 슈퍼소닉 페스티벌의 접근성은 최고 수준이다. 지하철 2호선 8호선만으로도, 강남 피플이라면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최적의 조건. 단 접근하기가 착하다고 해서 가격까지 착한 것은 아니다. 또 전 좌석이 스탠딩석이라는 것 또한 참고해야 할 점.

 

안 간다는 녀석들의 이유 혹은 변명 :모든 슈퍼소닉은 퀸으로 통한다. 퀸 하면 프레디 머큐리다. 프레디 머큐리가 없는 퀸은 퀸이 아니다. 퀸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년에 비해 확실히 즐길 거리가 줄었다. 존 레전드(John Legend),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 펫 숍 보이즈(Pet Shop Boys)가 왔던 것이 불과 1년 전이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라인업은 다소 맥 빠지는 게 사실.

 

김도헌(zener1218@gmail.com)

 

 

페스티벌
-AIA Real Life: Now Festival 2014


기대해 볼 만한 명장면 : 레이디 가가의 새로운 컨셉, 어떤 미디어에서도 볼 수 없었던 YG패밀리의 라이브 퍼레이드. 이를테면 싸이의 「행오버」 라이브와 빅뱅의 완전체 라이브.

 

함께 즐길 사람 :빅뱅과 레이디가가가 보고 싶은 사람 (가격으로 따져도 단독공연보다는 훨씬 저렴하다.) 실내공연이나 미디어에서만 주로 만날 수 있었던 와이지 패밀리 가수들을 보며 잔디밭 위에서 뛰어놀고 싶은 사람. 광복절을 공연으로 만끽하고 싶은 사람.

 

안 간다는 녀석들의 이유 혹은 변명 :가느냐 마느냐 그것은 개인의 취향! 나는 와이지도 싫고 레이디가가도 싫다면 끝.

 

내 왼손에 : 왕관모양의 빅뱅 응원봉, 여름의 정점 속에서 내 피부를 보호할 UV제품들오른손에는 : 지하철과 버스 끊길 때를 대비한 차비

 

주목해야 할 부분 :한 공간에서 레이디가가와 위너의 팬이 만났을 때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취향의 갭이 큰 다양한 종류의 팬들을 어떻게 만족시키고 포괄할 것인가가 숙제.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투정을 몇 가지 하자면 아무리 처음 열리는 거지만 타이틀이 너무 어렵고, 홈페이지 서비스는 아예 없고, 페이스북은 뜸하다. 시간 부족인가? 인력 부족인가? 아니면 티켓 파워에 대한 자신감인가? 

 

후유증 : 다른 페스티벌과 비교한다면 라인업의 빈약,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것이다.

 

김반야 (10_ban@naver.com)

 

페스티벌 페스티벌

페스티벌 페스티벌 


-World DJ Festival 2014

 

함께 즐길 사람 :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20대 초중반, 어른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요즘 애들’. 록을 좋아한다면 펜타포트로 가면 된다. EDM과 힙합이라면, 여기다. 

 

안 간다는 녀석들의 이유 혹은 변명 : “굳이 거기까지 가서 고생하기 싫다.” 맞는 말이다. 서울 안에도 힙합 공연과 일렉 클럽이 넘쳐나는데 기어이 갈 필요는 없다. 오후 3시부터 새벽 6시까지, 밤을 새는 페스티벌이기 때문에 체력이 중요한 조건이다.

 

내 오른손에는 : 국적조차 알 수 없는 외국인다리는 :흙탕물 범벅

 

이 페스티벌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4년 연속으로 비가 왔다. (때문인지 진행이 미흡한 부분도 있었다.) 이번엔 8월에 열리지만 방심할 수 없다. 우산 혹은 우비를 챙기기 바란다. 새벽 추위에 시달린 관객도 많았다고 하니, 짧게 발만 담갔다 갈 거 아니면 여벌옷은 필수. 서울 밖에서 치러지는 행사기에 올 때 갈 때가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행버스도 있다고 하니 한 번쯤은 확인해보자.

 

주목해야 할 부분 : 우리나라 브랜드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은 항상 치열했다.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이 이벤트 부스, 월디페 홈페이지에서도 참여를 유도한다. 함께 호흡하자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무대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잔재미들이 숨어있다. 단순히 공연만 보는 페스티벌이 아니다. 만족도는 뮤지션이 아니라 본인에게 달려있다.   

 

전민석(lego93@naver.com)


BONUS-집안 페스티벌 ( Feat. YouTube )

 

함께 즐길 사람 :좋아하는 장르나 뮤지션이 같다면 상관없다. 혼자여도 OK, 눈치 보이지 않는다.

 

기대해 볼 만한 명장면 : 직접 갔을 경우 부감하기 어려운데, 영상으로는 수 천, 수 만 명의 에너지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내 오른손에 : 무한한 맥주 왼손은 : 편한 반바지 안에

 

후유증 : 후유증은 없다. 대신 추억과 진한 감동도 포기해야 한다.

 

안 간다는 녀석들의 이유 혹은 변명 :집안 페스티벌이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는 그들의 대안이다. 부족한 돈과 시간 혹은 좋아하는 뮤지션의 부재가 주된 이유다. 서른이 넘어가면 예전 같지 않은 체력도 무시할 수 없다. 앞서 말한 조건들을 만족하는 동시에 같은 페스티벌에 가고 싶어 하는 친구 찾기도 어렵다.

 

주목해야 할 부분 :완벽히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마냥 구린 발상도 아니다. 요즘 녹화는 물론이고 중계를 해주는 페스티벌이 많다. 연초 아침에 그래미 보듯 관람, 감상하면 된다. 라이브가 아니라면 가능성은 무한해진다. 라인업과 타임테이블을 본인이 결정할 수 있다. 해외는 물론 하늘나라에 있는 뮤지션들을 부활시킬 수도 있다. 극단적인 예로 아침 9시에 공연 예정인 헤드라이너, 소녀시대를 위해 오프닝으로 엘비스를 세울 수 있다. 원한다면. 모니터 대신 TV를 사용한다. 불은 끄고 에어컨을 튼다. 치킨과 맥주, 비슷한 음악 취향을 가진 친구와 함께한다면 이것도 훌륭한 휴가 나기의 일종이다.

 

전민석(lego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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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음악을 잘 들었다고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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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웨이커스

밴드 스카 웨이커스

 

스카 웨이커스라는 밴드가 있다. 올해로 활동한지 8년이 되는 밴드다. 레게를 기반으로 스카, 보사노바, 아프로 비트를 구현하는 팀인데, 이들에게는 사운드만큼 가사도 중요하다. 이른바 메시지가 있는 음악이다. 그래서 이들의 음악을 들을 때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21곡이 수록된 최근 앨범<Riddim Of Revolt>는 곡의 양만큼 거기에 담긴 이야기도 다채롭다. 하지만 각각의 노래가 의미하는 바는 은유적이라기보다는 직설적이고, 그래서 취향이 갈릴 여지가 많다.

 

무엇이 직설적인가. 「우린 모두 다 알지」의 가사를 옮겨보자. “지금도 전 세계에선 전쟁을 하고 있어 / 레바논에도 가자지구에도 버마에도 이 땅에도 / 모두가 알고 있어 저들이 전쟁을 일으킨다는 걸 / 하지만 모두들 자기완 상관없다하네” “그래 우린 모두 다 알지 / 모든 전쟁은 자본의 논리라는 걸 / 미친 자본가의 욕망 속에서 / 우린 죽어간다는 걸 / 그래 우린 모두 다 알지 / 결국 사회구조를 바꿔야만 한다는 걸 / 온 민중이 대항해 / 혁명을”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 없는 노랫말이다. 하필이면 이 노래를 듣는 중에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투하한 백린탄에 사망한 아이들의 사진과 기사가 보였다. 이 뉴스와 이 가사, 그러니까 ‘민중’과 ‘혁명’이 등장하는 대중음악의 임팩트가 남다르다.

 

‘인간 해방’과 ‘자유에의 의지’를 겨눈다


스카 웨이커스의<Riddim Of Revolt>를 더 잘 이해하려면 약간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일단 ‘리딤’의 의미부터 보자. 리딤은 ‘리듬’을 자메이카 식으로 부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레게 리듬 그 자체, 특히 자메이카의 정신이 깃든 리듬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자메이카의 정신은 무엇일까. 그걸 이해하려면 ‘라스타파리아니즘’을 살펴야 한다.

 

자메이카는 한때 노예무역의 중심지였고, 약 300여 년 간 식민 지배를 받은 땅이다. 그래서 자메이카 인들은 서인도 제도에 있음에도 아프리카 대륙을 어머니의 땅으로 여겼다. 이를 배경으로 등장한 라스타파리아니즘은 토속신앙과 기독교가 혼합된 종교로 에티오피아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본명인 라스 타파리 마콘넨에서 유래했다. 성경을 흑인의 관점으로 해석해서 예수가 흑인이고,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재림한 예수라고 믿는다. 이를 토대로 흑인의 정신적 해방과 범아프리카주의를 제창하는데, 특히 밥 말리의 레게를 통해 공동체주의를 설파했다. 춤추기 좋은 레게에 종종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메시지가 담긴 건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라스타파리아니즘의상징유다의사자

라스타파리아니즘의상징 - 유다의 사자

 

스카 웨이커스의 음악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다. 데뷔하고 8년 동안 자메이카 레게를 음악뿐 아니라 문화와 정신에서도 계승하기 위해 애썼다. 요컨대 한국에서 레게를 한다는 건 무엇인가. 이 앨범은 그 질문의 대답인 셈이다. 강한 메시지가 담기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스카 웨이커스의 음악은 소위 ‘좌파적’인 것보다 더 보편적이고 광의의 ‘인간 해방’과 ‘자유에의 의지’를 겨눈다. 두 장의 앨범에 담긴 21곡에는 물론 상대적으로 가볍고 일상적인 이야기도 있는데, 아무래도 나로선 더 분명하고 또렷한 노랫말에 주목하게 된다. 앨범의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리딤’과 ‘메시지’를 모두 충족시키며 우리를 설득하는데에는 대체로 성공하지만, 이 앨범의 일정 부분은 깔끔하게 빗나가기도 한다. 아무래도 욕심이 지나쳤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의 무게가 남다른 건 부정할 수 없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스카 웨이커스의 음악이 던지는 메시지는, 현재 한국이란 공동체에 절실한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음악은 바로 이 메시지 덕분에 좀 더 적극적인, 입체적인 위치에 놓이는 것 같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보통 ‘감상자’가 되고 대체로 거기에 만족한다. 취향에 따라 좋은 음악을 골라 듣고 그것을 반복하면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음악은 우리가 좀 더 적극적이 되라고 요구한다. 그러니까, 다시 메시지. 이것은 일종의 요청이다. 우리가 잊고 있거나 보지 못했거나 아예 몰랐던 것들을 눈앞에 들이민다. 폭로의 정치란 점에서 은유가 굳이 필요 없는 것이다. 대신 손을 들어 그것을 가리켜 직관을 자극한다. 이 앨범은 듣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다. 뭔가 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이 음악을 듣는 것은 그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이 앨범을 듣고 우리는 똑같이 감상자의 위치에 머물 수 있을까. 메시지를 이해하고 사실과 진실이 무엇인지 찾아봐야 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게 바로 ‘깨어남’이 아닐까. 그때 이 앨범은 일종의 각성제다. 따라서 앨범의 노래가 끝나면 바로 다음 질문이 메아리처럼 돌아온다. “이 앨범을 잘 들었다고 하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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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스메타나, 체코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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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음악가로 누가 떠오르시는지요? 아마 안톤 드보르작(1841~1904)이 제일 먼저 생각날 겁니다. 이어서 베드르지히 스메타나가 떠오르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드보르작보다 17년 연상의 음악가입니다. 국제적 명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드보르작보다 조금 덜 알려진 사람이지요. 지금도 그렇고 당대에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체코의 민족음악’이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드보르작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민족적인 색채를 보여줬던 음악가입니다.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피아니스트, 지휘자, 비평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순수하게 체코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창조한 사람”이라고 자평하기까지 했지요. 물론 음악적 권위가 공고하지 못했던 젊은 시절에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스메타나는 188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자신을 체코 민족음악(국민음악)의 창시자로 스스로 일컬었던 것은 거의 만년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까지도 거부감 없이 인정되고 있는 스메타나 음악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드보르작은 함부르크 태생의 음악가 브람스에게 인간적으로나 음악적으로 깊이 경도돼 있었지요.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위를 계승한 것이 1848년, 그의 나이 18세였을 때였습니다. 한데 그가 단지 독일,오스트리아의 황제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지요. 오늘날의 헝가리와 체코의 전부, 또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폴란드, 러시아의 일부까지도 그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체코는 독일,오스트리아와 문화적 유대감 이상의 거의 일체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 체코는 크게 두 지역으로, 서쪽의 보헤미아와 동쪽의 모라비아로 나뉘는데요, 이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약 70%의 체코인과 30%의 독일인이 함께 살았습니다. 공식 언어는 당연히 독일어였지요. 황제 요제프가 지배했으니까요. 하지만 일상적 삶에서는 체코어가 끈질기게 이어졌을 겁니다.

 

스메타나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1824년 3월 2일 - 1884년 5월 12일)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체코 출신의 음악가 드보르작은 독일,오스트리아를 바라보면서 음악을 했습니다. 물론 어린 시절에 이미 형성된 토속성이나 민족적 선율 같은 것들은 그의 음악에서도 여전히 느껴지지요.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반면에 스메타나는 보다 의식적으로 체코의 민족음악을 건설하려는 목표를 지녔던 음악가라고 해야겠습니다. 물론 그도 거의 평생토록 리스트를 존경했을 뿐 아니라 바그너를 흠모해서 그의 스타일을 자신의 오페라 속으로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 덕분에 한때는 체코의 민족음악을 추구하던 그룹 안에서 “배신자” 소리를 듣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부분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스메타나는 오늘까지도 체코 민족음악(국민음악)의 아버지라는 상징적 권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마 그 결정적 계기는 1866년에 있었던 오페라 <팔려간 신부>의 초연일 겁니다. 그 해에 체코 국립극장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가설극장(임시극장)에서 공연된 오페라 <팔려간 신부>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체코어로 체코의 이야기와 정서를 담아낸 이 오페라는 지금까지도 체코 오페라의 정수로 평가받습니다. 그래서 1866년은 스메타나가 민족음악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진 해였다고 할 수 있지요. 참, 스메타나는 당시 가설극장의 상임지휘자이기도 했는데요, 30명가량의 단원들로 이뤄진 오케스트라에는 20대 초반의 드보르작도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의 드보르작은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를 연주했지요. 그러니까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은 한때 날마다 얼굴을 맞대는 사이였습니다.

 

스메타나는 1824년 체코 보헤미아 북쪽의 리토미슐에서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마을에서 맥주 양조장을 했습니다. 위로 딸을 일곱이나 낳고는 마지막으로 얻은 아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체코의 음악가 스메타나였습니다. 아버지는 생업으로 양조업을 택했지만 지역의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지요. 덕분에 스메타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음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열여섯 살 썼던 일기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네 살이 됐을 때 아버지가 리듬을 가르쳐주셨다. 다섯 살에 학교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다. 일곱 살 때는 오페라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의 전주곡을 연주했다.”(*인용문에 등장하는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는 다니엘 오베르(Daniel Auber, 1782~1871)가 작곡한 프랑스 오페라.)

 

그렇게 음악에 첫발을 들여놓았던 스메타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열아홉 살에 프라하로 갑니다. “리스트 같은 연주자,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채였지요. 그는 프라하에서 어느 백작의 집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요제프 프로크슈(Josef Proksch, 1794~1864)에게 음악을 배웠습니다. 맹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그는 스메타나에게 바흐와 베토벤에서부터 쇼팽과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가르쳤다고 하지요. 그 3년 동안의 수업은 스메타나가 받은 가장 중요한 음악교육이었습니다.

 

이어서 스메타나는 유럽 전역을 휘몰아쳤던 1848년 혁명의 열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아마도 그는 기질적으로 뜨거운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스물네 살의 혈기 방장한 청년이었습니다. 제가 앞서 연재한 칼럼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1948년에 유럽 곳곳에서 벌어졌던 시민 혁명은 보수 반동적인 빈체제에 대항하는 봉기였지요. 빈체제는 1814~15년 빈회의 이후에 성립된 체제, 철혈재상으로 불린 메테르니히의 이름을 따서 ‘메테르니히 체제’로도 불립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반대 급부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빈체제의 수호자들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보수 반동에 대한 반발이 바로 1848년 혁명이었고, 청년 스메타나는 그 혁명의 열기를 한복판에서 겪으면서 ‘보헤미아 민족주의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물론 이후의 행적에서 그가 남기는 약간의 의혹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이 무렵부터 스메타나는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에 눈을 떴고 그것은 당대의 역사적 흐름이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런 경향을 대표하는 음악이 앞서 말한 희극 오페라 <팔려간 신부>, 그리고 오늘 듣는 교향시<나의 조국>입니다.제목에서부터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확연히 느껴지는<나의 조국>은 모두 6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향시 연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시인 황지우의 시 ‘활엽수림’에는 ‘스메타나, 몰다우강(江) 쏟아지는 학림(學林)다방, 목(木)계단에 오줌을 갈기거나’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그 몰다우강은 이 교향시의 두 번째 곡입니다. 아마도 스메타나가 남긴 모든 음악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리스트의 교향시 <전주곡>을 설명하면서, 교향시란 간단히 말해 ‘관현악으로 한 편의 시를 쓰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리스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음악가인 스메타나도 6곡의 교향시를 썼고 그것을 하나의 연작으로 남겼습니다. 50세였던 1874년부터 6년에 걸쳐 작곡한 대작입니다.

 

자, 이 무렵이 되면 스메타나는 체코의 국민음악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구가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우울하고 병든 상태였습니다. 사실 그의 개인사는 불행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수년간의 구애 끝에 1849년 결혼했던 아내 카테리나 콜라르로바와의 사이에서 딸을 넷 낳았는데 그중 셋이 어려서 죽습니다. 큰 딸 베드리지슈카의 죽음을 슬퍼하며 작곡한 음악이 바로 ‘피아노 3중주 g단조’이지요. 게다가 아내가 1859년에 폐병으로 사망합니다. 그녀의 얼굴은 사진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매우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스메타나는 첫번째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16세 연하의 여인 베티나 페르디난도바와 결혼하지만 두 사람은 그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스메타나는 귀까지 멀고 맙니다. 그가 남긴 글에 따르면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고 귀에서는 윙윙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심각한 뇌경색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현기증이 나고 가끔 말투도 어눌했다고 합니다. 물론 청각장애는 그의 오래된 지병이긴 했지만, 급기야 1874년 10월부터는 완전히 듣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 이른 그는 체코 국립극장의 지휘자를 사임하고 카테리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중에서 유일하게 세상에 살아 있는 조피를 찾아 갑니다.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60km쯤 떨어진 야브케니체(Jabkenice)라는 마을이었지요. 조피의 남편, 그러니까 스메타나의 사위인 요제프 슈바르츠가 그 지역의 삼림 관리인이었다고 합니다. 스메타나는 그 숲 속의 작은 단층집에서 거의 은둔하다시피 합니다.

