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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 vs 투애니원! 화려한 대결의 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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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두 걸그룹이 한국 가요계를 세계적인 핫 플레이스로 등극시켰다. 소녀시대와 투애니원, 투애니원과 소녀시대. 어느 한 팀을 먼저 언급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기세가 비등비등한 두 팀의 맞대결은 초미의 관심사로 지금 우리들 앞에 서 있다. 라이벌 걸그룹의 역사를 열어 젖혔던 에스이에스와 핑클의 대결구도로부터 15년, 완벽히 구축된 아이돌 시스템과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 각국의 대중들이 가세하며 성사된 제2차 라이벌 매치는 가히 매머드급의 규모라 할 만큼 거대해졌다. 단순히 아이돌 가수간의 대결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이 마주침이 발생시킨 소용돌이는 과연 무엇을 낳고 무엇을 빼앗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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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막강세력간의 조우는 소녀시대의 컴백소식이 연기된다는 소식으로부터 점차 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뮤직비디오 파일 손실로 인해 예정된 일정을 미룬다는 뉴스가 나오기 바쁘게, 투애니원 측 역시 음원 공개 날짜를 늦춘다는 공지를 띄웠다. 이러한 '밀고 당기는' 기획사간 심리전에 촉각을 곤두세운 건 바로 각종 매스컴이었다. '눈치 싸움', '빅매치' 등의 표현이 각종 포털을 장식해갔고, 스마트폰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본 이라면 알고 싶지 않아도 두 팀 간의 경쟁구도를 알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돌입했다. 결국 소녀시대가 2월 24일, 투애니원이 2월 27일로 발매를 확정지음으로서 이 '실체 없던 맞대결'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렇게 두 팀의 음악이 대중들에게 전파된 며칠 후 지금,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분석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 TV를 켜도 이들의 비교자료가, 인터넷이나 SNS를 접속해도 이들의 이야기로 타임라인이 장식된다. 이 충격파에 그러려니 하다가도, 이 과하게 끓어오른 열기에 손이 데일세라 황급히 정신을 챙기게 된다. 아무리 화제 만들기에 좋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다른 가수들이나 노래, 공연에 대한 소식들이 보이지 않는 연유다. 마치 이 두 팀만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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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상급'이라는 위치적인 측면에서 라이벌로 몰아가기에 적합했을 뿐, 두 팀은 기본적으로 많은 차이점이 있다. 음악적인 스타일도 명확히 다르거니와, 남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통속적인 성역할에 충실한 활동을 해왔던 소녀시대와 자유분방함과 주체적인 모습을 통해 기존 여성의 관념을 전복시킨 투애니원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정반대편에서 평행선을 그린다. 때문에 팬층도 다르고, 이들이 노리고 있는 타깃도 큰 차이를 보인다. 여기에 과도한 시선집중이 노골적인 상업성 지향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점에서 이 두 기획사가 각종 매체의 도움을 받아 VS의 양상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은, 본인들이야말로 가요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심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도 마치 경쟁하는 듯, 실상으로는 서로의 힘을 빌려서 말이다.


아이돌 신은 최근 몇 년간 엄청난 확장을 이루어 왔다. 에이치오티 때부터 출발한 연습생 시스템은 완벽한 체계를 갖추며 '아이돌 고시'라는 이름으로 인재를 독식해 갔고, 이를 넘어 랩이나 연주 등에 재능을 갖춘 이들조차 아이돌 멤버를 자처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조금씩 가시화되었던 해외시장은 카라와 슈퍼쥬니어를 필두로 케이팝이라는 신조류를 만들어 내며 그 파이를 거대한 크기로 키워냈다. 이에 가수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길어진 생명력을 자랑하며 긴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 중심에는 완벽한 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패러다임을 만들어 낸 우리, 바로 SM과 YG가 있다는 것을 이들은 어필한다. 자신들이 가진 영향력은 어느새 미디어를 컨트롤할 수 있을 만큼 커졌고, 조회 수가 보장된 수많은 기사들을 통해 자사의 아이돌을 계속해서 가십의 중심에 올려놓고 있다. 마치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이 사이클이 두 그룹이 함께 활동하는 지금 이 순간 명확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스포트라이트의 독점도 불편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불러일으킨 화제를 음악이 전혀 받혀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Mr.Mr.」는 「I got a boy」에 비해 한결 간결해진 구조를 보여주고 있지만 흡입력 있는 멜로디의 부재로 다소 심심한 인상을 남기며, 「come back home」은 레게와 더티 사우스를 서정적인 분위기로 마감질했지만 기존에 해왔던 그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앨범 전체를 훑어보아도, 이들에게 수식된 미사여구를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아이러니다. 기껏해야 별 두개 내지는 별 두개 반짜리 작품을 두고 왜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귀중한 시간을 들여 이렇게까지 아웅다웅해야 하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다.

 




이렇게 두 그룹이 모든 매체를 흡수해버리고 있는 사이, 다른 음악을 듣고 싶은 이들을 위한 정보는 요원한 상황이다. 우선, 난립하던 중소기획사들의 아이돌들의 활동부터가 자취를 감췄으니 다른 카테고리의 뮤지션들은 안 봐도 블루레이다. 얼마 전 미국 음악웹진 < Indie Shuffle >에서 다프트 펑크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던 프롬 디 에어포트가 국내에 첫 앨범을 내기도 했고, 옥상달빛은 일본에서 성공적인 단독공연을 마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상은은 간만에 정규작을 발표했으며,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엔 포털에서조차 중계권을 얻지 못한 한국대중음악상이 아프리카 TV를 통해 생중계되고 있다. 이렇게 몇 가지 예시를 든 것처럼, 조명이 비켜간 어둠속엔 '진짜 음악'을 위해 노력하는 아티스트들과 관계자들의 원치 않는 희생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분명 꽤나 무겁게 다가오는 가요계의 단면이다. 그리고 이는 외부에 늘어놓은 자랑거리만 생각하느라 내부 사정은 뒷전인 우리나라를 정면으로 비추는 적나라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새로움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거스르기 위한 최종단계는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안겨줌과 동시에 그들을 선도할 수 있는 새로움의 리더십이다. 소녀시대는 자본을 바탕으로 한 시스템의 극대화로, 투애니원은 장르음악의 특화로 이 과정을 이미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들은 자리 지키기를 위한 화제 모으기에만 급급할 뿐, 진짜 정상의 품격이란 게 무엇인지에 대한 대중들의 물음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것이 아니냐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러기엔 여지껏 이들이 가져간 지분만큼 좋은 음악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대중들의 피해가 너무 크게 다가온다. 



아이돌 신에서밖에 이슈를 만들지 못하는 케이팝 신의 구조적 취약함이 결국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정보의 폭을 좁히고 취향을 평준화시켰으니, 반대로 아이돌 신에서 자기들 방식대로 음악사에 남을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득실관계가 그나마 균형을 이루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웃기게도 이들은 남의 핀조명까지 흡수해 홍보전략을 편 그 대가를 본인들의 음악으로는 조금도 메우지 못한 채 이를 고스란히 대중의 몫으로 떠넘기고 있다. 왜 그 책임을 나를 비롯한 음악 애호가들이 져야하는지에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미루어보건대, 2014년 2월 가요계는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텅 비어있으며, 지나고 보면 어느 때보다도 황망한 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건 짐작이 아닌, 확신이자 예언이다.  

 

 

글/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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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에이핑크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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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 에이핑크는 별로 인기가 없다. 보편적인 기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이 정확히 언제 데뷔했는지도 모르거나 발표했던 곡 제목도 기억하기 힘들 것이다. <응답하라 1997>의 정은지가 속한 걸 그룹이라고 하면 그제야 알 것도 같다는 표정을 짓겠지만, 동시에 다른 멤버가 누구고 어떤 옷을 입었으며 어떤 음악인지 도대체 모를 것이다. 심지어 여타의 걸 그룹들처럼 에이핑크도 야한 콘셉트의 댄스 음악을 부를 거라는 짐작을 할수도 있다. 아이돌에 관심이 많지 않다면 당연하다고 본다. 아이돌과 비-아이돌로 양분된(여러 번 밝혔듯이 나는 이런 분화가 이미 고정되었다고 생각한다) 가요계에서 극한 경쟁은 필연적이고, 특히 포화 상태인 걸 그룹 생태계에서 인지도를 높이려면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섹시함을 선택하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지만 에이핑크는 ‘놀랍게도’ 한 번도 섹시한 콘셉트를 표방하지 않은 소장파 걸 그룹이다. 그리고 나는 이게 에이핑크의 정체성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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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1일 정오, 에이핑크의 새 앨범 『Pink Blossom』이 공개되었다. 반주곡을 제외한 6곡이 실린 이 네 번째 ‘미니앨범’은 기존에 에이핑크가 발표했던 곡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에 발표한 곡이 어떤지 모를 테니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팬들이라면 에이핑크의 음악을 ‘순수하다’고 표현할 것 같고, 보편적인 감상자의 입장에서라면 ‘착한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음악은 90년대 아이돌 음악부터 특징 없는 가요, BGM의 기능에 최적화된 미드 템포의 팝의 연장에 있었다. 2011년의 데뷔곡 「몰라요」는 쿵짝대는 리듬 위에 뻔한 멜로디를 구축한 뒤 어설픈 랩을 삽입한 90년대 댄스 가요의 전형을 따랐고, 2012년 5월에 발표된 정규 1집에 수록된 「Hush」는 소위 ‘뽕댄스’의 구조, 훅이 강조되는 구성으로 원초적인 관심을 끄는 데 충실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훅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기도 하지만 훅이야말로 대중음악의 핵심이다) 매스미디어에 최적화하는 걸 우선적인 목표로 삼으면서 피로감과 지루함을 극복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반면 2013년 7월에 발표한「NoNoNo」는 매끈하게 정돈된 팝을 표방하며 어느 정도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만 그룹의 인지도나 영역의 확장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대중에게 확실한 각인을 남기는 곡은 아니었던 것이다. <응답하라 1994>의 성공은 그 뒤에 왔지만 그마저도 정은지 개인의 인지도가 그룹의 정체성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정은지가 걸 그룹의 멤버란 사실조차 헷갈린다)

 

 

이렇게 뻔한, 혹은 쉬운 음악은 특정 대상을 겨냥하기보다는 불특정 다수를 노린다. 바꿔 말해 특정 집단이 아닌 보편적 감수성에 호소하게 되는데, 시사적인 건 대중적으로든 비평적으로든 성공한 아이돌 팝이 오히려 확실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런 보편성을 추구하는 태도가 오히려 음악적 개성을 가리며 대중성을 놓치게 되는 악재가 되는 셈이다. 그 점에 비추어 새 앨범을 살펴보면, 안타깝게도 거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인상을 남긴다. 『Pink Blossom』에 수록된 곡들 중에서 이단옆차기가 주도한 「Mr. Chu」외에 딱히 어떤 곡도 남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Mr. Chu」조차도 보편적이고 관습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맥이 풀리는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때부터다. 내 기준에서 에이핑크의 음악과 정체성은 무색무취한데,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2011년 이후 현재까지 꾸준한 것이다. 콘셉트가 없는 게 콘셉트인 것처럼 이들은 의상이나 안무, 음악에서 튀기보다 무난한 걸 택했다. 앞서 신나서 써댄 것처럼 비판도…. 아니, 보통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사이에 다른 걸 그룹들이 온갖 스타일과 콘셉트를 바꾸고 더 강한 이미지를 만들려 애쓸 때(그 중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리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에이핑크는 얌전하고 순응적인 소녀 이미지를 얻었다. 나는 이 이미지가 걸 그룹 포화기에 ‘어쩌다 얻어걸린 요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반작용이 흥미롭기도 하다. 왜냐면 이런 정체성이야말로 메인스트림의 대중음악이 모두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우연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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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이핑크가 이렇게 어중간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 특히 밖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요컨대 멤버들의 부모가 섹시한 콘셉트를 결코 수용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의). 그런 이유와 무관하게 큰 일이 없는 한, 이런 스타일을 꾸준히 유지할 것도 같다. 그러면서 지금처럼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밀착된 팬덤의 지지를 더 많이 얻어낼 수도 있으리라 본다. 사실 에이핑크의 입장에서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물론 이들의 뻔한 정체성이 앞으로도 그대로라면, 나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음악을 소비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흥미롭다. 꾸준하게 일관된 애매함이 마침내 대중적 관심을 자극하는 맥락 때문이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려면 일단 팬클럽에 가입한 뒤에 이들의 음악과 콘셉트가 진심으로 좋아질 때까지 활동해야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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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과소평가 받는 ‘자넷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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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 흑인음악은 전 세계에서 초강세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상대적, 아니 절대적으로 푸대접을 가수가 바로 마이클 잭슨의 여동생 자넷 잭슨이죠.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 토니 브랙스톤, 보이즈 투 멘, 올 포 원 등이 우리나라에서 수십만 장의 앨범을 팔아치울 때도 자넷 잭슨의 음반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김건모와 서태지와 아이들, 솔리드, 듀스로 대표되는 흑인음악의 열풍은 2000년대 들어서도 여전하지만 자넷 잭슨에 대한 국내에서의 미적지근한 반응은 요지부동입니다. 물론 그의 음악이 정통 알앤비와는 거리가 있는 댄스 팝에 가깝긴 하지만 '참을 수 없는 댄스 음악의 가벼움'으로 댄스곡을 하찮게 치부해 버리는 우리나라 음악 팬들의 비뚤어진 시각도 큰 작용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자넷 잭슨의 노래는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지미 잼과 체리 루이스라는 명 작곡가 겸 프로듀서와 함께 작곡과 제작에도 깊숙이 관여한 그는 그저 그런 꼭두각시 댄스 여가수가 아닙니다. 비록 2004년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가슴이 드러나는 사고 이후로 급속히 쇠락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마돈나와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여성 댄스 팝 싱어 송라이터였다는 점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코너에서는 국내에선 평가절하 된 자넷 잭슨의 수많은 히트곡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15곡을 시대 순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자넷잭슨

 

 


1. What have you done for me lately (from Control)
자넷 잭슨의 첫 번째 싱글 히트곡으로 1986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4위, 영국차트 3위에 올랐습니다. '네가 요즘 나한테 해준 게 뭔데?'라는 제목만 봐도 순종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죠. 남자친구한테 그의 잘못을 당당하게 따지는 이 곡은 1980년대 중반에 많은 여성 가수들이 외치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여성의 마음가짐을 담은 노래입니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에서 자넷 잭슨과 백댄서들은 절도 있으면서 현란한 춤을 보여주는데요. 이 안무를 고안한 사람이 몇 년 후에 「Straight up」과 「Rush rush」로 인기를 얻은 폴라 압둘입니다. 가수로 데뷔하기 전에 안무가로 활동했던 폴라 압둘이 직접 출연한 이 뮤비에서는 우리나라에선 소위 '올챙이 춤'으로 알려진 동작이 등장하죠.

2. Nasty (from Control)
부담스런 타이즈를 입은 남성들이 골반을 열심히 흔드는 춤이 참으로 거시기했던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 역시 폴라 압둘이 안무를 맡았습니다. 미국에서 3위를 기록한 「Nasty」는 자넷 잭슨의 안 좋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곡입니다.
< Control >을 만들 때, 자넷 잭슨이 녹음실로 가다가 길거리에서 양아치들을 만나 언어로 성적인 모욕을 당했다고 해요. 그들은 자넷 잭슨에게 “Hey baby”라고 부르면서 희롱했겠죠. 이 나쁜 경험을 토대로 한 「Nasty」에서는 그래서 'No, my first name ain't baby, It's Janet'이란 가사가 등장합니다. 이 노래 역시 당당한 여성을 대변하는 곡인데요. 지미 잼과 테리 루이스의 프로듀싱은 이 노래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합니다. 인더스트리얼의 요소도 감지되는 「Nasty」를 반드시 헤드폰으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VH1에서 집계한 '1980년대의 위대한 노래 100'에서 45위를 차지했고, 음악 전문지 < 롤링 스톤 >의 '위대한 팝송 100'에서는 79위에 올 습니다.


 


3. When I think of you (from Control)
자넷 잭슨의 첫 번째 빌보드 넘버원입니다. 이 노래로 오빠인 마이클 잭슨과 함께 빌보드 정상을 따로 배출한 최초의 남매라는 기록을 만들었죠. 자넷 잭슨과 지미 잼, 테리 루이스가
< Control >앨범을 만들 때, 조지 머렐과 셰넌 루비캄이라는 작곡 콤비로부터 노래 하나를 제공받았지만 그 곡을 거절하고 「When I think of you」를 수록했는데요. 이 거절당한 노래가 바로 휘트니 휴스턴이 불러서 빌보드 1위를 차지한 「How will I know」였죠. 베이스 리듬이 충만한 이 노래는 나중에 노르웨이의 애시드 재즈 그룹 디사운드의 「Sunshine」과 비슷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4. Control (from Control)
자넷 잭슨을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려놓은 세 번째 앨범의 타이틀트랙. 그의 여러 히트곡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리듬 패턴을 소유한 이 노래는 빌보드 5위에 랭크됐고 1988년도 < 소울 트레인 어워즈>에서는 오빠 마이클 잭슨과 휘트니 휴스턴, 조디 워틀리를 제치고 최우수 알앤비/소울 비디오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처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조 잭슨에 의해 좌지우지됐던 우울한 10대를 끝내고 이젠 자신의 인생을 콘트롤하겠다는 의지를 다진 이 곡은 카일리 미노그가 「Too much of a good thing」에서 샘플링했죠.

5. Miss you much(from Rhythm Nation 1814)
1989년에 공개한 명반
< Rhythm Nation 1814 >의 첫 싱글로 자넷 잭슨의 통산 두 번째 넘버원입니다. 지미 잼이 헤어진 여자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게 된 이 노래는 강한 비트와 리듬과 맞아 떨어지는 가사의 운율 때문에 왠지 딱딱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흑백 영상으로 처리된 뮤직비디오를 통해 접하면 그 청각적 쾌감은 대단하죠.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잠깐 인기를 얻었던 남성 가수 양준일의 데뷔곡 「레베카」는 바로 「Miss you much」를 따라한 노래였고, 2006년에 큰 성공을 거둔 영화 < 미녀는 괴로워 > 사운드트랙에는 김아중이 부른 버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6. Rhythm nation(from Rhythm Nation 1814)
앨범< Rhythm Nation 1814 >의 두 번째 싱글로 빌보드 2위를 차지한 곡인데요. 사실 이 곡은 노래자체보다는 뮤직비디오가 더 유명합니다. 흑백으로 처리된 영상에서 경찰복 같은 유니폼을 입고 절도 있는 춤을 선보인 자넷 잭슨과 백댄서들의 움직임은 차가운 분위기의 「Rhythm nation」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래미, MTV, 빌보드 등 많은 매체에서 선정하는 뮤직비디오 부문을 싹쓸이했습니다. 오빠 마이클 잭슨이 「Billie Jean」과 「Beat it」으로 뮤직비디오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처럼 동생 자넷 잭슨도 선명한 발자취를 새긴 것이죠. 레이디 가가, 비욘세, 셀레나 고메즈 등이 「Rhythm nation」의 춤을 따라했고, 소녀시대와 애프터 스쿨은 텔레비전에서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출 정도로 「Rhythm nation」의 뮤직비디오와 안무는 전 세계 댄스 가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죠. 펑크(Funk)음악의 1세대 뮤지션 슬라이 & 더 패밀리 스톤의 1970년도 넘버원 싱글 「Thank you」의 베이스 리프와 건반 연주를 샘플링한 힙합 리듬 위에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요소까지도 포함한 「Rhythm nation」은 시대를 앞서간 노래였습니다.

7. Escapade (from Rhythm Nation 1814)
이 밝고 경쾌한 노래는 자넷 잭슨의 세 번째 1위곡이 됩니다. 「Escapade」는 「Dancing in the street」로 유명한 모타운 출신 걸그룹 마사 & 더 반델라스의 1965년도 히트곡 「Nowhere to run」에서 영감을 받았는데요. 사실 자넷 잭슨은 「Nowhere to run」을 리메이크하고 싶었지만 지미 잼과 테리 루이스는 그 의견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 대신 「Nowhere to run」과 유사한 노래를 만드는데 그게 바로 「Escapade」죠. 지미 잼과 테리 루이스가 만드는 노래는 멜로디도 좋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쳐주는 리듬이 정말 일품입니다.



8. Black cat
(from Rhythm Nation 1814)
1990년에 차트 넘버원에 오른 이 곡은 자넷 잭슨에게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줍니다. 이 노래로 그래미 최우수 여성 록 보컬 부문 후보에 올랐는데요. 티나 터너 이후 오랜만에 록 필드에 노미네이트 된 흑인 여가수가 됐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헤비한 기타 연주 덕분이죠. 데이브 배리라는 기타리스트의 육중한 기타 리프는 당시에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헤비메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인데요. 뮤직비디오 버전에서는 익스트림의 기타 주자 누노 베텐코트가 연주했고, 기타 리믹스 버전에서는 흑인 4인조 하드록 밴드 리빙 컬러의 기타리스트 버논 레이드가 연주했습니다.

9. Love will never do (Without you) (from Rhythm Nation 1814)
1991년 초에 빌보드 정상을 차지한 자넷 잭슨의 다섯 번째 넘버원이자
< Rhythm Nation 1814 >에서 일곱 번째로 탑 5 안에 든 싱글입니다. 이로서 자넷 잭슨은 한 앨범에서 일곱 곡을 빌보드 싱글차트 5위 안에 랭크시킨 유일한 가수가 됐고, 한 음반에서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년 동안 1위곡을 배출한 가수라는 기록도 보유하게 됩니다. 자넷 잭슨은 1987년에 유명한 트럼페터 허브 알퍼트의 히트곡 「Diamonds」에서 보컬을 맡은 보답으로 이 노래에서는 허브 알퍼트가 트럼펫을 연주해 주죠. 이 노래를 잘 들어보면 첫 소절은 마치 남자 가수가 부른 것처럼 들리는데요. 사실 이건 자넥 잭슨이 키를 낮춰서 부른 겁니다. 지미 잼과 테리 루이스가 이 노래를 처음 만들 땐 프린스나 저니 길 같은 남자 가수와 듀엣 곡으로 작업을 진행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넷 잭슨에게 남자처럼 낮은 옥타브로 불러달라고 부탁해서 이 노래가 완성됐죠.

10. That's the way love goes (from Janet)
자넷 잭슨은 1990년대 초반까지 통통한 몸매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검정색 의상을 자주 입었는데요. 1993년에 발표한
< Janet > 앨범부터 그는 체중을 줄이고 자신 있게 노출을 감행합니다. 이 음반의 첫 번째 싱글로 커트된 「That's the way love goes」는 제임스 브라운의 「Papa don't take no mess」를 샘플링한 곡으로 8주 동안 싱글차트 정상을 차지했고 그래미에서 최우수 알앤비 노래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4,000만 달러를 주고 자넷 잭슨을 모셔온 버진 레코드는< Janet > 앨범에서 「If」를 첫 싱글로 발표하길 원했지만 지미 잼과 테리 루이스, 자넷 잭슨은 「That's the way love goes」를 먼저 내야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엔 이들의 결정이 맞았음을 증명했죠. 은근한 섹슈얼리티가 일품인 이 노래는 로빈 씩을 비롯해, 크리스티나 밀리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그리고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냉소적이고 가멸찬 평가로 알려진 음반 제작자 사이먼 코웰 등이 좋아하는 곡이라고 합니다.

자넷잭슨

 



11. If (from Janet)
「That's the way love goes」에 밀려 두 번째로 발표된 싱글이죠. 위대한 걸그룹 슈프림스의 마지막 넘버원인 「Someday we'll be together」를 샘플링한 「If」는 펑키(Funky)한 알앤비 댄스 넘버지만 그 안에는 록뿐만 아니라 인더스트리얼의 요소도 끌어들여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합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2011년에 소녀시대의 공연에서 유리가 이 곡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지만 「If」는 아직도 유명하지 않은 미지의 댄스곡입니다.


12. Again
(from Janet)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자넷 잭슨의 노래로 감정을 절제하고 부르는 그의 가창력이 돋보이는 발라드 곡인데요. 래퍼 투팍과 함께 주연을 맡은 영화 < 포에틱 저스티스 >에 삽입된 「Again」은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에서 주제가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진 못했습니다.

13. Together again
(from Velvet Rope)
1997년에 발표한
< Velvet Rope >는 이전에 발표한 음반들과는 또 다른 음악을 시도한 작품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와 트립합을 수용한 이 앨범은 자넷 백슨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상대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죠. 여기서 두 번째 싱글로 낙점된 「Together again」은 그의 8번째 넘버원으로 에이즈로 사망한 친구에게 바치는 곡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차분한 발라드 스타일의 노래였지만 여러 차례의 편곡과 어레인지를 거쳐서 하우스 리듬이 넘실대는 1960년대 모타운 걸그룹 풍의 발랄한 노래로 탈바꿈했습니다.



14. All for you (from All For You)
2001년에 7주 동안 차트 정상을 차지한 자넷 잭슨의 마지막 넘버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꽤 애청된 이 노래는 그래미에서 최우수 댄스 레코딩 부문을 수상했는데요. 이 곡은 위대한 디스코 그룹 쉭으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은 이태리 그룹 체인지가 1980년에 발표해서 인기를 얻은 고품격 디스코 넘버 「The glow of love」의 도입부를 샘플링했습니다. 여기서 리드 보컬을 맡은 사람은 루더 밴드로스죠. 자넷 잭슨은 지미 잼과 테리 루이스의 권유로 「The glow of love」를 처음 듣고는 반해서 샘플링하는데 동의했다고 합니다.

15. Someone to call my lover
(from All For You)
맑고 경쾌한 기타 소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자넷 잭슨의 마지막 탑 텐 싱글입니다. 2001년에 3위를 기록한 「Someone to call my lover」는 포크 록 그룹 아메리카의 1972년도 히트곡 「Ventura highway」의 통기타 기타 리프를 샘플링했죠. 이 곡 덕분에 아메리카의 「Ventura highway」가 젊은 세대에게도 알려졌습니다.

 

 


글/ 소승근(gicsuc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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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 이선희의 새 앨범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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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일갈처럼 2014년은 ‘미친 것’ 같다. 이승환, 이선희, 이소라, 바이브, 임창정, 박효신의 새 앨범이 동시적으로 나왔다. 그 중 이선희와 이소라의 앨범은, 실제로 그 둘이 지향하는 음악적 방향이나 겨냥하는 팬층이 다르다고 해도, 비슷한 시기(2주 정도)에 비슷한 방식으로(젊은 작곡가들과 협업)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비교될 만하다.

이선희는 2009년 14집 <
사랑아>를 발표하고 5년 만에 복귀했고 이소라는<7>이후 6년 만이다. 이선희는 이번 앨범을 준비하며 백지영, 2AM, 윤미래 등의 앨범에 참여한 작곡가 MISS KAY와 공동 프로듀서를 맡았고 이소라는 본인이 직접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선희는 이단옆차기와 박근태, 고찬용, 선우정아, 에피톤 프로젝트의 곡을 받았고 이소라는 임헌일, 정준일, 이한철, 정지찬, 김민규(델리 스파이스) 그리고 토마스 쿡(정순용)과 함께했다. 비슷한 방식이지만 두 앨범이 뻗어가는 방향은 상당히 다른데, 그 점에서 이 ‘연륜 돋는’ 가수들의 프로듀싱을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이선희는 보다 대중적인, 그러니까 보편적인 감수성의 재현과 보컬리스트로서의 이선희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반면 이소라는 기존의 이미지를 부수는 파격적인 쪽으로 잡은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앨범의 반응이나 완성도를 평가하는 차이가 생길 것 같다.

 

 


이소라

 

이소라 <8>, 어떤 의미에서 컬트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소라의 <
8>은 음악적 외도, 혹은 파격이라고 할 만큼의 변화를 보인다. ‘낯선사람들’이라는 국내최초의 재즈보컬그룹에서 활동하던 그녀가 1995년 솔로로 데뷔한 후 이제까지 큰 변화 없이(부분적인 파격은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건 처음이다) 자신의 역량을 발휘한 걸 생각하면 확실히 의외의 부분이다. 일단 앨범의 커버도 검은 색이고, 임헌일과 정준일이라는 음악가들을 참여시키며 ‘쎈’ 음악을 선보이며 충격적인 효과를 노린다. 이때 그 강도를 오히려 1번부터 점차 약하게, 디미누엔도처럼 설정한 건 꽤 큰 승부수였을 것 같다. 임헌일과 정준일이 만든 「나 Focus」와 「좀 멈춰라 사랑아」, 「쳐」의 ‘쎈’ 전개는 이한철의 곡에 이르러 서서히 약해지다가 김민규의 곡에서는 일종의 그라데이션 효과를 내며 겹쳐진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는 1번부터 4번까지 곡의 매력도가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에 이 파격은 무리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반면 정지찬의 곡 「넌 날」과 「난 별」은 다 좋은 편이고, 소품 혹은 에필로그처럼 들어간 정순용의 곡도 꽤 깊은 잔상을 남긴다. 어쩌면 이런 반응이야말로 제작진이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응이 이전 앨범 혹은 이소라의 이미지를 고정화시키고 싶은 욕망(변화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고압적 태도)과 거리가 있다는 건 분명히 하고 싶다. 이소라 7집이 나왔을 때 나는 <씨네21>에 쓴 리뷰에서 10점 만점을 줬고 그 일을 계기로 이소라의 기획사와도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때도 기준은 취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앨범은 이소라라는 가수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가장 좋은 파트너와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구현해 낸 결과물이었다. 프로듀서로서 이소라의 능력을 정점에서 보여준 앨범. 같은 기준에서 이번 앨범은 실망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앨범에 대한 반응과 호응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이소라는 더 단단한 지위를 얻을 것도 분명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앨범은 컬트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실패한 결과다.

 

 


이선희

 

 


이선희 <세렌디피티>, 불균형이 아쉽다

이에 비하면 이선희의 새 앨범에 대한 반응은 기존 팬덤의 호응을 넘어서는 이슈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오랜만의 앨범이라는 점, 그럼에도 이선희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졌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앨범에 대해서는 1번과 2번으로 나란히 수록된 이선희 작사 작곡의 「Someday」와 이단옆차기가 만든 「동네한바퀴(꽃다운 나이)」의 이질감이 전체를 관통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니까 에피톤프로젝트가 만든 「너를 만나다」와 박근태와 김이나가 만든 「그 중에 그대를 만나」는 너무 무난해서 쉽게 잊힐 것 같은 곡이고, 선우정아가 만든 「이뻐 이뻐」도 곡은 재미있지만 선율의 재지(jazzy)한 진행이 너무 말끔하게 깎여 나간 믹싱 때문에 어색하게 들린다(그렇다고 만약 재지한 분위기를 살렸다면 다른 곡들과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선희가 작곡한 「꿈」, 「나에게 주는 편지」, 「솜사탕」같은 곡들이 더 좋게 들린다. 그걸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싶을 만큼 이런 불균형이 앨범을 관통한다. 이승환의 새 앨범을 접하면서도 생각했던 거지만, 올드 미디어에 익숙한 가수들의 귀한은 환영할 만하지만 그들이 전개하는 방식은 걱정도 되고 안타깝기도 하다. 어떤 불안이 작동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젊은 감각을 가져가야한다는 강박, 혹은 동시대와 소통해야한다는 강박 같은 것으로 작동하고, 어울리지 않는 젊은 작곡가의 곡을 사용하거나 음악에 요즘 유행하는 요소들을 집어넣는 식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 점에서 이선희의 앨범은 일단 곡이 너무 많고, 기존의 이선희 음악이 가진 장점을 부각시키지도 못하고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하지도 못한 어중간한 결과가 되었다는 인상을 남긴다.

사실 이런 평가가 두 앨범에 대해 야박하거나 몰이해한 태도로 읽힐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비평은 결국 주관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분은 이런 글과 상관없이 좋아하는 음반을 사고, 공연을 보고, 여러 채널로 응원하면 된다. 나도 그렇게 하고 있으므로 ‘쌤쌤’으로 쳐도 좋을 것이다(만약 이 ‘주관성’이 거슬린다면 같은 방식으로 응대하길 바란다, 그래야 비평적 긴장이라는 것도 생기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뭔가 좋은 것은 결국 청자의 몫이 될 것이다).

다만 이 얘기는 덧붙이고 싶다. 이 글에 대한 부연 설명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다. 이선희와 이소라의 새 앨범은 모두 2009년 이후에 나온 앨범들이다. 그런데 2009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는 한국 대중음악의 격변기라고 할 만한 때다.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고, 해외 페스티벌이 늘었으며, 갤럭시와 아이폰 시리즈를 필두로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며 음악을 듣는 방식이 급변했다. 음원 유통에 음악 포털이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도 이 즈음이다. 요컨대 2009년이 미디어(텔레비전)와 디바이스(휴대폰)와 플랫폼(음악 포털)의 혁신이 교차하는 산업적 전환이 깔린 시기라는 맥락에서 이들의 복귀가 이뤄지는 ‘방식’과 대중의 ‘반응’을 겹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음악과 무관한 것 같지만 어떻게든 연관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거장’으로 불리는 가수들 뿐 아니라 아이돌과 신인들이 취하는 태도를 통해 한국의 지난 5년을 복기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음악 비평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 (그런데 일단 지켜볼 수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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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그롤, 박제를 거부한 현재진행형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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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 화장실이 급하다며 잠시 무대를 내려오고, 싸우는 관객을 무대 위에서 갖은 욕설로 쫒아내는 남자. 우상이던 '비틀즈' 폴 매카트니를 만나 마치 오랜 친구인 듯 인사를 나누고, 그와 아이처럼 구르며 웃고 떠들 수 있는 남자. 바쁜 공연 일정으로 한 손에 운전대를, 한 손에 햄버거를 집으며 “이게 X발 사람 사는 거야?” 중얼거리다가 곧 “그래 X발 이게 로큰롤이지!” 외치며 호기롭게 웃어넘길 줄 아는 남자.

  

데이브그롤

데이브 그롤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쾌남의 과거는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화신인 너바나(Nirvana)로부터 시작한다. 아마 누구도 몰랐을 거다. 커트 코베인의 뒤에서 꺼벙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던 드러머가 이토록 매력적인 인물이었을 줄은. 펑크에 천착하는 줄만 알았던 청년은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계발해 나가며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해 스스로 나아갔다. 1990년대의 아이콘이던 너바나의 후광을, 그는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데뷔 앨범으로 '권총을 들이대며' 거부했다.그렇게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2014년을 사는 데이브 그롤은 누구보다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뮤지션이다.

푸파이터스

 

참여하고 있는 밴드만 해도 푸 파이터스와 뎀 크루키드 벌처스(Them Crooked Vultures) 두 집 살림에, 그마저도 기타와 보컬, 드럼 세 가지 포지션을 바쁘게 오간다. 그럼에도 세 분야 모두 뒤쳐짐이 없다는 점은 압권이다. 완전히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프린스(Prince)나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처럼, 그 역시 흔치 않은 '올라운드 플레이어'인 셈이다. (※1995년에 발표된 푸 파이터스의 1집이 이미 그 혼자의 힘으로 보컬과 드럼, 기타, 베이스를 연주 및 녹음하며 1주일 만에 만든 앨범이었으니, 그 이전부터 다양한 악기를 섭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나이를 먹으며 깊어가는 눈가의 주름과 얼굴 면적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빽빽한 수염은 어딘가 엉성하게 보이던 그의 외모를 보다 미중년다운 인상으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를 미중년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는 외모보다는 역시 쾌활한 그의 성격 덕분이다. 장난을 칠 때의 그의 모습은 흔한 동네 형처럼 느슨하고 꾸밈없이 보이며, 트랙 녹음 중 딸아이의 장난에 웃는 모습 또한 (시쳇말로) '딸바보'가 따로 없다. 공격적이고 야성적인 로커의 반전 매력이라니. 여심은 물론 남심마저 뒤흔들릴 정도다.
 
2013년, 데이브 그롤은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 < Sound City>의 감독이라는 특별한 이력 한 가지를 추가했다. 여기에서 그는 플리트우드 맥의 < Rumours>, 너바나의 < Nevermind>를 비롯한 수많은 명반들의 사운드를 담당했던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와서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고 있던- 니브 콘솔을 직접 구입해 자신의 스튜디오에 재현하고, 공연의 열광이 아닌 녹음의 긴장, 그리고 뮤지션들의 화학작용이 담기는 순간을 기록하며 그들의 연주를 생생히 담아낸다. 음악을 만드는 창작을 넘어, 그 창작의 과정을 사람들에게 시청각적으로 전달하고, 아날로그적 음악 작업의 매력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사운드시티에 갔을 때 저는 아직 어린 애였어요. 이 보드가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이유죠. 이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어요.”

- 데이브 그롤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사운드 시티는 영화보다도 데이브 그롤에 대한 매력에 더 빠지게 하는 필름이다. 대가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고, 니브 콘솔을 구입하기 위해 주문서 원본을 확인하는 모습 등을 통해 그가 얼마나 음악에 미쳐있는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치열하게 현재를 사는 로커라니. 게을러빠진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얄궂은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데이브 그롤은 매번 자기 스스로를 뛰어넘는다. 자신을 규정짓던 악기의 울타리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던 너바나라는 악령도 정면으로 받아치며 극복해냈다. 음악 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 역시 그의 방식대로 '온 힘을 다해' 완수했다. 박제를 거부한 현재진행형 레전드 데이브 그롤. 그는 언제나 '현재'라는 시간을 맹렬히 전진한다. 게을러질 때마다 그를 생각한다면, 우리도 조금은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글/ 여인협(lunariani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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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죽음과 소생, 그 생명의 순환을 말하는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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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다. 생명이 깨어나는 계절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소생(蘇生)의 전제는 엄연히 죽음인 까닭이다. 그래서 T.S. 엘리어트는 <황무지>(The Wasteland)라는 시편에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Gustav_Mahler

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 [출처: 위키피디아]
 

죽음과 소생, 그 생명의 순환을 보여주는 음악으로는 역시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교향곡 2번이 있다. ‘부활’이라는 표제를 지녔다. 독일어로는 ‘Auferstehung’, 영어로는 ‘Resurrection’으로 표기한다. 세기말의 작곡가 말러는 전작인 교향곡 1번 ‘거인’(Titan)의 연장선상에서 이 곡을 썼다고 전해진다. 말하자면 교향곡 1번의 음악적 화자였던 ‘거인’이 죽음을 맞는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곡이다. 물론 말러는 훗날(1896년) 1번 교향곡에서 ‘거인’이라는 표제를 아예 없애 버렸지만, 2번 ‘부활’의 첫번째 악장을 작곡하던 무렵에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구상은 여전히 ‘거인의 죽음’이었다. 말러는 폴란드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츠의 시에서 착상을 얻어 단악장의 교향시를 작곡했고, 그 곡에 ‘장례식’(Todtenfeier)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것이 5년 뒤 교향곡 2번의 1악장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되었을까? 말러는 ‘장례식’을 작곡한 이듬해에 잇따른 슬픔을 겪는다. 2월에는 아버지가, 10월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이어서 여동생 레오폴디네가 뇌종양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장면은 훗날(1904년) 말러가 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완성하고 3년 뒤에 실제로 장녀 마리아를 잃었던 상황과 오버랩된다. ‘인생과 예술은 별개가 아닌 것’이라고 믿었던 말러에게 애통한 운명이 잇따르면서,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의 곁에서 노상 서성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홉번째 교향곡을 ‘9번’으로 칭하지 않고 ‘대지의 노래’라고 명명했던 것도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심장병을 안고 살아야 했던 그는 베토벤과 브루크너가 9번 교향곡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일종의 터부로 받아들였고, 그 운명의 화살을 어떻게든 피하려 했다. 하지만 애써 피하려는 자에게 운명은 더 끈덕지게 달라붙는 것일까. 말러는 ‘대지의 노래’ 직후에 작곡한 교향곡에 결국 ‘9번’이라는 번호를 붙였고 불길한 예감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9번은 말러가 완성한 마지막 교향곡이다.

 

 

 
 
 

2번 ‘부활’의 작곡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겪어야 했을 뿐 아니라 지휘자로서의 공적 활동도 바빴던 탓이다. 그러다 마침내 창작의 영감이 찾아온 것은 1894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감의 장소 역시 장례식장이었다. 당시 독일 음악계의 가장 영향력 있던 원로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1830~1894)가 그해 2월에 사망했고 함부르크의 미하엘리스 교회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물론 말러도 그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번갯불 같은 영감”과 조우한다. 장례의식 중에 울려 퍼진 클로포슈토프의 ‘부활’이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는 기록을 말러는 이렇게 남겼다. “오르간이 있는 층에서 합창단이 클로포슈토프의 ‘부활’을 노래했다. 그것은 번갯불 같았다. 내 마음속에 있던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모든 예술가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교향곡 2번 ‘부활’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5악장은 그렇게 태어났다. 말러는 독일 시인 클로포슈토프의 가사를 일부 수정해 자신의 음악 속으로 끌어들였고, 마침내 ‘부활’이라는 이름의 칸타타적 교향곡을 완성했다. 특히 이 곡의 마지막 가사는 엘리어트가 노래했던 4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창조된 것은/반드시 죽어 없어지나니/죽어 없어진 것은 부활하리라!/(중략)/나는 날아가리/살기 위해 죽으리/일어서라 그래 다시 일어서/그대 내 마음이여 어서 일어서라!”
 

‘부활’의 명연으로는 3종의 음반이 손꼽힌다. 브루노 발터가 뉴욕필하모닉을 지휘한 음반(1957년, Sony)은 생전의 말러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지휘자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연주다. 또 레너드 번스타인이 뉴욕필하모닉을 지휘한 음반(1987년, DG)은 탐미적이고 감성적인 명연으로 손꼽힌다. 얼마 전 타계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2003년에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연주는 암과 투병하면서도 지휘봉을 놓지 않았던 노(老) 지휘자의 순정함을 느끼게 한다. DVD로 만날 수 있다.

 

 


말러: 대지의 노래 (Mahler: Das Lied von der Erde) - Fritz Wunderlich

클렘페러
《대지의 노래》(독일어 원제: Das Lied von der Erde)는 두 명의 성악 독주와 관현악단을 위한 대규모의 교향곡으로, 여섯 개로 나뉜 악장이 각각 하나의 독립적인 곡으로 전개된다. 표지 제목은 “테너와 알토 조합 및 관현악단을 위한 교향곡 (한스 베트게의 '중국의 피리'에서 따옴)”이다. 말러가 음악에서 '동양'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한 것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유일한 것이다.대지의 노래는 중국의 시를 모델로 한 교향곡이므로, 서양에서 동양의 시를 최초로 본따서 만든 교향곡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지의 노래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주고 받고 할 수 있었던 최초의 교향곡이므로 가히 혁명적이다. [글 출처:위키피디아]




    말러 : 교향곡 2번 "부활" - 주빈 메타

메타

메타의 음악은 뼈대가 굵고 당당한 스케일이 큰 역감에 넘치고 있는 동시에, 극히 정치(精緻)한 표현과 부드럽고 풍려한 울림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그 다이내미즘은 거대하지만 결코 예각적은 아니다. 그는 바로크에서 전위에 이르는 광범한 레퍼터리 중에서도 브루크너와 말러, R.슈트라우스의 후기낭만파를 가장 장기로 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오자와 세이지와 함께 동양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이다. [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말러 : 교향곡 2번 - 아바도

아바도
얼마 전 타계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2003년에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연주는 암과 투병하면서도 지휘봉을 놓지 않았던 노(老) 지휘자의 순정함을 느끼게 한다. DVD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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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뮤지션, 혹은 가능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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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POP 스타>에서 악동 뮤지션을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한다. 이찬혁, 이수혁의 성장배경은 몰랐던 때였다. 그러니까 오로지 이 두 친구의 음악만 들었던 때. 재미있는 곡을 쓰는 친구들이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수현의 보컬 톤에 반했다. 그 목소리 톤과 발성은 본능적인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많은 것들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을 응원했다. 이때 자작곡을 얼마나 잘 만드느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선 자작곡을 부른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저 그 또래의 관점으로 보는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서 일종의 가능성 혹은 비전을 볼 수 있는 것이니까. 심사위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악동뮤지션은 우승을 했고 YG 엔터테인먼트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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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 엔터테인먼트는, 대외적으로 보이는 부분에 한해서라면, 적어도 소속 가수들의 창작 활동을 최대한 지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SM 엔터테인먼트도 마찬가지겠지만 YG가 좀 더 유연하고 자유롭게 보이는 건 아무래도 그들이 구현하는 장르인 힙합, 알앤비와 집단 군무가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꽉 짜인 틀 안에서 재능을 펼치기보다는 재능을 기반으로 시스템이 보조하는 인상. 이런 이유로 악동뮤지션과 YG 엔터테인먼트의 조합이 궁금했다. 요컨대 시스템이 얼마나 개입할까, 혹은 시스템은 이 재능 많은 친구들을 얼마나 ‘서포트’해줄 수 있을까.