 

<나의 조국>은 바로 그곳에서 완성된 음악이지요. 1곡 ‘비셰흐라트’(Vysehrad)는 몰다우 강변의 성(城) 비셰흐라트의 위풍당당함과 그 곳에 담긴 역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프가 연주하는 네 개의 하강음을 모티브로 삼고 있지요. 2곡은 바로 그 유명한 ‘몰다우강’입니다. 체코어로는 블타바(Vltava) 강이라고 하지요. 몰다우강의 시원과 흐름을 묘사하고 있는 음악입니다. 이 강은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져 하나의 강을 이룬다고 하는데, 플룻이 시원이 되는 샘물을, 이어서 클라리넷이 또 하나의 물줄기를 묘사합니다. 이 두 개의 물이 합류해 도도한 흐름을 이룹니다. 숲과 축제의 들판, 전설 속의 요정들이 펼치는 달빛 아래의 춤, 급박하게 요동치는 급류를 지나 1곡에서 묘사했던 바셰흐라트의 성에 마침내 도달하지요. 작은 샘물에서 시작해서 점차 장대하게 굽이치며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곡 ‘샤르카’(Sarka)는 체코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여전사 샤르카, 남자들에게 잔혹한 복수를 펼치는 그녀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놓고 있습니다. 4곡 ‘보헤미아의 숲과 초원에서’는 아름다운 보헤미아의 풍광을 묘사하는 음악이지요. 5곡 ‘타보르’(Tabor)는 15세기 초반 후스 교도들의 종교적 저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 후스는 체코인들의 영웅이고, 민족주의 운동 시기였던 19세기 중반에도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곡의 제목인 보헤미아 남쪽의 ‘타보르’는 후스 교도들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6곡은 ‘블라니크’(Blanik)인데, 이것도 역시 지명입니다. 후스 교도의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지요. 역사의 영웅들이 부활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향시 연작<나의 조국>은 풍경과 역사가 어울린 전형적인 민족주의 서사를 펼쳐놓고 있습니다.
 
스메타나는 귀가 안 들리던 시기에 이처럼 장대한 민족적 서사시를 썼습니다. 아울러 기억할 것이 또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썼던 현악 4중주 <나의 생애로부터>는 순전히 개인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는, 슬픔과 회상의 자서전과도 같은 음악입니다. 이 곡도 꼭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스메타나는 1884년에 정신착란을 일으켜 같은 해 4월에 프라하의 한 병원에 입원했고 5월 1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쿠벨릭-보스톤심포니▶라파엘 쿠벨릭, 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1971년/DG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선택받는 음반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얀 쿠벨릭의 아들인 라파엘 쿠벨릭(1914~1996)은 서구적 세련미를 체코의 음악에 융합했다는 평을 듣는다. 체코 필하모닉의 지휘자였던 그는 1948년 서방에 진출해 자국의 음악을 널리 알렸다. 말러의 음악에서도 빼어난 녹음들을 남기고 있다. 보헤미아적 토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체코의 옛 명장인 바츨라프 탈리히, 카를 안체를 등의 이름이 먼저 떠오를 수도 있겠다. 이에 비한다면 쿠벨릭은 보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음색, 정교한 연주를 들려준다. 1990년 ‘프라하의 봄’ 축제에서 체코 필하모닉을 지휘한 실황(Sup)은 음반보다는 영상으로 접하는 것이 좋겠다.

 

 

 

바츨라프-노이만▶바츨라프노이만, 체코필하모닉오케스트라/1975년/Sup


쿠벨릭에 비하자면 좀더 흙냄새가 나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이 녹음은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 9번과 더불어 프라하 출신의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1920~1995)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바츨라프 탈리히의 제자인 그는 1948년부터, 그러니까 쿠벨릭이 서방으로 망명한 이후부터 체코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지휘봉을 들었다. <나의 조국>에서 그의 지휘는 섬세함보다는 역동성 쪽에 방점을 찍고 있다. 약간의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체코 필하모닉의 연주는 시원하게 가슴이 뚫리는 느낌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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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추억의 대학가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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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50대 후반인 한 사업가는 말한다. “오늘날의 MBC를 MBC답게 만든 것은 '대학가요제'다. 모두가 숨죽이던 군사정부 시절, MBC가 기획한 대학가요제는 신선한 충격과 도발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 MBC는 시대를 앞서가는 방송사라는 환상을 우리 세대에게 심어줬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대학가요제에 채무가 있는 사람들이고 MBC는 우리에게 빚진 방송사라고 생각한다.” 그는 MBC 대학가요제가 열리던 그해 대학에 입학한 인물이다. 유서 깊은 그 '77학번'이다. 그의 주장은 “대학가요제를 폐지함에 있어서 시청률이다, 트렌드의 변화다 하는 이유는 궁색하다. 방송사가 자신을 먹여 살리고 키워준 고마운 프로에다 역사성 자체인 자사 프로그램 하나 못 지킨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대학가요제의 폐지를 둘러싼 논란은 오래전부터 뜨거웠다. 엄연히 광고로 먹고사는 방송사 입장에서 제작비 투자에 대비해 광고와 시청률로 나타나는 실적이 저조할 경우 존속을 고집하기는 어렵다. 이런 고비용 저효율 상황은 1990년대 중반에 뚜렷하게 나타났고 IMF를 거쳐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는 숱한 폐지설로 직결되었다. MBC는 그래도 대학가요제라는 상징성 하나로 버텼다. 대학생 음악경연대회의 또 다른 산맥을 형성한 '강변가요제'가 2001년 22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 것과 비교하면 할 만큼은 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가요매니저와 일부 방송관계자들은 현저히 영향력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사가 연례행사를 계속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마침내 잠정 중단 발표가 나왔고 2013년 대학가요제는 열리지 않았다. 폐지라는 말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MBC가 폐지할 것으로 예단했다.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들 특히 수상자 출신 가수들과 출전을 준비해온 대학생들은 엄청나게 반발했다. 상기한 사업가를 포함해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후반 학번의 일반인들도 가세했다.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들은 서명운동까지 전개했고 10월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2013 대학가요제 포에버'라는 항의성 공연까지 열었다.

 

MBC는 한발 물러서 연말에 대학가요제의 부활을 약속하며 폐지결정을 번복했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 봐도 이건 무리라는 생각으로 꿍꿍 앓았을 것이다. 비용을 들여 방송국 아닌 바깥으로 나가 대학캠퍼스에서 오랫동안 행사를 강행해왔지만 2012년에는 상대적으로 조촐하게 일산 소재의 자사 방송센터에서 대학가요제를 개최했다. 결국 마지막이 된 이 행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됐을 때의 느낌은 “반드시 대학가요제를 살리겠다!”는 제작진의 넘치는 의욕이 무색하게도 “앞으로 어렵겠구나!”였다.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만 결국은 상업적, 경제적 논리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장구한 역사가 무서운 자본논리에 패한 셈이라고 할까. MBC는 몇 개월 후인 올해 6월말 공식적으로 폐지를 결정하면서 37년의 대학가요제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간의 논란에 조금은 숙달된 탓일까. 이번에 언론과 대중의 반응은 “아쉽다!”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로 비교적 차분하게 나타났다. 폐지설이 등장할 때마다 격하게 분출하던 반론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MBC는 “적절한 기회가 오면 새로운 트렌드와 참신한 형식의 가요제 기획을 모색하도록 하겠다”고 전했지만 수년간 가요제(오디션) 형식의 프로가 누린 열기가 빠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속한 시기에 대학가요제가 부활할 것 같지는 않다. 몇몇 음악관계자들은 설령 가요제형식이 돌아오더라도 대학생 중심의 기획은 되지 않을 것이라며 “대학가요제는 이제 끝!”이라고 단언한다. 프로그램이 설령 끝이더라도 추억은 끝일 수 없다. 대학가요제가 음악계와 문화 전반에 남긴 36년의 궤적은 워낙에 거대하기 때문에 대학가요제 세대라고 할 현재 40-50대(7080) 기성세대의 기억에서 쉽사리 퇴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대학가요제가 쏟아낸 엄청난 히트곡들과 더불어 젊은 시절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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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 우상들과 주옥같은 명곡들을 배출


우선 폭풍과도 같았던 1977년 1회 대학가요제의 대상 곡인 샌드페블스(서울대)의 「나 어떡해」를 잊을 수 없다. 젊음의 혈기와 아우성을 담은 이 노래는 1975년 대마초파동 이후 움츠린 청춘정서와 젊은이들의 음악인 록의 폭발을 되살리면서 기성의 틀에 묶여있던 음악계에 충격을 가했다. 때 마침 3형제 밴드인 '산울림'의 출현과 맞물리면서 록의 함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실제로 「나 어떡해」를 작곡한 인물이 산울림의 둘째인 김창훈이었다) 샌드페블스를 기폭제로 무수한 록 밴드들, 당시 표현으로 '그룹사운드'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왔다. 1회 대학가요제에서는 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 이스라엘 민요와 가곡 청산별곡을 혼합한 이명우의 「가시리」도 널리 애청되었다.배철수가 이끈 '활주로'(항공대)의 「탈춤」과 노사연(단국대)의 「돌고 돌아가는 길」이 기억되는 1978년 2회 대학가요제에서는 입상조차 하지 못한 심민경의 「그 때 그 사람」이 일대 주목을 받았다. 그는 록과 포크가 대세이던 시절 뜻밖에 트로트 곡을 들고 나와 수상자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음반취입의 기회가 주어졌다. 곧 그의 이름은 심수봉으로 바뀌었다.

 

대상이 발표되는 순간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며 뛰어나온 김학래가 임철우와 호흡을 맞춘 3회 1979년 대상곡 「내가」, 가장 대학가요제 음악답다는 평가를 받은 이범용 한명훈의 포크 록 「꿈의 대화」는 대학가요제가 배출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오랫동안 라디오 리퀘스트를 받은 1982년 대상 곡인 조정희(홍익공전)의 「참새와 허수아비」, 한편의 시를 방불케 한 '높은 음자리'(부산 동의대)의 1985년 대상 「바다에 누워」, 이듬해 그랑프리를 수상한 유열(한국외대)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1988년 대상을 탄 밴드 무한궤도(서강대, 연대, 서울대)의 「그대에게」도 주옥같은 노래들이다. 무한궤도의 리더였다 나중 솔로 활동을 전개한 신해철은 지금도 대학가요제 출전을 자신의 음악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모멘트로 꼽는다. 그가 들려주는 「그대에게」 관련 일화.

 

“한 번은 「그대에게」를 공연장에서 안 부르려고 했던 적이 있어요. 우려먹기 그만하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요. 그래서 한번은 앙코르에서 「그대에게」를 안 부르고 공연을 끝냈어요. 근데 그랬더니 관객들이 또 앙코르를 하더라고. 심지어 세 번이나 앵콜을 했어요. 그러다 지쳐서 '아.. 나도 집에는 가야겠다' 해서 「그대에게」를 불렀죠. 그렇게 앙코르를 외치던 사람들이 그제야 다 집에 가더라고요.”

 

비록 대상을 타지 못했어도 그 못지않게 사랑받은 곡들도 부지기수다. '마그마'(서울대 연세대)의 「해야」, 우순실(한양대)의 「잃어버린 우산」, 이정석(피어선 신학대)의 「첫 눈이 온다구요」가 대표적인 곡들이다. 이후 1993년 대상을 탄 남자듀엣 '전람회'(연세대)의 「꿈속에서」, 2005년 대상인 그룹 '익스'(경북대 대구대 영남대)의 「잘 부탁드립니다」, 2009년 그랑프리를 수상한 '이대 나온 여자'(이화여대)의 「군계무학」은 잠깐 주목을 받았지만 전국적 히트로 번지지는 못했다. 1990년대 들어서 대학가요제의 부진과 쇠퇴가 히트곡 부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전람회는 그러나 근래 영화 <건축학 개론>을 통해 재조명된 곡 「기억의 습작」을 히트시키면서 존재감이 비상했고 멤버 김동률은 솔로 활동을 통해 이 시대를 대표하는 톱 가수로 명성을 구가하고 있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이름은 얻은 가수는 그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심수봉, 노사연, 배철수, 김학래, 조하문, 유열, 이정석, 신해철은 대학가요제를 발판으로 기성음악계에 우뚝 선 면면들이다. 노사연의 한마디. “대학가요제가 없었다면 「만남」의 노사연, 지금의 노사연도 없다!”

 

히트곡과 인기가수가 무더기로 나왔다는 것은 신인가수의 등용문을 넘어 스타의 산실이 됐다는 얘기다. 이러니 가수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중고교 때부터 대학가요제를 벼르고 벼르는 것은 당연했다. 김학래는 언제가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솔직히 말하자면 오로지 대학가요제에 나가려고 대학에 가야 했지요. 하기 싫은 입시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대학가요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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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문화가 대항문화에서 대중문화로 변질


대회 입상이 삶의 절대적인 목표가 되고, 수상자들이 곧 청춘의 아이콘이었던 황홀한 전성기를 누렸던 대학가요제가 왜 1990년대 이후 영향력이 급속도로 약화된 것일까? 일각의 분석처럼 시대가 바뀌면서 '군사독재 시절 젊은이들의 아픔과 울분을 토해내는 해방구'의 역할을 하지 못해서일까? 분명 대학가요제의 노래는 간접적으로나마 대학생의 건강한 정서를 표출한 측면이 있다. 1981년 5회 대상곡인 정오차(한양대)의 「바윗돌」이 증명한다. '찬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하얀 눈 맞으며 아픔만 달래는 바윗돌/ 세상만사 야속 타고/주저앉아 있을쏘냐...' 정오차는 바윗돌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죽은 친구의 묘비를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이 곡은 얼마 후 방송과 판매가 전면 금지됐다.

 

그러나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 대학가요제의 대부분 출전 곡은 기성 노래와 별 다를 게 없이 꿈과 사랑, 이별 등의 감상적 기조를 노래했다. 검열이 있던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답답한 시대를 직시하고 아픈 현실을 드러내는 비판성향의 노래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대학가요제는 당대에 이미 “폭발하는 청춘정서의 부활이 아니라 단지 캠퍼스 낭만의 부활일 따름”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1979년 3회에 지극히 시적이고 감성적인 노래 「영랑과 강진」을 가지고 참가, 은상을 수상한 김종률(전남대)의 사례를 보자. 이듬해 터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일대 충격을 받은 김종률은 즉각 낭만과 작별하고 얼마 후 운동가요의 새 장을 연 기념비적인 곡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다. 대학가요제를 관통한 지배적 표현정서는 틀을 박차고 나오지 못한 채 일정 수위에 머물러 있었음을 반증한다.

 

차라리 대학문화의 성격 변화 측면에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군사독재시절인 1980년대까지 대학문화는 기성, 기존의 양식을 거부하며 새로움을 추구하는 일종의 '대항문화'의 성격을 지녔다. 여기서 캠퍼스 송들이 기성곡들과의 차별적 가치를 획득했다. 사회적 저항성을 담보하지는 않았더라도 정형화된 사고, 익히 알고 있던 접근, 설령 상업적 성공을 가져올지라도 진부한 스타일과는 대항했다. 하지만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선풍이 전국을 뒤집으면서 대중문화의 파괴력이 캠퍼스를 강타하게 되자 대학문화의 기반은 대항문화에서 '대중문화'로 빠르게 이동했다. 어른 지향의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판치던 시절에 초창기 대학가요제 참가자들은 밴드 록과 포크를 동원했던 반면 이 시기의 참가자들은 랩, 알앤비, 코믹 송, 일렉트로닉 등 주류를 점령한 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했다.

 

총학생회 주최의 행사나 대학축제에 출연한 가수들이 이전에는 대중가수 아닌 언더그라운드 계열의 음악가들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주류의 인기가수들로 채워졌다. TV스타들이 대학축제의 공간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1999년 한 유수의 대학에서 총학생회가 '올해 축제에서 가장 보고 싶은 가수'를 묻는 학내 설문조사를 실시했을 때 학생들이 꼽은 1위는 뜻밖에도 당시 최고인기의 걸 그룹인 에스이에스(SES)였다. 정태춘, 안치환, 윤도현밴드가 아니었다. 이러한 변화가 고스란히 대학가요제에 반영되었다. 초창기에 대중들의 호응을 만끽한 「나 어떡해」, 「탈

춤」,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바윗돌」, 「꿈의 대화」 등의 노래는 이전 주류 미디어에서 접하지 못했던 신선함으로 가득했다. 곡조가 그랬고 가사가 그랬고, 출전자들의 창법도 기성가수들과는 분리선을 그었다.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대학가요제의 노래는 정반대로 대중가수의 스타일을 닮아갔고 따라갔다. 대중적 흐름을 앞서가야 할 대학문화가 오히려 대중문화를 허겁지겁 뒤쫓는 배반의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달라야 할 대학생의 음악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인기곡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거기서 대학생만의 참신함과 순수를 얻기는 어렵다.

 

근래 들어 대학은 다시금 변화의 몸살을 앓고 있다. 대학의 현실은 취업의 높은 벽에 막혀 대항문화와 멀어졌고 대중문화에도 지친 채 학점, 과제, 스펙 쌓기에 내몰리고 있다. 요즘 대학생들의 이데올로기는 시대정신이 아니라 엄연히 취직이다. 일자리를 얻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학생들의 영혼을 잠식한 상황이다. 대학 캠퍼스를 향한 동경과 선망은 자취를 감췄다. 방송평론가 정덕현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과거 대학가요제가 대중들에게 주목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이라는 선망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런 지성인들이 벌이는 음악의 향연이라는 점이 어떤 특별한 정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을 보라. 대학이 과연 선망의 대상인가. 대학은 취업을 위한 치열한 전쟁터가 되어 있다. 대학이 사회의 변화에 선봉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도 이미 지나버렸다. 청춘의 도전과 낭만? 그런 게 지금 대학이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는가.”

 

심지어 대학가요제가 스타탄생의 산실로서의 위상을 구가하게 되자 어느 순간, 초창기와 달리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가요기획사에 소속되어 전문가의 지도 아래 면밀히 출연을 준비한 학생들도 있었다. 대학가요제가 기획사의 공략지로 전락했다고 할까. 소속사는커녕 연습설도 얻기 어려웠던 시절에 힘들여 만든 곡 하나 달랑 들고 나와 푸릇푸릇하고 영롱한 젊음의 스피릿으로 들이댄 순수 시대의 종막! 대학가요제의 자랑이던 청춘의 독립과 저돌성이 실종된 것이다. 대학가요제 출신의 선배 가수들은 무대 성격이 변질되어버린 것도 이미지 탈색의 요인으로 지적한다. 생생한 라이브만을 들려주던 경연장이 어느 순간에 미리 반주를 녹음해온, 이른바 MR 테이프를 틀고 노래하면서대학가요제의 지향이 훼손됐다는 것이다. 아마추어의 작품으로 비록 조야하고 서툴지언정 음악을 자기 손으로 철저히 관장한 일종의 청춘 자주(自主)가 흔들리면서 매력이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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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처럼 당대의 실력 있는 가수들이 대회에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노래든 춤이든 현재 미래를 꿈꾸며 실력을 쌓고 있는 인물은 상대적으로 확실한 성공을 기약해주는 큰 음악기획사로 가서 음원을 내놓으려고 하지 '미련하게' 대학가요제를 노리며 맹훈을 하지 않는다. SM이나 YG와 같은 거대 기획사에 재능아들이 몰려가고 있고 이 회사들의 신인육성 시스템은 견고하다. 이게 싫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는 음악지망생들은 인디 음악 쪽으로 선회, 서울 홍대와 신촌의 클럽 출연을 꿈꾼다. 대학가요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운데 낀 것도 아닌 어정쩡한 미약한 존재가 돼버렸다.

 

실력파 뮤지션 이한철의 행보는 초라해진 대학가요제의 위상을 단적으로 웅변한다. 1994년 영남대 대표였던 그는 「껍질을 깨고」라는 노래로 영예의 대상 트로피를 안았다. 단지 대학가요제에 참가하려고 대학을 간 그였다. 예전 같으면 대상수상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류 진입의 가능성을 확보했겠지만 비주류에 매료된 그는 거꾸로 인디 음악계로 자진 '내려'가는 용단을 취했다. 스스로도 비주류에서 주류로 점프한 「말달리자」의 크라잉넛과 반대의 길을 걸었음을 인정한다. 1999년에는 인디 밴드 '불독맨션'을 결성해 인디의 수확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2007년에는 「슈퍼스타」란 힐링 성향의 곡으로 한국대중음악상의 '올해의 노래' 부문을 수상하며 성가를 높였다. 이한철이 예시하는 바는 지금 시대는 대학가요제보다 차라리 인디 활동이 더 전망이 밝다는 것이다.