 

4월 7일 발매된 1집 『Play』는 이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준다. 이 앨범에 수록된 11곡은 모두 이찬혁이 작사, 작곡했고 노래는 모두 이수현이 불렀다. 예의 발랄하고 귀여운, 딱 10대 초반의 아이들의 감수성이 담긴 노래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은데 그건 아무래도 너무 다듬어진 인상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어떤 음악은 다듬어지지 않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 이 아쉬움을 상쇄시켜주는 건 확실히 이수현의 보컬이다. 이 소녀의 보컬은 훈련되지 않은 감각을 자유자재로 갖고 논다는 인상을 준다. 그게 재미있고 또 신기하다. 특히 「Give Love」와 「200%」로 이어지는 초반 2곡의 가벼운 분위기에서 이수현의 보컬은 한없이 상승하는 멜로디를 땅에 붙들어 매는 역할을 맡는다. 덕분에 빈틈이 많은 랩도 단조로운 구성의 멜로디도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세 번째 곡 「얼음들」의 차가운 감각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YG 엔터테인먼트의 보컬 트레이닝 흔적이 약간 감지되긴 하지만 여기서 이수현의 보컬과 이찬혁의 작곡, 작사는 그야말로 빛난다. 특히 아이를 속이고 홀대하고 의심하고 무시하는 어른들을 다룬 뮤직비디오는 최근 세월호 사건과 연관지어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이 노래가 남다르게 들리는 건 물론 영상의 내러티브 때문이지만, 한편 감정을 고양시키는 멜로디와 손끝으로 느껴질 것 같은 차가운 노랫말에 밀착된 보컬 덕분이다. 남매의 호흡과 팀워크는 이 곡에서 꽉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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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귀에 쏙 들어오는 곡은 「지하철에서」와 「작은별」, 「Galaxy」다. 이 세 곡은 기타나 건반을 토대로 착실하게 쌓아올린 감상적인 곡이고, 여기서 이찬혁과 이수현의 재능은 숨김없이 드러난다. 모두 멜로디 전개나 가사의 명료함이 돋보이면서 집중도를 높인다. 앨범의 앞부분이 대중적인 면에 집중한다면 오히려 후반부는 악동뮤지션의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여기 세 곡이야말로 악동뮤지션의 방향을 제시하는 곡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다른 곡들은 어딘지 아쉬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인데, 그건 음악적 취향보다는 곡의 밀도, 요컨대 완성도 때문이다. 아직까지 이들은 보컬의 결을 살리는 작곡이 강점이고, 랩이나 전자음이 활용되는 편곡은 다소 무리한 설정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에 발랄함 혹은 또래의 감수성을 ‘굳이’ 드러내는 것 같은 의성어나 나래이션은 곡을 습작의 수준에 머물게 하는 것 같다.

 

짐작이지만, 만약 이 후반부의 균열이 YG엔터테인먼트가 두 친구에게 음악가로서의 자율성을 보장했거나, 전략적으로 몽골이라는 ‘자연적인 장소의 이미지’와 10대라는 ‘세대적 감수성’을 동시에 겨냥한 결과라고 한다면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나는 이들의 데뷔 앨범이 음악적으로 조금 더 다듬어지길 바랐는데, 왜냐면 그런 맥락에서 『Play』를 하나의 앨범으로서, 또한 악동뮤지션을 하나의 음악적 공동체로서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얼음들」을 포함해 「지하철에서」와 「작은별」, 「Galaxy」는 자주 듣게 되는 곡이다. 결론은? 이 앨범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점점 높아진 기대에 대한 만족도보다는 메인스트림에 진입한 어리고 발랄한 신인 듀오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가능성에 방점이 찍힌다. 다만 이들이 여느 10대들처럼 괜히 두려워하고 기대하고 실패하며 서툰 채로 그 시기를 잘 보내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다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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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 내한 공연을 위한 지침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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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매카트니

폴 매카트니 [출처 : 위키피디아]

 

50년을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근처에 온다는 소식만 접하더라도 한국의 비틀매니아는 올해에는 방문하지 않을까, 오매불망 내한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 사실이다. 끝내 '마지막 기회'라고 까지 여겼던 작년 11월경 일본에서 진행되었던 < Out There Tour Japan >에서도 기다렸던 '그 사건'은 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꿈은 그저 꿈으로 끝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모두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비로소 '루머'는 마무리되었다. 홍대 거리에는 흰색 종이에 검정 글씨로 'Madonna', 'Helen', 'Mary'라는 세 장의 포스터가 붙여졌고, 「Hey Jude」만 삽입된 TV 광고가 방영되었다. 이제는 다른 누구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아도 된다. 헌정하며 추억하는 장면도 아니다. 바로 비틀스의 음악을, 비틀스의 목소리로 들게 될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5월 28일 있을 폴 매카트니의 역사적인 내한 공연을 위해 이즘은 '폴 매카트니 공연 세트리스트' 분석을 준비했다. 소개할 39곡의 작품은 2011년 11월 21일 일본 도쿄돔에서 있었던 공연의 세트리스트를 반영했으며, 한국 공연에서 예정된 곡은 아님을 밝힌다.

 

※우선 20곡을 소개한다. 나머지 19곡은 추후에 업데이트될 예정이다.

 

폴-매카트니   폴매카트니    비틀즈

 

「Save us」
작년 발매된 새 앨범< New >의 톱 트랙이자 'New Paul McCartney'의 화려한 귀환을 알린 곡이다. 시작과 동시에 터져나오는 거친 기타 리프의 로큰롤은 '회춘'이라는 표현보다 '영원한 젊음'이라는 칭송이 적합할 정도로 파워풀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웅장한 하모니를 자아내는 후렴부의 환희는 공연장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영웅 강림'이 꿈이 아닌 실제 상황임을 실감케 한다. 경배하라. 폴 매카트니 경께서 이 땅에 오셨도다. 가장 확실하고도 현명한 개선 행진곡이다.


김도헌(zener1218@gmail.com)

 

「Eight days a week
비틀즈의 네 번째 앨범< Beatles For Sale >(1964)의 수록된 트랙. 흔치 않은 폴 매카트니 작곡 / 존 레논 보컬의 곡이다. 원래 싱글로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존 레논의 「I feel fine」이 선택되며 영국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묻어놓기에는 아까웠던지 후에 미국 시장을 겨냥해 싱글 커트하며 빌보드 정상을 꿰차는 쾌거를 거뒀다. 과연 폴 옹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Eight days a week」는 어떨지.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All my loving」
1964년 2월 9일 <에드 설리반 쇼>, 미국 진출의 기회를 잡은 비틀스가 첫 무대의 첫 곡으로 선택했다. 당시의 연인인 제인 애셔를 위해 폴 매카트니가 쓴 것으로 비틀스에게도 폴 매카트니 개인에게도 큰 의미가 담긴 곡이라 하겠다. 단숨에 만들어진 멜로디는 이후 50년이 넘도록 세계인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는 중이다.


 

조아름(curtzzo@naver.com)

 

「Listen to what the man said」
폴 매카트니는 사랑에 대해 늘 긍정적이고 낭만적이었다. 윙스 시절이던 1975년에 발표한 「Listen to what the man said」는 폴의 그런 생각을 담은 노래로 어떤 이들은 여기서 말하는 The man이 신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Only you know and I know」와 「Feelin' alright」의 주인공 데이브 메이슨이 기타리스트로 참여한 「Listen to what the man said」는 소프라노 색소포니스트 탐 스코트가 참여하고 나서야 폴 매카트니의 마음에 들어 녹음했다.


소승근(gicsucks@hanmail.net)

 

「Let me roll it」
폴 매카트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앨범 < Band On The Run >의 수록곡으로, 제목은 조지 해리슨의 곡 「I'd have you anytime」의 첫 소절 'Let me roll it to you'에서 따왔다. 발표 당시 존 레논의 「Cold turkey」와의 유사성 논란이 있었다. 마치 비틀즈 시절의 곡들처럼 전면에 나서는 기타 사운드를 맛볼 수 있는 곡.


여인협(lunarianih@naver.com)

 

「Paper back writer」
1966년 여름, 2주간 넘버원을 한 이 노래의 가사는 작가가 되고 싶은 한 남자가 출판사에 보내는 편지다. 사랑 노래가 아니라는 것이 흥미롭다. 반복되는 구성과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프레이징이 재미있다. 전형적인 로큰롤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귀에 감기는 코러스로 차별화를 둔다.


전민석(lego93@naver.com)

 

「My valentine」
2012년 스탠더드 재즈 작품 < Kisses On The Bottom >의 수록곡 「My valentine」은 부인 낸시 쉬벨 (Nancy Shevell)에게 바치는 곡이다. 스튜디오 버전에서는 오랜 친구인 에릭 클랩튼의 연주가 담겼고, 54회 그래미에서는 이글스의 조 왈쉬와 공연하기도 했다. 느슨하고 나지막한 육성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메시지와 클랩튼 특유의 블루지한 톤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특히 할리우드 스타 나탈리 포트만(Natalie Portman)과 조니 뎁(Johnny Depp)의 수화로만 채워진 뮤직비디오는 팬들에게 강하게 각인되어있다.


신현태(rockershin@gmail.com)

 

「Nineteen hundred and eighty-five」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 해체 이후 그의 아내와 밴드 윙스(Wings)로 활동하던 시절 앨범 < Band On The Run >에서 발표한 곡이다. 음반의 가장 중추적이고도 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트랙답게 급박하고도 긴장감 넘치는 전개가 특징이다. 공연에서는 폴 매카트니의 건반에 화려한 기타 솔로까지 대동하며 분위기를 한 층 고조시킨다. 기타 솔로를 몰아치며 절정으로 달하는 후반부는 특히 압권이다.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비틀즈   폴매카트니  비틀즈

 

「The long and winding road」
폴 매카트니가 스코틀랜드에서 만들었다는 이 노래는 비틀즈의 마지막 넘버원 싱글이다. 시기적으로 그래서인지 더 쓸쓸하다. 오케스트라, 합창 편곡이 분위기를 조성하고 보컬 선율로 곡의 전개를 주도한다. 노래를 만들 당시 폴은 장중한 편곡이 본인의 의도와 달라, 프로듀서 필 스펙터에게 불만이 컸다고 한다. 후에 다른 버전도 발매하지만 공연에서는 원곡에 가까운 편곡으로 한다.


전민석(lego93@naver.com)

 

「Maybe I'm amazed」
폴 매카트니의 솔로 작품 중에서 팬과 평단 모두에게 가장 높은 평가를 이끌어낸 노래다. 발표 당시 프랑스와 독일을 제외하고는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지만 폴 매카트니 자신도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으며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비틀스 해산 등으로 힘든 시기에 곁을 지켜준 아내 린다에게 사랑과 감사를 담아 만든 곡.

조아름(curtzzo@naver.com)

 

「I've just seen a face」
레코딩 전부터 'Aunty Gin's Theme'라는 별칭이 붙어있었는데, 이는 그의 고모가 이 노래를 끔찍이 아꼈기 때문이라고. 컨트리 스타일의 가창과 연주가 돋보이는 곡으로 베이스를 뺀 채 기타와 마라카스만으로 단출한 멋을 살려내고 있다. 후렴구의 화음은 여느 보컬그룹 저리가라 할 정도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보여주며, 운율을 살린 가사가 이를 거들며 대중성에 박차를 가한다. 라이브에서 자주 선보이는 노래이기도 하다. < Beatles for Sale >의 수록되어 있다.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We can work it out」
비틀즈의 11번째 넘버원이다. 폴 매카트니가 당시 연인이었던 제인 애셔와의 관계에 대해 쓴 이 노래는 폴 매카트니가 작곡한 노래 중에서 리듬감이 가장 돋보인다. 조지 해리슨의 건의로 중간 간주에 왈츠를 도입한 것이 화룡점정이다. 존 레논은 이 곡 대신 「Day tripper」를 강력하게 밀었다. 결국 A면에 「We can work it out」을, B면에 「Day tripper」를 수록한 싱글을 발표했지만 「Day tripper」는 전미 차트 5위를 기록해서 정상에 오른 「We can work it out」에 판정패했다.


소승근(gicsucks@hanmail.net)

 

「Another day
비틀즈 해산 이후 발표한 폴 매카트니의 첫 싱글이라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곡으로, 매카트니 특유의 편안한 멜로디가 돋보이는 곡이다. 아내인 린다 매카트니가 백보컬로 참여한 사실로도 유명하다. 1971년 빌보드 싱글차트 5위에 올랐다.


 여인협(lunarianih@naver.com)

 

「And I love her」
이 곡을 두고 존 레논은 '폴의 첫 번째 Yesterday'라 평했다. 멜로디 히트메이커 폴 매카트의 출발점을 「And I love her」로 설정한 것이다. 폴도 '나 자신에게 감명 받은 첫 번째 곡'이라 칭할 정도로 중요한, 비틀즈 역사의 출발점에 위치한 감미로운 발라드 곡이다. 거대한 미국 침공의 서막을 알린 < A Hard Day's Night >에 수록된 이 달콤한 러브 송은, 비록 폴 매카트니의 손에서 탄생했지만 초창기 비틀즈의 든든한 팀워크가 빛난다. 인상적인 기타 리프는 조지 해리슨의 것이었고 링고 스타는 드럼 대신 봉고를 두드렸으며 존 레논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비틀즈의 순수함은 50년 세월이 지나도 청정하다.


 김도헌(zener1218@gmail.com)

 

「Blackbird」
< The Beatles [White Album] >에 수록된 곡. 어린 시절 조지 해리슨과 함께 시도했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류트(lute) 모음곡 e단조 중 5번째 부분인 「Bourree」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 가사는 1968년 작곡 당시, 인종 간의 긴장이 일던 미국 사회의 현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잔잔하게 흐르는 보컬과 어쿠스틱 기타 연주는 모두 폴 매카트니의 것이다. 음악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던 비틀즈의 말미에서 많이 손꼽히는 폴매카트니의 대표곡이다.


 이수호(howard19@naver.com)

 

비틀즈  비틀즈  폴-매카트니

 

「Here today」
비틀즈 해체 이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앙숙이 되었다. 비틀즈 때부터 깊어졌던 감정의 골은 추구하는 방향이 전혀 달랐던 솔로 활동 시기에 더욱 극명해졌다. 존 레논은 「How do you sleep」으로 팝스타가 된 폴을 조롱했고 폴은 이에 대한 비꼼으로 「Silly love songs」를 내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료였다. 존 레논의 사망 2년 후, 1982년 앨범 < Tug of war >에 수록된 「Here today」를 통해 폴은 존 레논과 나누는 상상의 대화를 그리며 그를 추모하고 그리워했다. 싱글로 공개하지 않았음에도 곡은 빌보드 싱글 차트 46위까지 올랐다. 세월이 지나도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비틀(Beatle)이었던 것이다.
 

 김도헌(zener1218@gmail.com)

 

「New」
'새로운' 폴 매카트니의 젊은 사운드가 담겨진 신작 < New >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어려서부터 즐겨듣던 고전으로만 구성한 전작 < Kisses On The Bottom >의 트랙 리스트를 상기한다면 '더욱 새로운' 매카트니로 다가온다.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팬들에게 바치는 「New」는 젊은 날 그와 함께 울고 웃었던 추억을 함께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현태(rockershin@gmail.com)

 

「Queenie eye」
< Out There Tour >는 새 앨범 투어인 만큼 신곡을 다수 연주한다. 그렇다고 해도 늘 그렇듯 이번 한국 공연에서도 40여 곡의 세트리스트로 '중무장'한 폴 매카트니일테니 “신곡만 하다가 끝나는 거 아니야?”라는 기우는 필요 없을 것이다. 「Queenie eye」는 음악적인 부분은 논할 것도 없이 세련된 팝적 센스가 돋보이며, 음악이야기와는 별개로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뮤직비디오에서 매카트니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다. 출연진 한 명, 한 명이 '대박'급이다.
 

신현태(rockershin@gmail.com)

 

「Lady madonna」
지난 4월 1일, 현대 카드 글씨체로 'MADONNA'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비틀즈의 「Lady madonna」를 활용한 재치 있는 홍보였다. 이러한 만우절 장난처럼 노래도 유쾌하다. 가사는 힘겹게 가정을 이끄는 어머니를 그리고 있지만 피아노가 흥겹다. 여기에 추가적인 색소폰 세션으로 부기우기의 들썩임을 차용하여 요란한 로큰롤 넘버를 완성했다. 다른 곡들과 다르게 마음 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노래다.
 

전민석(lego93@naver.com)

 

「All together now」
곡 자체는 < Magical Mystery Tour >(1967)를 작업할 때 완성되었지만, 정작 세상에 빛을 본 건 < Yellow Submarine >(1969)에 실리면서다. 2013년부터 시작된 < Out There > 투어에서 처음으로 라이브화 되었다.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가사처럼 마치 동요를 연상케 하는 멜로디와 구성이 돋보이며, 그 또한 '편한 마음으로 즐겼으면' 하는 의도에서 만든 곡이라고 한다. 노랫말이 단순해 이만큼 떼창에 어울리는 곡도 없을 듯 싶다. 남은 건 연습 또 연습!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폴매카트니-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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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미친 예술가의 환상적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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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년에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은 유럽 곳곳을 정복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1806) 스페인을 속국으로 만들고(1807)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인 오스트리아를 1809년에 굴복시켰습니다. 잇따른 승리에 도취해 영국, 러시아와 또 한판의 전쟁을 벌이지요. 하지만 이 지점부터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됩니다. 광활한 러시아를 정복하는 데 실패한 데 이어 막강한 경제력을 자랑했던 영국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하지요. 결국 그는 1814년 4월에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폐됩니다.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 [출처: 위키피디아]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은 좌절됐지만 당시 유럽 사회에 남긴 영향은 거대했습니다. 프랑스혁명의 이념이 유럽 곳곳으로 전파된 것이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실각 이후의 ‘빈 체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빈 체제’는 빈 회의의 결과물이지요. 1814년에 유럽 각국(오스트리아?영국?러시아?프로이센)의 보수파 지도자들이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다시 세상을 옛날로 돌리기로 합의합니다. 이후의 복고적 질서를 ‘빈 체제’라고 부릅니다.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고 독일 지역에는 독일 연방이 세워지지요. 북이탈리아, 폴란드는 열강에 의해 분할 지배됩니다. 한마디로 말해 빈 체제는 절대왕정으로의 복귀라고 할 수 있는데, 혁명의 본산지였던 프랑스에서 특히나 강력한 반동 정책이 실시됩니다. 왕좌에 복귀한 샤를 10세가 이를 주도했지요. 일단 의회를 해산시켰습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으로 토지를 잃었던 귀족들에게 대대적인 보상 정책을 실시하지요.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하겠습니다. 당시 유럽의 정세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는 것은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데 상당히 요긴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음악들이 대체로 이 시기의 예술적 산물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빈 체제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것은 왕과 귀족들을 위한 세상으로의 회귀였기 때문에 곧바로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유럽 곳곳에서 크고 작은 봉기들이 일어나지요.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에서 1830년에 일어났던 7월혁명이 커다란 사건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와 소시민, 그리고 자본가들이었습니다. 노동자와 소시민들은 공화정을 완전히 부활시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들끓었지만 자본가들로 이뤄진 혁명 지도부는 결국 ‘입헌군주제’라는 방식으로 타협하지요.

 

문화사적으로 보자면 이 시기는 낭만주의의 시대입니다. 혁명의 열기와 함께 찾아온 낭만주의의 기운이 유럽 전역에 흘러넘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가장 두드러진 장르는 문학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괴테와 실러가 낭만의 풍조를 이끌었지요. 괴테가 나폴레옹 지지자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실러의 시에 기초해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 태어난 것도 이미 썼던 칼럼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프랑스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물론 많은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있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빅토르 위고를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레미제라블>을 한번 떠올려 볼까요? 소설의 주인공 장발장이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쳤던 해가 1796년입니다. 한데 어린 조카는 왜 굶주렸던 걸까요? 우리는 이 장면에서 혁명 이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혁명은 당연히 혼란을 수반하지요. 그 혼란을 겪으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겁니다.

 

당시에도 물론 그랬습니다. 물가가 엄청나게 치솟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장발장은 빵을 훔치다가 19년의 노역형을 선고받았고 훗날 탈출해서 신분을 바꾸고 살아갑니다. 아마 뮤지컬이나 영화로 <레미제라블>을 본 분들이 많을 듯합니다. 젊은이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위를 하는 장면이 기억나는지요? 그 장면에 이르면 장발장은 어느새 노년에 이르러 있지요.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그 장면은 1832년 6월 파리에서 일어났던 봉기입니다. 장발장은 사랑하는 양녀 코제트의 연인 마리우스를 구하려고 이 봉기에 참여하지요.    