 

3-4년 가까이 TV매체를 장악한 오디션 프로 붐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선두주자가 된 유선방송 엠넷의 '슈퍼스타K'를 위시해 '위대한 탄생', '케이팝 스타' 등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오디션 프로는 과거 대학가요제가 그랬듯 단기간에 많은 톱 가수를 배출했다. 허각, 존박, 울랄라세션, 버스커버스커, 이하이, 정준영, 로이킴, 악동뮤지션이 모두 오디션프로를 통해 이름을 얻었다. 이리로 가야 가수로 성공할 수 있는데 굳이 대학가요제로 향할 이유가 없다. MBC도 보도자료를 통해 존속 유지가 힘든 이유 중 하나로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등장을 꼽았다.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로 이미 그로기상태였는데 오디션 프로의 범람과 득세로 대학가요제는 KO를 당했다.

 

사정이 이러한데 시청률과 트렌드 추수로 방송사의 초심이 바뀌었다며 존속을 요구하는 것은 MBC 입장에서는 너무나 부담스럽고 가혹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수년전에 없어져야 할 대학가요제가 이제야 폐지됐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다. 대학가요제와 같이 역사성을 지닌 프로그램의 경우 인기, 시청률, 제작비, 광고매출 등 여러 가지가 불리해도 분명한 한 가지를 잡고 있다면, 예를 들면 EBS의 '스페이스 공감- 헬로 루키'처럼 음악계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존속의 가능성을 담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없다.

 

대학가요제의 시대는 저물었다. 현실적으로 시장지분도 사라졌고 정서지분도 없다. 오로지 기성세대에게 흐뭇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만이 남았다. 대학가요제 폐지가 이 추억마저 앗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추억은 때로 막강한 화력을 발할 수 있다.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로 복고 흐름이 거세질수록 대학가요제가 마냥 화석화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현실에 지속적으로 출몰하여 매 시점마다 중요한 가치를 설파해주지 않을까. 순수와 참신함을 추구하는 청춘문화만이 변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미래에 길을 열어준다는 사실을. 때로 과거시제가 바른 현재진행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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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펠트 예은, 싱어송라이터로 인정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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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

 

원더걸스를 좋아한다. 특히 2011년에 발매된 두 번째 정규앨범을 좋아한다. 「Be My Baby」가 실린 그 앨범. 진작부터 사람들은 앨범으로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지만, 이 앨범은 타이틀 곡 외에도 꽤 괜찮은 곡들이 실렸다. 최근에 나는 SM이나 JYP, YG 같은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 앨범이야말로 ‘시대에 역행해서’ 앨범에 의미를 내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할 때 항상 이 앨범을 떠올린다. 아무튼, 여기서 원더걸스의 멤버인 예은은 첫 곡인 「G.N.O.」를 작사/작곡했는데 당시 기준으로 굉장히 트렌디한 곡이었다. 아무래도 원더걸스의 복고적인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시도 중 하나로 들렸다.

 

인상적인 건 바로 그 동시대의 감수성


예은의 예명인 핫펠트(HA:TFELT)의 솔로 데뷔작<Me?>는 이런 감각을 다시 한 번 깨우는 앨범이다. 예은과 이우민(collapsedone)이 공동 작곡한 앨범의 첫 곡 「Iron Girl」은 하나씩 힘주어 짚어가는 록 비트가 강한 의지를 담은 가사와 어울리며 앨범의 전체 인상을 좌우한다. 수록곡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Truth」와 「Ain’t Nobody」, 그리고 빈지노가 피처링한 「Bond」다. 「Truth」는 단번에 엑스엑스(THE XX)가 연상되는 비트를 깔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영국의 신예 싱어송라이터인 뱅크스(Banks)와 상당히 닮았다. 혹자는 라나 델 레이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녀보다는 시기적으로 뱅크스가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건 누구와 닮았다는 게 아니다. 이런 유사성을 짚으면서 우쭐댈 마음은 없다. 다만 지금 저 두 음악가들이 현재 영국 쪽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대해선 짚어 봐야할 것이다. 사운드클라우드 같은 음악 서비스에 가면 엑스엑스의 비트를 활용한 미니멀한 알앤비의 싱글들이 그야말로 흘러넘친다. 뱅크스는 지금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음악가 중 하나지만 한국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어둡고 습한 분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이는 뱅크스의 스타일은 한국에서는 대중적으로 소개되기 어렵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예은의 음악은 이 사운드를 동시적으로 소화하며 정면 돌파한다. 인상적인 건 바로 그 동시대의 감수성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트랙은 「Bond」다. 느와르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보컬의 리드 뒤에 이어지는 <007 시리즈>의 메인 테마를 변형한 비트가 등장하는 타이밍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다. 빈지노의 랩도 예리하게 다듬어진 인상을 풍긴다. 곡은 전반적으로 예리하고 날카롭다. 디자인이 잘 빠진 자동차를 보는 기분이다. 「Ain’t Nobody」와 타이틀을 경쟁했다고 하는 후문도 있는데, 이 곡만으로도 예은의 미래를 충분히 기대하게 된다. 보컬의 톤에서 로드(Lord)나 엘리 굴딩, 버디 등이 연상되는데 아무튼 최근 여성 알앤비 보컬의 경향에 포함된다는 게 중요할 듯싶다. 결과적으로 이 앨범은 온 힘을 다해 이전과는 다른 아이돌 싱어송라이터의 출현을 선언한다.

 

이때 싱어송라이터에 대해서 부연해야할 것 같다. 보통 ‘싱어송라이터’란 말은 마치 음악의 완성도와 예술적 지위를 보장하는 만능열쇠처럼 여겨진다. 수많은 보도자료와 비평이 그걸 전제로 움직인다. 하지만 싱어송라이터는 그저 사소한 재능 중 하나일 뿐이라고 본다. 특히 음악에서 이것은 전능하지도 않고 뭔가를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우리가 글을 쓸 때 언어를 다룰 수 있는 것처럼 곡을 쓸 때 음표와 화성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이돌에게 싱어송라이터란 말을 붙이는 것은 그가 아이돌과는 다른 지위를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음악을 좀 더 재미있게,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음악을 콘트롤할 수 있는 것, 그건 툴(tool)을 갖게 된다는 뜻 그 이상도 아니다. 그래서 예은을 응원한다. 그녀가 자기 재능을 자기 뜻대로 활용할 수 있는 순간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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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답사기 2014 : 펜타포트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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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2013년 여름의 페스티벌 시장은 그야말로 화악 타고 없어져버리는 신문지 뭉치 같았다. 불과 1년이 지난 지금, 여느 때와 같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야외형 록 페스티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나 뿐이니 말이다. 각기 야심차게 내걸었던 슬로건들을 재정적인 문제로, 혹은 사회적인 문제로 하나 둘 씩 접고 있을 때, 최후의 보루로서 음악팬들 곁에 남아준 것은 결국 트라이포트의 영혼이 서려있는 바로 그 곳이었다. 9년차를 맞은 <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 비를 친구 삼듯, 태풍을 애인 삼듯 하는 이 축제에 참전하기 위해 올해도 역시 많은 인파가 인천 송도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도 역시 태풍 나크리와 할롱이 동시 북상하고 있다는 뉴스와 함께 행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송도 상설무대에 세워진 거대한 메인 스테이지가 당당히 그 위용을 자랑했고, 펜타포트 특유의 탁 트인 전망을 기반으로 푸드코트와 이벤트 부스들이 나란히 자리해 쾌적함을 배가시켰다. 누군가 이야기했던 줄어들지 않는 맥주를 기대하며 한 잔 가볍게 들이키면, 공연을 즐기기 위한 대강의 워밍업은 끝나는 셈이 된다. 언젠가부터 공연을 즐기기 전 나름의 준비과정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개인적인 재미라면 재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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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몰라도 재밌다.

 

이틀 동안 여러 가지를 즐기며 가장 좋았던 점은, 바로 '특정 아티스트'가 아닌 '음악 자체'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 아무래도 라인업 보다는 펜타포트라는 브랜드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겼다고 봐도 과언은 아닌 듯 싶었다. 이에 보답하듯 기획사측은 불편함을 찾아보기 힘든 매끄러운 운영으로 관객들에 대한 성의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제대로 즐길 '판'을 만들어주니, 고조된 분위기가 딱히 아티스트를 가리지 않고 유지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꼭 헤비성향의 음악이 아니더라도, 시도 때도 없이 서클 핏이 생겨나고 몸을 서로 부딪치며 즐기는 모습이 그 자체로 축제를 상징하고 있었다.

 

요 몇 년간 '모셔가기 전쟁'으로 인한 출혈경쟁에서 한발 빠져있던 펜타포트였는데,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 조금씩 라인업 자체의 의존도를 줄여간 것이 오히려 음악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요건이 되었다. 쏠림현상 없이 다양한 성향의 아티스트들이 고르게 배치되었고, 어느 시간이건 즐겁게 놀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편차가 크지 않은 러닝타임이 하루 내내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많은 둘째 날은 디테일한 부분에 열광하고, 크게 관심이 없었던 셋째 날은 관객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다시 한 번 잘 몰랐던 이들의 매력에 빠질 수 있었다. 모르고 가든 알고 가든 큰 차이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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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떻든 즐겁다.

 

둘째 날 헤드라이너인 카사비안을 보다가 재밌는 광경을 목격했다. 초등학생들이나 되어 보이는 아이들일까. 요 꼬맹이들이 뒤쪽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이 글래스톤베리 영웅의 귀환을 보며 헤드뱅잉을 하고 흥얼흥얼거리며 여느 관객 못지않게 열광적으로 놀고 있더라 이거다. 그러고 보니 왠지 모르게 가족 단위나 친척 모임, 혹은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모여서 돗자리를 깔아 놓고 음식을 먹으며 몸을 들썩이던 광경을 목격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리곤 오버랩 됐던 것이 재작년인 2012년 지산의 기억이었다.

 

일본밴드인 세카이 노 오와리(SEKAI NO OWARI)의 순서였는데, 대가족처럼 보이는 한 일본인 그룹이 굿즈 티셔츠를 단체로 입고 공연을 기다리던 것이 눈에 띄었다. 할머니부터 꼬마까지, 세대의 간격이 족히 3대는 되어보였다. 그것을 보면서 '아, 우리나라에서도 저런 문화가 정착할 수 있을까'라고 부러워했던 적이 있는데, 이미 인천에는 그것이 존재하고 있었나 보다. 나만 못 봤던 것이지. 사실 어떤 연유로 오게 되었는지, 혹시 누구를 보러 오셨는지 여쭤보고도 싶었지만, 박자를 타며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는 그들의 모습에 질문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겠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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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이 추구해야 할 이상향, 그 실마리가 이곳에.

 

이러한 콘셉트의 음악 축제가 가져야 할 본질은 무엇일까. 올해의 펜타포트는 거의 정답에 가까운 답변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9년이라는 시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트라이포트 시절엔 록이란 장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이겨내야 했고, 관객 수와 열기로 이를 깨뜨리자 날씨라는 천재지변을 맞닥뜨렸다. 몇 년의 노하우를 거쳐 비에도 끄떡없는 요건을 갖추자마자 이번엔 뒤늦게 돈이 되는 시장임을 알아챈 대기업들의 물량공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악조건을 이겨냈다기보다는 그냥 악조건은 악조건대로 받아들이며 '장사'보다는 '음악'에 초점을 맞춘다는 초심을 잃지 않은 채 꾸준히 그 브랜드를 지켜냈다. 2014년은 바로, 한참을 내달린 뒤 돌아보니 경쟁자들은 사라진 채 홀로 남아있다는 것이 의아한 감격을 자아내는 해다. 이는 그간 공연을 주관해 온 기획사에게도 그렇겠지만, 록 팬들에게는 더 없는 믿음과 신뢰를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드림 스테이지에서의 하울링 강한 사운드에도, 불평하기보다는 '내년에는 분명 나아져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그 분위기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것. 그것이 펜타포트이기에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광경이다. 잘 모르는 아티스트가 나와도 서클 핏을 만들며 관객들과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펜타포트만이 만들어내는 즐거움이다. 좋아하는 뮤지션 앞에서 스마트폰 대신 귀와 마음을 내미는 사람들. 그것이 인천 한가운데에 모인, <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이라는 행사 자체의 팬들인 것이다.

 

 물론 다른 무대에서도 머리칼이 곤두설 만큼의 희열을 느끼곤 했지만, 2014년 여름의 송도처럼 모든 음악을 평등하게 바라보고 즐기는 관객이 가득했던 곳은 없었던 것 같다. 내년이면 드디어 기념비적인 10주년을 맞이하는 이 인천의 프랜차이즈 페스티벌에서 다시금 10만에 육박하는, 관객이라는 이름의 헤드라이너들과 재회할 수 있기를 빈다. 그럼 그때 보자, (필자를 포함한) 이 미친 인간들아!

 

2014/08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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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이 느낀 미국이라는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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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땅을 몸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 속에 알게 모르게 지역성(locality)을 내포하게 되지요. 예컨대 쇼팽이 그랬습니다. 물론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폴란드적인 음악을 해야겠다고 특별히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제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는 책에서도 썼듯이 쇼팽의 음악에는 “조국 폴란드에서 체득한 육체성”이 꿈틀거립니다. 음악가들에게 이런 경우는 아주 흔합니다. 브람스의 음악이 보여주는 아다지오 템포의 두터운 선율은 그의 고향인 북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를 떠오르게 하고, 차이코프스키의 어두운 노랫가락은 러시아의 광산촌 보트킨스크의 구름낀 하늘을 연상시킵니다.

 

음악가들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역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신의 음악에서 강조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리스트를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헝가리 태생의 그는 헝가리적이었던 동시에 매우 순발력 뛰어난 범(汎)유럽인이었습니다. 스페인과 루마니아, 러시아, 체코 등 여러 나라의 민속적 특징을 자신의 음악 속에서 적절하게 구사했지요. 그가 유럽 전역을 누비고 다닌 ‘순회 피아니스트’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 그 나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들려주면서 인기를 얻었던 것이지요.

 

지난 회 칼럼에서 언급했던 체코의 음악가 스메타나는 보다 정치적 지향이 뚜렷했습니다. 그는 당대의 예술가들에게 퍼져 있던 민족주의적 경향, 다시 말해 자국의 특색을 뚜렷이 보여주는 음악을 작곡해야 한다는 흐름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 시대적 요청에 부응했던 그는 결국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얻었던 것이지요. 이렇듯이 작곡가가 음악에서 지역성, 혹은 민속적 요소를 드러낼 때 그들의 내면적 태도는 각기 다릅니다.   

 

드보르작

드보르작 [출처: 위키백과]

 

오늘 만나는 드보르작은 바로 그 스메타나 이후를 대표하는 체코의 음악가입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체코를 대변하는 음악가의 계보는 스메타나(1824~1884)와 드보르작(1841~1904)을 거쳐 야나체크(1854~1928)로 이어집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들에게 체코적 지역성은 내적 필연이라고 해야겠지요. 그곳에서 나고 자랐으니까요. 하지만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의 경우, 민족적 요소를 드러내는 양상이 좀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메타나가 보다 의도적으로 민족적 음악을 구현하려고 했던 것에 비해 드보르작에게서는 그런 자기 강제, 혹은 강박 관념이 덜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지점은 20세기 초반에 체코 음악계의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민족적인 스메타나’와 그렇지 않은 드보르작을 각각 지지하는 이들이 양편으로 나뉘어 입씨름을 펼쳤던 것입니다. 당시는 민족적인 것을 진보적인 것으로 여기던 때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오는 측면이 있지만 당대의 흐름 속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드보르작은 1841년에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30km쯤 떨어진 넬라호제베스(Nelahozeves)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에 두 번째 곡으로 등장하는 ‘몰다우강’(체코어로 불타바강)이 가까이 흘러가고 있는 마을입니다. 당시 인구가 약 500명이었다고 하니 참 작은 동네였지요. 아버지는 여관과 정육점을 운영했는데, 지금 그 여관은 드보르작 기념관으로 꾸며져 여행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위해 프라하로 나온 것은 열여섯 살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큰아버지가 응원군이었다고 하지요. 이렇게 프라하에 발을 디뎠을 때가 1857년이었으니 한창 민족주의 바람이 불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드보르작은 그런 사회적 흐름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서 오르간 학교 수업에만 매진했고 졸업을 하자마자 레스토랑과 카페 등에서 연주하면서 생계를 해결합니다. 말하자면 드보르작의 청년기는 몹시 고달팠습니다.

 

당시 그가 카페 악단에서 연주했던 악기는 비올라였지요. 그러다가 드디어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던, 체코 국립극장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가설극장(임시극장) 오케스트라에 참여하게 됩니다. 1862년이었습니다. 당시 이 악단의 지휘자였던 스메타나와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지지요. 드보르작은 그때부터 1873년까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일합니다. 월급이 너무 적어 고생이 막심했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알토 가수였던 안나 체르나코바와 결혼한 직후에 오케스트라에 사표를 던지고 세인트 아달베르트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한데 오케스트라에서 일할 때보다 급료가 훨씬 더 줄어듭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요. 결혼까지 했는데 월급이 더 적은 자리로 이직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드보르작은 이때 큰 결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소모되기보다는 본격적으로 작곡가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오케스트라에 비한다면 교회 오르간 연주자에게는 창작에 전념할 시간이 많았던 것이지요.

 

드보르작은 그렇게 작곡한 음악들을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최하는 한 공모전에 투고합니다. 짐작컨대 이를 악물었을 겁니다. 다행히도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자신의 월수입보다 2배가 넘는 생활비 지원을 받게 되지요. 한데 그 생활비 지원보다 훨씬 더 커다란 행운이 드보르작을 찾아옵니다. 바로 브람스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항용 그런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이는 언젠가 보상을 받는 것 같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고, 삶에는 곳곳에 복병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연처럼 보이는 행운들이 사실은 필연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브람스는 드보르작이 투고했던 공모전의 심사 위원이었습니다. 드보르작의 음악에 마음이 끌렸던 브람스는 이 체코의 젊은 작곡가를 베를린의 출판업자 짐로크에게 소개하지요. 일종의 추천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젊은 브람스가 슈만의 후원을 받으면서 음악가로 이름을 얻었던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등장인물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긴 했어도, 똑같은 일이 다시 한번 벌어졌던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태어난 음악이 바로 <슬라브 무곡> 1집에 수록된 여덟 곡이었습니다. 짐로크 출판사에서 간행된 이 곡은 요즘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물론 독일과 영국 등지에서 날개 돋힌 듯 팔렸고 드보르작은 당연히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가 남긴 200여곡의 음악 중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애청되는 곡들을 꼽아본다면 <스타바트 마테르>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드보르작이 세 자녀를 잇따라 잃은 비통함을 담아낸 음악입니다. 또 드보르작은 현악4중주를 중심으로 실내악 분야의 걸작들도 다수 남겼습니다. 특히 현악4중주 12번 F장조 ‘아메리카’가 널리 애청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향곡입니다. 모두 9곡의 교향곡을 썼는데 그중에서도 8번과 9번이 자주 연주됩니다.

 

오늘 들을 곡은 ‘신세계로부터’라는 부제로 유명한 9번 교향곡입니다. 아마 드보르작의 모든 음악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일 성싶습니다. 지금의 중장년들이 학창 시절에 배웠던 ‘꿈속의 고향’(Going Home)이라는 노래가 이 교향곡의 2악장에서 흘러나옵니다. ‘꿈 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하는 노랫말이 기억나시지요? 6마디의 서주가 끝난 후 잉글리시 호른이 그 애틋한 선율을 연주합니다.

 

자, 이 곡은 드보르작이 미국 뉴욕에서 작곡한 음악입니다. 드보르작은 1892년 가을에 미국 뉴욕의 내셔널음악원 원장으로 가게 되지요. 이름에는 ‘내셔널’이 들어가지만 자네트 서버(Jeanette Thurber)라는 거부(巨富)가 창설한 민간 음악학교였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음악적으로 가장 번성한 도시였던 뉴욕은 유럽 음악가들을 초빙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지요.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이런 추세는 거의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집니다. ‘유럽 음악가의 미국행’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드보르작은 1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당시 국제적 음악가로 명성이 높았던 드보르작은 연봉 1만 5천달러의,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뉴욕으로 건너갑니다. 1895년까지 그곳에서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했는데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는 바로 그 시기에 작곡된 음악이지요.

 

드보르작 본인은 이 곡에 대해 “아메리카를 보지 않았다면 이런 교향곡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체류하던 당시 접했던 흑인들의 음악, 아메리카 인디오들의 음악에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들이 나옵니다. 특히 1악장에서 플룻이 연주하는 선율이 흑인영가 ‘Swing low, sweet chariot’와 흡사하다던가, 인디언의 펜타토닉 스케일(5음계), 흑인음악의 싱코페이션(Syncopation, 당김음)이 종종 등장하는 장면들에서 그런 해석들이 연유합니다. 물론 전혀 연관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한 체코 음악가에 눈에 비친 아메리카의 인상(印象), 아울러 그곳에서 느꼈던 모국에의 향수가 배어 있는 음악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아메리카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체코풍의 음악으로 다가옵니다.
 
1악장의 아다지오 서주는 동 트는 새벽의 느낌입니다. 이어서 호른이 첫번째 주제를 힘차게 연주합니다. 이 주제 선율에서 드보르작은 5음계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을 꼭 아메리카 인디오의 음계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래의 교향곡들에서 만나기 어려운 민속적인 체취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두번째 주제는 목관악기들이 연주하는 애수 어린 선율입니다. 관현악 총주로 내닫는 마지막 코다는 시원하고 장쾌합니다.

 

2악장에서 잉글리시 호른이 연주하는 선율은 향수의 느낌으로 가득합니다. 누구나 아는 아름다운 선율이지요. 드보르작의 제자인 피셔(William Arms Fisher, 1861~1948)가 훗날 이 선율을 기반으로 만든 노래가 바로 ‘꿈속의 고향’(Going Home)입니다.

 

3악장은 느린 2악장과 달리 활기찬 스케르초 악장이지요. 짧고 강렬한 서주에 이어 풀룻과 오보에가 주제를 선보이고 현악기와 팀파니가 이에 가세하면서 음악이 점점 춤의 형태를 띠어 갑니다. 체코 보헤미아 지방 농부들의 춤을 연상시킵니다. 중간부(트리오)에서 플룻과 오보에가 애수 띤 가락을 연주하고, 종결부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음악이 아주 잠깐 멈추는 듯싶다가 짧고 강력한 화음으로 악장을 마무리하지요.

 

마지막 4악장은 ‘알레그로 콘 포코’(Allegro con fuoco, 빠르고 정열적으로)라는 지시어가 보여주듯이 매우 힘차고 뜨거운 악장입니다. 앞으로 전진하는 느낌의 짧은 서주에 이어, 들으면 누구나 금세 알 수 있는 박력 넘치는 첫번째 주제가 연주됩니다. 반면에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두번째 주제는 어딘지 애틋한 분위기입니다. 여기에 첼로와 바이올린이 차례로 호응하지요. 이어서 앞에서 등장했던 각 악장의 주요 주제들을 다시 한번 선보이다가 다시 마지막 악장의 첫번째 주제가 힘차게 작렬합니다. 종결부에 이르면 ‘꿈속의 고향’의 선율과 4악장 첫 주제가 다시 어울리면서 화려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방점을 찍지요.

 

 

쿠벨릭▶라파엘 쿠벨릭(Rafael Kubelik), 베를린 필하모닉/1972년/DG


드보르작의 교향곡을 선택하다 보면 아무래도 체코 출신의 지휘자들에게 먼저 손이 간다. 그중에서도 라파엘 쿠벨릭(1914~1996)이 지휘한 이 녹음은 오래도록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온 음반이다. 물론 바츨라프 탈리히와 카를 안체를 등 체코의 옛 명장들이 체코 필하모닉을 지휘해 들려줬던 연주에 비해 체코적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닉이 보여주는 연주력은 역시 믿을 만하다. 현재 국내 매장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하고 있다.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 음반을 첫 구매하는 분들에게 권한다. 리마스터링으로 재발매돼 음질도 합격점이다.   

 

 

노이만▶바츨라프 노이만(Vaclav Neumann), 체코 필하모닉/1993년/Denon


프라하 출신의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1920~1996)은 체코필하모닉을 지휘해 3~4종의 녹음을 남겼다. 1981년 체코의 수프라폰(Supraphon)에서 발매한 음반도 호평을 받지만 이 지면에서는 1993년에 있었던 9번 교향곡 초연 100주년 기념 음악회의 실황 녹음을 권한다. 체코적 토속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보다 앞 세대의 지휘자인 카를 안체를을 더 호평하기도 하지만, 이 연주는 체코적 흥취라는 측면에서도 안체를에 전혀 못지 않다. 게다가 이 실황에서 보여주는 노이만과 체코 필하모닉의 호흡과 집중력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노이만 말년의 지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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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LP가 인기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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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LP가 붐이다. 해외 록 밴드, 국내 인디밴드, 혹은 몇몇 메이저 가수들에 국한되던 LP 발매가 최근 부쩍 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최근에는 비틀스의 LP 박스세트와 아이유의<꽃갈피> 음반이 각각 한정판 LP로 발매되었다. 아이유의 경우엔 수록곡 7곡 외에 ‘건전가요’가 하나 수록된다는 게 특이하다. 1970~80년대 가요 앨범의 콘셉트를 그대로 살리는 기획이다. 3호선 버터플라이의<Dreamtalk>앨범도 더블 음반의 LP로 400장 한정으로 발매되었다.

 

<서울레코드페어>에서도 국내 음반들을 한정판 LP로 소개하고 있다. 올해는 노브레인 1집 <청년폭도맹진가>(2000), 언니네 이발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2008), 디제이 소울스케이프의 데뷔 앨범인<180G BEATS>(2000)와 김목인 1집 <음악가 자신의 노래>(2011), 더 콰이엇과 도끼, 빈지노가 속한 일리네어 레코즈의 최근작<11:11>(2014)이다. ‘오프라인 음반 판매 플랫폼’이라고 해도 좋을 <서울레코드페어>는 지난해까지 누적 관객 1만 2천명을 모았다.

 

꽃갈피  3호선버터플라이

 

노브레인  잭화이트

 


LP 붐은 그저 ‘느낌적 느낌’이 아니다. 미국으로 가보자. 얼마 전 잭 화이트의 새 앨범 <Lazaretto>가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발매 첫 주 판매량이 13만 8천장이었는데 이 중 음원이 약 5만 6천장이었다. 나머지 중 CD가 대략 4만 1천장, LP가 약 4만장이었다.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이 앨범은 닐슨 사운드스캔(Nielsen SoundScan)이 LP 판매량 조사를 시작한 1991년 이후 최고의 주간 LP판매량을 기록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LP 판매량이 2007년 1백 만 장 판매를 기록한 후 2009년 2백 50만장, 2012년에는 4백 50만 장, 2013년에는 6백 10만 장을 기록하며 무서운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

 

이런 LP 붐에 대해서는 여러 입장이 엇갈리기도 하는데, 대체로 ‘소리’에 대한 것은 편견이다. LP가 들려주는 특유의 사운드는 ‘언리미티드 와이드 다이내믹스(unlimited wide dynamics)’에서 시작하는데, CD에서는 이 부분이 제거된다. 최근에 재발매되는 LP들은 대부분 CD 마스터링 음원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최근에 발매된 LP에서 ‘특유의 소리’를 찾는 건 넌센스다. 이런 이유로 제작사들도 LP 발매를 홍보할 때 ‘최초 LP 발매’나 ‘180g 중량반’, ‘유럽 최고의 생산 라인 이용’ 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제작에 대한 것이지 음질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LP에 대한 수요는 주로 손으로 만지는 것, 디자인이 예쁜 것, 그래서 소장하는 것에 대한 욕구가 반영된다. 잭 화이트의 <Lazaretto> LP에는 재생할 때 홀로그램으로 인쇄된 천사 이미지가 떠오르고, 가운데의 동그란 스티커 부분에 히든 트랙이 숨어 있다. B면 첫 곡의 인트로는 전자음악과 어쿠스틱의 두 개 버전으로 녹음되었는데 바늘을 어떻게 대느냐에 따라 두 버전을 동시에 들을 수 있다. ‘고객 이벤트’ 같은 것이다.

 

오히려 음질을 따진다면 일본에서 수입되는 ‘Platinum SHM-CD’ 시리즈를 구하는 것이 훨씬 낫다.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15주년 한정판이나 주다스 프리스트의 앨범들, 그 외 스트라빈스키의<봄의 제전, 불새>나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19, 23번> 등 팝과 헤비메탈, 클래식에 이르는 범위의 음반들이 발매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이 포맷의 음질이 현존하는 CD 버전 중 최상이라고 여긴다. 패키지도 두껍다. 요컨대 기본에 가장 충실한 CD인 셈이다.

 

 

차우진

 

소리가 아닌 물건에 대한 관심


그런데 미국의 LP 판매량은 왜 늘고 있을까? 2007년 이후 급증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2006년은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한 해고, 2008년은 아이튠즈가 음악 산업 매출 1위를 차지한 해다. 미국의 음악 산업 구조는 이때부터 디지털로 전환되었다. 음반에서 (디지털)음원으로 시장 구조가 바뀌었다는 것은 물건에서 저작권으로 수익구조가 변환되었다는 뜻이다.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수익구조는 음반 판매에서 저작권 관리 체계로 바뀌었다. 이즈음부터 역설적으로 LP 판매량이 급증한 것은 음악이 대중문화의 다른 장르들보다 더 개인과 밀접하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이때 중요한 건 다시, 음악적 경험이다. 이 음악이 ‘내 음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이 음악을 통해 어떤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LP에 대한 높은 관심은 디지털 음원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면서 아닐 수도 있다. 최근의 LP 붐은 소리가 아닌 물건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디지털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산업적으로 스트리밍에 대한 수익을 기대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에 20세기처럼 물리적 음반을 판매하는 것(과 동시에 페스티벌에서 머천다이즈를 판매하는 것)이 음악 산업의 실제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때 다시 중요한 것이 ‘음악적 경험’이다. 음악 자체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음악을 듣기 위해 혹은 음악에 접착된 경험 말이다. 음반을 사려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걷던 기억, 혹은 특정 쇼핑몰을 클릭하는 것, 손에 들었을 때의 촉감, 플레이버튼을 누르고 첫 소리를 듣던 감각 등이 바로 음악적 경험이다.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음악과 만나는 과정을 통한 쾌락은 음악을 감상하는데 더 많은 결을 부여한다. 그래서 이런 경험이 중요하다. LP의 붐은 음악을 듣는다, 혹은 소유한다는 것에 대해 새삼 여러 가지를 ‘뒤집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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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뮤지션 리그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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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팬들에게 있어서 네이버 뮤직은 독특한 면이 있었다. 음원을 제공하는 서비스 외에도 사이트 내외로 갖추고 있는 콘텐츠들 속에는 메이저나 거물급 음악가가 아닌 인디 뮤지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기획들이 있었던 것이다. 매주 한 장의 앨범을 선정하는 이주의 발견에서 종종 발견되는 인디 음반들이나, 이미 4년의 발자취를 걸어오고 있는 온스테이지의 사례에서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개설된 뮤지션 리그는 네이버 뮤직이 지속적으로 비인기 장르들에 취하고 있던 노선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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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 프로슈머 플랫폼 밴드캠프(Bandcamp)

 

뮤지션 리그라는 포맷이 새로운 시도인 것은 아니다. 이미 해외에서는 밴드캠프(Bandcamp)나 사운드 클라우드(Soundcloud) 등의 사이트를 통해 소비자와 공급자의 영역을 허무는 프로슈머 시장의 전례가 있었다. 국내에서도 광범위한 영향력이 없었을 뿐 밀림 등의 매체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여기에 뮤지션 리그는 SNS의 성향까지 가미하면서 음악가가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작업물을 공유하는 통로를 연 것이다. 최근 기존의 전철을 밟으며 뮤지션이 직접 음원을 공개하는 바이닐(Bainil)같은 사이트도 국내에서 생겨났다는 점을 볼 때 네이버 뮤직의 뮤지션 리그 출범이 난데없는 시도나 무리수로 보이진 않는다.

 

뮤지션 리그는 먼저 음악가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비디오나 오디오파일을 업로드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등록된 매체는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좋아요'와 같은 추천을 받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후 매달마다 추천수와 조회수 활동지수 등을 토대로 우수한 팀을 선정하는 베스트 리그를 진행할 예정도 있다. 아직 베타 테스트 중이지만 < 슈퍼스타 k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오디션이라는 포맷을 다분히 인터넷과 인디라는 범위로 좁힌 인상인 것이다. 무엇보다 거의 500팀 가량의 뮤지션들이 참여를 하고 있는 등 호응에 있어서도 무시 못 할 성과를 거두고 있는 중이라 이런 성향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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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뮤지션 리그에 참가한 인디 밴드 솔루션스

 

이전 < 슈퍼스타 k > < 탑밴드 >같은 TV 프로그램에서도 중견 음악가나 밴드들이 참가자로 출연하는 경우가 있었듯이 뮤지션 리그에서도 인지도 있는 인디 밴드의 참가가 눈에 띈다. 자신들의 연주 영상을 공개하면서 활동을 하는데 당연하게도 이들의 추천수는 다른 참가자들 보다 높은 편이다. 새로운 무명 참가자들과의 묘한 불평등을 상쇄해가는 과정은 뮤지션 리그의 숙제이자 나름의 재미가 될 것이다.

 

가장 기대할만한 점은 역시 네이버라는 사이트의 영향력에서 나온다. 음원 사이트라는 기능 외에도 네이버가 현재 우리나라에 공론장으로 역할 하는 부분이 그만큼 거대한 것이다. 무명의 위치에 서있던 음악가들이 스스로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직접적인 창구이기 때문에 뮤지션 리그가 자리를 잡는다면 이 노선을 통한 지속적인 신인 유입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TV등 대중매체가 심의나 흥행과 같은 매체 본래의 성격 때문에 뮤지션에게 변화를 강요할 수밖에 없는 반면, 이곳은 최소한의 개입을 약속으로 내걸은 만큼 작가의 본래 색을 보존한 상태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점 역시 뮤지션 리그만의 강점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다만 현재 우리나라 인디씬에 뮤지션 리그가 가져올 영향이 긍정적일지는 미지수이다. 무엇보다 이 플랫폼을 통해 등장할 신인들이 참신함 혹은 실험성과는 거리가 먼 음악가들이라면 그 여파는 더욱 치명적이다. 이미 500여개의 팀이 각자의 계정을 만든 이 상황에서 대중은 개인의 기호 혹은 인기에 따라서 콘텐츠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마이 메뉴를 따로 개설한 것이나, 음악이나 음악가를 추천수에 따라 나열해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는 피할 수 없는 귀결이다.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생리라고 하더라도 지금 현재 뮤지션 리그를 차지하는 대다수의 장르는 포크 싱어송라이터나 버스킹 계열의 음악 혹은 일렉트로니카다.

 

참여자 개인에게는 인지도를 높일 기회일수도 있겠지만 불균형하게 성장하고 있는 인디씬의 입장에서는 이미 포화한 분야에 더 많은 용질만 투여할 뿐이다. 아이돌 음악으로 대표되는 대중음악에 대한 회의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현재 인디 음악에는 과한 찬사나 과대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빛의 뒤편에 여전히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재즈 혹은 월드 뮤직과 같은 비주류 장르들 역시 존재한다. 인디씬에 대한 대중의 다소 과장된 인식과 그 와중에도 더 주목받지 못하는 그림자들 사이의 미묘한 격차는 현재의 뮤지션 리그가 가진 규칙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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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뮤지션 리그 참가자(민키)의 영상

 

언더그라운드의 많은 음악인들이 공간의 부재를 호소한다. 소통의 통로가 새로이 열리며 일시적 갈증의 해소는 기대할 수 있겠으나 결국에는 그 나물에 그 밥처럼 유야무야 할 수도 있다. 인디 음악도 대중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만큼 인기 역시 중요한 측도이다. 하지만 인디 음악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만 모든 것을 걸어서 좋은 호응을 일으킬 수는 없다. 메이저와 차별을 가지는 독립성에서 빛을 발해야 하는 인디씬의 특성을 인기의 생리로 밀어 넣는 과정은 한계를 맞닥뜨릴 가능성이 많다.

 

 < 탑밴드 >나 < 밴드의 시대 >같은 프로그램들이 가진 문제도 어느 정도 상기한 질문들과 비슷한 맥락에 있었다. 뮤지션 리그가 그저 그런 인기투표의 범주를 벗어나 비주류 장르에도 시선을 돌리고 신인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프로슈머 공동체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 또한 이 지점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장르별 추천을 따로 개설하거나 앨범을 낸 경험이 없는 가수들을 전면에 노출시키는 등 어느 정도의 인위적인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다. 뮤지션 리그 옆에 붙은 베타라는 표지가 떨어져나간 이후의 모습은 어떨지 새삼 기대가 된다.

 

사소한 사족을 붙이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음원 시장의 수익 구조를 바꾸어보고자 시작한 플랫폼 바이닐이 출범한지 얼마 안 되어 거대한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인 네이버 뮤직이 미묘하게 비슷한 서비스를 만들었다는 점은 무언가 꺼림칙한 뒷맛을 남긴다. 이는 그저 우연을 과대 해석한 기우일까 아니면 하나의 불편한 진실일까. 개인적으로는 전자이길 바란다.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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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소박하고 엄숙한 기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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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가 쓴 가곡(Lied)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무엇일까요? 아마 다들 아시는 곡일 겁니다. 우리말로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하는 유명한 노래입니다.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아름다운 장미꽃 너를 둘러 피었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곡이지요. 그렇습니다. ‘브람스의 자장가’로 불리는, 작품번호 49의 네번째 곡(Op.49-4)입니다. 브람스가 친구인 베르타 파버(Bertha Faber)에게 선물한 곡이지요. 파버는 여성 성악가입니다. 브람스는 1857년부터 약 3년간 고향인 함부르크에서 합창단을 지휘했는데, 파버는 바로 이 합창단 단원이었습니다. 세월이 약 10년쯤 흐른 1868년에 그녀가 둘째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 곡을 작곡해 선물했던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브람스는 겉으론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정이 참 깊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의 무뚝뚝한 외모, 배가 불뚝 나온 데다 수염이 덥수룩해서 접근하기 쉬워 보이지 않는 인상은 중년을 넘겼을 때의 모습이라고 해야겠지요. 롤랑 마누엘이 쓴 <음악의 정신사>(1979년/홍성사/안동림 옮김)라는 책에는 이런 묘사가 나옵니다. “수염을 기른 뚱뚱한 신사, 턱이 세 겹이나 늘어졌고 맥주를 너무 마셔 아주 뚱보가 된 채 호른과 첼로가 군림하는 관현악의 중후한 음향을 무척 좋아하는 사나이.”