 

자, 다시 음악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혁명과 낭만이 몸을 섞던 시대에 음악은 과연 어땠을까요? 음악에서도 물론 낭만주의가 유행합니다. 특히 이 시기는 문학과 음악의 융합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대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융합’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21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지만, 사실 이 ‘융합’이라는 것은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 음악에서 이미 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낭만주의적 시를 가사로 삼은 ‘가곡’을 비롯해 한 편의 소설처럼 드라마틱한 성격을 띠는 ‘표제적 교향곡’이 중요한 장르로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은 그 지점을 잘 보여주는 음악입니다. 혁명과 반혁명의 충돌이 가장 극심했던 프랑스에서 1830년에 작곡된 곡이지요. 바로 7월혁명이 일어났던 해입니다. 한마디로 ‘소설적 교향곡’으로서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자리했습니다. 물론 이 교향곡을 설명하면서 주로 거론되는 것은 베를리오즈 개인의 특정한 체험들이지요.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받았던 감동과 오필리어와 줄리엣을 연기했던 여배우 해리엇 스미스슨을 향한 사랑, 또 베토벤의 교향곡과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받은 영감과 자극 등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다 틀리지 않은 얘기입니다. 그런 개인적 경험들이 <환상교향곡>이라는 걸작 속에 녹아들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기억해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파리음악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던, 그래서 피아노를 아예 칠 줄 몰랐던 베를리오즈, 대신 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했던 그는 낭만주의 시대의 선택을 받은 음악가라는 점이지요. 독일의 바그너가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의 베를리오즈도 기질적으로 고전보다 낭만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기질도 그렇거니와 인생을 살면서 겼었던 여러 가지 풍파, 아울러 자기 과시적인 태도 같은 것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기질적 낭만성이 당대의 시대적 흐름과 만나면서 음악사를 아로새긴 걸작들로 남은 것이겠지요.

 

<환상교향곡>은 짝사랑했던 여인 스미스슨을 생각하면서 작곡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베를리오즈 본인의 자전적 기록에 따르면, 1827년 파리 오데옹 극장에서 영국의 한 극단이 <햄릿>을 공연하는 걸 보았다고 하지요. 그 다음날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포스터가 내걸렸고 베를리오즈는 그 연극도 한걸음에 달려가 관람했다고 합니다. 스물네 살 때였지요. 혈기 왕성한 베를리오즈는 셰익스피어 연극에 매료됐을 뿐 아니라 여배우 스미스슨에게 완전히 빠져 버립니다. 훗날 이렇게 회고하지요. “나는 절망적인 상태로 몇개월을 보냈다. 모든 파리 사람들을 탄식하게 만든 오필리어 역의 여배우 꿈을 꾸었다.” 그리고는 거의 스토킹에 가까운 구애를 퍼붓습니다. 광적인 러브레터를 계속 보냈던 것이지요. 하지만 잘 나가던 여배우는 무명의 작곡가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스토커 베를리오즈’가 무서웠을지도 모릅니다.

 

베를리오즈는 스미스슨을 향한 짝사랑이 좌절된 후,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뺏기기도 합니다. 벨기에 출신의 피아니스트 마리 모크와 사랑에 빠져 청혼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녀는 유명한 피아노 제작자인 플레옐과 결혼합니다. 베를리오즈는 격분했겠지요. “그들을 죽이고 자살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자서전에 남겨놓고 있습니다. 광적인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베를리오즈는 훗날, 그러니까 1832년에 자신이 그토록 구애했던 아일랜드 출신의 여배우 스미스슨과 재회합니다. 말하자면 인기가 시들해진 왕년의 스타, 게다가 자신이 직접 극단을 만들었다가 파산을 맞은 스미스슨과 파리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지요. 베를리오즈는 “빈털털이가 된 이 딱한 여인”과 이듬해에 결혼합니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두 사람은 아들을 하나 낳고 헤어지지요. 그녀가 알콜 중독자여서 파경을 맞았다는 ‘설’이 많은데, 그런 얘기는 주로 베를리오즈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어서 100% 신뢰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환상교향곡>은 스미스슨을 향한 연모가 좌절된 이후에 작곡한 곡이지요. 한 여인에 대한 집착적인 사랑과 환상을 한 편의 드라마로 형상화하고 있는 곡입니다. 몽상가 베를리오즈는 ‘어느 예술가의 생애와 에피소드’라는 부제를 붙여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지요. 음악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고통 받던 한 예술가가 아편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는데, 아편의 양이 치사량에 미치지 못해 혼수 속에서 온갖 환각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환상교향곡>보다 뒤에 작곡한 <렐리오>와 1부와 2부로 짝을 이루는 곡입니다. 모두 5개 악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베를리오즈는 애초에 각 악장의 스토리를 일일이 밝혀두었으나 훗날에 표제만 남기고 모두 삭제하지요.

 

1악장은 ‘꿈, 열정’입니다. 느린 목관의 연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약음기를 낀 바이올린이 사랑을 향한 동경을 묘사하지요. 점차 음악이 격렬해지고 빨라지면서 사랑의 고통, 질투에 휩싸인 감정을 그려냅니다. 2악장은 ‘무도회’입니다. 약간 긴장감이 감도는 현의 트레몰로와 하프로 막을 엽니다. 이어서 우아하고 경쾌한 왈츠가 등장하지요. 베를리오즈 본인의 설명에 따르자면, 음악 속의 주인공은 무도회의 춤추는 사람들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이리저리 찾아 헤맵니다. 혹은 어디를 가든 그 여인의 모습이 끊임없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하지요.

 

3악장 ‘들판의 풍경’은 표제처럼 목가적인 악장입니다. 목동의 느긋한 피리 소리로 시작하는데, 곧 이어 현악기들의 트레몰로가 약간의 불안감을 지핍니다. 주인공이 들판을 거닐며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는 악장이지요. 목가적인 평안함과 어두운 예감이 뒤섞여 있습니다. 4악장은 ‘단두대로의 행진’입니다. 팀파니가 연주하는 불길한 리듬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주인공의 꿈속에서 펼쳐지는 그로테스크한 환상이 펼쳐집니다. 사랑했던 여인을 살해한 죄목으로 단두대로 끌려가는 장면이 행진의 음형으로 묘사되고, 악장의 거의 끝부분에 이르면 사형의 칼날이 쿵 하고 떨어지는 장면까지 음악으로 그려냅니다. 매우 사이키델릭한 악장입니다.

 

5악장은 ‘마녀들의 밤의 축제와 꿈’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영향을 받은 악장으로 알려져 있지요. 단두대로 끌려가서 처형되는 4악장보다 오히려 더 그로테스크합니다. 주인공의 장례식에 모여든 마녀들의 소름끼치는 춤이 펼쳐집니다. 심지어는 사랑했던 여인마저도 마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장례식의 종소리, 이어서 바순과 튜바가 레퀴엠 중 ‘분노의 날’(Dies Irae)을 연주하는 부분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랍니다. 처음 듣는 분들은 음악이 좀 장황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베를리오즈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들으면 한 편의 그로테스크한 드라마처럼 들려올 겁니다.

 

 

 

▶샤를 뮌슈(Charles Munch), 보스톤 심포니/1962년/SonyMusic(RCA)


뮌슈샤를 뮌슈는 보스톤 심포니와 1962년에, 파리오케스트라와 1967년에 <환상교향곡>을 레코딩했다. 두 연주 모두 빼어나다는 것이 중론이다. 국내에서는 보스톤 심포니를 지휘한 음반이 구입하기에 좀더 용이하다. 수십 년 동안 <환상교향곡>의 필청음반으로 손꼽혀온 녹음이다. 해석은 역시 뮌슈의 스타일대로다. 힘이 넘치는 화려한 연주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과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피해갈 수 없는 음반이다.

 

 

 

 

 

▶콜린 데이비스(Colin Davis),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1974년/Philips


콜린-데이비스지난해 타계한 콜린 데이비스도 베를리오즈의 음악을 운위하면서 빼놓을 수 없다. 영국 출신의 지휘자이지만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그의 주요한 레퍼토리로 자리해 있다. 앞서 언급한 뮌슈의 강렬한 드라이브에 비하자면 상당히 보수적인 느낌의 연주다. 주관적인 해석을 가능한 배제한 채 균형잡힌 연주를 들려주는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차분하게 음악의 구조를 음미하게 해주는 연주다. 물론 이 또한 호불호가 엇갈릴 수 있겠다. <환상교향곡>의 극적인 느낌을 짜릿하게 맛보려면 뮌슈의 지휘가 더 적절하겠다. 

 

 

 

 

ps. 존 엘리엇 가디너가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음반(1991년/Philips)은 시대 악기를 사용한 호연입니다. 현재 품절 상태인 탓에 추천 목록에 넣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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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대의 사운드, 엑소와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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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디

 

어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소리’라는 게 존재한다고 본다. 음악에 대해서라면 특정 악기나 멜로디, 코드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빈티지 사운드’라고 할 때의 특징, 요컨대 ‘음색’이 어떤 시대적 감수성을 대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때 등장한 악기에 의해서, 아니면 음악이 만들어진 구조나 특정 문화권에 속한 작곡가들의 관습(혹은 습관)에 의한 것일 수 있다. 가수의 발성도 마찬가지. 곳곳에 당대의 ‘맥락’이 작동한다. 그래서 1970년대의 통기타 음악을 들으면 각기 다른 곡들에서 유사한 특징이 감지되는 것이다. 1980년대의 음악도, 1990년대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건 동시대의 구성원들은 그 특징을 잘 잡아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2014년의 소리라는 건, 어쩌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감지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 점에서 엑소와 지오디의 신곡은 꽤 흥미로운 자극을 준다.

 

지오디

데뷔 15주년을 맞이해 전 멤버가 그대로 결합한 god의 신곡 「미운오리새끼」는 이단옆차기가 만든 곡으로 꽤 신기한 감상 포인트를 제공한다. 이전에 박진영이 만든 god의 히트곡들이 오롯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공기방울이 터지는 것 같은 효과음을 비롯해 F, D, A 계열의 코드로 구성된 버스(verse)도 기존 god의 히트곡을 연상시킨다. 감정에 호소하는 부드러운 보컬, 단절되는 랩과 틈틈이 삽입되는 핑거 스냅과 스네어의 조화가 90년대 말의 감수성을 환기한다.

 

랩 스킬마저도 god 특유의 촌스러운, 단순한, 미숙한 감각을 불러오는데 이단옆차기는 그야말로 박물관의 모사화가처럼 사람들이 ‘기억’하는 god의 한 순간을 복원해내는 셈이다. 이로서 god는 2005년 이후의 공백을 뛰어넘어 여기에 온다. 이것은 짧으면 6년, 길면 10년 정도의 공백기를 끝내고 복귀한 대다수 가수들이 ‘지금’의 소리를 반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이들은 아마도 변화에 적응하기보다는 추억을 재생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덕분에 이 음악을 들으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대다수의 팬들은 반가워하는 분위기지만, 나로서는 꽤 완고하게 보이는 「미운오리새끼」의 작법을 어떻게 이해하는 게 적절한지 모르겠다. 이 음악은 god의 현재를 보여주는 곡일까, 아니면 이단옆차기가 팬들을 향해 던진 서비스에 부과할까. 그에 대한 얘기는 정규 앨범이 공개되는 7월이 되면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엑소

 

반면 엑소의 새 앨범 <중독>은 기존의 K와 M으로 나뉜 유닛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각각 활동한다. 그 타이틀인 「중독」은 미국의 프로듀서 그룹 언더독스(The Underdogs)와 SM 엔터테인먼트의 켄지(Kenzie), 유한진 등이 참여했다. 엑소는 현재 SM 엔터테인먼트에서 총력을 기울이는 그룹으로 알려졌다. 「으르렁」으로 찍은 정점에서 신곡에 대한 기대가 큰 것도 사실인데 언더독스가 샤이니와 소녀시대의 곡에 참여한 인원보다 더 많은 인력을 투입했다는 걸로도 이 곡에 기울인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으르렁」과 유사한 지점들이 반복되면서 음악적으로 분명한 색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일단 충분히 만족스럽다. 긴박하게 흐르는 경고음처럼 왜곡된 리프와 킥 드럼이 반복되는 중에 클랩 사운드가 차곡차곡 쌓이는 구조는 「으르렁」에서 확인했듯 꽤 세련된, 그럼에도 익숙한 디자인을 선보인다. 전곡과의 유사함을 유지하는 가운데「중독」에서 차별화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잠깐의 쉼표를 기준으로 랩이 등장하며 분위기가 달라지는 구성도 「으르렁」과 유사하다. 짐작하건데 언더독스가 메인 테마를 짜고 후렴을 켄지가 구성한 게 아닌가 싶다. 2/3 지점에서 곡이 전환되는 타이밍도 반복되는 루프의 피로감을 완화시킨다.

 

엑소

이 음악이 지향하는 소리는 한국보다는 미국에 가깝다. 저스틴 팀버레이크나 크리스 브라운 등이 선보인 알앤비의 구성을 계속 환기시키는 것으로 이 음악의 위치가 한국보다는 국제적인 맥락에 있음을 계속해서 드러낸다. 이건 단지 작곡을 미국 팀이 맡았다는 것 뿐 아니라 SM 엔터테인먼트 혹은 엑소가 이미 국제적인 산업 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으르렁」에 높은 점수를 주게 된다. 그 곡은 21세기 이후 등장한 한국 팝 중에서 가장 좋은 것 중에 하나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미운오리새끼」와 「중독」을 함께 듣는 건 2014년 현재의 소리가 어떤 것인지, 그 맥락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로컬과 글로벌의 감수성을 환기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중독」의 소리가 21세기 한국 팝의 소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결국 한 시대의 소리는 뭔가가 다 지난 뒤에야 재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각각의 소리가 지향하는 바, 만들어진 조건 등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퍼즐 맞추기야말로 음악을 ‘듣는’ 재미가 아닐까. 아무튼 이 시대의 소리가 더 복잡해지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이 비트의 향연을 어떻게 추억하게 될까. god의 「미운오리새끼」를 들으면서 엑소의 「중독」을 생각한다. 재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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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 내한 공연을 위한 지침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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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매카트니 

폴 매카트니 [출처 : 위키피디아]

 

50년을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근처에 온다는 소식만 접하더라도 한국의 비틀매니아는 올해에는 방문하지 않을까, 오매불망 내한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 사실이다. 끝내 '마지막 기회'라고 까지 여겼던 작년 11월경 일본에서 진행되었던 < Out There Tour Japan >에서도 기다렸던 '그 사건'은 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꿈은 그저 꿈으로 끝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모두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비로소 '루머'는 마무리되었다. 홍대 거리에는 흰색 종이에 검정 글씨로 'Madonna', 'Helen', 'Mary'라는 세 장의 포스터가 붙여졌고, 「Hey Jude」만 삽입된 TV 광고가 방영되었다. 이제는 다른 누구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아도 된다. 헌정하며 추억하는 장면도 아니다. 바로 비틀스의 음악을, 비틀스의 목소리로 들게 될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5월 28일 있을 폴 매카트니의 역사적인 내한 공연을 위해 이즘은 '폴 매카트니 공연 세트리스트' 분석을 준비했다. 소개할 39곡의 작품은 2011년 11월 21일 일본 도쿄돔에서 있었던 공연의 세트리스트를 반영했으며, 한국 공연에서 예정된 곡은 아님을 밝힌다.

 

※1부에서 소개했던 20곡에 이어 나머지 19곡을 소개한다.

 

폴-매카트니   비틀즈  비틀즈

 

「Lovely Rita」


1967년 문제의 발표작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 의 수록곡이다. 1966년 투어 이후 단 한 번도 공식적인 무대 위에서 선보인 적이 없었으나 2013년 'Out There' 투어의 셋 리스트에 추가되어 놀람 섞인 환호를 받았다.


2014/05 조아름(

curtzzo@naver.com)

 

「Everybody out there」


새 앨범 < New >에 수록된 곡. 폴 매카트니는 인터뷰를 통해 '관객들과 함께 노래하기 위한' 노래라 소개한 바 있다. 어쿠스틱 기타를 중심으로 한 단출한 로큰롤은 노장의 관록과 여유를 상징한다. 'Hey!'의 구호와 함께하는 중반부의 코러스 부분은 폴이 소개한 곡의 취지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다. 가서 목청 높여 힘껏 외쳐보자. 'Hey! Everybody out there?'


2014/05 김도헌(

zener1218@gmail.com)

 

「Elenor rigby」


비틀즈의 < Revolver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써 폴 매카트니가 작곡을 일임 했던 싱글이다. 길지 않은 길이, 현악 세션과 메인 멜로디를 따라 흐르는 코러스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특징으로 당시 비틀즈의 실험성과 팝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악 파트와 기타가 리듬만을 담당하면서 복잡한 솔로 없이 곡이 단순하다. 게다가 곡의 주제가 되는 백 보컬의 선율을 초반부터 제시해주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따라 부르며 즐기기 쉬운 노래로 자리 잡았다.


2014/05 이기선(

tomatoapple@naver.com)

 

「Being for the benefit of Mr. Kite!」


이전까지는 라이브에서 쉬이 들을 수 없었지만, 2013년 'Out There' 투어에서 곡이 추가되며 라이브로 들을 수 있게 된 비틀즈 시절의 곡.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 수록곡으로, 중반부 왈츠풍으로 전환되는 몽환적 분위기가 일품이다. 원곡은 존 레논이 보컬을 맡았다.


2014/05 여인협(

lunarianih@naver.com)

 

「Something」


「Something」은 조지 해리슨의 곡이다. 비틀즈의 < Abbey Road >에 실려 있는 원곡에는 조지 해리슨의 보컬과 리드 기타 연주가 멋들어지게 깔려 있다. 1969년 11월 마지막 주 빌보트 싱글 차트에서 정상에 올랐다. 노래는 시종일관 사랑을 읊는다. 그 점에서 러브 송을 많이 써낸 폴 매카트니의 세계관과도 교차한다. 곡을 쓸 당시 연인이었던 패티 보이드와의 연관성에 많은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정작 조지 해리슨은 레이 찰스를 생각하며 「Something」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제는 폴 매카트니의 목소리로 더 자주 흘러나온다.


2014/05 이수호(

howard19@naver.com)

 

「Ob-la-di ob-la-da」


비틀즈 시절 < The Beatles [White Album] >에 수록된 곡으로써 폴 매카트니의 공연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다. 그가 써낸 곡답게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 멜로디가 특징이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고 수많은 리메이크와 오마주를 통해 익숙한 곡인만큼 폴에게 익숙하지 않던 음악 팬이라도 쉽게 즐기고 동참할 수 있는 곡이다. 특히 후렴의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외치는 순간은 공연의 백미를 장식할 것이다.


2014/05 이기선(

tomatoapple@naver.com)

 

「Band on the run」


1974년에 공개한 윙스의 앨범 < Band On The Run >의 타이틀곡으로 전미 차트 정상을 기록했다. 비틀즈 이후의 폴 매카트니가 공개한 앨범 중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이 음반의 오프닝 트랙 「Band on the run」은 3개의 멜로디를 결합한 콜라주 방식을 도입해 음악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폴 매카트니가 기타와 베이스, 드럼을 연주한 것에서 그 의욕을 알 수 있다. 그의 수많은 베스트 모음집에 빠지지 않고 수록되어 있으며 공연 때마다 부르는 골든 레퍼토리다.


2014/05 소승근(

gicsucks@hanmail.net)

 

 

비틀즈  폴매카트니  비틀즈

 

「Back in the U.S.S.R.」


이륙하는 비행기의 굉음이 울려퍼지는 순간 관객들은 경쾌한 업템포 피아노 리듬을 고대한다. 예술성의 극치였던 < The Beatles [White Album] >의 첫머리를 장식한 「Back in the U.S.S.R」은 수려한 팝/록 트랙으로 가득한 앨범 가운데서도 특별한 제목만큼이나 독특한 매력으로 비틀즈의 영원한 명곡이 되었다. 작곡 뿐만 아니라 메인 보컬, 베이스, 리드 기타, 피아노, 드럼 등 모든 악기 파트를 담당한 폴 매카트니의 온전한 작품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당연히 세트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14/05 김도헌(

zener1218@gmail.com)

 

「Let it be」


비틀스를 아는 모두가 「Yesterday」와 더불어 공연장에서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곡이 아닐까. 장중한 피아노 음이 울림과 동시에 함성을 지르며 눈물을 글썽일 관객들의 모습 또한 쉽게 예상된다. 라이브 클립을 통해서도 자주 포착된 풍경이기도 하다. 1970년에 나온 비틀스의 마지막 정규앨범 수록곡.


2014/05 조아름(

curtzzo@naver.com)

 

「Live and let die」


영화 007시리즈 중 하나인 < 죽느냐 사느냐 >에 쓰인 노래로, 극적인 국면 전환이 매력적인 곡이다. 라이브에서는 솟아오르는 축포들과 함께 후반부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곡이니 사전 준비는 필수. 헤비메탈 밴드 건스 앤 로지스의 커버 버전도 유명하니 관심이 있다면 체크해 보도록 하자.


2014/05 여인협(

lunarianih@naver.com)

 

「Hey jude」


딱 한 곡만 꼽아야한다면 이 노래다. 런던 올림픽에서 괜히 부른 것이 아니다. 「Yesterday」, 「Let it be」도 있지만 잠실 주경기장에서 나올 '떼창'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소름이 돋는다. 원래는 줄리앙 레논을 위로하는 곡이다. 아버지 존 레논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했고 부모님의 이혼으로 혼란스러웠을 그를 달래려던 노래였지만 발매되던 1968년부터 40년이 넘도록 전 세계 팝 음악 팬들까지 위로하고, 동시에 응원한다. 간소한 곡 구성과 놀라운 흡입력으로 노래가 길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7분이다.


2014/05 전민석(

lego93@naver.com)

 

「Day tripper」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앨범을 급조해야 했던 1965년 겨울, 머리를 싸매며 겨우겨우 완성시킨 곡 중 하나다. 「We can work it out」과 함께 더블 A면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 1위, 미국 5위의 호성적을 거두지만, 왜인지 같은 달에 선보인 앨범< Rubber Soul >에서는 이 곡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메인 기타리프가 인상적인 곡으로, 바비 파커(Bobby Parker)의 「Watch your step」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후에 존 레논이 이야기한바 있다.


2014/05 황선업(

sunup.and.down16@gmail.com)

 

 

비틀즈  폴매카트니  폴매카트니

 

「Hi Hi Hi」


앨범에 수록된 곡은 아니다. 윙스의 1972년 작 < Ram >과 1973년 작 < Red Rose Speedway > 사이에서 음반 미 수록곡으로 발표된 싱글들 중 하나다. 곡을 낸 당시에는 가사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방송 전파를 제대로 타지 못했다. 'get you ready for my body gun'이라는 구절을 'get you ready for my polygon'으로 수정해 불러야 했다. 걱정 말자. 공연에서는 그럴 일 없다. 이 흥겨운 로큰롤 넘버를 충분히 즐기자.