 

하지만 젊은 시절의 브람스는 슈만도 감탄했을 정도로 핸섬한 금발 청년이었습니다. 아울러 브람스의 생애를 들여다보노라면, 그는 참으로 속 깊은 애정과 배려를 지니고 타인을 대했던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고는 합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책임감도 아주 강했습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던 아버지 야코프 브람스는 아내(브람스의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몇 달 후에 자신보다 나이가 18세 연하였던 여성과 재혼하는데요, 그녀에게는 이미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브람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이 어린 동생은 매우 병약한 소년이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의리남’ 브람스는 어땠나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1872년부터 새어머니와 병든 동생을 자신이 돌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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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출처: 위키피디아]

 

쉬운 일이 아니지요. 자신의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슈만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을 끝까지 돌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람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격, 수수께끼와도 같은 복잡한 캐릭터를 지녔던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인내와 성실함,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짐작컨대 브람스는 그런 성품 때문에 상처와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을 겁니다. 아마 그런 성품과 기질이 그의 음악이 보여주는 내향적 우울함, 바닥을 짐작하기 어려운 어두운 심연의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자, 오늘은 브람스의 가곡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브람스의 음악 중에서 가장 많이 애청되는 곡들은 주로 네 곡의 교향곡이지요. 그 외에 도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한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또 여러 곡의 실내악 곡들, 그밖에 <독일 레퀴엠> 같은 곡이 많은 사랑을 받는 걸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가곡은 브람스가 남긴 다른 장르의 음악들에 비하자면 창고에 묻혀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가요? 브람스야말로 슈베르트와 슈만의 계보를 잇는 가곡 작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가 남긴 가곡은 상당히 많습니다. 브람스가 스스로 미숙하다고 여겨서 출판하지 않은 곡들을 차치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음악으로 공인해 출판한 가곡들만 200곡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그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만 가곡 작곡에 몰입한 것이 아니라, 음악가로 사는 평생 동안에 꾸준히 가곡을 썼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가곡은 브람스에게 평생의 음악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클래식 101>에서 브람스의 음악을 이미 다섯 곡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음악 중에서 한 곡을 더 고르려고 약간 고심했습니다. 이른바 예술가의 ‘말년성’을 드러내는 곡을 선택하려고 며칠 궁리했던 것이지요.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곡은 <클라리넷 5중주 b단조 Op.115>였습니다. 생전의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브람스도 음악적 생애의 마지막 무렵에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매우 사랑했지요.

 

제가 더 클래식-바흐에서 베토벤까지』이라는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모차르트는 안톤 슈타틀러(1753~1812)라는 당대의 클라리넷 명연주자와 친밀한 우정을 나눴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계기로 작용해 <클라리넷 5중주 A장조>와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를 말년작으로 남겼지요. 브람스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891년에 마이닝겐 궁정악단을 방문했다가 그 악단의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리하르트 뮐펠트(1856~1907)의 뛰어난 연주에 완전히 매료되고 맙니다. 직후에 클라리넷 3중주와 5중주를 거의 일사천리로 작곡하지요. 그중에서도 3중주곡은 브람스가 직접 피아노를 맡아 뮐펠트와 초연(1891년 12월 12일)하기까지 합니다. 2년 뒤에 쓴 두 곡의 클라리넷 소나타까지 포함하자면 모두 네 곡의 클라리넷 음악을 생애 말년의 작품으로 썼던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오늘 들은 음악으로 고심 끝에 고른 메뉴는 가곡 <네 개의 엄숙한 노래 Op.121>입니다. 브람스가 남긴 가곡들이 대중적으로 애청되지 않는 까닭에 아마도 오늘 이 곡을 처음으로 듣는 분들도 있을 법합니다. 그렇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브람스는 슈베르트에서 슈만으로 이어지는 독일 낭만가곡의 계승자일 뿐 아니라, 가곡은 그의 음악적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동반자와도 같은 장르입니다. 게다가 이 곡은 작곡 당시의 상황뿐 아니라 가사에서 보여주는 숭고함으로 인해 브람스의 말년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브람스는 이 곡을 1896년 5월에 작곡했지요. 그때가 언젠가요? 바로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해입니다. 그해 3월 26일에 클라라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잠시 정신을 회복하는 듯하다가 다시 쓰러져 5월 20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브람스는 <네 개의 엄숙한 노래>의 작곡을 막 끝낸 직후에 클라라의 부음을 전해 받았다고 하지요. 5월 21일에 오스트리아의 온천도시 바트이슐에서 클라라의 사망 소식을 전해 받은 브람스는 아마도 가슴이 내려앉았을 겁니다. 정신없이 독일 본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은 그는 클라라의 시신이 무덤에 매장되기 직전에야 간신히 장례식에 도착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평생토록 사랑했던 여인과 그렇게 작별했습니다.
 
간신히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브람스는 자신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저는 아마 느끼고 있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어쩌면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작곡하던 순간에 이미 클라라와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인과관계를 객관적으로 증빙하기는 어렵지요. 시기적으로 보더라도 이 곡의 작곡은 클라라가 사망하기 직전에 이뤄졌으니까요. 하지만 ‘마지막 노래’라는 곡의 제목뿐 아니라, 수록된 네 곡의 노랫말에 담긴 의미와 분위기가 인생의 허무와 죽음에 대한 관조를 선연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브람스는 이 곡을 화가인 막스 클링거(1857~1920)에게 헌정했지요. 자신의 속내를 좀체 드러내지 않았던 그는 이 곡을 무난한 인물에게 헌정함으로써 클라라와 자신의 관계 속에서 음악이 해석되고 유추되는 것을 피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브람스는 그런 남자였습니다. 그랬기에 선배이자 스승의 아내인 클라라를, 열네 살이나 연상이었던 그녀를 40여 년 동안이나 마음속으로 연모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사실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연모는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1856년) 전에 이미 싹텄던 감정입니다. 이 자리에서 일일이 인용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은 1854년부터 이미 서로에게 연정을 털어놓는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사랑이었지요. 그래서 클라라는 브람스에게 “이 편지를 읽고 태워버리라”고 쓰기까지 합니다.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 브람스에게 밀려왔을 공허감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당연히 건강도 무너졌겠지요. 점점 안색이 나빠진 그는 같은 해 9월에 간암 진단을 받고 맙니다. 아버지인 야코프 브람스, 가난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던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병이었습니다. 이듬해 3월에는 병세는 크게 악화돼 4월 3일에 결국 눈을 감고 말지요.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같은 해에 작곡했던 <11개의 코랄 전주곡>과 함께 브람스 음악의 마지막 방점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브람스의 가곡들은 그의 음악 대부분이 그렇듯이 아다지오의 느릿한 템포, 아울러 저음부를 강조하는 중후한 표현법 등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아울러 그의 가곡은 장식음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소박함을 보여줍니다. 피아노 반주를 최대한 간결하게 처리하면서 노랫말의 의미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브람스 가곡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애 마지막 가곡인 <네 개의 마지막 노래>도 당연히 그렇지요. 저는 이 곡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해 ‘숭고함의 절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서의 ‘전도서’와 ‘고린도전서’, 또 외경에서 가사를 가져온 곡들입니다. 하지만 종교가 기독교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이 음악을 종교를 초월한 엄숙한 기도의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장식음 없는 담백한 피아노 반주, 그리고 가사에 집중하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곡 ‘사람의 아들들에게 임하는 바는 짐승에게도 임하나니’(전도서 3장, 19~22절)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짐승이 죽는 것처럼 인간도 죽느니라/모든 것은 하나의 목숨을 가지고 있으니/사람도 짐승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니/모든 것은 헛됨이로다/모든 것은 한 곳으로 가고/모든 것은 먼지로부터 만들어졌고/다시 먼지로 돌아가느니/사람의 영혼이 위로 올라가는지/동물의 호흡이 땅 밑으로 가는지를 누가 알리오/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일을 할 때/기뻐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것을 보았노라/그것이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니/죽은 뒤에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려고/누가 다시 그들을 데려 오겠는가
 
  2곡 ‘나는 모든 학대를 보았노라’(전도서 4장, 1~3절)


 “나는 해 아래에서 자행되는 모든 억압을 보았도다/보아라,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을/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도다/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구나/그러나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구나/나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이들이/아직 살아 있는 이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하였느니/그리고 그 둘보다 더 행복하기로는/아직 태어나지 않아/해 아래에서 자행되는 악한 일을 보지 않은 이라고 말하였도다”
 
  3곡 ‘죽음이여, 고통스러운 죽음이여’(시라크서 41장)


 “오 죽음이여/너를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자기 재산으로 편히 사는 인간에게/아무 걱정이 없고 만사가 안락하며/아직 음식을 즐길 기력이 남아 있는 인간에게/너를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가/오 죽음이여, 얼마나 좋은가/궁핍하고 기력이 쇠잔하며/나이를 많이 먹고 만사에 걱정이 많은 인간에게/반항적이고 참을성을 잃은 자에게/너의 선고가 얼마나 좋은가”
 
  4곡 ‘내가 인간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코린도전서 13장, 1~3절, 12~13절)


 “내가 인간의 방언과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할지라도/나에게 사랑이 없다면/나는 요란한 징이나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도다/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모든 비밀과 지식을 깨닫고/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하여도/내게 사랑이 없으면/나는 아무것도 아니도다/내가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해도/내게 사랑이 없으면/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도다/우리가 지금은/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이지만/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이로되/내가 지금은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로다/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로되/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이라”

 

ps. 이 곡은 원래 브람스가 베이스 가수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곡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베이스 성악가인 알렉산더 키프니스가 피아니스트 제랄드 무어의 반주로 노래한 1930년대의 모노녹음이 전설적인 음반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비통하고 무거운 해석입니다. 요즘 CD로 구할 수 없어 아쉽습니다.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DG에서 내놓은 음반도 이 곡의 레코딩 중에서 수작으로 손꼽히는데 국내 매장에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의 아마존에서는 판매중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페리어.jpg▶캐슬린 페리어(Kathleen Ferrier), 존 뉴마크/1950년/Regis


영국 랭켜셔 출신의 콘트랄토인 캐슬린 페리어(1912~1953)는 지휘자 브루노 발터에게 인정받으면서 세계적 성악가의 반열에 올랐다. 1949년부터 1952년 사이에 이뤄진 이 모노녹음 음반은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비롯해 브람스의 ‘네 개의 엄숙한 노래’ 등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부드러우면서 호소력 있는 여성 저음으로 브람스의 마지막 가곡을 만날 수 있는 빼어난 음반이다. 지성과 감성의 어우러진 음색이 돋보였던 페리어는 1954년에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크바스토프.jpg▶토마스 크바스토프(Thomas Quasthoff), 유투스 제인(Justus Zeyen)/2000년/DG


비교적 최근에 녹음된 음반 중에서는 토마스 크바스토프(1959~)의 목소리를 권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독일의 베이스바리톤 크바스토프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탈리도마이드 장애를 안고 태어난 그의 키는 132cm에 불과하고 팔은 거의 없다. 1972년부터 개인교습으로 성악을 공부했고 장애로 인해 하노버음대 입학이 좌절되는 아픔도 겪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뮌헨국제콩쿠르 우승 이후 세계의 성악팬들에게 감동어린 연주를 선보여왔다. 묵직하고 꾸밈이 없는 그의 목소리는 브람스의 마지막 가곡에서도 빛난다. 국내 매장에서 구입이 비교적 용이한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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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는 음악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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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 화요일, 음악평론가 차우진의 대중음악 이야기

‘차우진의 사운드 & 노이즈’가 연재됩니다.

 

 

괜찮아사랑이야

 

실시간 음원 차트를 종종 뒤적인다. 나름 동시대적인, 물론 찰나에 사라지거나 뒤집어질 것이지만, 유행이 대략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유행의 감각은 오직 최신곡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차트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건 텔레비전이다. 요새 누가 TV를 보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TV야말로 스마트 시대에 가장 스마트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해도 TV가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TV는 여전히 강력한 멀티미디어 플랫폼이다. 아무튼, 2014년 9월 1일 현재, 실시간 차트 10위권에는 TV프로그램의 삽입곡이나 관련곡이 4곡 포함된다. 영화 사운드트랙도 한곡 있다.

 

일단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의 사운드트랙 음원이 두 곡 있다. 윤미래가 부른 「너를 사랑해」와 다비치의 「괜찮아 사랑이야」. 아무래도 인기 드라마여서 삽입곡이나 주제곡도 관심을 받는 것이다. 에일리가 부른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잠시 안녕처럼」도 순위권에 들었다. <쇼미더머니 시즌3>에 출연 중인 바비의 「연결고리」도 상위권에 머문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마크 머팔로가 출연한 <비긴 어게인>의 사운드트랙 「Lost Stars」도 있다. 10곡 중 5곡이 드라마와 영화의 삽입곡인 이런 상황을 보면서 누군가는 현실을 개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 산업에 있어서 이런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불만을 성토할 일도 아니다.

 

중요한 건 음악이 점차 영상화되고 있다는 점


애초에 대중음악은 미디어와 밀접했다. 1960년대의 록 음악은 당시 청년 세대와 밀착되어 성공했는데, 여기에 크게 기여한 것이 라디오다. 비틀스가 바다 건너 미국으로 ‘침공’할 때 라디오 뉴스는 10시간 이상 소요되는 이동 루트를 생중계로 보도했다. 1980년대 MTV의 성공은 말할 필요 없이 1가구당 두 대 이상 설치된 텔레비전 덕분이었다. 80년대의 10대들은 거실이 아닌 자신의 방에 놓인 텔레비전을 통해 마이클 잭슨, 듀란듀란,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었다.

 

1990년대 팝의 지구적 성공 배경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스템이 존재했다. 셀린 디옹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 중 하나가 된 건 <타이타닉>의 무시무시한 성공 덕분이었다. 21세기의 대중음악은 드라마 삽입곡과 유튜브 공유 버튼을 통해 시장을 선점한다. 대중음악과 미디어의 관계는 TV가 탄생하던 때부터 밀접했고 영화가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부터는 더욱 더 강화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록큰롤과 록이 10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데에는 TV와 영화의 역할도 컸다. UIP직배로 대변되는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지구적인 확장은 영화 사운드트랙의 상업적 가치를 드높였고 음반사들은 영화의 기획 단계부터 개입해 사운드트랙을 구성했다. 21세기 이후, <C.S.I.>로 대변되는 ‘미드’ 열풍이 유럽과 남미, 아시아를 지배하면서 드라마의 삽입곡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비긴어게인

 

중요한 건 음악이 점차 영상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2009년에 유니버설, 소니뮤직, 아부 다비 미디어가 지분을 나눠 투자한 고화질 동영상 서비스 베보(VEVO)는 현재 가장 대표적인 동영상 채널이 되었고, 2000년의<C.S.I.>나 <어메이징 레이스>이후 급성장한 드라마/리얼리티 쇼는 각 에피소드에 삽입된 음악이 곧장 싱글 차트 상위권에 진입한다는 공식을 낳았다. 현재 가장 유명한 록 밴드 중 대다수가 그렇게 알려졌다. 이점에선 한국도 마찬가지다. 2000년 이후의 한류는 드라마를 통해 동아시아라는 시장을 개척했고, 사운드트랙 역시 곳곳에 소개되었다. 조수미나 이문세 등 중견 가수들의 ‘고급’ 사운드트랙에서 아이돌 그룹의 멤버의 솔로, 인디 밴드의 음악에 이르기까지 현재 드라마 사운드트랙은 한국 음악이 해외로 진출하는데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특히 산업적으로 <가을동화>가 한류를 이끈 2000년 이후부터 기존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한류로 인해 대규모 자본과 기획이 가능한 드라마 전문제작사가 등장했는데,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상징적이다. 하나는 드라마 판권에 대한 방송국의 권리가 절대화되며 계약상 제작사가 사운드트랙에 한해 저작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 또 하나는 그로 인해 드라마제작사와 음반제작사가 협업, 혹은 합병되는 구조적 변화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여기에 2004년 이후 국내에서 온라인/모바일 플랫폼을 기반으로 디지털 싱글시장이 형성되자 드라마 사운드트랙의 시장 영향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음원 차트 상위권에 드라마 사운드트랙이 상당수 포진해 있는 건 꽤 자연스러운 현상인 셈이다.

 

그런데 뭔가 개운하진 않다. 요컨대 사운드트랙은 말 그대로 영상을 보조/보완할 수밖에 없는데, 그 점에서 일관성을 우선하게 된다. 1980, 90년대의 활발하게 드라마 사운드트랙을 담당한 김수철(<TV문학관>, <사랑이 뭐길래>)이나 최경식(<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송병준(<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고개숙인 남자>), 신중현/신윤철(<코리아 게이트>), 윤상(<파일럿>), 최진영(<사랑을 그대 품안에>) 같은 이들이 그랬다.

 

하지만 21세기의 드라마 사운드트랙은 맥락보다 보편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박효신이나 백지영을 비롯해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처럼 ‘누가 불렀는가?’란 점이 더 부각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것은 앞서 말한 시장과 산업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란 점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일은 아니다. 다만 아쉬운 건 아쉬운 대로, 궁금한 건 궁금한 대로 남는다. 10년 후쯤 우리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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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속 전파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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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9월, 가을이다. 감성적이고 고독한 천고마비의 계절... 보다 '2014년 다 끝나 가는데 뭐 했나'라는 자책이 든다. 각박한 책임의 굴레, 모질다.  가을은 이런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다. 미뤄 두었던 독서를 즐기고, 높은 하늘 아래서 사색을 홀짝이며, 아메리카노에 빠지게 한다. 허세라 불리는 운치는 자연스럽게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잃어버렸던 '새로움'을 되찾아준다.

 

간혹 이 '설렘'은 옛 추억에서도 온다. 노스텔지아 그리고 가을, 이번 달 특집 주제가 '라디오'인 이유다. 지친 마음을 느슨하게 할 필요가 있기에 낙엽과 잘 어울리는 치유와 위로의 창구를 택했다. 이번 주는 가사에 라디오 담은 곡들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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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잉넛 - 「고물라디오」

 

나에게 잔소리만 하던 꼰대 같던 형은 공부에 방해된다며 허락도 없이 라디오를 부숴버렸지만, 사랑이 남겨준 새빨간 립스틱처럼 그 때 들었던 음악들은 조금도 빛바래지지 않은 채 머릿속을 맴돈다. 모든 고색창연한 추억들의 총체. 바로 그것이 라디오 키드들에게 있어 전파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외로움에 지칠 땐 연인이 되어 주기도 했고, 맘껏 춤추고 싶을 땐 방안을 자그마한 고고장으로 만들어주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연을 읽어주는 디제이는 학교 선생님보다도, 아니 때로는 엄마, 아빠보다도 소중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이야 수백, 수천개의 인터넷 방송들이 취향별로 분류되어 끊임없는 구애의 손짓을 하고 있지만, 그 시절이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은 간절히 바라고 바라다 포기할 때쯤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던 기가 막힌 타이밍 때문일지도 모른다. 잠시 한눈팔고 있다 뒤늦게 녹음 버튼을 누르지만 이미 앞의 10초를 놓쳐버린 아쉬움에 또 다시 그 곡이 나오길 기다리는 인내의 연속. 결국 추억을 만드는 건, 내가 좋아하는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간절함이 8할이라는 것을 그 과정에서 깨닫는다. 내 것이지만 내 맘대로 조종할 수 없기에 더더욱 소유하고 싶었던 세상. 그것이 바로 너와 나의 고물라디오였다.

 

2014/09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오토그래프(Autograph) - 「Turn up the radio」

 

'라디오의 전성기'는 '메탈의 전성기'와 시대를 공유한다. 80년대를 풍미했던 '헤머 메탈'을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인 오토그래프는 당시의 젊은이들이 음악을 향유했던 풍경을 자신들의 히트곡으로 써냈다. 「Turn up the radio」의 진행은 전형적인 '쌍팔년도' 메탈이다. 육중하게 내려치지만, 어딘가 빈듯한(?) 드러밍을 시작으로 가벼운 건반 터치가 곡 전체를 아우른다. 기타와 베이스, 보컬 역시 우리가 상상하는 그대로다. 가사도 아주 단순하다. “라디오를 켜! 난 지금 음악이 필요하고, 느끼고 싶어. 록 음악과 함께 춤추고, 무아지경에 빠지길 원해!” 지금의 시각에서 재미있는 것은 라디오를 통한 유희다. 라디오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요술램프였다.

 

2014/09 신현태(rockershin@gmail.com)

 

 

윤시내 - 「DJ에게」

 

「DJ에게」는 마녀 한영애와 더불어 1980년대를 풍미했던 소울 싱어 윤시내의 히트곡이다. 차곡차곡 인지도를 높여가던 그를 한 번에 스타덤에 오르게 한 곡이기도 하다. 처연한 가사와 다르게 윤시내의 무대매너는 파격적이었다. 반주에 맞춰 몸을 열정적으로 흔드는 모습이나 중간 중간 내지르는 괴성 등은 관객들을 충격과 흥분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강렬한 무대 장악력은 20여년이 지난 지금의 라이브에서도 드러난다.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가 현재까지 간직하고 있는 음악에 대한 진지함과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 그 노래는 틀지 말아달라고 DJ에게 부탁하는 가사와 달리 「DJ에게」는 라디오와 브라운관을 뜨겁게 달구던 당대의 히트곡이었다.

 

2014/09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도나 섬머(Donna Summer) - 「On the radio」

 

라디오 -그 중 FM- 좀 듣는다는 사람에겐 레지나 스펙터(Regina Spektor)가 떠올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앞서 「On the radio」라는 타이틀로 라디오를 장악한 여자가수가 도나 섬머다. 디스코를 1970~1980년대의 키워드로 만들어 여왕으로 불리다 2년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레전드라는 명예가 덧붙여졌다. 대표곡 「Hot stuff」, 「She works hard for the money」에 비해 「On the radio」가 우리나라에서 받는 관심은 해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 이제는 아주 가끔 올드팝 전문프로그램에서나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반가운 순간이 좀 더 자주 찾아와주려면 글쎄, CF에 쓰이거나 아이돌이 부르거나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거나..

 

2014/09 조아름(curtzzo@naver.com)

 


알이엠(R.E.M) - 「Radio Free Europe」

 

1981년 알이엠(R.E.M)의 메이저 데뷔 싱글. 실존하는 국제 방송국인 '자유 유럽 방송'을 제목으로 따왔다. 허나 정작 라디오 자체와 큰 의미가 있는 내용은 아니다. '해석 불가능'을 작사 작곡의 모토로 삼은 보컬 마이클 스타이프의 소원대로, 당대 유행하던 뉴웨이브 리듬에 다소 모호한 중얼거림이 더해지며 불분명한 의미가 혼란을 자아낸다. 허나 이 혼란스러운 곡은 훗날 알이엠이 쏘아 올릴 얼터너티브 록 혁명의 기폭제가 되어 전설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팝 시장의 지배에 맞선 날것의 사운드는 대학가 언더그라운드를 정복해나갔고, 1983년 데뷔작 < Murmur >는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를 제치고 < 롤링 스톤 > 선정 올해의 앨범이 되었다. 2010년 미 의회 도서관은 '대중의 무관심을 대학가 라디오의 힘으로 극복함으로서 후대의 인디 록에 패턴을 제시했다'는 공을 들어 이 곡을 권위 있는 기록집 '내셔널 레코딩 레지스트리'에 등록했다.

 

2014/09 김도헌(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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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글스(Buggles) - 「Video killed the radio star」

 

1981년 대중음악의 새로운 역사를 쓴 MTV가 최초로 방송한 뮤직비디오가 바로 이 노래였다. MTV는 음악사에서 라디오 시대의 종영과 TV 시대의 개막을 이 노래 하나로 화려하게 선포했다. 사실 MTV 개국 전에는 라디오가 대중음악과 한 몸처럼 여겨질 정도로 밀접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제목처럼 가사도 비주얼시대의 안타까움과 라디오스타에 대한 추억과 애도(?!)에 대해 노래한다. 내용은 쇠퇴하는 라디오와 아날로그 음악 시대를 염려하고 있지만 사운드만은 신시사이저의 첨단으로 중무장했다. 라디오스타는 죽었을지 몰라도 이 노래의 생명력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4/9 김반야 (10_ban@naver.com)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 「Guerrilla radio」

 

음악가임에 앞서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은 행동하는 지식인들이었다. 랩 메탈의 사운드만큼 강렬한 강성의 태도를 담아 사람들에게 전달했고 늘 비판과 불만, 분노의 텍스트를 실어 던졌다. 로스 앤젤레스에 투쟁을 가져온 1999년의 음반< The Battle Of Los Angeles >의 수록곡 「Guerrilla radio」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대중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소수 기득권 층 소유의 미디어 구조에 비난을 가한다. 이를 부각시키는 데에 있어 팀 컴과 브래드 윌크가 깔아놓은 둔중한 리듬 파트와 잭 드 라 로차의 날 선 목소리, 그 위를 가로지르는 톰 모렐로의 펑크(funk) 기타가 이루는 힘 있는 조합은 상당한 효과를 일으킨다. 청명한 가을 하늘 라디오에는 어째 영 어울리지 않네 싶은 분들도 있을 테다. 주위를 둘러보며 듣길 권한다.

 

2014/09 이수호(howard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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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펜터스(Carpenters) - 「Yesterday once more」

 

'어린 시절 라디오를 듣곤 했죠

좋아하는 노래를 기다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며

미소를 짓곤 했죠'

 

지나가버린 유년기의 추억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리처드 카펜터가 실로 뽑아내고, 카렌 카펜터가 섬세한 목소리로 수를 놓는다. 음악은 이토록 우리의 일상에 지워지지 않을 진한 흔적을 남긴다. 어린 시절 따라 부르던 'Sha-la-la-la', 'Wo-o-wo-o' 부분이 흘러나올 때,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던 그 부분이 떠오를 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낭만적이고 순수한 시간을 그리워하며 우리는 눈물짓게 된다. 과거의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Yesterday once more」는 라디오 시대를 살았던 세대뿐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역사의 한 페이지다.

 

2014/09 김도헌(zener1218@gmail.com)

 

퀸(Queen) - 「Radio ga ga」

 

퀸 드러머, 로저 테일러가 아들의 옹알이를 듣고 썼다는 노래다. 의미 없이 “카카”라고 한 것을 '가가'로 바꾸어 썼고 이는 후에 레이디 '가가'의 어원이 되었다. 1984년, 좋은 반응을 얻어 퀸의 빛나는 히트곡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고, 최근 우리나라 < 슈퍼소닉 2014 >에서도 불렀다. 수많은 관객들이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박수율동으로 맞이했다고 한다.

 

당시 유행이었던 신스 팝을 통해 퀸의 매력을 전한다. 신시사이저와 드럼머신 위에 얹혀진 간단한 멜로디는 '라디오'에게 다시 일어나라고 힘준다. 비디오가 대중화된 이후, 약해졌다. 무시 받는다. 하지만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들을 떠올리며 반복해서 말한다. 아직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고.

 

2014/09 전민석(lego93@naver.com)

 

신승훈 - 「라디오를 켜봐요」

 

라디오에는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인다. 즐거운 얘기, 그냥 사는 얘기, 고민 얘기. 때론 당사자에게 전할 수 없는 이야기와 마음을 담은 노래 한 곡을 전파로 쏘아 올리며 그가 우연히 이 사연을 듣길 기도하기도 한다. 2008년 발표된 신승훈의 미니앨범 < Radio Wave >의 타이틀곡 「라디오를 켜봐요」는 그렇게 라디오를 즐기는 우리들의 노래이다.


'지금 라디오를 켜봐요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노래가

그대를 향해 울리는 내 사랑 대신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아나요'

 

아름다운 원태연 시인의 가사가 수놓아진 이 곡은 또한 신승훈의 음악적 변신으로 화제가 되었다. 그의 이름에 자동으로 따라붙는 '발라드'가 아닌 '모던 록'의 옷을 입은 것이다. 라디오 또한 새로운 옷을 입은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제 라디오를 '볼' 수 있으며, 친구와 문자를 하듯 DJ에게 사연을 보낼 수 있다. 새로운 옷을 입는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듯, 라디오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많다.

 

2014/09 성민주(sencibility@gmail.com)


이지형 - 「Radio dayz」

 

그는 1996년 얼터너티 브록 밴드 '위퍼(Weeper)'의 프론트 맨이었다.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말에서 눈치채겠지만 그는 커트 코베인처럼 머리를 헝클고 분노와 좌절을 담에 목에 핏대를 세웠다. 「Radio Dayz」는 그가 2006년 처음으로 솔로로 독립해 발매한 곡이다. 지지직 거리는 주파수 다음, 쏟아지듯 나오는 그의 음성은 설렘과 산뜻함이 묻어난다. 가사도 낡고 오래된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고백'을 노래한다. 난해하고 실험적이었던 '위퍼'의 음악들이 '이지형'이라는 이름과 시선으로 깔끔하고 산뜻하게 변신했다. 그는 이 노래를 통해 '라디오'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2014/9 김반야 (10_b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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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열 - 「라디오 천국」

 

토이, 라디오. 나의 음악을 이루는 2가지 키워드다. 토이의 뮤직비디오로 1990년대 가요에 입문했고, 자정을 넘겨서도 잠이 안 올 때 유희열의 라디오를 들었다. 유희열 1집에 수록되어 있는 「라디오 천국」은 그의 멘트를 오프닝 하는 시그널 송으로 때로는 프로그램 이름으로 DJ 활동 내내 함께 했다.

 

1999년도에 만들어진 곡이지만 여전히 따뜻하고 좋다. 가볍고 말랑말랑한 신디사이저 건반과 오르간이 섬세하고 온화한 유희열의 음악적 개성을 담아낸다. 딱히 화려한 세션이나 감동적인 노랫말, 실험적인 장르를 차용하지 않더라도 좋은 곡은 이렇게 평범하고 소박한 기획 하에 등장한다. 라디오와 음악이 삶을 투영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 둘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라디오 천국」은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게 만드는 청춘뮤직이다. 이것이야말로 라디오 키드들이 그리워하는 담백하고 서정적인 아날로그 음악의 묘미이기도 하다.

 

2014/09 정유나(enter_cruise@naver.com)

 

달리 닷츠(Dolly Dots) - 「Radio」

 

요즘 젊은 세대는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서 며칠은커녕 단 몇 분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듣고 싶은 곡을 핸드폰에 담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되는데 굳이 시간을 투자해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인스턴트식품처럼.

 

'라디오, 모두 라디오를 들어요.
우리가 아는 노래를 따라 불러요.
어딜 가든 당신이 좋아하는 라디오 쇼를 들을 거예요'

 

달리 닷츠의 「Radio」는 마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다양한 음악이 라디오에서 나온다고 노래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래서 요즘처럼 자기만의 컴필레이션이 더 유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 유로 댄스의 대표하는 라디오 찬가 「Radio」를 부른 달리 닷츠는 네덜란드에서 결성된 6인조 걸 그룹이다. 1979년 12월에 발표해서 1980년에 인기를 얻은 이 노래는 특히 일본에서 대박을 기록했고 곧바로 국내에서도 라디오의 단골 레퍼토리로 자리했다.

 

2014/09 소승근 (gicsucks@hanmail.net)

 

시나위 - 「크게 라디오를 켜고」

 

물론 21세기는 스마트폰 하나로 무엇이든 보고 들을 수 있는 시대다. 그러나 과거에는 TV와 컴퓨터가 우리의 방과 후를 책임지던 때가 있었고, 그보다 앞서 음악과 라디오가 거의 모든 오락거리의 중심이던 시절이 있었다. 시나위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음악과 라디오가 놀이문화의 중심에 있던 당시의 정서를 정확하게 잡아낸 곡이다. 꼭 그 시절을 겪어본 이들이 아니더라도, 라디오 방송을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설렘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즐길 거리가 무척이나 많아진 요즘, 이런 설렘은 왜 예전만 못해지는 건지.

 

2014/09 여인협 (lunariani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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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어울리는 잔잔한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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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를 관통하는 낭만시대는 음악의 보고입니다. 요즘 우리가 듣는 클래식 음악의 상당 부분이, 적어도 70% 이상이 이 시절에 세상에 태어난 음악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꼭 들어봐야 할 멋진 곡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가득한 시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그 빛나는 음악들을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드보르작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앞서서 그의 교향곡 9번을 들었지만 8번도 빼놓을 수 없는 걸작입니다. 특히 8번 G장조는 이른바 ‘클래식 비수기’로 불리는 여름철에 많이 연주되는 곡이지요. 음악이 시원하기 때문일 겁니다. 솔직히 푹푹 찌는 여름철은 클래식 음악을 듣기에 적기라고 볼 수는 없겠지요. 아무래도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부터가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에 더 좋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위 속에서 들을 만한 곡이 없는 건 아닙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찾아보면 시원한 청량감을 주는 음악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사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비발디의 협주곡집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 Op.8> 중에서 ‘여름’이 대표적이지요. 또 헨델의 <수상음악 HWV. 348~350>도 강물 위에서 연주했던 곡답게 시원한 선율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드보르작, 특히 그의 교향곡 8번은 트럼펫이 행진곡을 연주하듯이 시원스럽게 뻗어 가는 4악장에서 가슴이 뻥 뚫리는 청량감을 맛볼 수 있는 음악이지요.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8번 교향곡을 조금만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드보르작이 이 교향곡의 작곡에 손을 댄 것도 한여름이었지요. 그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마흔 살이 넘어서야 경제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1885년에 체코의 서쪽 지역 보헤미아 남부의 시골마을 비소카(Vysok)에 별장을 한 채 마련합니다. 허름한 목장을 하나 인수해서 자신과 가족이 머물 수 있는 집으로 개축했다고 하지요. 그랜드 피아노를 갖춘 음악실도 마련하고 정원에 비둘기를 키웠다고 합니다. 어쨌든 드보르작은 그해부터 여름마다 이 별장에 머물면서 많은 걸작을 썼는데 교향곡 8번도 그중 하나입니다. 보헤미아의 시골 마을 비소카에서 마흔여덟 살에 작곡한, 흙냄새 나는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지요.

 

드보르작

드보르작 [출처: 위키피디아]

 

1악장은 첼로, 클라리넷, 호른의 선율로 시작합니다. 보헤미아적 우수가 짙게 깔린 주제 선율이지요. 하지만 이 우아한 알레그로 템포의 선율은 잠시 후에 저음의 현악기들이 뽑아내는 서늘한 리듬으로 표정을 바꿉니다. 이어지는 2악장에는 숲 속에 들어선 것처럼 청량감이 가득하지요. 드보르작의 여름별장이 있던 비소카, 그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떠오르게 만드는 현악기 선율 속에서 플루트와 오보에가 새처럼 노래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선율은 3악장에 등장하지요. 3악장 첫머리에서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주제 선율은 듣는 순간에 누구라도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어서 여름날의 선곡으로 더 없이 적절한 4악장은 행진곡풍으로 터져 나오는 시원한 트럼펫 소리로 문을 엽니다. 팀파니가 둥둥거리는 리듬을 짧게 연주한 후, 첼로가 등장하고 이어서 다른 현악기들이 합세하지요. 변주에 변주가 꼬리를 무는 악장입니다. 여러 차례 변주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마침표를 찍습니다.

 

지난달 18일자 칼럼에서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에 대해 이미 이야기했지요. 그러다보니 8번을 거론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오늘 지면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이렇듯이 들을 음악은 많은데 다 소개할 수 없어 마음 한 구석이 좀 찜찜합니다. 드보르작뿐 아니라 다른 음악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보니 여러분과 함께 들을 곡을 선곡하면서 늘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오늘도 그랬습니다. 드보르작이 교향곡 9번에 이어서 곧바로 작곡한 <현악4중주 12번 F장조>, 이른바 ‘아메리카’라는 부제로 불리는 곡을 들을까 생각했습니다. 1893년 작곡한 이 곡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른바 드보르작의 ‘아메리카 시대’(1892~1895)를 대표하는 곡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첼로 협주곡 b단조 Op.104>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아무래도 현악4중주 ‘아메리카’보다는 첼로 협주곡이 대중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 곡은 ‘첼로 협주곡’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사실 첼로 협주곡은 레퍼토리가 그닥 많지 않지요. 하이든과 슈만, 생상스 등이 첼로 협주곡을 썼고 좀더 세월이 흐르면 중요한 첼로 협주곡이 몇 곡 더 탄생합니다. 영국의 엘가와 러시아의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첼로 협주곡이 있습니다. 20세기로 접어들어서의 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첼로 협주곡은 그다지 레퍼토리가 풍요롭지 않아서 솔리스트로 활동하는 첼리스트들을 애먹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첼로 협주곡이 아마도 드보르작의 곡인 듯합니다. 게다가 이 곡은 드보르작의 아메리카 시대를 마감하는 곡이라고 할 수 있지요. 교향곡 9번과 현악4중주 12번 ‘아메리카’에 이어 드보르작은 연가곡집 <성서의 노래>를 1894년에 작곡합니다. 같은 해 11월에 첼로 협주곡을 쓰기 시작해 다음해 2월에 일단 완성하지요. 친구였던 첼리스트 하누슈 비한(Hanus Wihan)을 염두에 두고 작곡해 그에게 헌정합니다. 이 친구는 드보르작의 고향 친구입니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에 보헤미아 지방을 같이 순회 연주하기도 했던 친구였지요. 그러니 이 곡은 당연하게도 보헤미아의 향토색이 짙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향곡 9번에서도 그렇듯이 이 협주곡에서도 미국 음악과의 융합성을 찾아내려고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보헤미아적 색채와 고향에 대한 향수가 담긴 곡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적절할 겁니다. 예컨대 드보르작이 자신의 음악에서 자주 사용하는 싱커페이션(당김음)을 흑인 음악에만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보헤미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의 민속음악에서 발견되는 요소입니다. 사실 드보르작은 미국으로 떠나기 한참 전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a단조> 등에서 이미 싱커페이션 리듬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드보르작은 첼로 협주곡을 몇 차례 수정해 출판하는데, 그렇게 악보를 고치는 과정에서 친구인 하누슈 비한이 과도하게 수정을 요구해 사이가 나빠졌다는 ‘설’도 있고, 초연을 영국의 첼리스트 레오 스턴이 하는 바람에 사이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곡은 1896년 영국 런던에서 드보르작이 직접 필하모니아 교향악단을 지휘해 초연되지요.

 

궁핍했던 청년기,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풍요롭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았던 드보르작은 54세에 작곡한 이 첼로 협주곡에서 매우 당당한 걸음걸이를 보여줍니다. ‘아메리카 시대’를 대표하는 곡인 교향곡 9번에서 이미 보여줬던 관현악적 호방함이 그의 유일한 첼로 협주곡(젊은 시절에 시도했던 첼로 협주곡은 미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요. 특히 이 협주곡의 관현악 파트는 토속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열정을 물씬 풍깁니다. 그와 동시에 독주 첼로와 목관악기들이 보헤미아적 애수를 짙게 풍기는 선율, 아련한 향수가 느껴지는 서정적 선율들을 곳곳에서 들려줍니다. 말하자면 이 곡은 남성적 격정과 보헤미아의 애틋한 서정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1악장은 서주 없이 클라리넷이 곧바로 첫번째 주제를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어둡고 묵직한 분위기의 선율이지요. 이어서 현과 목관이 합류하면서 강력한 음향의 전체 합주로 고조됩니다. 호른이 연주하는 두번째 주제는 아련한 목가풍 선율이어서 듣는 순간에 곧바로 가슴을 파고들지요.

 

이어지는 2악장은 애틋한 향수의 느낌으로 가득합니다. 오보에와 파곳의 화음으로 문을 열고, 뒤를 이어 첼로가 아름다운 표정의 노래를 부르지요. 가요풍이 두드러지는 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g단조로 조옮김을 하면서 격렬한 전체 합주가 등장했다가 다시 첼로가 부르는 두번째 노래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마지막 3악장은 보헤미아적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악장이지요. 행진곡풍의 리드미컬한 연주로 막을 올립니다. 밝고 화사한 행진곡이라기보다는 묵직한 저음의 발걸음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이어서 화려한 기교의 첼로 독주가 앞에 등장했던 두 개 악장의 주제를 연상시키는 선율을 연주합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첼로가 무엇인가를 회상하는 듯한 연주를 고즈넉하게 펼치다가 음악이 한차례 고조되면서 힘차게 마침표를 찍지요.