2014/05 이수호(

howard19@naver.com)

 

「Get back」


1969년에 싱글로 한번, 1970년에 < Let It Be >에서 앨범 버전으로 한번 발표됐다. 곡의 포인트는 건반 주자 빌리 프레스턴의 전자 피아노 연주에 있다. 오죽했으면 이전의 그 어느 작품에서도 멤버 이외의 인물을 표기하지 않던 비틀즈가 빌리 프레스턴의 이름을 수면 위로 등장시켰을까. 위대한 이 건반 주자가 남긴 흥겨운 피아노 라인을 이번 라이브에서 맛보자.


2014/05 이수호(

howard19@naver.com)

 

「Yesterday」


말이 필요 없는 명곡.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리메이크 된 작품이자,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팝송 중 한 곡이기도 하다. 꿈에서 들은 멜로디를 모티브로 만들었으며, 다른 비틀즈 멤버들 없이 홀로 녹음에 참여한 탓에 탈퇴설이 돌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라이브는 이 곡이 하이라이트가 되지 않을까 감히 예상해 본다.


2014/05 황선업(

sunup.and.down16@gmail.com)

 

「Helter skelter」

더 후의 히트곡 「I can see for miles」에 대한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잰트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폴 매카트니도 가능하면 시끄럽고 지저분한 사운드의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탄생한 이 곡은 그래서 비틀즈 같지 않다. 질퍽한 디스토션이 걸린 거친 기타 리프와 폴 매카트니의 샤우팅 창법은 「Helter skelter」를 헤비메탈과 펑크의 족보 맨 위에 올려놓았다. 공연장에서 분위기를 띄우는데 최적의 노래다.


2014/05 소승근(gicsucks@hanmail.net)

 

「Golden slumbers - Carry that weight - The end」


「Golden slumbers」, 「Carry that weight」, 「The end」로 이어지는 일명 'Abbey Road medley'로 대망의 공연은 마무리될 예정이다. 팝 역사상 'LP의 미학'을 가장 잘 표현한 이 메들리는 각각의 곡에서도 아름다운 선율을 머금고 있다. 특히, 「The end」 가사의 마지막 줄, "And in the end, the love you take is equal to the love you make(그리고 결국, 당신이 받게 될 사랑은 당신이 베푼 사랑과 같아요."라는 문구는 폴 매카트니의 오랜 철학이자 비틀즈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다.


2014/05 신현태(

rocker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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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홍대 인디 밴드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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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에 외국인이나 해외 문화권에서 오래 살았던 멤버가 있는 건 당연하게 여겨진다.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둘 때 유리하기 때문이다. ‘현지화’라는 맥락에서 볼 때 이런 현상은 K-POP의 국제화와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인종 멤버들이 등장하는 현상은 아이돌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인디 밴드들에도 이런 경우가 종종 보인다. 물론 아이돌 그룹과는 방향이 다르다. 주로 원어민 강사로 일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밴드의 멤버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중적으로는 버스커 버스커의 드러머였던 브래드나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하세가와 요헤이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밴드들에서 외국인이나 외국 국적, 해외 문화권에서 성장한 멤버들이 활동하고 있다. 덕분에 ‘인디’의 개념도 달라지고 있다.

 

 

버스커버스커

장기하와얼굴들

(위)버스커버스커

(아래) 장기하와 얼굴들

 

 

외국인으로 구성된 인디 밴드


‘홍대 인디 밴드’는 이젠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요즘엔 ‘인디’ 대신 ‘로컬’이란 말을 종종 쓰기도 하지만, 여전히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은 자칭 타칭 ‘인디’라고 불리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 이때 우리는 특정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인디’라는 수식어를 ‘아직 성공하지 못한/않은’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진정한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라고 이해하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는 ‘아마추어적인 음악’으로 이해할 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외국 록을 촌스럽게 따라한 음악’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경우에 따라선 ‘인디는 마케팅 용어일 뿐’이란 입장을 가질 수도 있고 ‘독립 자본이 아니면 인디가 아니다’는 주장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중 어떤 것이 ‘진짜’ 인디인지 아닌지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인디’라는 개념이 입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자.

 

그런데 이 모든 의미 부여에 있어서도 우리는 인디 음악가를 한국 국적의 멤버들로 국한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아이돌 멤버들의 다국적은 비교적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인디 음악가는 한국 국적의 음악가인 걸 당연히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엔 꽤 다양한 인종과 국적자들이 홍대 앞에서 활동하고 있다. 외국인으로만 구성된 밴드도 있고 외국인 멤버가 포함된 밴드도 있다.

 

글렌체크의 김준원(보컬, 기타), 강혁준(신시사이저, 일렉트로닉스)은 해외에서 유년기를 보낸 인물들이고, 빅포니(로버트 최)는 재미교포 2세로 한국에서 활동하기 전에 이미 LA에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던 경험이 있다. 자신들의 음악을 ‘지구음악’으로 정의하는 수리수리마하수리에는 이승열의 『V』앨범에 참여했던 모로코 출신의 오마르가 속해 있다. 개러지, 블루스 록을 주로 연주하는 웨이스티드 쟈니스에는 프랑스인 닐스(Nils Germain,베이스)가 속해 있고, 포크 음악을 연주하는 3인조 모노반에는 미국의 첼리스트 조지 더햄이 속해 있다. 하드록 밴드 마그나폴은 기타를 제외한 3명의 멤버들이 모두 외국인들이다.

 

밴드의 외국인 멤버들은 주로 드럼이나 베이스 같은 리듬 파트를 맡는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밴드 내부를 비롯해 외부적으로 공연 관계자나 관객 등과의 의사소통의 문제 때문이다. 하지만 덕분에 음악적 질감이 달라진다는 인상도 받는데, 소위 ‘그루브’라고 부르는 감각이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멤버들과는 다르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래서 결과적으로는 홍대 앞 인디 밴드의 밀도가 달라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그나폴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밴드 마그나폴, 웨이스티드 쟈니스, 수리수리마하수리

 

 

홍대 앞의 한국 인디,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다


흔히 ‘홍대 앞에는 다양한 음악이 있다’고 할 때의 그 ‘다양성’이 장르나 스타일 외에 구성원들의 관계와 활동, 범위, 공동체 등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2002년 이후 홍대 앞에 집중된 ‘외국인 강사들’이 서울의 마포구 서교동을 국제적인 공간으로 만들었고, 나아가 홍대 앞의 음악에도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진 건, 단지 멤버의 국적이 다양해진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루브’는 음악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개념인데 여기서 중요한 건 결국 경험이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의 여부가 독특한 그루브를 만드는 것이다. 기존에 볼 수 없던 악기를 비롯해 다른 문화권의 경험이 독특한 리듬 체계로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한국은 이미 다인종 사회로 진입했다. 대도시 서울에는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아시아가 아닌 지역들-유럽, 미국, 러시아,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의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홍대 앞의 한국 인디’는 어쨌든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미 국제적인 관계에 놓여 있고 우리가 즐기는 대중문화는 그런 맥락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그저 어떤 게 좋은 음악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 다시 말해 ‘우리는 어디에 있느냐’란 정체성의 질문과도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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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 음악가가 말하는 ´인생의 봄날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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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안데르센(1805~1875)은 30대 중반에 긴 여행길에 오릅니다. 1840년 10월 31일,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출발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스를 거쳐 중동 지역까지 건너가지요. 이후에 오스트리아 빈을 통해 덴마크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이었습니다. 약 9개월이 걸렸다고 하지요. 그는 당시의 여행에서 겪은 일들과 보고 들은 것들을 2년 뒤에 책으로 펴냈습니다. 『시인의 시장』(En Digter Bazar)이라는 여행기입니다. 그 책의 초판 속표지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우리 함께 상상 속의 시장을 돌아다녀 보자 / 그 풍요로움을 내가 보여줄 테니 / 코펜하겐에서 동방까지 /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 아치 주랑들을’

 

어떤가요? 책을 내놓고 홍보하는 카피라고 해야겠지요? 안데르센이 살았던 19세기 중반에도 이렇듯 노골적인 카피로 독자들을 유혹했습니다. 어쨌든 이 책은 국내에서 『안데르센의 지중해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는데, 최근에는 절판돼 구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여행기에 첫번째로 등장하는 도시는 독일 함부르크입니다. 코펜하겐에서 출발한지 엿새 뒤인 11월 5일, 안데르센은 함부르크의 슈타트 론돈 호텔에 있었습니다. 사실 안데르센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그 호텔에 묵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그곳을 찾아갔던 까닭은 리스트의 연주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뒷계단을 통해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제일 좋은 자리로 나를 안내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리스트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1837) [출처: 위키피디아]

 

당시에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요. 제가 앞서 썼던<순례의 해>와 <사랑의 꿈>에서도 언급했듯이, 리스트가 당대의 피아노 비르투오조로 등장한 시기는 1830년대였습니다. 여행길에 나선 안데르센이 소문으로만 듣던 리스트의 연주를 실연으로 마주한 것은 그로부터 10년쯤 세월이 흘러서였지요. 리스트의 나이가 스물아홉 살 때입니다.

 

 안데르센의 기록에 따르면“홀은 순식간에 초만원이 되었다”고 하지요. 안데르센도 그날 현장에서 매우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문장들, 예컨대“리스트는 (연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청중을 흥분시켰다”라든가 “(그가) 무대에 등장하자 한줄기 전류가 홀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는 구절들에서 안데르센 본인이 느꼈을 흥분감이 고스란히 전해옵니다. 그는 그날 리스트의 연주를 ‘음악의 바다’에 비유하지요. “피아노 한 대가 하나의 완벽한 오케스트라로 변해 버린 느낌” “광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숙련된 열 손가락, 위대한 천재의 손가락…” 같은, 어찌 보면 허황되기까지 한 극단적인 찬사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튀어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데르센의 이 여행기는 당대에 리스트의 인기가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특히 연주회장에 모여든 여성들로부터 얼마나 큰 열광을 받았는지를 문학가적인 필치로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리스트가 연주를 마치자 사방에서 비오듯 꽃다발이 날아들었다. 예쁘고 젊은 여자들과, 한때 예쁘고 젊었을 노부인들이 저마다 부케를 던졌다.”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숱한 여성들의 환호를 받았던 리스트가 ‘나도 이제 한 곳에 정착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1840년대 후반 무렵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가장 유력하게 등장하는 인물은 카롤리네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지요. 리스트는 러시아를 세번째 방문했을 때 그녀를 만나 이후 15년간 연인이자 친구로 지냈습니다. <사랑의 꿈>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녀는 화려하고 섹시한 여성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외모상으로 보자면 그 몇 해 전에 결별했던 마리 다구가 훨씬 더 남성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타입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한데 당대 사교계에서 ‘완전 센 여성’으로 통했던 마리 다구마저도 리스트의 여성 편력 때문에 상당히 속을 끓였다고 전해집니다.

 

리스트는 어딜 가나 여성들의 환호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중에는 바람둥이 리스트의 마음을 흔들었던 여성들도 당연히 적지 않았겠지요. 특히 아일랜드 출신의 롤라 몬테스(1820~1861)라는 여성이 유명합니다. 당시 사교계에서 처음에는 무희로 이름을 날렸고, 나중에는 부유층 남자들을 상대로 몸을 팔면서 살았던 여인입니다. 초상화로 남아 있는 그녀의 얼굴은 감탄사가 나올 만큼 예쁘지요. 아마 리스트가 평생 만난 여인 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외모를 지닌 여성이었을 겁니다. 한데 성격이 매우 뜨겁고 거침없었다고 전해지지요. 그녀는 유부남 리스트를 거리낌 없이 대동하고 파티장에 드나들었고, 파티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춤을 추는 일이 예사였다고 합니다. 아마 천하의 바람둥이였던 리스트마저도 감당하기가 좀 어려웠을 겁니다. 어쨌든 리스트와 롤라 몬테스의 스캔들은 마리 다구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고, 그녀가 리스트와 결별을 결심하게 된 이유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카롤리네와 만났을 무렵이 되면 ‘낭만의 화신’처럼 살아온 리스트도 좀 지쳐 있었을 겁니다. 사실 리스트는 그보다 몇 년 앞선, 그러니까 1842년에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감독 직을 수락하는 잠정적 계약서에 서명을 한 적이 있었지요. 유럽 곳곳을 바람처럼 떠돌며 살던 그가 바이마르에 정착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던 것입니다. 그런 리스트에게 카롤리네가 했던 충고는 “이제 피아노 연주를 줄이고 작곡에 전념하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카롤리네는 매우 지적이고 사려 깊은 여인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두 사람이 만난 이듬해에 리스트는 바이마르 알텐부르크에 집을 마련하지요. 1848년이었습니다. 카롤리네는 남편인 비트겐슈타인 공작과 법적으로 이혼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바이마르로 와서 리스트를 내조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법적인 남편과 끈질긴 이혼 투쟁을 벌이지요.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공작이 세상을 떠난 1864년에야 이혼이 성사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리스트와 그녀가 이후에 법적인 부부가 된 것은 아닙니다. 속사정이야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그 무렵이 되면 두 사람의 관계는 거의 친구에 가까웠다고 전해집니다. 급기야 리스트는 1865년에 신부가 되지요.    
 
어쨌든 바이마르에 집을 마련한 1948년에 리스트는 궁정의 음악감독 직에 마침내 취임합니다. 삶에서의 큰 변화였을 뿐 아니라 음악에서도 획기적 전환을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유럽을 곳곳을 돌며 환호를 이끌어냈던 투어 피아니스트로서의 시기는 막을 내립니다. 이때부터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관현악곡 작곡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특히 교향시(symphonic poem)야말로 이 시기의 리스트를 대표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사에 새겨진 리스트의 족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피아노 비르투오조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향시’라는 장르를 개척했다는 점이지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에 대해 썼던 지난 회 칼럼에서도 설명했듯이, ‘음악과 문학의 융합’은 낭만주의 시대의 두드러진 경향입니다. 리스트의 교향시는 바로 그런 경향을 이끌었던 음악입니다. 교향시란 ‘관현악 곡으로 한 편의 시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음시’(音詩, tone poem)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교향곡처럼 여러 악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한 개의 단일악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교향곡에 비해 표현 방식이 좀더 자유롭다는 특징을 갖지요. 리스트 이후의 작곡가들 중에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교향시’에서 가장 많은 걸작을 남긴 대표적인 작곡가로 손꼽힙니다.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이라는 분류에 따르자면 교향시는 당연히 표제음악이지요. 그림이나 조각, 희곡이나 시 같은 문학 작품, 풍경이나 인물 등의 내용을 음악으로 표현하면서 곡의 제목(표제)을 붙이는 것이니까요. 낭만주의 시대에 절대음악을 옹호했던 대표적 인물로는 음악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1825~1904)가 손꼽힙니다. 반면에 표제음악의 옹호자들은 주로 창작자 본인들이었지요. 특히 베를리오즈와 리스트가 유명합니다. 리스트는 1855년에 쓴, 베를리오즈의 <이탈리아의 해럴드>를 옹호하는 글에서 절대음악 진영을 비판하면서 표제음악의 가치를 이렇게 주장합니다. “왜 작곡가가 표제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 노래를 통해 문학 혹은 그와 유사한 것과 음악의 결합은 항상 있어 왔다. 그 통합은 지금까지 서로 떨어져 있던 것보다 훨씬 친밀하게 그 둘이 하나가 되기를 약속하는 것이다.”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1848년부터 1958년까지, 리스트는 ‘교향시’로 명명한 12곡의 관현악곡을 작곡합니다. 훗날, 리스트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이었던 1882년에 또 한 곡이 추가돼 모두 13곡의 교향시를 남깁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 오늘 들을 음악, 바로 교향시 3번 <전주곡>(Les Preludes)이지요. 1848년에 작곡해 1854년에 바이마르 궁정 극장에서 초연했습니다. 1854년에 작곡한 교향시 6번 <마제파>(Mazeppa)와 더불어 가장 애청되는 리스트의 교향시라고 할 수 있지요. 음악의 내용은 프랑스의 시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의 ‘시적 명상’(meditations poetiques)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시는 ‘우리 인생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으로의 전주곡이다’라고 시작하지요. 표제인 ‘전주곡’이 바로 그 첫 구절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주곡>은 내용적으로 보자면 모두 4부로 이뤄져 있습니다. 현악기들이 느린 주제 선율을 연주하면서 시작하는 1부는 ‘인생의 봄날과 사랑’을 묘사합니다. 물론 ‘삶은 죽음의 전주곡’이라는 시구처럼, 화창하고 명랑하기보다는 철학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가 주조를 이룹니다. 2부는 ‘생명의 폭풍우’입니다. 1부의 잔잔함과는 대조적입니다. 템포는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 관악기를 앞세운 강력한 사운드가 터져 나오지요. 아마 이 칼럼을 읽을 여러분들의 귀에도 익숙한 선율일 겁니다.
 
3부는 이 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으로 손꼽힙니다. ‘사랑의 위안과 평화로운 목가’입니다. ‘알레그레토 파스트랄레’(조금 빠르게, 목가적으로)라는 지시가 붙어 있지요. 호른으로 시작하는 관악기의 목가적 선율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금관악기들이 행진곡풍으로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4부는 ‘싸움과 승리’를 묘사하지요. ‘알레그로 마르치알레 아니마토’(빠르게, 행진곡풍으로 활기차게)라는 지시가 붙어 있습니다. 신경을 조금 집중해서 들으면 4부로 이뤄진 구성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겁니다.

 

 

페렌치크프리차이▶ 페렌치크 프릭세이(Ferenc Fricsay)베를린 방송교향악단/1959년/DG

 

확고한 추천 음반이다. 힘찬 금관의 사운드가 명불허전이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프리차이의 지휘봉이 만들어내는 음악은 순정하고 견고하다. 특히 ‘전주곡’에서는 음악을 힘차게 밀어붙이는 힘이 막강하다. 푸르트벵글러가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녹음과 더불어 1950년대의 대표적 명연으로 손꼽힌다. 현재 국내 매장에서 품절된 상태라 추천을 망설였으나, 곧 구입 가능할 전망이다.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가 함께 수록돼 있다.   

 

카라얀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67년/DG


템포는 약간 느리고 음색은 밝은 편이다. 카라얀 특유의 채색 탓에 호불호가 엇갈리지만,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이 선택해온 베스트셀러 음반이다. 현재 국내 매장에서도 리스트의 ‘전주곡’ 음반 중에 가장 보편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1980년대에 이뤄진 디지털 녹음도 있으나 1967년 레코딩을 권한다. 교향시 3번 ‘전주곡’과 6번 ‘마제파’를 비롯해 헝가리언 랩소디 4번 등을 함께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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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빌보드를 점령한 연주곡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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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연주음악이 빌보드나 인기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연주곡은 종종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곤 했습니다. 아주 예전에는 경음악이나 이지 리스닝이라고 불렀고, 요즘엔 세련되게 인스트루멘탈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목소리 없이 온전히 멜로디와 리듬, 화음으로 구성된 연주곡들은 가창이 있는 노래만큼의 감동을 전해주죠. 그래서 이번에는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연주음악을 두 편으로 나눠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감상해보실까요?

 

   

 


1. Surfaris - Wipe out


그룹 서파리스의 매니저 데일 스말린의 방정맞은 웃음소리로 시작하는 이 음악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곡입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론 윌슨의 드럼과 짐 퓰러, 밥 베리힐의 명징한 기타 사운드는 「Wipe out」을 팝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주 음악 중 하나로 등극시키죠. 1963년에 발표된 이 곡은 당시 한창 붐을 이루던 서프 음악에 방점을 찍으며 싱글차트 2위에 올라 미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음악으로 자리했습니다. 국내에선 벤처스의 버전으로도 큰 인기를 누렸고 1987년에는 비치 보이스와 랩 그룹 팻 보이스가 함께 한 힙합 버전으로도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2. Champs - Tequila


이번에는 애주가들이 좋아하실만한 제목을 가진 곡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곡 역시 들으면 다 아실만한 음악인데요. 초기 로큰롤 연주 그룹 챔프스가 1958년에 발표해서 5주 동안 정상을 지킨 「Tequila」입니다. 이 곡은 제목처럼 라틴 내음이 물씬 풍기는데요. 페레즈 프라도의 「Cherry pink and apple blossom white」, 도메니코 모듀노의 「Nel blu dipinto di blu」와 함께 1950년대에 가장 중요한 라틴 음악 중 하나입니다. 「Tequila」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는 거친 소리를 내는 색소폰인데요. 색소포니스트 대니 플로레스가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3. Paul Mauriat - Love is blue


이 음악도 정말 유명한 곡이죠. 아마 40대 이상 분들은 이 곡을 들으면 라디오 시그널 음악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화면조정시간이 생각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둔 「Love is blue」는 유럽의 서정성과 고풍스러움이 상존하는 고품격 음악이죠.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 겸 악단 지휘자인 폴 모리아와 그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Love is blue」는 1968년에 미국 차트 정상에 올랐는데요. 원래는 1년 전인 1967년도 <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 >에 룩셈부르크 대표로 출전한 여가수 비키 레안드로스가 부른 「L'amour est bleu」를 연주곡으로 편곡한 음악입니다.

 

4. Edgar Winter Group - Frankenstein


록 연주곡으로는 유일하게 빌보드 정상을 차지한 연주음악입니다. 밴드 리더 에드가 윈터는 1960년대 블루스 리바이벌의 한 축을 담당했던 기타리스트 저니 윈터의 동생인데요. 그는 건반과 색소폰, 타악기를 연주합니다. 하드록과 프로그레시브의 영향을 받아서 1973년에 빌보드 넘버원을 차지한 「Frankenstein」은 에드가 윈터가 1970년에 발표한 「Hung up」의 기타 리프를 기초로 재탄생한 곡인데요. 여기서 에드가 윈터는 ARP 2600 신시사이저와 퍼커션, 색소폰까지 직접 연주하죠. 「Frankenstein」은 < 롤링 스톤 >이 선정한 최고의 록 연주곡 25에 오른 명곡입니다.

 

5. Chuck Mangione - Feels so good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이죠. 후르겔혼 연주자 척 멘지온이 1978년에 발표해서 싱글차트 4위에 랭크된 이 곡은 우리나라 라디오의 터줏대감이면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도 널리 쓰여서 아주 익숙합니다. 척 멘지온은 이후에 라디오 프로그램 < 황인용의 영팝스 >의 시그널로 사용된 「Give it all you got」과 영화 < 산체스의 아이들 >의 주제음악 「Children of Sanchez」로 케니 지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재즈 뮤지션이었죠. 「Feels so good」은 1978년도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빌리 조엘의 「Just the way you are」에 밀려 수상하진 못했습니다.

 

 

   

  

 

6. Kenny G - Songbird


1980년대 후반에 척 멘지온의 인기를 능가하는 재즈 뮤지션이 등장하죠. 바로 케니 지입니다. 소프라노 색소폰을 연주하는 케니 지는 1990년대를 풍미한 뮤지션인데요. 그 열풍의 시작이 1987년에 빌보드 4위를 기록한 「Songbird」입니다. 저녁 노을로 채색된 가을 하늘이 연상되는 이 아름답고 사색적인 곡은 영화 < 귀여운 여인 >이나 애니메이션 < 카 >를 비롯해 여러 드라마나 광고에 사용될 정도로 넓은 인지도를 자랑합니다.

 

7. Hot Butter - Popcorn


이 음악은 여러분들이 다 아는 곡입니다.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지만 아티스트 이름과 곡 제목도 모르시는 분들이 많죠. 1972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9위를 기록한 핫 버터의 「Popcorn」은 미래지향적인 음악입니다. 1969년에 거손 킹슬리가 무그 신시사이저로 연주한 원곡을 부활시킨 이 곡은 전자음악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요. 핫 버터는 거손 킹슬리의 음악을 좀 더 팝적으로 편곡해서 널리 알려졌고, 이후에도 트럼페터 허브 알퍼트나 프랑스의 건반 주자 장 미셸 자르, 뮤즈 등 많은 뮤지션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리메이크했습니다.

 

8. Apollo 100 - Joy

 

1969년에 인간이 달에 착륙한 이후, 우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대중음악에서는 우주를 소재로 한 이름이나 노래 제목이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탐 파커라는 건반 주자를 중심으로 뭉친 스튜디오 그룹 아폴로 100입니다. 이름은 아폴로 100이지만 영국에서 결성됐는데요. 1972년에 빌보드 6위에 랭크된 이들의 대표곡 「Joy」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Jesu,, joy of man's desiring(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을 바탕으로 한 연주곡으로 마크 월버그의 영화 출세작 < 부기 나이트 >에도 삽입됐습니다.

 

9. Deodato - Also sprach Zarathustra


1960년대 후반에는 21세기가 되면 우주를 마음대로 유영하며 다른 별에 기지를 건설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나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1960년대 후반이나 2010년대나 크게 달라진 건 별로 없네요. 스탠리 큐블릭 감독의 영화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의 도입부에 사용된 리차드 스트라우스의 심오한 클래식 「Also sprach Zarathustra(자라투르스는 이렇게 말했다)」를 퓨전 재즈와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광대하게 재해석한 인물은 브라질 출신의 뮤지션 유미르 데오다코, 줄여서 그냥 데오다토라고 합니다. 그는 이 유명한 곡으로 그래미에서 최우수 연주곡 부문을 수상했고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펑크(Funk) 그룹 쿨 & 더 갱의 음반들을 제작하면서 그들에게 전성기를 안겨준 일급 프로듀서가 됩니다.

 

10. MFSB & Three Degrees - TSOP


지금부터는 디스코 시대의 연주곡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74년에 차트 정상을 차지한 MFSB의 「TSOP」. 무슨 암호 같은 팀 이름과 제목이죠? MFSB는 Mother, Father Sister, Brother의 이니셜입니다. Mother Fucking Son of Bitches가 아닙니다. 그리고 TSOP는 'The sound of Philadelphia'의 첫 알파벳인데요. 이 필라델피아 사운드는 '필라델피아 소울' 혹은 '필리 소울'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스타일은 펑크(Funk)와 소울에 현악기와 관악기를 첨가해 고풍스럽고 세련된 음악을 추구했는데요. 훗날 초기 디스코의 원형으로 평가 받는 음악입니다. 1960년대의 공민권 운동으로 힘을 얻은 흑인들은 소울과 펑크(Funk)로 자신감을 표현했고 모든 흑인들은 모두 부모형제라는 하나의 모토를 내세웠죠. MFSB는 바로 그 소울 정신을 담은 그룹이었지만 사실 이들은 우리가 이해하는 일반적인 밴드가 아니라 악단 형식을 갖춘 오케스트라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필라델피아의 유명한 시그마 사운드 스튜디오의 세션맨들이 있었죠. 「TSOP」는 흑인들을 위한 음악 텔레비전 프로그램 < 소울 트레인 >의 시그널 테마로 사용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11. Van McCoy - Hustle


작곡가면서 프로듀서이자 악단 지휘자였던 밴 맥코이는 자신이 이끄는 소울 시티 심포니와 함께 발표한 「Hustle」는 1975년에 차트 정상을 차지한 디스코 음악입니다. 1976년도 그래미에서 최우수 팝 연주 부문을 수상한 이 곡은 밴 맥코이가 친구와 함께 갔던 클럽에서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허슬 춤을 추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았는데요. 이 멋진 음악에서 가장 두드러진 악기는 주요 멜로디를 담당한 피콜로라는 목관악기입니다. 풀피리처럼 높은 소리를 내는 피콜로는 묵직한 음색을 내는 트럼펫과 조화를 이루며 또 다른 디스코의 명곡을 탄생시켰습니다.


   

 

12. Love Unlimited Orchestra - Love's theme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는 느끼한 저음으로 유명한 흑인 가수 배리 화이트가 이끄는 대형 오케스트라입니다. 1973년에 발표해서 1974년에 2주 동안 빌보드 정상을 지킨 「Love's theme」은 배리 화이트가 작곡하고 직접 악단을 지휘한 곡이죠. 도입부의 현악 스트링이 마치 시원한 바닷가를 연상시키는 이 음악은 와와 페달을 사용한 리듬 기타가 인상적인데요. 초기 디스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음악입니다. 이 곡은 1980년대에 MBC 라디오 < 임국희와 함께 >의 시그널로 쓰여서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졌죠.

 

13. Average White Band - Pick up the pieces


'평균적으로 백인 밴드'라는 이름만 봐도 그룹 멤버 대부분이 백인이란 걸 알 수 있죠. 드러머만 빼고 나머지 구성원이 모두 백인인 스코틀랜드 출신의 소울 펑크(Funk) 밴드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연주한 「Pick up the pieces」만 들으면 흑인 펑크(Funk) 밴드가 연주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진한 음악을 들려줬죠. 1974년에 싱글차트 1위를 차지했지만 흑인음악차트에선 5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한 건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정상을 허락하지 않은 것 아닐까요? 이 음악을 들은 '소울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은 「Pick up the pieces one by one」이라는 연주곡을 발표해 애버리지 화이트 밴드에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랑과 평화가 이 곡을 자주 연주했고, 최근에는 영화 < 아이언맨 2 >에도 잠깐 흘러나왔습니다.

 

14. Walter Murphy - A fifth of Beethoven


'악성' 베토벤은 빌보드 싱글차트 넘버원을 가지고 있을까요? 정답은 '그렇다'입니다. 월터 머피가 빅 애플 밴드와 함께 연주한 「A fifth of Beethoven」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디스코로 편곡한 곡으로 차트에 등장한지 19주 만에 정상을 정복했습니다.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한 월터 머피는 디스코가 붐을 이루던 당시에 어느 누구도 클래식을 디스코 음악으로 연주한 적이 없다는 틈새시장을 노려 이 곡을 연주했죠. 그는 녹음한 데모 테이프를 여러 음반사에 보냈지만 거의 모두 퇴짜를 맞았고 그 중에 프라이비트 스톡 레코드라는 소규모 레코드 제작사와 연결이 되어 가까스로 싱글로 발표됐습니다. 1977년에는 영화 < 토요일 밤의 열기 >에도 삽입돼서 다시 한 번 그 인기를 증명 받았습니다.

 

15. Herb Alpert - Rise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트럼펫 연주자 허브 알퍼트가 1979년에 발표한 「Rise」의 베이스 리프는 노토리어스 바아이지의 1997년도 넘버원 「Hypnotize」에서 샘플링됐기 때문에 랩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아주 익숙합니다. A&M 레이블 사장이기도 한 그는 팝 역사에서 노래를 부른 곡과 연주곡이 모두 빌보드 정상에 오른 유일한 아티스트인데요. 1968년에 직접 부른 「This guy's in love with you」가 1위에 올랐고, 1979년에는 이 곡 「Rise」가 넘버원을 차지해 불멸의 기록을 갖게 됐죠.

 

이것으로 '빌보드를 점령한 연주곡들' 1편을 마치고 다음에는 영화 주제음악이나 미드 주제곡으로 히트한 연주곡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소승근(gicsuc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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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의 행오버, 미국 시장에서 살아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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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9일 공개된 싸이의 「행오버」는 듣는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스눕독이 쉬지 않고 ‘hang over, hang over, hang over’를 반복하면 곧이어 싸이의 랩이 등장하는데 그러다가 부부젤라처럼 삑삑삑 귀를 긁어대는 노이즈가 피치를 올리며 그걸 따른다. 싸이의 랩이 한 번 더 등장하고 마침내 “안 예쁘면 예뻐 보일 때까지 빠라삐리뽀~”가 등장하면 문득 스눕독의 중얼대는 플로우와 감미롭게 상승하는 유려한 신스가 뭔가 몽롱하고 나른한 분위기를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자, 이제 다시 ‘hang over, hang over, hang over’가 반복된다. 이번에는 꽹과리 소리가 더해진다. 아유 진짜 아이고, 머리야.



 

음악과 영상의 밀착을 살펴라


이 곡을 감상하(거나 견디)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정신없음을 장르적, 미학적 특징으로 이해하는 것. 다른 하나는 뮤직비디오의 영상을 뒤쫓는 것. (중간에 꺼버리면 이 두통을 한 번에 해결할 수는 있겠지만) 물론 이 둘은 매우 밀접하게 붙어 있으므로 그 둘을 분리하는 게 별 의미가 없긴 하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 둘, 음악과 영상의 밀착을 살피는 것이다. 사실 국내든 해외든 요즘 뮤직비디오의 경향이 음악과 영상이 별개로 작동하거나 음악의 부연설명 정도에 머문다는 걸 생각하면 「행오버」에서 보여주는 ‘뮤직’과 ‘비디오’의 쫀쫀한 조합은 꽤 놀라울 정도다.

 

일단 이 곡은 구조적으로 몇 개의 다른 스타일을 접착시킨다. 무겁고 강렬한 베이스와 쪼개지는 비트를 반복하는 트랩(trap)에 일렉트로 하우스(electro house)의 발랄한 신스와 꽹과리나 부부젤라 같은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악기들이 끼어든다. 신나게 흔들어대다가 무겁게 가라앉다가 중얼중얼 대다가 ‘빠라삐리뽀’나 ‘받으시오~’ 같은 우스꽝스러운 구절이 등장한다. 이런 구조가 몇 번이나 반복되는데, 맥락 없이 어쩌면 단절적으로 접착된 소리는 듣는 사람을 그야말로 정신없게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이것은 영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디오는 앞뒤로 되감기를 반복하다가 애니메이션이 나오다가 갑자기 폭탄주와 편의점과 사우나와 할리데이비슨과 중국집과 노래방과 월미도와 당구장과 조개구이 집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 모든 맥락 없음이 일제히 겨누는 것은 결국 ‘밤새 술을 마시는 점입가경의 여정’인데, 이 여정은 조개구이 집에서의 다툼이 서울 시내(의 일부)를 마비시키는 재앙으로 번질 때에야 끝난다. 심지어 싸이와 스눕독은 자신들이 야기한 저 엉망진창을 뒤로 하고 유유자적 길을 떠난다.

 

싸이

 

‘한국적인 무엇’은 온갖 것을 짜깁기한 것


여기서 흥미로운 건 바로 저 ‘맥락 없음’이다. 다시 말해 그때그때 여타 이유로 여기저기서 갖다 붙인 것들의 정서가 음악과 영상을 관통한다. 그리고 이거야말로 서울 혹은 한국의 문화를 직관적으로 가리킨다. 다시 보면, 「행오버」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한국적인 무엇’은 온갖 것들을 짜깁기한 것들이다. 폭탄주부터가 그렇고 사우나와 중국집, 노래방(=가라오케), 월미도 유원지가 그렇다.

 

그런데 정작 이 ‘비디오’는 이것들을 ‘한국적인 것’으로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소룡을 흉내 내고 중국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한자가 쓰인 병풍 앞에서 씨엘은 춤을 추고, 비디오의 클라이막스인 조개구이 집에서의 난장판에서는 무술영화의 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 모두가 만드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상상할 수 있는 ‘아시아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흥미로운 건 한국의 일상, 대중문화가 사실은 서양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이 뒤섞인 결과이며 그것이 나름의 독특하고 고유한 지점을 생산해낸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접착이야말로 K-Pop의 근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K-Pop은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이제까지 존재했던 그 모든 ‘좋은’ 것들을 이어붙인 무엇이다. 오리지널리티는 없지만 오리지널리티를 능가하는 순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점이 바로 K-Pop이 의미심장한 맥락을 얻는 지점이라면, 싸이의 「행오버」는 「강남스타일」과 「젠틀맨」을 거치며 자신이 미국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걸로 보인다. 이건 음악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다시 말해 미학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물로 시장에서 승부를 겨루겠다는 기존 K-Pop 기획사들의 전력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가차 없고 뻔뻔하고 단호하다. 이것은 문화도 아니고 예술은 더더욱 아니라는 얄짤 없는 태도. 그래서 이 음악이 좋으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이 비디오가 어떠냐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군데군데 의미심장한 부분이 나오지만, 의도라기보다는 무의식적인 선택에 가깝다. 이것은 그저 상당히 재미있는, 또한 피곤하게 만들어서 듣는 사람의 뇌를 마비시켜버리는 엔터테인먼트다. 그런데 그게 어때서. 분명한 건 싸이가 무시무시한 속도가 지배하는 미국, 세계 시장에서 꽤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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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과 조르주 상드, 영혼의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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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여성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작가 조르주 상드(1804~1876)입니다. 쇼팽보다 6년 연상이지요. 오늘은 이 유명한 여성 작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이름부터 한번 살펴보지요. 그녀의 본명은 ‘아망틴 오로르 루실 뒤팽’(Amantine Aurore Lucile Dupin)입니다.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여섯 살에 지방 귀족이었던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지만 시골 영주의 안주인으로 살 수 있는 여성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뒤드방 남작과 헤어진 채 두 아이를 데리고 파리로 들어서지요. 그게 1831년의 일이었고 이듬해에 <앵디아나>(Indiana)라는 소설을 써서 작가로 데뷔합니다. ‘조르주 상드’라는 이름은 이 소설을 발표하면서 사용한 필명이었는데 이후에도 계속 같은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한데 ‘조르주’는 남자 이름이지요. 영어로 하면 ‘조지’가 됩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여성작가들이 남자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Chopin,_by_Wodzinska.

프레데리크 쇼팽(Fr?d?ric Chopin) [출처: 위키피디아]

 
사실 ‘소설 쓰기’는 그 무렵의 지적인 부르주아 여성들이 도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문직’이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차별’이라고 해야 할 성역할이 엄연히 존재했으니까요. 여성의 참정권 제한은 물론이거니와 대학에서도 여성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학 교육을 받아야 가능했던 철학이나 과학 분야에서 여성의 이름을 만나기는 어렵지요. 여성이 활약할 수 있었던 분야로 ‘소설 쓰기’ 외에 또 다른 것을 떠올려보자면 아마도 음악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대부분 남성들이 주도했습니다. 쇼팽과 상드의 시대, 그러니까 낭만주의 시대의 기억나는 여성 음악가로는 슈만의 아내였던 클라라 슈만, 또 멘델스존의 누나였던 파니 멘델스존 등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한데 당시에 작가 조르주 상드는 과연 어느 정도의 인기를 누렸을까요? 한마디로 말해 엄청났습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발자크나 빅토르 위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볼 수 있지요. 같은 시기에 영국에는 찰스 디킨스가 있었습니다. 상드는 불어로 소설을 썼지만 영국에서도 번역돼 인기를 누렸던 작가였고, 그녀가 받았던 원고료는 앞에서 언급한 ‘세 분’보다 오히려 한 수 위였지요. 게다가 상드에게는 이른바 ‘무명 시절’이 없었습니다. 처녀작이었던앵디아나』가 요즘말로 ‘대박’이 나면서 단숨에 유명작가로 부상했던 것이지요.

 

그녀가 파리로 들어섰던 1831년에 폴란드의 청년 쇼팽도 역시 파리에 옵니다. 물론 우연이었겠지만 훗날 두 사람의 열애를 떠올린다면 필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1830년 11월에 폴란드를 떠난 쇼팽은 오스트리아 빈에 체류하다가 프랑스 파리로 들어서지요. 그 여정 중에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을 때, 조국 폴란드의 독립운동 봉기가 러시아 군대에 진압됐다는 소식을 듣고 연습곡 12번 ‘혁명’을 작곡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여부는 좀 불투명합니다. 실제로 음악가 쇼팽이 ‘폴란드 민족주의자’로 채색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는 조국 폴란드를 분명히 사랑했고 자신의 음악에, 특히 ‘마주르카’에 폴란드 민속음악의 체취를 강하게 담아내기는 했지만 민족주의 운동가로서의 기질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Die_junge_George_Sand

조르주 상드 [출처: 위키피디아]

 

그보다는 좀더 보편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할 성 싶습니다. 우리가 흔히 쇼팽을 일컬어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부르는데, 저는 이 수식어야말로 쇼팽을 설명하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서양음악사의 인물 수식어는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경우들도 적지 않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음악의 어머니 헨델’일 겁니다. 같은 시대의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칭해놓고 그와 대구를 이루는 표현으로 등장한 듯한데,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수식어입니다. 하지만 쇼팽의 경우에는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물론 이런 표현 앞에서 쇼팽보다 한 살 아래인 리스트를 먼저 떠올릴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두 사람은 당대의 피아노 음악을 수놓았던 천재들이었지요. 한데 저는 쇼팽에 비해 리스트의 피아니즘은 좀더 소설적이고 영화적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 지점에서 또한 떠올릴 것은 당대에 피아노라는 악기가 차지했던 위상입니다. 제가 베토벤 편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19세기로 접어들면서 비약적인 발전과 개량을 이룬 악기, 그와 더불어 대량생산과 대량 보급이 가능해진 악기로 피아노를 빼놓을 수가 없겠지요. 말하자면 19세기 초중반에 가장 인기 있던 악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부르주아지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악기가 바로 피아노였습니다. 집안의 거실에 프랑스산 플레옐이나 영국산 브로드우드, 혹은 독일산 베흐슈타인 피아노를 들여놓는 것이 교양과 품위의 상징이던 시대였지요. 오늘날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스타인웨이는 이보다 조금 후발주자였습니다.
 
이미 연재한 글에서도 여러 차례 설명했습니다만 음악의 발전은 악기 발전과 궤를 같이 합니다. 그러니 쇼팽과 리스트는 ‘피아노 르네상스’의 선택을 받은 음악가들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1831년 9월, 기진맥진한 심신으로 파리에 들어선 쇼팽은 약 6개월간 꽤나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주머니에 돈도 떨어진데다 파리에서는 아직 무명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듬해 2월에 파리의 살 플레옐에서 가졌던 데뷔 연주회가 큰 성공을 거둡니다. 조르주 상드가 처녀작 <앵디아나>로 일약 유명작가 대열에 올라섰던 바로 그 해에, 쇼팽은 피아노 회사 플레옐이 만든 콘서트홀에서 성공적인 데뷔 연주회를 치렀던 것이지요.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836년 리스트의 연인인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살롱에서였습니다. 남장을 하고 시가를 피우는 유명 여성작가, 아마도 사회주의자였을 조르주 상드에게 쇼팽은 처음에는 거부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이 또한 확실한 설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오히려 두 사람이 서로의 강렬한 개성에 끌렸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렇지 않다면 약 1년 뒤부터 전개된 둘의 열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첫 만남에서 진짜로 거부감을 느꼈다면 아마 둘은 다시 만나지 않았을 겁니다.
 
어쨌든 두 사람은 1838년 가을, 스페인 마요르카 섬으로 가서 동거 생활을 시작하지요. 상드의 두 아이들인 모리스와 솔랑즈도 함께였습니다. 하지만 마요르카에서의 생활이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두 사람과 아이들은 발데모사 수도원에서 살았는데 주거 여건이 별로 좋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상드와 쇼팽의 관계를 의심한 동네 사람들의 비난과 구박도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우기가 닥치는 바람에 몸이 약한 쇼팽은 건강을 크게 상하고 말지요. 아마도 폐병으로 추정되는데 쇼팽은 이때 각혈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상드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지만 아무 차도가 없자 할 수 없이 마요르카 섬을 떠납니다. 마르세이유에서 잠시 요양을 한 후, 자신의 고향인 프랑스 중부의 노앙(Nohant)으로 쇼팽과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요. 이때부터 1846년까지 쇼팽과 상드는 노앙과 파리를 오가며 지냅니다.
 
상드는 쇼팽의 음악인생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지요. 특히 노앙 시절은 쇼팽의 삶에서 매우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쇼팽, 기질적으로 예민한데다 신체적 질병까지 있었던 그는 상드의 모성애적 사랑에 큰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물론 당대와 훗날까지도 일부 남성들은 상드에 대해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험담을 퍼부었지요. 남성 편력이 많은데다 과시욕이 넘치는 여자, 소설이 많이 팔리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소설을 쓰지는 못한 B급 작가라는 등의 비난이 많았습니다. 제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라는 책에서도 썼듯이, 보들레르와 니체는 아주 대놓고 상드를 욕했던 인물들이지요.