 


로스트로포비치.jpg▶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닉/1968년/DG


2007년 타계한 로스트로포비치는 생전에 여러 차례 이 곡을 녹음했다. 남성적 힘과 세밀한 기교를 모두 보여줘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로스트로포비치만큼 이 곡에 어울리는 첼리스트도 별로 없을 성싶다. 20대의 젊은 로스트로포비치는 바츨라프 탈리히가 지휘하는 체코 필하모닉과도 이 곡을 협연해 음반으로 남겼는데, 보헤미아적 토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음반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CD로 구하기 어려운 음반이 됐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한 이 음반은 국내 매장에서 가장 많이 선택받고 있는 베스트셀러다. 호방한 힘과 유장하게 흘러가는 첼로의 노래, 아울러 관현악의 밀도도 탄탄하다.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을 함께 수록했다.

 

 

L[5].jpg▶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 조지 셸?베를린 필하모닉/1962년/DG


프랑스 파리 태생의 피에르 푸르니에(1906~1986)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와는 또 다른 맛을 전해준다. 보다 정갈하고 우아한 연주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연주에 대해서는 보헤미아의 흙냄새가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자의식을 걷어낸 담담하고 유려한 연주에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다. 부드러운 비브라토와 따뜻한 음색 덕택에 오래 들어도 물리지 않는다. LP시절부터 애호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음반이다. 푸르니에도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여러 종의 녹음으로 남겨 놓고 있는데, 조지 셸과의 스튜디오 레코딩이 독주자와 관현악의 절묘한 호흡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호평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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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끝난 건 기껏,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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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가 쓴 『레트로 마니아』에는 ‘노스탤지어’에 대해 수차례 언급된다. 현재성을 대체하는 과거지향의 정서 물고 늘어지는 이 책은 21세기의 문화(적 실천과 태도)를 얘기하기 위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 ‘음악’의 처지를 헤집는다. 다시 말해 ‘레트로’에 대한 불만 섞인 뉘앙스가 지배하는 이 책은 ‘노스탤지어’를 지향하는 21세기의 팝을 겨냥해 콕콕 찍어댄다. “무엇보다 팝은 현재형이어야 하지 않나?

 

팝은 여전히 젊은이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젊은이는 노스탤지어를 느끼지 않아야 정상이다. 소중한 기억을 뒤로할 정도로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팝의 본질은 ‘지금 여기’에 살라는, 즉 “내일은 없는 것 마냥” 살면서 동시에 “어제의 족쇄는 벗어던지라”는 충고에 있다.” 라고 (관점에 따라서는 시원하게) 써버린 것이다.

 

노브레인크라잉넛

 

 

한국 인디 씬의 ‘종말’을 선언하는 앨범


위에 인용한 글에 따르면, 적어도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이 발표한 합동 앨범<96>이야말로 한국 인디 씬의 ‘종말’을 선언하는 앨범일 것이다. 이 음반은 노브레인이 크라잉넛의 노래를, 크라잉넛은 노브레인의 노래를 재해석한 버전에 더해 두 밴드가 함께 만든 「96」을 배치한 스페셜 앨범이다. 짐작대로, 「96」은 크라잉넛이 컴필레이션 앨범 <Our Nation 1>으로 데뷔한 1996년을 뜻하면서, 뒤집어진 거울처럼 숫자 9와 6에 두 밴드를 빗대는 의미다.

96

 

그 뜻에 충실하듯 이 앨범에서는 노브레인 버전의 「말달리자」, 「룩셈부르크」, 「비둘기」를, 크라잉넛 버전의 「바다사나이」, 「아름다운 세상」, 「넌 내게 반했어」를 들을 수 있다. 특히 「96」은 애수어린 건반 솔로를 반주로 “수많은 별빛 밤하늘에 / 반짝 거리는 이 밤 / 초라해진 어깨 위에 달빛 / 나를 비추네 (워어)”라고 노래하며 시작된다. 이 곡을 지배하는 것은 명백히 노스탤지어다. 그런데 이 노스탤지어는 앞서 언급한 사이먼 레이놀즈의 글과는 다소 다른 맥락으로 보인다.

 

2015년이면 크라잉넛이 데뷔한 지 20년이 된다. ‘스트리트 펑크 쇼’로 시작된 한국 인디 씬의 역사가 벌써 20년이란 얘기다. 1974년생부터 1982년생까지 모인 밴드 멤버들의 나이도 벌써 30대와 40대를 가로지른다. 그래서 사이먼 레이놀즈가 염려한 ‘늙어버린 팝’이란 자기모순에 비해 이들의 노스탤지어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과거를 회상할 만큼 실제로 나이를 꽤 먹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 앨범과 음악을 마냥 칭송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 입장에선 재미있는 이벤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면 이 앨범이 환기하는 ‘인디 씬’의 경험은 특정 시공간에 대한 것일 뿐, 인디 씬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브레인과 크라잉넛이 ‘한국 인디’의 대표성을 획득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건 상징적인 위치일 뿐이다. 20년 동안 이 씬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고, 깊어졌다. 음악가들의 양과 질, 형식과 장르, 산업과 공동체가 뒤섞였으면서도 나름의 경계를 유지하는 균형감도 유지하고 있는 드문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거나 다투면서 때로는 협력하고 긴장을 유지하며 상생하고 있다. 이 생물적 역동성이야말로 인디 씬의 기반이다. 중년을 앞두거나 중년의 삶에 진입한 밴드의 노스탤지어를 씬 전체의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야말로 씬의 종말을 선언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다.

 

한편 이 역사, 정확히는 ‘인디 씬 20년’이라는 레토릭이 던지는 감흥은 분명 남다르다. 왜일까. 아마도 ‘우리’는 한국에서 이토록 지속적으로 성장한 음악 공동체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불성실하게 보이리라는 것을 감수하고 다소 거칠게 구분하자면, 1960년대와 70년대에 만개한 ‘한국 록’의 유산은 군부독재로 소멸했다. 1980년대의 하드록, 메탈 공동체는 소수의 스타를 배출하고선 언더그라운드에 내내 머물렀다. 이런 단절을 현재로 불러온, ‘모던’하게 호명한 것은 90년대와 2000년대의 인디 씬이었다. 심지어 이 공동체는 장르적으로도 장소적으로도 다채롭게 분화되면서 20년 동안이나 ‘홍대 앞’이라는 공간을 점유하고 확장시켰다.

 

우리는 이제까지 20년이 넘도록 생존한 음악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했다. 간절히 원했지만 그 하나를 허락받지 못한 것이다. 그 점에서 「96」은 이 씬이 비로소 유년기의 끝을 맞이했음을 선언하는 낭독과 같다. 하지만 끝난 건 기껏, 유년기다. 펑크 아저씨들의 귀여운 이벤트 후에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을 기반으로 삼은 음악 공동체’의 지속가능성, 이 씬을 젊은 상태로 유지하는 어떤 활력이다. 그리고 그 힘은, 당연하게도, 음악과 사람을 연결하는 관계성에 있을 것이다.

 

 

이 칼럼을 마지막으로 ‘차우진의 사운드 & 노이즈’ 연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힘들고 즐거웠어요. 모쪼록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길 바랍니다. 좋은 음악들, 사람들과 함께 좋은 하루를 보냅시다. 그러다보면 불현듯 좋은 삶을 살고 있겠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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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상의 턴테이블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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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독자님들께 정중한 인사드립니다. (90도 폴더 인사 꾸벅) 저는 소설을 쓰는 박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 이름이 생소한 분이 많을 테니 아직은 무명작가겠지요. (부끄러우면서도 허탈한 웃음 크흥크흥)

 

저는 음악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며, 독자님들께 턴테이블 위의 레코드판처럼 지지직거리며 여행지를 돌아보는 느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창밖의 먼 곳을 바라보며 맥주 한 모금 꿀꺽)

 

2주일에 한 번, 하나의 트랙에 펜으로 된 바늘을 올려놓을까 합니다. 이 지면에 과연 읽어줄 만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기분이 좋아 연재하는 동안 엉덩이가 처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리며,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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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다프트 펑크 「겟 럭키」와 스페인 이비자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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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난생 처음 들은 곳은 스페인의 이비자Ibiza 섬이었다. 카탈루냐 식으로 발음하자면 에이비싸Eivissa 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섬에 들어가는 비행기 값이며, 숙박비며, 맥주 값을 낼 때마다 에이, 비싸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오, 이런 잔망스러운 언어유희로 칼럼 첫 회를 시작하게 될 줄이야! 부끄럽고 겸연쩍다.
 

흠, 흠. 제주도 1/3 크기인 이비자 섬은 세상에 흔하지 않은 환락의 섬이자 섬 전체가 거대한 일렉트로닉 클럽이라고 해도 무방한 곳이다. 춤추는 사람들에게 거품을 내리 끼얹는 파티로 유명한 암네시아Amnesia, 탐스러운 궁둥이 두 쪽 같은 빨간 앵두 마크로 유명한 파차Pacha를 비롯해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는 클럽들이 즐비하고, 유명세에 걸맞게 유명 디제이들이 줄줄 찾아와 높은 수준의 공연을 자행하는 곳이다. 여름 성수기엔 호텔들마다 각 클럽들의 이벤트 일정이 도표로 만들어져 게시한다. 이비자만큼 ‘클러버’들이 대놓고 정신없이 흔들기 좋은 판을 깔아놓은 섬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섬에 도착해 헤벌쭉 즐거워하는 순간, 아차 내가 클럽 문화를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냈다는 점이었다. 깜빡깜빡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여행지를 깜빡하고 잘못 선택하는 식의 개그를 하고 싶진 않았는데 꽤 심각한 문제였다. 인생이 초라하고 울적해서 찾아간 환락의 섬에 오자마자 울적해야 한다니 잔혹한 비애감이 파고들었다. 
 

내가 클럽 문화를 즐길 수 없게 된 건, 어느 날 내게 생긴 밀집 공포증 때문이었다. 회사 다닐 때 2호선 만원 지하철에 하도 시달려서인가. ‘죠리퐁’을 먹다 죽도록 사래가 들린 적이 있어서인가. 원인은 모르겠지만 뭔가 바글바글한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런 장애가 생긴 줄도 모르고 홍대에서 한 번 클럽에 갔다가 사람들에 떠밀려 앞쪽에 밀려 나갔는데 갑자기 격심한 요의가 시작되었으나 사람들에 막혀 화장실 쪽으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상태에 직면하자 내게 그 공포증이 있음을 선명하게 인지하고 말았다. 그 순간 다리 관절들이 제 맘대로 부들부들 떨렸다. 사람들은 내가 웃기려고 개다리춤을 춘다고 생각했겠지만 내 표정은 닭한테 닭발로 따귀를 맞은 사람처럼 낯선 공포심에 사색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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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비자의 클럽들 사진도 바글바글한 인파를 자랑하는 장면이 대부분이라 그 공포심을 자극했다. 이비자에 왔으니 화려한 조명과 특수효과 속에서, 멈춘 심장도 다시 뛰게 만들 것 같은 비트에 맞춰 춤을 추고 싶긴 했지만 아무래도 무리가 따를 것 같았다. 더구나 섬을 지배하는 드레스 코드는 ‘헐벗는’ 것이었다. 남자고 여자고 길거리에서 수영복 정도나 달랑 입고 맨살을 노출하며 다니는데, 단단한 근육이나 매끈한 몸매 라인을 강조하는 그 패션을 나는 미처 준비해 가지 못했다. 나로선 최소 3년 이상 꾸준히 운동해도 될까 말까한 몸들이 대세였고 흐름이었고 경향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운동도 안 하고 이비자에 왔단 말인가. 후회가 밀려왔다. 클러버들의 성지에 와서 의식을 거행하길 거부하는 이단자가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비자 섬의 신도들이라면 하루에 오십 번씩 겟 럭키를 들어야 한다는 교리가 있는 듯했다. 섬 어느 술집이나 식당에 들어가도 한 번씩은 꼭 듣게 되는 곡이 다프트 펑크의 ‘겟 럭키’였다. 아예 이비자 섬의 찬송가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곡의 경쾌한 리듬이며 노랫말의 내용이 이비자의 분위기와 딱 떨어지면서 착착 감기니 그럴 만도 했다. 이단자인 나조차 그 음악을 하염없이 듣고 있자면 ‘겟 럭키’(땡잡기?)를 위해 클럽에서 춤추고 밤새며 놀고 싶어지는 경건한 신앙심이 생기곤 했다. 노랫말에 따르면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이므로. 마치 전설속의 불사조처럼. 
 

그러나 클럽은 과감하게 포기했다. 클럽 입장료를 보니 에이 비싸, 라는 말이 또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포기하니 편했다. 
 
그런데 이비자 섬은 클럽문화의 에너지로 리드미컬할 뿐 아니라 굉장히 너그러운 섬이었다. 불경스러운 이교도인 내게 섬은 다른 종교를 권했다. 그것은 자연이 조성한 아름다운 해변들이었다. 그 풍경을 경배하지 않고는 배겨낼 도리가 없는 해변들이 잔뜩 있었다. 이비자 섬은 클럽으로 유명해지기 이전에 미친듯이 아름다운 해변들을 가진 섬으로도 유명했다. 저마다 특색을 뽐내는 해변이 대략 오십 개 쯤 있었다. 
 

나는 그 바다들의 매력에 설렘을 느꼈고 이내 한없이 빠져들었다. 수영을 잘하는 편이 아니지만 이비자 섬의 해변에서 헤엄을 치고 있으면 수영 실력이 좋건 말건, 이 지구 위에서 인간으로 사는 자존감이 극도로 향상되는 기분이었다. 클럽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나지도 않을 만큼 해변들은 내게 융숭한 환대와 축복을 베풀었다. ‘깔라 꼼떼’처럼 유명한 곳은 말할 것도 없고, 숙소 근처의 손바닥만한 해변도 기가 막힌 색채와 구성의 미학으로 은혜를 베풀었다. 오늘은 깔라 꼰따, 내일은 깔라 바싸! 갈 곳이 넘쳐났다. 지중해 바다에 몸을 던져놓고 하루 종일 수영하거나 모래사장에서 책을 읽고, 저녁이 되면 맛있는 맥주를 마시는 패턴으로 지내자 몸과 마음에 점점 에너지도 넘쳐났다. 또한 발랄한 에너지를 뭉게뭉게 발산하는 젊은 여행자들과 분위기 좋은 바에 섞여 앉아 농담을 주고받으며, ‘겟 럭키’를 수십 번씩 듣는 하루하루를 보내자 굳이 클럽에 가지 않아도 그 시간들이야말로 ‘썸씽’ 이고 ‘겟 럭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식당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비키니 차림으로 다니는 섬이라 해변에선 그나마 걸친 수영복도 벗어던지는 사례가 빈번한 것도 부가적인 즐거움이었다. 그들이 아름다운 바다에 대해 표하는 그런 경의는 신성해 보였고,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는 신앙심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이비자 섬에 가서 클럽 근처에도 가지 않고 바다에서만 놀다 온 경험으로 웃길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뜻밖의 소득을 올린 기분이었다. 그 모든 장면과 경험에 배경음악으로 깔린 ‘겟 럭키’라는 음악은 인생이란 어느 정도 흥겨워야만 유연하게 유지된다는 메시지를 각인 시켰다.

 


인생엔 초청하지 않은 울적한 순간들이 자꾸만 찾아오고 뭔가를 잘못 선택하거나 바보 같은 짓을 해버리는 경우가 정말 많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는 대신 다프트 펑크의 ‘겟 럭키’를 듣는다. 이 신나는 곡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머리를 까딱거릴 때마다 마치 이비자 섬의 클럽에서 일생의 스트레스를 해소한 사람들과 같은 기분이 되고, 이비자 바다의 투명한 물속에서 훤히 보이는 물고기들 사이를 유유자적 수영하는 장면이 바로 연상된다. 맛있는 맥주를 건배하며 짓는 은근한 미소나, 유쾌한 농담을 듣고 빵 터지던 표정을 저절로 짓게 된다. 인생을 살면서 이만한 약을 갖고 산다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맥주와 겟 럭키를 함께 섭취하는 걸 마치 종교적 제의로 숭앙하듯 살고 있으며 생의 초라함과 울적함을 튕겨낼 카드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아니 뭐, 이런 게 하나쯤 있어야 사람이 살지. 
 

이비자에 가보지 못했더라도 다프트 펑크의 겟 럭키를 들으면 그 섬을 여행한 것과 유사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을 읽는 누구에게나 좋은 약효를 가진 유쾌한 기억이 잔뜩 생기길 빈다. 싹싹 빈다. 그럼 모두모두 겟 럭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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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지금 라디오를 켜봐요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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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켜봐요


라디오는 음악을 만나게 하고 음악은 라디오를 만나게 한다. 귀에 자기 존재를 맡기는 둘이기에 음악과 라디오는 뗄 수 없는 사이로 긴 시간을 함께 해왔다. 음악 애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조그마한 수신기를 달고 살았고 라디오 팬이라 자기를 칭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전파를 통해 들었던 음반을 끼고 살았다. 그 각별한 관계 덕분일까. 비디오는 아직도 라디오 스타를 없애지 못하고 있다. 음악을 온전히 눈으로 들을 날은 아직 멀어 보인다.


이즘의 필자들 역시 음악만큼이나 라디오를 좋아한다. 내게 영향을 주었던 그 때의 그 라디오 프로그램을 각자 소개해보기로 했다. 글 대부분에 소회가 조금씩 섞였다. 삶의 한 순간에 자리한 이들을 감정 없이 써 내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추억과 공감의 장이 되길 바라며 이번 특집, 출발한다. 순서는 가나다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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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CBS) 


라디오와 함께 하는 식사 시간. 여유를 되찾은 일요일 아침 가족끼리 앉아 대화를 나눌 때 중간 중간의 여백을 클래식, 영화 음악이 채워줬다. 방해받지 않고도 같이 할 수 있는 은은한 정취, 이 시간만큼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따뜻한 제목이 좋아 지금까지 듣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넘치는 에너지와 우렁찬 너털웃음. 성악가 김동규의 유쾌한 분위기는 방송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생일 사연에 축하 노래를 성악으로 불러주고 오페라의 대본 속 다양한 캐릭터를 굵직한 목소리로 조율한다. 가장 좋아하는 코너는 음악칼럼니스트 이준형이 일주일동안의 공연, 음반 정보를 풀어놓는 < 이준형의 보물상자 >다. 소식을 소개하기 전 쏟아지는 두 진행자의 핑퐁 같은 수다를 듣는 재미도 쏠쏠했고, 덕분에 한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던 오페라나 뮤지컬 쪽의 문화 공연을 다시 찾게 되었다. 김동규의 웃음소리와 곧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나올 '10월의 어느 멋진 날'은 이 시간이 주던 행복한 기운을 꾸준히 기억하게 만든다.


2014/09 정유나(enter_cruise@naver.com)



김현철-밤의 디제이 쇼



김현철의 밤의 디스크쇼 (MBC) 


윤상과 이소라를 포함해 '음악 참 잘 하는(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가수 상당수가 이 프로그램을 거쳤다. 본의 아니게 뮤지션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두근대며 들었던 목소리가 김현철이다. 능글맞은 말투와 80년대 디스크자키 향이 묻어나는 어딘가 살짝 독특한 억양이 그렇게 끌릴 수가 없었다. 재미난 사연을 읽으며 껄껄대며 웃을 땐 엄마미소를 지으며 볼륨을 낮추곤 했다. 작가와 피디 등 제작진의 의도가 매끄럽게 소화된 라디오가 이런 게 아닐까 상상하면서 섬세한 구성에 매번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다방면으로 음악을 풀어주고 들려준 진행자 김현철의 역량은 말할 것도 없고. 김현철은 이후로도 드문드문 라디오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4년은 기쁘게도 진행형이다.