 

하지만 적어도 쇼팽과의 관계에서 상드가 보여줬던 태도는 헌신적이었습니다. 귀족적 취향에 까탈스럽고 병약한, 때로는 상드의 남자관계를 의심하기까지 했던 쇼팽의 곁에 상드는 9년간이나 머물지요. 지나치게 모성애적인 연애관계가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상드는 쇼팽에게 행복과 영감을 줬던, 어머니 같은 연인이었고 예술의 뮤즈였습니다.

 





쇼팽의 창작적 전성기는 바로 그 시기, 상드와 사랑에 빠져 있던 마요르카에서 노앙까지의 시절이었습니다. 마요르카에 머물던 시기에 쇼팽은 24곡의 전주곡을 완성했고, 노앙 시절에도 많은 곡을 썼지만 그중에서도 <소나타 2번 b플랫단조>와 <소나타 3번 b단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자는 노앙에 당도한 직후였던 1939년 여름에, 후자는 노앙 시절의 막바지였던 1844년 여름에 작곡했지요.

 

이 두 곡 중에서 소나타 3번을 음악적으로 더 원숙한 작품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장송’이라고 불리는 소나타 2번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형식적 완성미는 3번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감성적으로 호소력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절망적인 색채감, 무겁고 어두운 리듬이 두드러진 소나타입니다. 특히 3악장 ‘장송행진곡’이 유명한데 쇼팽은 이 악장을 1837년에 이미 작곡했다가 2년 뒤에 소나타 2번에 포함시키지요.

 

1악장은 네 마디의 무겁고 느린 서주로 막을 엽니다. 이어서 곧바로 빨라집니다. 왼손으로 저음부를 격렬하게 짚어나가면서 오른손으로 짧은 악구를 집요하게 반복하는 첫번째 주제, 그리고 두번째 주제에서 느리고 서정적인 선율이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뜨거워집니다. 끊어 치는 리듬으로 돌진하듯이 막을 여는 2악장은 스케르초 악장입니다. ‘딴딴다다단’ 하는 리듬형을 잘 기억해두기 바랍니다. 이어서 우아하고 잔잔한 분위기의 중간부가 등장했다가 다시 무겁고 저돌적인 스케르초, 그리고 마지막 코다에서 중간부에 등장했던 우아한 악구가 다시 얼굴을 내밉니다. 긴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입니다.

 

이어서 소나타 2번의 백미인 3악장 ‘장송행진곡’으로 들어섭니다. 마치 장송의 행렬이 서서히 걸음을 떼는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무겁고 장엄하면서도 비애감이 느껴집니다. 장송의 발걸음이 점차 크고 무거워집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중간부의 애수 어린 선율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마 처음 듣는 분들도 단번에 마음을 빼앗길 만한 선율일 겁니다. 마지막에 다시 장송의 주제로 돌아왔다가 곧바로 짧은 피날레 악장에 들어서지요. 이 피날레는 왠지 그로테스크합니다. 셋잇단음표를 양손으로 계속 연주하면서 수수께끼 같은 악구를 펼쳐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강렬한 포르티시모 한 방으로 음악을 마무리합니다.

 
ps.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쇼팽의 소나타 2번(1962년/Sony)은 현재 품절 상태여서 추천 목록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폴리니▶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1984년/DG


오랜 세월 꾸준히 손꼽혀온 명연이다. 물론 쇼팽의 음악 중에서도 소나타 2번은 남성적 열정을 대변하는 곡 중의 하나인 까닭에, 이지적이고 때로는 차갑게까지 들리는 폴리니의 연주가 적합하지 않다는 이견도 있다. 그렇더라도 쇼팽은 폴리니의 한 시절을 대표했던 레퍼토리다. 차분하게 음악을 풀어나가는 솜씨가 역시 폴리니답다. 치밀한 음향의 조율이 돋보인다. 어둡고 무거운 악구와 부드럽고 섬세한 악구를 견실하게 조탁해가는 연주력이 탁월하다. 자칫하면 오버하거나 그 반대로 맥이 빠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 쇼팽의 소나타 2번일 터. 하지만 폴리니의 연주는 두고두고 들을 수 있는 모범적인 사례다. 2008년의 새로운 녹음도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좋다.

 

 

소콜로프▶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2008년/Naive


개성이 넘치는 강렬한 연주다. 소콜로프는 1950년 레닌그라드 태생. 러시안 피아니즘의 계승자답게 파워풀하면서도 섬세하고 영롱한 연주를 들려준다. 리듬과 템포의 운영은 기존의 쇼팽 연주들에 비해 좀더 자유스럽다. 유니크한 음악을 창조하려는 자신감 있는 태도를 엿보게 한다. 어딘지 관조적인 폴리니의 스타일에 비하자면 훨씬 더 음악이 피부로 육박해오는 느낌을 준다. 1악장 서주부터 듣는 이의 귀를 붙들어맨다. 특히 소나타 2번이 가진 강약의 대비, 애틋한 서정과 남성적인 폭발력의 대비를 선명하게 구사하고 있는 호연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장의 CD에 24개의 전주곡과 소나타 2번을 함께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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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 행오버(Hangover)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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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

 

'한국 출신 팝 가수' 싸이의 신곡이 나왔습니다. 갱스터 힙합의 거물 스눕 독(Snoop Dogg)을 초대하여 만든 「행오버(Hangover)」는 최신 유행의 트랩 비트에 태평소를 연상시키는 관악기와 꽹과리 소리를 얹었습니다. 사실 전작 「젠틀맨」은 「강남스타일」의 후폭풍에 살짝 숟가락을 올렸던 터라 싸이의 본격적인 진검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부함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야 퀄리티만큼은 놀랍다.” -이대화


“간단히 얘기하자면 구리고 복잡하게 얘기하자면 상당히 구리다.” -한동윤

 

유튜브에 뮤직비디오가 발표된 시점부터 「행오버」에 대한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SNS에선 이즘의 전 편집장 이대화, 한동윤이 완전히 상반된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여론은 물론 이즘 필자들 사이에도 온도차가 큽니다. 오가는 의견을 모으고, 추려, 한자리에 펼쳐보니, 「행오버」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합니다.

 

버스(verse)라인에 깔린 비트와 「행오버」를 연달아 읊어대는 보컬 라인, '받으시오'로 시작해 꽹과리, 색소폰, 신스를 겹치고 겹친 훅에서의 사운드는 상당한 중독성을 자아낸다. 단순히 보컬에 흡인력을 부여했던 「강남스타일」과는 다른 다각화된 방법론이 보인다. 즐겁게 곡을 풀어나가는 제 색깔이 적당히 배어있고 여러 방식을 도입하는 여러 시도들도 적당히 섞여있다. 실로 괜찮은 곡을 뽑아냈다. -이수호

 

이전 두 곡에 비해 전체적으로 집중도가 많이 떨어진다. 훅이 약하다. 그나마 튀는 '받~으~시~오'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 아니면 매력을 느끼지 못할 부분 -조아름

 

국악기를 사용한 편곡도 뒤지지 않는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며 무식하게 어울리지도 않는 국악을 섞는 뮤지션들과 선을 긋는다. 잘 녹아들었다. 트랜드를 놓치지 않는 동시에 본인의 매력도 살렸다. -전민석

 

싸이의 랩핑은 스눕 독에 가려 귀에 잘 들리지 않으며, 곡 후반부에 이르면 꽹과리는 소음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조화가 원만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성민주

 

'받으시오~' 구절과 왜곡된 색소폰 소리가 잠시 노래를 가볍게 만들기는 한다. 그것도 감상이 반복되다 보면 적절한 안배이며 구성의 묘미로 다가온다. 아직 「강남 스타일」의 잔상을 떨쳐 버리지 못한 이들에게는 다른 접근법에 거부감부터 들 수도 있겠지만, 그는 분명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최대치를 해냈다. 더 말할 것도 없다. 또 다른 싸이의 탄생이다. -황선업

 

스눕 독의 특색이 짙은 랩핑이 싸이가 점하는 작품의 점유율을 상쇄시킨다. 곡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은 이 때문이다. 더욱이 둘이 주고받는 랩도 다분히 평범하다. 이를 지루하게 늘어뜨린 기분마저 든다. -신현태

 

곡의 모양새가 나쁘지 않다. 기본적인 트랩 비트위에 색소폰이나 꽹과리 소리 등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도 집어넣었다. 말춤의 이미지를 탈피하면서도 적정수준의 곡 완성도를 확보하려는 고민이 묻어난다. -홍혁의

 

싸이의 음악에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B급 개그, 음악성, 재밌는 가사가 아닌 '원초적인 흥'이다. 음악에 미쳐 신나게 뛰던 13년차 대중가수가 전 세계의 입맛에 맞춰야 한다는 국제가수의 강박감에 즐기지를 못하고 있다. -정유나

 

대부분 사람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일단 반감부터 갖기 마련이다. '왜 하던 거 계속 안하고 이상한 음악 하지?', '왜 웃긴 춤은 안 추고 술자리 추태나 찍은 거지?' 그럼 싸이는 계속 '오빤 강남 스타일'을 외쳐야 하고, 계속 말춤 추면서 한국을 알리는 관광 패키지 영상이라도 찍어야 하나? 그것이 싫어 나온 노래가 「Hangover」다. 'Do you know Psy?' 'Do you know Gangnam Style?'식의 익숙함보단 이런 어색함이 백배 천배 낫다. 싸이답다. -김도헌

 

제목처럼 강한 '숙취'를 남긴다. 되풀이되고 울렁거리는 구성은 쉽게 머리에서 떨쳐내기 힘들지만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차기작에 대해 치열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 보다는 '어떻게 뜰 것인가'에 더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결국 유행 제조의 가장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공식. 세뇌에 가까운 '반복 청취'를 택했다. 전략은 치밀하나 방식은 진부하고 울림은 약하다. 힙합적 베이스와 한국적 소리를 섞고, 스눕 독이란 어마어마한 물량공세를 퍼부은 것에 비해 짜릿한 감흥은 적다. -김반야



 

「강남스타일」이 유튜브에서 초특급 대박을 친 만큼 이번 「행오버」의 뮤직비디오도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오바이트하는 모습부터 시작해 폭탄주, 숙취음료, 노래방, 러브샷 등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신기하게 비춰질 대한민국의 '음주문화'를 코믹 혹은 섹시 코드로 버무렸습니다. 뮤직비디오는 날이 갈수록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고 있지만 만만치 않은 '논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음악 이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술이다. 물론 음주와 숙취를 노래한 곡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마치 한 편의 노골적인 상업용 필름을 보는 것 같다는 게 영 찜찜하다. 안으로만 굽는 애국심을 비꼬는 '두유노우 싸이?'에 이어, 향후에는 '두유노우 소주?'와 '두유노우 소맥?'도 추가해야 할 판. 음악과 뮤비를 통해 한국을 홍보해야 한다는 식의 사명감은 부디 내려놓았으면 -여인협

 

음주와 숙취의 쳇바퀴를 바삐 굴리는 뮤직비디오는 적나라한 우리의 술자리 모습이다. 싸이 고유의 '똘끼'도 살리면서 정체성도 지켰다. -김도헌

 

미국 음악으로 전하는 한국의 음주문화. 그 총체가 그리 어색하게 다가오지 않은 건 이질함의 경계를 매끄럽게 지워버리는 싸이의 천연덕스러움 덕분인지, 아니면 근 몇 년간 홍대에서 소주냄새에 절은 서양인들을 익숙하게 봐 와서인지는 모르겠다. 뮤직비디오에서 어색한 건 오직 그의 싼티다. 그 억지스러움 때문에 등장하는 모든 게 다 광고 같다. 「강남스타일」의 예기치 못한 성공은 싸이의 B급 정서에 작위성을 부여해버렸다. -윤은지

 

뮤직비디오에서 과도할 정도의 마샬 아츠 신도 넣으면서 적극적으로 구애에 나서고 있다. 물론 신드롬으로 유명세를 얻었으니 그 이상의 결과를 얻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감정 섞인 비난은 필요 이상이다. -홍혁의

 

우리 음주 문화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준다는 도덕적 비판을 떠나서 「행오버」의 성공에도 이는 걸림돌이다. 한바탕 소란에 눈을 바삐 움직이다 보면 음악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노래를 잡아먹는 뮤직비디오가 싸이를 비디오 가수로 전락시킨다. 그가 이 사실을 자신의 태생적 한계로 인식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이기선

 

국위선양이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부담감 따윈 갖지 말아야한다고 듣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생각은 했을 거다. 꼭 한국문화를 눌러 담아야 했을까 싶지만 모르는 이에겐 충분히 재미와 흥미를 줄 장면이 많다. 과장 운운하며 거품 무는 사람도 상당수라곤 하나 이만큼 웃기고 현실적인 묘사가 또 있던가? -조아름

 

싸이

 

싸이의 조준경은 국내가 아니라 미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미 공개 시점과 유통 과정부터 내수용이 아니죠. 그래서 국내 시장에선 「행오버」가 더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마도'트랩'이라는 용어 자체를 며칠 사이 처음 들은 사람이 태반일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월드스타가 된 싸이는 이제 미국과 유럽의 귀들이 반길만한 사운드와 작법을 선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철저히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행오버」가 과연 해외시장에서 잘 먹힐까요? 조심스레 해외 전망까지 던져봅니다.

 

웨스트 코스트 힙합의 거목 스눕 독과의 협업으로 미국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확인할 정도로 만족하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현재 빌보드는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는 '그만 그만한' 상황이다. -신현태

 

뜰 것 같진 않다. 뜰만한 소재가 없기도 하고, 이미 반응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전민석

 

그야말로 '강남스타일 열풍'을 주도했던 싸이의 신곡 수준이 아닐까? 스눕 독 효과로 어느 정도 관심을 확보할 순 있겠지만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긴 힘들어 보인다. -한환

 

흥행 여부, 글쎄올시다. 해외에서 싸이는 음악으로 인정받은 남자가 아니다. 빌보드 정상을 위협케 한 「강남스타일」 첫 파동은 B급 컬러로 칠해진 뮤직비디오. 강남 한량의 일상이 한 차례 웃음을 자아낸 뒤에야 우스꽝스러운 안무, 귀에 박히는 노래가 겨우 빛을 받았다. 시각 요소에서 출발해 음악에서 성공을 거두는 체계인데, 이게 참 우습다. 음악만으로는 흥행을 점칠 수 없는 음악가의 기이한 수익구조다. -이수호

 

'뜰 것 같다'라고 적긴 했지만, 대박보다는 중박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애초에 「강남 스타일」은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고, 「젠틀맨」은 그 화제성의 덕이 컸다. 오랜 공백기 후 자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상황에서, 단순히 재미나 유흥을 벗어나 '듣는 음악'으로서의 매력이 느껴진다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다만 아주 높은 순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미국 대중들에게 있어 「강남 스타일」과 같은 경험하지 못한 새로움이 아닌, 어느 정도 예상 범위 안에 있는 스타일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머리를 끄덕끄덕일 수는 있어도 시선을 완전히 돌리게 하긴 좀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 아닐까. -황선업

 

「행오버」 뮤직비디오의 결말을 기억하십니까? 싸이가 던진 숟가락 하나에 사람들은 패싸움을 벌이고, 식당은 쑥대밭이 되죠. 현재 저녁 뉴스에서 싸이의 신곡을 조명하고, 스눕 독과 함께 간 노래방이 금영인지 태진인지 알려주는 인터넷 기사까지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가 던진 '5분 9초'가 대한민국과 이즘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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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낭만주의, 요즘 시대에도 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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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신곡 「A.D.D.a」가 발표되었다. 2008년, 넥스트(N.EX.T)가 발표한 <666 Trilogy Part I>이후 6년만이다. 이 곡은 곧 발표될 여섯 번째 솔로앨범<Reboot Myself>의 첫 번째 공개곡이기도 하다. 반응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양가적이다. 호응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적응하기 어렵다거나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나는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개한민국>을 들었을 때의 ‘충격과 공포’를 잊을 만큼 괜찮았다. 오랜만에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랬다. 아닌 게 아니라 올 초부터 뜬금없이 신해철의 초기 앨범들을 틈틈이 다시 듣고 있던 중이라 오랜만의 신곡이 놀랍진 않았다.

 

신해철  신해철  신해철

 

낭만적인 감수성이 존재하는 신해철 음악


「A.D.D.a」는 원 맨 아카펠라 형식으로 만들어진 곡이다. 1천개 이상의 트랙을 겹겹이 쌓아 올려 제작했다고 한다. 어쩌면 장난처럼, 혹은 대수롭지 않게 들리는 소리‘들’이 사실은 강박적으로 녹음과 재녹음을 반복한 다음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결과라는 뜻이다. 원 맨 아카펠라는 아니지만 미국의 5인조 아카펠라 그룹 펜타토닉스(Pentatonix)도 이런 식으로 음악을 만든다. 목소리만으로 일반 음악에 필적하는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하는 식인데 「A.D.D.a」의 경우엔 배경으로 깔리는 베이스 라인과 리드 보컬과 코러스의 겹겹이 쌓인 구조가 전자음악의 그것처럼 복잡하고 리드미컬하게 펼쳐진다. 수없이 반복되는 작업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노래가 환기하는 건 역설적으로 신해철이라는 싱어송라이터의 포지션이다. 그는 무한궤도와 솔로 시절 이후 윤상과 함께 결성했던 프로젝트 노땐스, 넥스트, 크롬(Chrome), 비트겐슈타인 등을 거치는 동안에 꾸준히 ‘다른 음악’을 찾아다녔지만 그 중심에는 세계에 대한 낭만적인 감수성이 확실하게 존재했다. 이 낭만성이야말로 신해철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인데, 90년대의 감수성이라고 해도 좋을 지점을 자극하는 것 같다.

 

「A.D.D.a」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학교를 갔어도 졸업이 업이 안 돼 / 군대를 갔어도 취직이 직이 안 돼 / 장가를 갔어도 글쎄 어째 애가 안 생겨 / 애아범이 돼도 철이 들질 않아 전혀.” 그 뒤로는 ‘철들지 않는다’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는데 “그냥 그대로 그대로 그대로 대로 대로 대로 대로 / 이 똑같은 세상을 어떡하든 버티는 나 / I'm just what I am” 같은 가사가 쭉 이어지는 것이다.

 

신해철  신해철  신해철

 

신해철의 이런 낭만주의는 90년대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서태지와 비교될 만하다. 솔로 시절과 넥스트의 음악을 다시 들어보면 소위 ‘중2병’같은 감각의 노랫말이 단번에 와 닿는데 이 점이야말로 신해철의 특징이자 서태지와 직접적으로 비교되는 지점이란 얘기다. 요컨대 서태지의 음악은 ‘시대적 명령’에 가까운 화두를 던지는 노래들이었다면 신해철은 대책 없는 낭만주의를 선보였다. 서태지 노래의 화자에 주로 ‘우리’가 많이 등장한 반면 신해철은 언제나 ‘나’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것을 개인주의와 소비주의가 주도권을 행사한 ‘90년대’라는 시대적 조건에 발맞춘 ‘낭만적 개인의 탄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태지가 사회와 제도에 집중했다면, 신해철은 꿈이나 사랑, 운명 같은 형이상학적인, 비현실적인, 낭만적인 개념들에 대해 노래했다. 음악적으로도 넥스트/신해철은 단지 프로그레시브 록의 접목이 아니라 이런 서사와 분위기를 압도적인 ‘스펙터클’로 제시하려는 욕망이 있었음이 중요할 것 같다. 이것은 아직까지 신해철의 음악적 방향을 결정하는 키워드다. 「A.D.D.a」의 강박적인 접근방식 또한 이런 스펙터클과 밀접하다.

 

중요한 건, 나처럼 90년대에 10대와 20대를 보낸 세대에게 신해철의 낭만주의가 꽤 강렬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신해철의 노랫말은 주로 ‘꿈을 포기하지 않겠어’, ‘난 결코 철들지 않겠어’, ‘세상과 싸워나가겠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시절에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형성된 세계관이 아직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은연중에 그렇게 살려고 애써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A.D.D.a」를 들어보니 신해철은 40대 중반에도 여전히 그렇게 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다.

 

새삼 이 곡이 실리게 될 새 앨범의 제목은<Reboot Myself>다. <Myself>는 신해철이 1991년 발표한 2집 앨범의 제목이었다. 이 앨범은 한국 최초로 미디로 만들어진 앨범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Reboot Myself>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미디’라는 혁신적인 악기를 사용했던 것처럼 아카펠라와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고, 다른 하나는 본격적으로 ‘혼자 모든 작업을 해낸’ 솔로 2집의 초심을 다시 가다듬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을 돌아보는 것. 요컨대 “난 바보처럼 요즘 세상에도 운명이라는 말을 믿어”, 맙소사. 이 낭만주의가 90년대 세대들과 만나는 지점에 대해 더 살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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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 대기만성의 노력형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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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

안톤 요제프 브루크너 [출처: 위키피디아]

 

음악이 대중적인 것과 순수한 것으로 나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그런 식의 이분법으로 음악을 쪼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는 19세기의 음악가들은 ‘그냥 음악가’였습니다.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는 물론이거니와, 좀 더 후대로 내려와서는 리스트나 파가니니 같은 비르투오소 계열의 음악가들, 혹은 점잖고 묵직한 이미지로 표상되는 브람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순수하고 고급스러운 음악가들’로 인식되는 그들조차도 당대에는 그저 ‘음악가’로만 존재했습니다. 말하자면 음악적 순수함뿐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까지 두루 갖춘 음악을 써내는 것이 그들의 작업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변화인 자본주의 체제의 도래는 음악의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더욱 부채질했을 겁니다. 콘서트홀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활성화하기 시작한 대중매체는 이른바 ‘스타 음악가’를 찾아내 그의 이름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겠지요. 그렇게 근대로의 진입이 본격화되면서 음악에서의 대중성이라는 요소가 이전 시대에 비해 점점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19세기의 문화사적 풍경이었습니다.

 

안톤 브루크너(1824~1896)는 바로 그런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다간 음악가입니다. 이른바 후기 낭만주의 시대를 관통했던 그의 삶은 20세기를 고작 4년 앞두고 막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그는 나이 마흔 살이 넘어서야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으니, 활동 시기가 주로 19세기 후반에 집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대중성이 음악에서 점점 중요해지던 시기였지요.

 

그런데 어떤가요? 이 브루크너라는 음악가는 한마디로 그런 시대에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도시 린츠(Linz)에서 남쪽으로 약 15km쯤 떨어져 있는 안스펠덴(Ansfelden)이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성품이 매우 우직했을 뿐 아니라 평생을 엄격한 가톨릭 신자로 살았습니다.

 

이런 특성들은 당연히 그의 음악에도 반영돼 있지요. 특히 9개 교향곡(스스로 ‘습작’이라 밝힌 f단조와 0번으로 칭한 d단조까지 포함하면 모두 11개 교향곡)으로 대표되는 그의 음악은 ‘웅장하고 광대한 음의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곤 하는데, 그 뿌리를 더듬다 보면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오랜 세월을 보낸 그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에서 울려나오는 웅장한 음향과 그의 교향곡들은 매우 밀접한 친연성을 보여줍니다.

 

브루크너는 시골학교 교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본인도 교사로 일했습니다. 슈베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브루크너는 16세에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이듬해에 보조교사로 교편을 잡습니다. 한데 그는 아버지로부터 직업을 물려받은 것뿐 아니라 오르간도 배웠습니다. 시골 성당 오르간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열 살 무렵부터 오르간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약 2년 뒤에는 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성가대에 들어가지요. 이 수도원은 브루크너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그는 1845년부터 1855년까지, 이 수도원에서 처음에는 교사로, 나중에는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니까 10대의 일정 기간과 20대의 전부를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어땠을까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웅장한 수도원에서의 삶이 그의 음악은 물론이고 인간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브루크너는 바로 이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음악에 대해 심도 있는 학습을 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작곡가로서의 행보를 내딛기도 하지요.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곡은 아니지만, d단조의 레퀴엠과 b플랫단조의 장엄미사가 바로 이 시기에 작곡된 음악들입니다.



 



브루크너의 생애에서 중요하게 손꼽히는 몇 번의 이주(移住)는 1856년 린츠의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로 취임한 것, 또 1868년 음악의 도시 빈으로 들어선 것 등입니다. 물론 빈으로 가기 전이었던 1863년에 린츠에서 공연된 바그너의 음악극 <탄호이저>를 보고 받았던 충격이 이후의 브루크너 음악, 특히 교향곡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요. 하지만 브루크너의 삶에서 가장 근원에 자리했던 마음의 고향은 역시 성 플로리안 수도원이었습니다. 도시 생활을 두려워했던 약간의 은둔자적 성향, 또 시골 농부와도 같은 우직한 성품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을 겹겹이 쌓아올리는 듯한, 웅장한 대성당 건축물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교향곡들은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서부터 몸 속에 저장된 오르간의 중층적(重層的) 음향에서 비롯했을 겁니다.

 

그의 음악적 연보에서 눈에 띄는 장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연히 성악을 포함한 종교음악이지요. 특히 린츠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있을 때 작곡했던 미사곡 3번 f단조, 또 브루크너가 남긴 종교음악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테 데움’(Te Deum) 등이 유명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브루크너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까닭은 역시 교향곡 때문이지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어느 정도나마 굳힌 것은 40대에 들어서였습니다. 서양 음악사를 수놓은 수많은 음악 천재들, 모차르트는 말할 것도 없고 낭만 시대의 음악가들인 슈만이나 쇼팽, 리스트, 브람스 같은 이들이 20대 초반에 이름을 날린 것에 비하자면 참으로 대기만성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빠트릴 수 없는 멘토, 말하자면 브루크너의 음악적 여정에서 커다란 자극이 됐던 인물로 바그너를 빼놓을 수 없지요. 브루크너는 서른아홉 살이었던 1863년에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봤고, 2년 뒤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을 보기 위해 뮌헨으로 갑니다. 이때 바그너를 직접 만나기도 하지요. 바로 이렇게 바그너에게서 큰 자극을 받으면서 브루크너는 마침내 교향곡 작곡에 손을 댑니다. 1863년에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이었던, 하지만 ‘습작’이라며 스스로 평가절하했던 ‘교향곡 f단조’를 작곡합니다. 이어서 같은 해 10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교향곡 d단조’를 작곡합니다. 이 곡은 훗날, 브루크너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이었던 1895년에 작품을 정리하다가 발견된 곡이지요. 그러니까 본인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곡이었습니다. 브루크너는 다시 발견한 이 곡의 악보에 ‘0번’이라고 써넣고는 ‘전혀 써먹을 수 없는 단순한 시험작’이라고 부기합니다.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강한 자의식이 느껴지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그는 바그너의 대담한 화성과 조바꿈, 거대한 관현악적 규모, 특히 관악기들의 힘찬 음향에 많은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빈번히 연주되는 그의 교향곡들이 보여주는 특징도 그렇습니다. 특히 브루크너는 린츠를 떠나 빈으로 이주한 다음부터 교향곡 작곡에 더욱 매달립니다. 1871년부터 세상을 떠난 1896년까지 그는 거의 해마다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하는 한편, 이미 작곡한 교향곡들을 다시 고치는 작업을 쉼 없이 병행했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중에는 자신의 음악적 우상이었던 바그너에게 헌정한 곡도 있지요. 1872년에 작곡했던 교향곡 3번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바그너 교향곡’이라고도 불립니다.

 

오늘 함께 들을 곡은 4번입니다. 1874년에 처음 작곡했고, 1878년과 1880년 사이에 대폭 수정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여러 버전으로 존재합니다. 3악장을 수정한 악보는 ‘노바크 판’으로, 4악장을 수정한 악보는 ‘하스 판’으로 불립니다. 브루크너가 남긴 11개의 교향곡(9번은 미완성) 중에서 이 곡을 첫번째로 감상할 곡으로 고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의 교향곡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낭만적’(로맨틱)이라는 표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친숙하게 끌어당깁니다. 브루크너 스스로도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알기 쉬운 것”이라는 언급을 남겨놓기도 했습니다. 그의 다른 교향곡들에 비하자면 좀더 밝고 낙천적인 느낌을 풍깁니다. 아울러 좀 더 감각적이기도 합니다. 음의 빛깔은 선명하고 선율은 직접적인 호소력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복잡하고 거대하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거나, 접근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아쉬운 일입니다. 처음 듣는 분들은 특히 1악장 시작 부분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랍니다. 안개 속에서 여명이 밝아오는 느낌으로 시작합니다. 현악기의 트레몰로 속에서 호른이 주제 선율을 연주합니다. 이 주제 선율을 잘 붙잡고 있으면 됩니다. 전곡을 관통하는 모티브입니다. 아울러 금관악기들이 힘차게 연주하는 코랄풍의 악구를 기억하면 됩니다. 워낙 인상적이어서 들으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듣다 보면 음악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리는, 묘한 기분의 명상적 체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아를 잠시 잊어버리고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느낌과 비슷합니다. 혹은 음악으로 샤워를 한 것 같은 느낌일 수도 있을 겁니다. 
  

칼뵘▶칼 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73년/Decca


오래도록 애호가들에게 사랑받아온 음반이다. 현재 국내에서도 보편적으로 가장 애청된다. 칼 뵘은 대체로 느린 템포의 지휘자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브루크너 4번에서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이 곡의 연주에서 가장 느린 템포로 손꼽히는, 첼리비다케가 뮌헨필하모닉을 지휘한 1988년의 녹음(EMI)에 비하자면 훨씬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1970년대 초반의 빈 필하모닉이 들려주는 합주력은 지금 들어도 역시 명불허전이다. 악기들 사이의 균형, 브루크너 교향곡의 조형미 등 여러 측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다.

 

 

 

반트▶귄터 반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98년/Sony


2002년 타계한 귄터 반트는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여러 차례 녹음했다. 모두 뛰어난 연주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교향곡 4번을 연주한 음반을 딱 한 장만 추천한다면, 개인적으로는 북독일 방송교향악단(NDR)을 지휘한 녹음을 꼽고 싶다. 같은 지휘자가 쾰른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녹음보다 연주의 질적 우위가 느껴질 뿐 아니라, 반트의 음악적 개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견고함과 묵직함이 느껴지는 호연이다. 한데 아쉽게도 국내 매장에서 구입이 어렵다. 대신 추천하는 음반은 1998년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녹음이다. 80세를 넘긴 고령의 거장을 실황 연주로 만나볼 수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NDR에 비하자면 다소 밝은 음색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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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어떻게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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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사람, 죽은 사람이었구나. 신보< Xscape >를 맞은 기쁨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을 테다. 생각해보면 꿈만 같은 시간들이었다. 한 때 동일한 시간을 같이 걸었던 탓에 달콤한 꿈을 너무도 당연한 현실처럼 생각했지 않았나싶다.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등진 지 벌써 5년이다. 팝의 황제가 걸은 위대한 행보는 이미 앞서 수차례나 다뤘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그 발자취들에 담긴 필자들의 추억들을 풀어보기로 했다. 기억을 꺼내온 노래들은 총 13곡. 마이클 잭슨을 생각해본다.

 

글 내의 소제목은 곡 이름, 발표 년도, 수록 음반을 다루고 있다. 배치 순서는 싱글 및 앨범 발표순.

 

 


I wanna be where you are, 1972, < Got To Be There >

 

꽂히는 곡이 생기면 계속 듣곤 한다. 갈증이 해소되고도 질릴 수준에 도달해야 직성이 풀리나보다. 글을 쓰는 데에 적잖이 방해가 되는 습관이다. 하지만 싫지는 않다. 하루를 소비해도 아깝지 않을 곡을 인생에서 몇 번이나 만나겠나.(고 생각했다가 지금도 고생 중이다.) 언젠가 모타운 싱글들을 돌이켜보며 쭉 정리한 적이 있었다. 「I wanna be where you are」는 그 때 다시 만난 곡이다. 펑키한 반주와 한없이 앳된 10대 시절의 목소리와 '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곁에 있고 싶다는' 귀여운 가사, 'any-any-any'하고 반복하는 장난스런 보컬까지, 곳곳에 깔린 마음을 잡아둘 함정에 떡하니 걸려버렸다. 들을 곡이 많이 남았는데, 남았는데 하면서 이 곡으로, 이 곡이 수록된 솔로 데뷔작< Got To Be There >로, 그리고 마이클 잭슨으로 그렇게 넘어가버렸다. 아, 또 당분간 이것만 꽂고 지낼 듯싶다.

 

이수호(howard19@naver.com)


Ain't No Sunshine, 1972, < Got To Be There >

 

이 노래를 처음 듣고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런 슬픈 목소리를 낼까 생각했었다. 십대의 마이클잭슨 목소리는 전성기 미성보다는 거칠고, 조금은 더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소울'이 담겨있다. 약간은 어설픈 내레이션으로 시작해 후반부로 갈수록 휘몰아치는 고음은 그가 얼마나 노래를 잘했는지 명쾌하게 입증한다. 울부짖듯이 절규하는, 나이답지 않은 블루스는 그의 불행한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이클 잭슨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신음했을 그의 시퍼런 멍울이 목소리에도 서려 있는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통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음색을 그에게 선사했지만 말이다.

 

이 노래는 원래 '빌 위더스(Bill Withers)'의 곡으로 스팅, 존 메이어 등 정말 많은 뮤지션들이 다시 부르고, 즐겨 부르는 명곡이다. 개인적으로 이 노래의 첫대면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었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처음 들었던 그 때 그 순간의 느낌이 살아난다. 이 노래를 들을때면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 어떤 분위기라도, 제일 먼저 마이클 잭슨의 앳된 얼굴이 떠오른다.

 

 김반야(10_ban@naver.com)


Ben, 1972, < Ben >

 

아마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은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아닐까. 어린 나를 앉혀놓고 통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길 좋아하시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노래였다 (기억나는 맨 처음은 무려 존 덴버의 「Annie's Song」이었다!). 혹여 아들이 잭슨 파이브의 막내처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길 바라셨는지, 하루 종일 아버지께서는 코드 잡는 법을 가르쳐주시며 '한 소년과 그가 기르던 개의 아름다운 우정을 그린 가사'라는 감동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아버지는 더 이상 통기타를 잡지 않으시고, 나도 노래의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개가 아니고 쥐, 심지어 호러 영화라니) 「Ben」은 쉽사리 잊힐 리 만무하다.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과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노미네이트되는 등 성과도 어마어마한 곡이지만 나에게 있어 「Ben」은 어린 날 아버지와의 소박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어마어마한 아버지의 학대를 감내해야만 했던 잭슨의 상황과는 정반대라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과연 하늘에서 그는 아버지를 용서했을까?

 

김도헌(zener1218@gmail.com)


Rock with you, 1979,< Off The Wall >

 

고등학생 시절,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마이클 잭슨 특집을 했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의 삶을 40분 만에 훑어주는 그런 방송이었다. DJ가 「The way you make me feel」과 「Rock with you」를 선곡했다. 마이클 잭슨에 흥미를 붙여준 두 곡이다. 놀라웠다. 옛날 노래가 촌스럽기는커녕 세련되었다는 인상이 진했다. 「The way you make me feel」 다음으로 들려준 「Rock with you」도 마찬가지, 드럼이 말리는 순간부터 마법 같다. 모르긴 몰라도 마이클 잭슨은 다정하고 아이 같은 사람일 것 이라는 생각을 했다. 「We are the world」, 「You are not alone」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 들은 「Rock with you」는 달랐다. 천진난만하면서도 섹시하다. 그것들을 알아달라는 듯 들이밀지 않는다. 곡 자체에 묻어난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좋아 헛웃음이 났다.

 

전민석(lego93@naver.com)


Billie Jean, 1983, <  Ben >

 

1983년 봄, 국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그해 3월 25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모타운 설립 25주년을 기념하는 무대에서 마이클 잭슨이 「Billie Jean」을 부르는 모습을 방송했다. 그는 립싱크를 했지만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왼손의 흰 장갑과 발목까지 올라오는 짧은 검정 바지 그리고 재기차기 동작과 비슷한 발놀림까지, 지금까지 기억되는 마이클 잭슨 이미지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Billie Jean」의 중간 기타 간주와 후반부에서 보여준 문워크는 대중음악의, 아니 대중문화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이 글을 쓰는 사람 역시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실 때나 학교의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문워크를 따라했고, 어느 정도 흉내내자 마이클 잭슨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마이클 잭슨은 여전히 신(神)이었다.

 

소승근 (gicsucks@hanmail.net)

 

 


Beat it, 1983,< Thriller >

 

누구나 '허세의 시절'은 있다. 하드록과 메탈만을 편식하며 팝을 경시하던 어린 시절, 마이클 잭슨의 존재는 당시 즐겨 듣던 마니악한 장르의 어떤 밴드들보다도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더랬다. 그런 내가 이 곡을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기타 리프부터 머리가 쭈뼛 섰다. '이거 완전 하드 록 아니야!'

 

그 날 이후 팝에 대한 나의 철벽이 당장 100% 무장해제되었다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상당부분의 편견을 해소할 수 있던 계기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또 모른다. 이 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마초냄새 풀풀나는 음악만을 경배하고 있었을지도. 생각하니 소름이 다 돋는다. 그를 일찍 만난 것이 다행이다.

 

 여인협(lunarianih@naver.com)


Thriller, 1983,< Thriller >

 

내게 마이클 잭슨은 「Thriller」가 선사한 강렬함으로 기억된다. 비교적 최근, 마이클 잭슨이 보고 싶던 밤이 있었다. 금방 잠에 들 요령으로 침대에 편하게 기대 앉아 아직 보지 못한 마이클의 영상을 쭈욱 훑었다. 「Thriller」의 뮤직비디오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붉게 물든 타이틀이 등장했을 때 얼른 알았어야 했는지 모른다. 공포물이라면 극구 사양하는 내가 볼만한 무엇은 아니라는 걸. 보름달이 뜨고 마이클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리는 순간 호되게 놀라버렸다.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성인이 현재에 비하면 조악한 CG기술과 티 나는 분장에도 식겁하고 말다니. 사실 이는 마이클 잭슨의 위대함의 한 단면이다. 작품이 만들어진지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니. 새로운 「Thriller」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반쯤은 안도하고 있지만, 그의 부재는 여전히 뼈아프다.

 

 성민주(sencibility@gmail.com)


The way you make me feel, 1987, < Bad >

 

첫 눈에 반한 이성의 마음을 얻기 위한 마이클 잭슨의 작업 송. 9시부터 5시까지 일하는데 널 사서라도 내 옆에 두고 싶다는 달달한 가사에 설레고, 코러스, 군무에 완전히 넘어간다. 길을 가다 만난 이상형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다면 실루엣 키스신이 나오는 뮤직비디오라도 보자.

 

 정유나(enter_cruise@naver.com)


Smooth Criminal, 1988, < Bad >

 

나에겐 음악 이전에 게임이 있었고, 덕분에 MJ는 가수이기 이전에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하는 히어로였다. 콘솔 중에서도 닌텐도의 패밀리가 아닌 세가의 마스터시스템(국내 출시명은 겜보이)부터 패드를 잡기 시작한 이들이라면, 아마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 < Michael Jackson's Moonwalker >이라는 게임 타이틀이 친숙하게 들릴 것이다. 하얀색으로 깔맞춤한 중절모와 수트를 입고 악당에 맞서 아이들을 구출해 내던 화면 속 초능력자. 그것이 마이클 잭슨과 나의 첫 조우였다.

 

그때만 해도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좋던 BGM들이 그의 곡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리듬에 맞춰 게임을 즐기다 갑자기 적이 몰려들면, B버튼을 꾸욱 눌러 문워커의 춤을 시전해 나쁜 놈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그 연출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 이 노래를 접한 것은 그 후로 몇년 뒤. '둥둥 두두둥둥 두두둥둥~' 특히나 좋아했던, 버릇처럼 게임기의 전원을 넣고 듣던 첫 스테이지의 미디 음원이 이렇게 생생히 살아 움직이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이고 전율이었다. 그 시점부터 내 어릴 적 도트 영웅은, 생명을 얻어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전자 롬팩 속의 영웅이 아닌, 내 인생을 구원할 뮤직 히어로로서.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Remember the time, 1992,< Dangerous >

 

가장 아름다웠다. 나풀거리는 랩 스커트도 황금빛 액세서리도 마이클 잭슨이 아니면 감히 소화해낼 수 없었을 거다. 칼 같은 군무와 왕비를 바라보는 의미심장한 눈빛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뮤직비디오를 처음 본 순간부터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 모습에, 매번 새로이 반한다. 멜로디와 가사, 다이애나 로스에게 바치는 곡이라는 은근한 소문들까지 무엇 하나 애틋하지 않은 게 없다. 내게 마이클 잭슨은 「Remember the time」의 위트와 박력과 절규와 유혹이다.

 

조아름(curtzzo@naver.com)


Heal the world, 1992< Dangerous >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의 트라우마를 아동에 대한 애정으로 승화시켰다. 곡의 내용 자체가 희망적이고 전지구적이다. 실제로 그는 'Heal The World'라는 재단을 설립하는 등 아동인권보호에 앞장섰다. 다만, 행복한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으로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놀곤 했는데 그런 호의가 그를 아동성범죄자로 의심받게 했다. 무죄는 확실히 밝혀졌지만 명예로운 이력에 유일한 흠으로 남았다.

 

여행을 갈 때마다 아버지의 차에서 들려오던 「Heal the world」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내게도 분명 따스하게 들려왔다. 가사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였지만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화려한 퍼포먼스와 함께 어우러진 노래들도 좋지만 진정으로 가슴에 와 닿는 곡이라 이 노래가 좋아지게 되었다. 그 스스로도 「Heal the world」를 제작하면서 가장 자랑스러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환(sperosperah@naver.com)


Gone too soon, 1993, < Dangerous >

 

2009년 7월 7일, LA에 위치한 스테이플스 센터(Staples Center)에 어셔(Usher)가 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착잡한 심정으로 「Gone too soon」을 노래했다. 이 작품은< Dangerous >(1991)의 9번째 싱글로 어린 나이에 에이즈로 사망한 라이언 화이트에게 바친 곡이다. 이날의 자리에서 추모의 대상은 물론 마이클 잭슨이었고 마이클의 가족과 그가 따르고, 또 그를 따랐던 모두가 눈시울을 적셨다. 현장에서 그리고 화면으로 지켜본 모두가 감정에 복받쳐 쓰러질 듯한 어셔의 마지막 깊은 한숨에 목이 메었다. 나 역시 “Gone too soon...”라는 이 한 문장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음악을 통한 기쁨과 동요, 그리고 이를 통한 즐거움 모두가 노랫말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은 순간이었다.

 

“제 동생은 그곳에서도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어요. 지금 이 순간처럼 우리와 함께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에요. 마이클 잭슨을 절대로 잊히지 않을 겁니다.”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

 

뻔하디 뻔한 말로 들렸지만, 사실 더 이상의 멋진 추모사도 없었다. 2014년의 지금에 와서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5년이 지난 지금 미공개 트랙으로 발매된< Xscape >은 그가 살아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앨범을 듣는 순간 나는 이날 단상에 섰던 스모키 로빈슨의 판에 박힌 추모 연설이 현실처럼 상기되었다. 이래서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다고 하나. 영원히 죽지 못하는 사람, 그가 마이클 잭슨이라 다행이다.

 

신현태(rockershin@gmail.com)


A place with no name, 2014, < Xscape >

 

전설은 역시 리메이크도 남다르다. 최근 발표된 < Xscape >의 수록곡 「A place with no name」을 처음 듣자마자 아메리카(America)의 「A horse with no name」을 떠올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곡 나름의 화성진행이나 후반부의 코러스를 제외하면 이 곡은 원작에 대한 특별한 암시를 남기지 않는다. 마이클 잭슨이라는 역사가 컨템포라이징이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에 포장되고 판매되는 광경을 목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Xscape >의 디럭스 판에만 실린 「A place with no name」의 원곡을 개인적인 베스트로 꼽아본다. 마이클 잭슨이 1980년대를 수놓았던 사운드를 급히 현대식으로 이식한 앨범 버전에 비해 원곡은 투박한 기타 사운드에 아메리카 특유의 풍취까지 가미하여 훨씬 겸손하고 소박하다. 물론 이 노래 역시 디럭스라는 상업적 명칭 아래에 유통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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