2014/09 조아름 (curtzzo@naver.com)



배철수의 음악캠프



배철수의 음악캠프 (MBC) 


1990년 3월 19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2014년 현재까지, 24년 동안 대한민국 팝 음악의 창구로써 전파를 탔던 < 배철수의 음악캠프 >는 국내 팝 음악 프로그램의 상징이다. 해외 유수의 뮤지션들이 출연하여 한국의 팬들과 직접 소통하는 기회도 제공하며, 발 빠른 팝 음악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유일무이의 팝 전문 방송이다. 팝 음악 좋아하는 사람치고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사연 하나쯤은 보낸 기억이 있지 않은가. 이 방송을 빼고 대한민국 라디오 방송의 역사를 논할 수는 없다.


2014/09 신현태 (rockershin@gmail.com)



신해철 고스트네이션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 (MBC) 


요즘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테이프를 통해 집에서 영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학습지가 있었다. 엄마 눈에 비친 나는 늦은 밤마다 학습지를 펼쳐놓고 헤드폰 속 원어민 발음을 들으며 영어를 공부하는 착한 아들이었을지 모르지만, 정작 귀에 걸친 헤드폰에서 영어보다 더 자주 등장하고 있던 것은 심야 프로그램 < 고스트스테이션 >의 마왕, 신해철의 초저음 목소리였다. 생각해보면 당시의 어린 마음은 선곡되는 음악보다도 마왕의 흥미로운 캐릭터 자체에 더 이끌렸던 것 같다. 음악하는 친한 후배가 휴가를 나왔다고 생방 도중 술을 마시러 나가버리는 그의 호기로움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2014/09 여인협 (lunarianih@naver.com)



0시의다이얼



0시의 다이얼 (DBS) 


디스크자키 이장희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전한 사연과 선곡은 방에 처박혀 나약함에 시달리던 사춘기 중3학생의 시선을 '밖으로', '음악으로' 돌리게 했다. 그가 전한 청취자 사연, 약간은 음흉한 너털웃음, 자신의 취향이 실린 팝 가요 선곡은 그 수줍은 청소년을 '은밀하게 위대하게'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했다. 무엇보다 그는 여기서 음악을 얻었다.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등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로 활약 중이던 이장희는 영웅이자 롤 모델이었다. 음악은 숙명적 고지가 되어 무슨 일이 있어도 음악 쪽으로 갈 것을 다짐했다. 1974년 겨울, 유신정권에 의한 갑작스런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광고 탄압 때 프로그램을 감싼 긴장과 불안, 어두움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 노스탤지어의 꼭짓점!


2014/09 임진모 (jjinmoo@hanmail.net)



별이 빛나는 밤에



윤하의 별이 빛나는 밤에 (MBC) 


사실 말해 나는 라디오 세대가 아니다. 주옥같은 명 DJ들이 진행하는 아름다운 노래의 향연을 느껴보지 못했다. 라디오 매체와 친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가 대세인 때를 살지도 않았다.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들었다는 지론은 상당히 평범한 음악 감상법이지만 나에겐 예외였다. 내가 라디오를 챙겨듣던 때라곤 롯데 자이언츠 경기가 있는 날이나 이른 새벽 눈을 비비며 학교 가는 첫차에 몸을 누였을 때뿐이었다.


< 윤하의 별이 빛나는 밤에 >를 듣게 된 것도 사실 라디오나 < 별밤 >에 대한 관심보다는 윤하라는 가수에 대한 무한(!!!) 애정 때문이었다. 첫 라디오 진행이라 어색한 점도, 몇몇 잔 실수들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요 위주 유행가 위주의 선곡도 상관없었다. '윤하느님'이 아리따운 목소리를 들려주신 다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매일같이 내 사연을 읽어주시길 기다리며 사연을 보냈고,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 별밤 간식당 >에 당첨되는 호사도 누렸으나 정작 그 날 방송은 들을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라디오 선곡표를 확인하고,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서 행복해하고, 라이브라도 있는 날에는 거의 하나의 의식과도 같이 집중했다. 라디오를 몰랐던 소년이었음에도 < 윤하의 별이 빛나는 밤에 >의 시간은 사랑이었다. 윤하님이 사랑이었을지라도 어쨌든.


2014/09 김도헌 (zener1218@gmail.com)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 (KBS) 


어릴 적 나에게 있어 걸어 다니며 음악을 듣는다는 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부러운 일이었다.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손에 넣은 마이마이. 기쁜 마음에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를 수십 분, 갑자기 이어폰에서 사람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라디오라는 매체와 나눈 첫인사였다. 그 경험을 전파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준 이가 바로, < 볼륨을 높여요 >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탤런트, 까만콩 이본이었다.


청소년 시절 이렇다 할 질풍노도의 시기가 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덕분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혼란스런 마음을 가라앉혀주던 정서적 안식처였고,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는 무조건 주파수를 맞춘 채(주말도 예외 없이) 꼬박 4년을 그렇게 함께 했다. 자유분방했던 진행스타일로 본의 아니게 반말을 애용하며 언어파괴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듣는 이들에겐 그것이야말로 또래 친구처럼 다가오던 가장 주효한 포인트였다. 잘나가던 아이돌 가수들을 고정 패널로 한가득 실은 채 중고등학생들의 시끌벅적한 수다터가 되어주었던 곳, 하루에 적어도 두 시간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때 내 삶의 가장 큰 활력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가능케 한 이 프로그램은 종영한지 10년이 넘은 지금에도 가끔 생각이 나는, 어릴 적 가장 친했던 친구 중 한명이다.


2014/09 황선업 (sunup.and.down16@gmail.com)



전영혁의 음악세계



전영혁의 음악세계 (KBS) 


처음 이 방송을 들었던 때는 중학교 시절. 2003년이나 2004년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리 긴 청취자가 아니다. 1986년에 시작해 2007년에 막을 내린 전영혁의 긴 DJ 여정에 내가 참여했던 건 고작 두어 해 정도에 그치니. 잠깐이지만 많은 음악을 만났다. 행로 막바지에도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아티스트들을 소개했고 익숙한 밴드들의 초기 음악을 날라주기도 했다. 아직은 생소했다 할지라도 전파를 타고 넘어온 그 소리를 어린 난 상당히 반가워했던 것 같다. '음악은 길게, 멘트는 짧게' 구성했던 스타일 또한 좋게 다가왔다. 불친절하다할 수 있어도 일단은 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국내 팝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1980년대의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내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 전설의 한 페이지로 들어섰다. 내가 잡을 수 있던 그 시기의 유산은 몇 되지 않았다. < 전영혁의 음악세계 >는 그 중 하나였다.


2014/09 이수호 (howard19@naver.com)



정은임의 FM영화음악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MBC) 


영화 < 트루 로맨스 >의 주제곡 「Amid The Chaos Of The Day」이 시그널 음악으로 흐르면 그의 느릿하면서도 깨질 듯 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영화 프로그램이지만 영화보다 더 신랄하게 현실을 이야기하고, 세밀하고 깊게 영화와 우리 인생을 들여다보았다. 프로그램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새벽시간에 방송됐으며, 정은임 아나운서의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전설의 프로그램이 되었다. 물론 전파를 타고 있을 당시에도 청취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라디오 세대의 마지막 DJ'라고 불리기도 했다.


최근에 그의 이름은 트위터나 팟캐스트를 통해 자주 만나볼 수 있다. 고인의 부친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둔 음원이 팬들의 손에 걸쳐 팟캐스트로 다시 태어났고, 트위터에는 그의 오프닝을 따로 정리해 날려주는 봇이 있다.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10년도 더 전에 방송되었지만 그 속에 나오는 현실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그의 오프닝 멘트가 한진중공업 사태와 묘한 '오버랩'이 되어 화제가 된 건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라며 “마치 고공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2014/9 김반야 (10_ban@naver.com)



타블로의 꿈꾸는 라디오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 (MBC) 


<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 >, '의'가 아닌 '와'가 주는 느낌처럼 함께 간다. 특별한 추억이나 향수라기보다 내 일상이다. 2008, 9년에는 제때 들었으나 요즘은 사정상 스마트 폰으로 다시 듣기 하고 있다. 음악을 이어듣지 못하는 게 아쉽다. 고심해서 추렸을 선곡을 음원 사이트에서 따로 듣는다.


“나는 악동, 문학 동네에서 노는 두 얼굴의 문화 잡종” 


「Supreme 100」의 가사처럼 라디오에서도 타블로는 여러 색을 띤다. 번뜩인다. 사연에 답변해주거나 블로노트를 진행 할 땐, 기발하고 감성적이다. 에픽하이 멤버들이 나오면 바보 같고 정신없어진다. 일교차가 큰 편이다. 덕분에 팬층이 넓다. 나는 힙합 팬이라는 경로로 듣게 되었지만 일반적인 대중의 입장이었어도 이해하기 쉽게, 힙합 선곡을 설명해준다. 이를테면 유명 프로듀서들이 참여한 나스의 < Illmatic >을 아이유의 < Last Fantasy >에 빗대어 소개한다. 대중들에게는 흥미를 힙합 팬들에게는 위트를 선사한다. 처음엔 그러한 재미나, 평론가와 기자들이 출연하는 코너에서 정보만 들었다. 그 후엔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와 고민을 듣게 되었고, 때로는 함께 치유 받는다. 들리지 않을 때도 괜히 틀어놓는다. 다른 라디오들처럼 담담하게 옆을 지켜준다. 외로움과 도시의 소음이 두려울 때, 내게는 < 꿈꾸라 >가 있다.


2014/09 전민석 (lego93@naver.com)



푸른밤, 성시경입니다



푸른밤, 그리고 성시경입니다 (MBC)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 2시까지 깨어있곤 했다. 자정에 시작되는 MBC FM4U < 푸른밤, 그리고 성시경입니다 >를 듣기 위해서였다. 0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리고, 스티브 바라캇(Steve Barakatt)의 「No regret」 전주가 흐르면 DJ 성시경은 어김없이 다정한(혹은 느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는 항상 좋은 음악들을 소개해주었으며, 유쾌한 친구들과의 짓궂은 농담으로 나를 웃게 해주었다. 사랑과 사람에 있어 지나치게 뚜렷한 그의 주관이 이해되지 않는 때도 있었지만, 나의 어려움에는 언제나 귀 기울여 공감해주는 목소리에 위로를 받곤 했다. 나는 점차 깊이 빠져들었고, 그의 "잘 자요" 인사에 비로소 하루를 마감했다. 

행복한 하루하루를 함께 해 나가던 어느 날, 그는 이젠 떠나야 한다고 했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울먹이던 음성에 결국 나도 함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가 떠난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마지막 문자를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뿐이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는 동시에 수만 명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는 걸. 


2014/09 성민주 (sencibility@gmail.com)



영팝스



황인용의 영 팝스 (KBS) 


저녁 7시 55분이 되면 자동적으로 책상에 앉아 라디오를 켰다. 그리고 '잠시 후 8시를 알려드립니다'라는 멘트 뒤에 나오는 '뚜뚜뚜뚜~'하는 시보가 끝나면 명징한 종소리에 이어서 등장하는 트럼펫 소리로 시작했던 < 황인용의 영팝스>의 시그널 음악 척 맨지온의 「Give it all you got」은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겐 하나의 종교의식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듣던 < 황인용의 영팝스 >는 1980년대를 살아가던 팝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팝 프로그램이었다. 팝 컬럼니스트로 고정 출연한 전영혁씨, 팝 소식을 전하던 미국 특파원 권오규씨 등도 < 황인용의 영팝스 >의 인기와 함께 덩달아 인지도를 확대했다.


이때도 게스트가 있었지만 철저하게 팝송과 관계된 사람이 출연해 팝송에 대해 이해력을 도왔고, 발 빠르게 팝 소식을 전해줘 음악 정보에 갈증을 느끼던 청취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디제이 황인용씨의 푸근한 진행이 < 영팝스 >의 가장 큰 인기 요인이었다. 1970년대에 앵커와 사회자로 알려진 그는 1980년대가 되면서 '라디오 스타'가 되었다.


2014/09 소승근 (gicsuc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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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인 플랫폼과 대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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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하게 파란 어느 가을, 이탈리아 베로나 역 플랫폼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는 이탈리아 여행의 종착지인 베네치아로 가는 중이었다. 포근한 기온 때문에 후드티를 벗어 손에 드는 순간 어째서인지 플랫폼에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세계가 멸망했는데 나만 모르고 기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색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철길의 침목 주변엔 잡초가 드문드문 돋아 초록초록 싱싱했고, 카푸치노 거품처럼 부드러운 햇살이 선로를 번쩍번쩍 빛나게 만들어 눈이 부셨다. 그것들은 기이하리만큼 생생했다. 


현실의 사물들이 너무 가깝고 선명하게 느껴지자 오히려 현실감이 결여되는 기분이었다. 풀과 하늘과 햇빛과 선로와 플랫폼 벤치가 인격을 가진 채 내게 본조르노?(안녕)하고 좋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내가 대답이 없자 잠시 후 진공처럼 아무 소리가 없는 상태가 쭉 늘어져 순간적으로 호흡이 곤란했다. 갑자기 그런 낯선 분위기에 사로잡히자 뭔가 비현실적인 행동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럴 땐 뭘 해야 할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자 초조해졌다. 나는 내 마음에게 반문했다. 왜지? 기차를 기다릴 땐 사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잖아. 하지만 플랫폼의 분위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요, 이건 비현실이 아니에요. 단지 가을만의 조금 특별한 한 순간인 거죠. 음악을 듣는다거나, 뭐든 감상적인 폼을 좀 잡아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압박감을 느꼈다. 기차 타러 왔을 뿐인데 가을을 타라는 거냐. 평범한 플랫폼이 갑자기 분위기 잡고 이래라 저래라 하다니 이게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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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가방 속에서 음악을 주섬주섬 꺼냈다. 묘한 분위기를 버티기 힘들었고, 이럴 때 음악을 듣지 않는 건 죄악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음악을 재생할 수 있는 시디플레이어의 배터리가 간당간당 메롱이었다. 지난 밤 맥주를 마시며 내내 켜놓고 있었던 기억과 진득한 숙취가 동시에 밀려왔다. 긴 여행에 시달린 내 체력도 딱 방전 상태라는 생각이 들자 시디플레이어에게 감정이 이입되려 했다. 우린 둘 다 지쳤고, 외롭고 불쌍하구나. 그런데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별 것 아닌 풍경에 십대 소녀처럼 쉽게 감상에 빠지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 나는 분위기고 음악이고 나발이고 무시한 다음 벤치에 가만히 앉아 적극적으로 멍 때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음악을 못 들으면 직접 부르면 된다네, 친구. 슬렁슬렁 지나던 바람이 내게 훅하고 속삭였다. 옆머리가 살짝 나부꼈다. 오오, 아침에 귀 옆에 딱 붙이느라 애 먹은 내 머리카락을 함부로 헝클어놓다니, 만만치 않게 집요한 플랫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옳은 충고였다. 아무도 없는 이국의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노래를 부르면 멋질 것 같았다. 불러볼까…. 생각만 해도 몸 깊은 곳 어디에선가 예비전력이 가동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가사가 전부 기억나는 노래가 뭐 있을까.


 나는 이런 저런 곡을 흥얼거려보았다. 그러자,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 엷어졌다. 나는 비로소 이상하고 감상적인 플랫폼이 원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 듯했다. 문득 로드리게즈(Rodriguez)의 슈가맨(Suger man)이 떠올랐으나 그 플랫폼의 분위기랑 잘 맞지 않는 듯했다. 다음으로 포넌 블론즈4Non Blonds의 왓츠업(What’s Up)이 생각났으나 앞부분 가사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산울림의 모든 노랫말을 다 외우고 있으니 그걸 불러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산울림은 한 번 부르면 1집부터 13집까지 정규앨범을 쭉 다 불러야 성에 차니까, 곤란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곡이 하나 떠올랐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이화동’이었다. 나지막이 그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보는 동안 그 플랫폼엔 나 혼자였다. 가을의 맑고 부드러운 날씨란, 배낭여행중인 낯선 이방인에게도 공평하게 포근했다. 뜬금없이 이탈리아에서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이 떠오른 건 어떤 조화인지 알 수 없었으나 참 잘 어울렸다. 별 것 없는 기차역 플랫폼이 그 순간 무척 경이롭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그동안 무수히 보고 지나온 아름다운 건물들과 골목들과 미술들과 바닷가의 예쁜 마을들을 그 플랫폼 하나가 압도해 버리는 듯한 감명이 철렁였다. 


그 장면과 그 순간을 다른 어떤 장소와 시간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분명 두뇌의 미적 판단력이 일종의 오작동을 일으킨 것일 뿐이었겠지만 그 플랫폼의 가을 햇빛은 특별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인지 ‘아름답게 눈이 부시던 그해 오월 햇살 그대의 눈빛과 머릿결까지’ 라는 노랫말을 부를 때 어이없게도 눈에 눈물이 뾰로롱 생겨났다. 헤어진 옛 애인이 떠오르고 그녀의 머릿결과 표정과 내게 건네던 미소와 함께 ‘이화동’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던 빈티지 테이블이 생생하게 기억나버렸다. 가을이란 하늘만 높고 맑게 하는 계절이 아니라 한 남자의 기억도 깊고 맑게 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 선명한 추억 때문에 아름답게 눈이 부셨다. 부시다 못해 아렸다. 그 시절이 내 생애에서 하나의 핵심적인 순간으로 아름다웠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느낌이었다. 즉시 가슴에 압통이 밀려왔다. 돌아갈 수 없는 지나간 시간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는 가슴이 아팠다. 베로나의 ‘푸르게 빛나던’ 가을 햇살이 그것을 쿡 찔러버린 것이었다.  



 이건 무슨, 터프하게 여행하다 말고 대차게 가을을 타면 어쩌나? 나는 감상에 빠져 ‘이화동’을 여러 번 부르면서도 좀 남세스러웠다. 누가 플랫폼에 나타나 “저기 봐, 어떤 동양인 남자가 여행 가방을 끌어안고 질질 짜!” 하며 신기하게 구경하거나 카메라로 찍을까봐 쑥스러웠다. 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대합실로 나갔다. 기차 시간은 십오 분 남아있었다. 


 간단히 세안을 하고, 음악을 듣기 위해 건전지를 사서 플랫폼에 다시 돌아오자,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나 책을 보며 서있었다. 매우 정상적이고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플랫폼 풍경이었다. 방금 전까지 나 혼자 있던 플랫폼은 세상에 없는 어떤 사차원의 관문을 통과해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인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이 또 가슴을 아련하고 애틋하게 만들었다. 지나간 오 분 전의 시간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니 또 아팠다. 여행이 끝나간다는 게 느닷없이 슬펐다. 


이러는데 몇 년을 사귄 사람을 떠올리며 아파지는 건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픔이 다가 아니었다. 비록 비현실적인 플랫폼은 사라졌지만 가슴속에는 그리움과 애틋함과 그 시절을 아름답게 보낸 시간과 그것을 기억한 순간의 감정이 비현실적으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것은 사실 아픈 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었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귀결되기 위해 현실의 대기권을 통과하는 마찰인 것이었다. 



 만약 현실에서 새로운 연애를 하게 되면 도의적으로 당연히 잊을 기억이고, 그렇다면 사람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가을날의 비현실적인 플랫폼을 갑자기 만나더라도 굳이 가슴을 저미며 아파지진 않겠지만 아직 솔로인 이상 나는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었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순간 빌어먹을 옆머리가 또 바람에 휙 날리면서 바보 같은 모양으로 뻗쳤다. 현실의 기차가 일으킨 바람은 내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열차에 오르기 전 고개를 들자 새파란 가을 하늘이 잔인할 만큼 아름답게 느껴져 다시 울컥했지만 간신히 참고 배낭을 어깨에 멨다. 베네치아에 도착할 때까지 이화동의 멜로디와 가사는 끝내 떨쳐지지 않았다. 사실, 떨치고 싶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소중하게 생각하며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는 것은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문을 열어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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